근대과학의 궁극적인 비빌 언덕은 수학의 근거가 되는 인과율이다. 이 하나의 논리로 인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석가의 연기법과 같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원인이 일어나면 결과가 일어난다. 그런데 다르다. 서양의 인과율은 시간의 선후를 따라간다. 원인이 먼저 가면 결과가 뒤따라간다. 석가의 연기법은 공간의 인과율이다. 전체가 움직이면 부분에서 포착된다. 통나무 둘을 서로 기대 놓았다 치자. 그 중에 하나를 빼면 다른 하나도 자빠진다. 아치구조에서 돌 하나를 빼면 전부 무너진다. 공간의 연기가 먼저다.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도 과부나 홀아비가 된다. 가만 있었는데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원인이 없다.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홀아비가 되어 있고 과부가 되어 있다. 이상하잖아. 서방이 죽고 아내가 죽은 것은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있다. 인과율과 안 맞네? 전체의 변화가 부분의 변화로 파급된 것이다. 서양수학과 근대과학은 이 부분을 놓치고 있다. 돌 두개를 기댈 수 없다. 보통은 솥발처럼 셋을 기댄다. 소총을 세우더라도 삼각형 모양을 만들어야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다. 중력이 있기 때문에 버티는 것이다. 중력까지 사실은 넷이네? 아니다. 지구가 받쳐주니 다섯이다. 우리는 보통 둘 사이를 보지만 부부가 둘이라도 주례가 있고 자녀가 있고 증인이 있다. 최소 다섯이라야 하나가 유지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둘은 대칭이고 셋은 밸런스고 넷은 방향성이고 다섯은 기세다. 기세를 타야 팽이는 자빠지지 않고 자전거는 쓰러지지 않는다. 인과는 둘이다. 둘로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있다. 다섯은 있다. 전체는 있다. 닫힌계는 있다. 부분에서 나타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관점이 이동하는 것이 마이너스다. 상호작용은 사실 이 전체가 작용하는 것이다.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이 부분에서 포착된다. 우리는 드러난 부분을 본다. 일방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그 관점은 틀렸다. 부부가 다투어도 원인은 전체에 있다. 전체에서 뭔가 끊어진 것이 부부의 불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
뭐가 끊어지고
뭐가 틀어지고
뭐가 깨졌는지 들여다 보는 것
그것을 양 방향에서 살펴보는 것이 구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