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한 자들은 몇 번 흔들어주면 제 입으로 가벼움을 실토해 버린다. 그게 정치판을 관전하는 재미다. ‘그래. 나 소인배다. 어쩔래?’ 이렇게 나온다. 타진요 두목 왓비컴즈는 타블로를 까다가 실패하자 ‘네가 이겼다’를 시전하고 GG를 쳤다. ‘네가 이겼다’는건 무슨 말일까? 이게 일종의 게임이라는 거다. 나는 네티즌을 동원하고 너는 막강한 빽을 동원하여 일합을 겨루었는데 네가 놀라운 수완을 발휘하여 문제를 덮어버리는데 성공했으므로 타블로 너의 승리다. 사실인정을 거부한 것이다. 왜 그럴까? 외국에서 학력위조 하는 자들은 널려 있고 자신은 집단에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며, 거기에 정당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무엇인가? 인류는 많고 개인은 집단 안에서 역할을 얻으면 그만이다. 3류 지식인은 입바른 말만 하면 되고, 시민단체는 떠들기만 하면 되고, 정의당은 개평만 뜯으면 되고, 왓비컴즈는 의심나는 곳을 찔러보기만 하면 되고, 시정잡배는 마녀사냥에 동참하면 되고 어차피 세상은 그렇게 요지경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소인배는 집단에 응석을 부리고 자신의 역할을 좁은 영역으로 한정시킨다. 공무원 행동을 하는 것이다. 국민은 그 과정을 지켜본다. 자신을 리더로 여기는지 응원단장으로 여기는지 보는 것이다. 정의당은 정권교체에는 관심이 없고 문재인 정권의 손가락 하나만 분질러서 전리품으로 챙기면 된다. 왓비컴즈는 한국의 내부문제에 훈수 두는 방법으로 외국에 사는 교포의 쓸쓸함을 달래면 된다. 타블로의 진실? 관심 없어. 근데 학력위조하는 넘 주변에 졸라리 많더라구. 우리 교포의 존재감을 알아달라구. 흥! 우리는 너희를 일방적으로 조질 수 있고 너희는 나를 기소할 수 없지. 그래! 이 게임은 타블로 너의 승리야. 그러나 사실은 나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 왜냐하면 너는 나를 처벌할 수 없거든. 캬캬캬. 불리하면 게임의 형태를 바꾸면 되고. 윤석열의 ‘증거대라’는 말도 문제를 게임화 시키는 소인배의 기술이다. 사실이 어떻든 신경끄고, 중요한건 재판인데 너는 증거를 댈 수 없고, 나는 증거를 인멸하는데 성공했고, 그러므로 사실상 내가 게임에 이긴게 아니냐. 외국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 독수독과이론. 증거가 오염되었으니 너는 나를 기소할 수 없어. 나의 승리다. 캬캬캬. 주인공 검사를 비웃고 휘파람 불며 유유히 법정을 걸어 나가는 빌런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면서 엔딩 자막이 오르고. 중요한건 윤석열이 국민 앞에서 이런 범죄자의 심리를 들켰다는 거다. 왜냐하면 이건 형사재판이 아니고 정치재판이거든. 노무현과 박원순은 증거가 안 나왔고 법적으로 다퉈볼 만한데도 책임을 졌다. 제일 한심한 변명은.. 당시 존재감이 없었던 김웅 정치 지망생에게 이런 엄청난 범죄를 시킬 바보가 어디에 있냐? 하는 볼멘 소리. 국민의 상식은.. 그럼 존재감이 넘치는 유승민이나 김무성에게 이런 엄청난 범죄를 시키는 야당이 어디에 있냐? 존재감이 없는 정치 지망생 김웅이 더러운 청부살인 심부름으로 공을 세우고 공천받은거 맞잖아. 공천은 범죄의 대가. 움직일 수 없는 물증. 결론.. 범죄자의 표정을 짓는 자가 범죄자다. 영화 올드보이에도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게임을 건다. 이건 게임이야. 캬캬캬. 범죄자는 언제나 그렇게 한다. 소인배는 사건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화 시킨다. 그 방법으로 집단을 개인의 사정에 개입시킨다. 그것을 우리는 관종이라고 부른다. 날 쳐다봐줘. 나랑 놀아줘. 내가 외로워. 너희가 머나먼 외국에서 타블로나 괴롭히며 비참하게 숨어 사는 교포들의 울분을 알아? |
증거를 대라
윤희숙이 아버지와 상의했다는 증거를 대봐라 -> 불가능, 집에 24시간 365일 음성녹음 되는 첨단기기라도 있기 전에는
김건희가 쥴리라는 증거 대봐라 -> 불가능, 누가 십수년전 룸살롱 가서 쥴리랑 놀아난 것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닐까?
조민 표창장이 위조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봐라 -> 불가능, 살다 살다 기소를 당한 쪽이 증명을 해야 하는 재판은 첨봄
성폭행범이 성폭행 했다는 증거를 대봐라 -> 불가능, 누가 성폭행할때 사람들 불러서 구경하라고 하면서 하나? 둘만 있을때 저지르지. 목격자가 존재할 수 없는 범죄가 성폭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