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전쟁을 망설이는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전쟁을 이겨서 무엇을 얻자는 것이 아니고, 싸움의 결과에는 신경쓸 이유가 없으며, 승부 그 자체에 인생의 절절한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전사는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이라고. 도박꾼이 벌어진 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이, 술꾼이 차려진 상을 보고도 발길을 돌리는 법이 없듯이, 수학자가 문제를 보면 풀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듯이, 학자가 지식을 보면 곧 달려들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야 말듯이, 피아니스트가 건반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청중의 앵콜을 기다리듯이. 왜? 거기에 승리가 있기 때문이다. 승리해서 무엇을 얻자는게 아니라 승리로 가는 지난한 상호작용 과정이 그대로 인생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부여잡고 있는 대로 용을 쓰며 그렇게 상호작용하며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켜 가는 것이 인생이다. 문제는 상호작용이다. 인생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승부의 키를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한다. 농부는 흙을 붙잡고, 어부는 물결을 붙잡고, 조종사는 바람을 붙잡고, 기사는 말을 붙잡는다. 붙잡은 것을 놓지 못하고 곧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것이 인간의 진실이다. 상호작용에는 상대가 있고 우리는 포기하지 못한다. 한 번 눈을 맞추면 끝까지 가야 한다. 사건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연결되어 있으므로 끊지 못한다. 바둑기사는 바둑알과 사랑에 빠져 버린다. 화가는 캔버스와 사랑에 빠져 버린다. 연주자는 악기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연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겨야 한다. 이기면 앵콜이 들어오고 다음 연주를 이어갈 수 있다. 이기면 의사결정권을 얻어 다음 판을 내가 설계하고 지면 씹힌다. 인생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인간은 환경에 휘둘리거나, 환경에 적응하거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집단에 휘둘리거나, 집단에 녹아들거나, 집단을 지배할 수 있다. 이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권력이라고 부른다. 정치의 무력 외에도 매력, 능력, 활력, 지력, 체력, 인기, 평판, 권위, 세력, 재력, 폭력 등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의사결정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주도권을 행사하여 능동적으로 사건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엔진을 장악하고 핸들을 잡는 것이다. 다음 전투가 벌어질 전장과 무기의 종류를 내가 정하는 것이다. 권력은 자연에 실제로 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악사에게는 악기가 있고, 농부에게는 흙이 있고, 학자에게는 지식이 있고, 어부에게는 배가 있다. 있는 것을 붙잡으면 게임이 벌어진다. 하거나 아니면 당한다. 서로 간에 밀당이 있고 상호작용이 있다. 있는 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권력을 정면으로 말한 사람으로는 공자와 니체가 있다. 역사에 허다한 사상가와 철학자가 있으나 공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양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깔았다. 니체도 눈을 정면으로 뜨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그것을 지식의 문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인식론,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심리학 따위의 문제로 착각했던 것이다. 번짓수를 잘못 짚었다. 이건 액션의 문제다. 행위의 문제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인식론에 묻지 말고 상호작용의 상대방에게 물어봐야 한다. 존재의 진실은 권력이다. 권력은 상대가 있는 게임에서 물리적으로 상대를 장악하고 의사결정하는가다. 권력은 철학자의 형이상학, 논리학, 인식론, 도덕학, 윤리학,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 따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다들 헛다리를 짚고 있다. 공자가 인류의 유일한 스승인 이유는 공자 외에는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고 인생의 승부는 서양철학사의 너절하고 잡다한 이야기들과 다른 것이다. 농부는 흙에게 묻고, 어부는 물고기에게 묻고, 광부는 돌에게 묻고, 연주자는 악기에게 물어볼 따름이다. 철학자의 지식에서 구할 것은 없다. 이겨야 한다. 노예가 노예인 이유는 졌기 때문이다. 졌는데, 그래서 잡혔는데, 그래서 처지가 노예인데, 도덕이고 윤리고 형이상학이고 나발이고 간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얼어죽을! 이긴 사람에게 결정권이 있다. 일단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 조수석에서 씨부리는 것은 안 쳐준다. 누가 물어봤냐고? 키를 잡으면 힘이 걸린다. 거기에는 별도의 논리가 있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사공이 노를 잡으면 물살을 느낀다. 윤리고 도덕이고 나발이고 필요없고 사공은 다만 물살을 이겨야 한다. 서양사에 등장하는 허다한 철학자의 목소리는 모두 조수석에서 궁시렁거리는 소리다. 왜? 운전석은 일찌감치 신이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을 운전석에서 끌어내릴 배짱은 없었다. 니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도 운전석에 한 번 앉아보고 싶었다며 간청했을 뿐이다. 서양철학은 철학 근처에도 못 간 것이다. 조수석 근처에는 갔다. 철학은 운전석에 있다. 동양정신도 자랑할 것은 없다. 운전석에 앉기는 앉았는데 그게 손수레였다. 공자의 철학은 강자의 철학이고 그것은 이겨야 써먹을 데가 있다. 현장에서 이기고, 산업에서 이기지 못하면 공자 할배가 와도 소용이 없다. 이기지 못하면서 강자의 철학을 말한다면 허무개그다. 근래에 동양이 서양을 이기고 있기 때문에 공자가 다시 호출되는 것이다. 인생은 게임이다. 게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경우의 수는 셋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기거나, 아니면 꼼수로 이기고 나중에 청구서를 받거나, 아니면 지고 씹히거나다. 이겨도 대의로 이기고 명분있게 이겨야 한다. 그래야 다음 게임을 연결할 수 있다. 이기고 그걸로 끝나는 승부는 의미가 없고 이겨서 또다른 게임의 주최측으로 올라서는데 의미가 있다. 우리는 판을 관리하며 정당한 승리를 유도하고 꼼수로 이기려는 자를 응징해야 한다. 그것이 군자가 게임에 참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은 다섯 가지다. 살아가는 동력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다. 삶의 엔진이 있어야 한다. 남의 기관차 꽁무니에 객차로 붙어가는 자도 있다. 철학은 자체 엔진을 가지는 문제다. 남의 동력에 묻어가려면 철학이 필요없다. 적당히 눈치보고 끼어들면 된다. 첫째는 원시인의 주술로 사는 것이다. 그들은 목적도 없고, 희망도 없고, 계획도 없이 환경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원시인의 수명이 짧은 이유는 허무에 치이기 때문이다. 부족민은 쉽게 자살하거나 무의미한 싸움 끝에 살해된다. 인류의 질병은 대부분 가축에게서 온 것이다. 고립생활을 하는 부족민은 전염병이 없는데도 수명이 짧은 이유는 그다지 오래 살고자 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부계사회로 넘어와서 돌봐야 할 친자식이 생기고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손에 쥔 이후에 오래 살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고대사회에 순장과 인신공양에 식인이 널리 행해진 이유는 살면 뭣하냐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할복을 즐겨 하는 일본인의 죽음에 대한 집착을 보면 알 수 있다. 살면 뭐해? 얼른 죽어서 천국 가야지. 일본에 진출한 카톨릭 선교사들은 죽음을 열망하는 신도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현대사회도 주술에 의존하는 사람은 많다. 점쟁이를 찾고, 음모론을 찾고, 외계인을 찾고, 초능력을 찾고, 각종 몸에 좋다 시리즈를 찾고, 유기농을 찾고, 명품을 찾고, 귀신을 찾는 이유는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려는 것이다. 환경의 자극에 의존하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이다. 도박과 술과 마약과 섹스에 탐닉하는 것도 같다. 그들은 환경이 자신을 지배해주기를 바란다. 누군가 자신을 유혹해주기를 갈망하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들은 독재자를 갈망하고 가부장을 원한다. 충직한 노예가 되고 싶은데 매우 부려주는 주인이 없어서 화가 나 있다. 주인의 심한 매질에는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런 수동적인 상호작용에 익숙해져 있다. 둘째는 봉건의 종교로 사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들 사이의 벌어진 간격을 좁히는 방법으로 권력을 생성한다. 절대권력을 가진 신과 연결시켜 권력의 국물을 얻어먹는다. 봉건사회의 상호작용 단위는 가문이다. 종교는 가문 위의 확대가문이다. 종교에 가부장 뺨치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종교로 사는 것이다. 보다 긴밀하게 돌아가는 권력구조 안에서 호흡하려는 것이다. 세번째는 학자의 지식으로 사는 것이다. 지식의 권력은 약하다. 무신론자 포지션에서 종교의 광신도나 주술에 의존하는 부족민을 놀려먹지만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없다. 엘리트 우월주의로 무장하고 무식인을 조롱하고 냉소하지만 그들에게는 활력이 없다. 매력도 없다. 상호작용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 지식인이 종교와 결별하지 못하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지식이 권력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연주는 단조롭다. 풍성하지 못하다. 받아주는 리액션이 없다. 네번째는 배신자의 처세술로 사는 것이다. 이들은 노자의 부류다. 그들에게는 콤플렉스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력이다. 돈을 추구하거나, 정치권력을 추구하거나, 불로장수를 추구하거나 간에 뭔가 잔뜩 소유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만 공허하다. 그들이 추구하는 돈과 명성과 성욕과 식욕과 불로장수에도 약간의 권력이 있지만, 그 돈과 명성과 욕망에 끌려다닌다. 자기보다 못한 바보들 앞에서만 주름잡는다. 그들의 권력은 파편화 되어 있고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들은 흩어져서 각개약진 하며 방향이 없고 흐름이 없고 기세가 없다. 다섯 째는 공자의 존엄으로 사는 것이다. 이들은 싸우는 방법을 알고 싸우면 이긴다. 이겨야 존엄하다. 의리의 플러스알파로 서로를 연결하여 환경을 이기고 경쟁자를 이긴다. 이들은 현실주의자이며 구체적인 무언가를 붙잡고 있다. 무사가 칼을 쥐거나, 문사가 붓을 쥐거나, 농부가 흙을 쥐거나 간에 그 붙잡은 대상을 이긴다. 능동적으로 일을 벌여야 한다. 적극적으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 큰 싸움에 가담해야 한다. 세상을 다 바꾸려는 야심을 가져야 한다. 인생은 사건이라는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다. 기사는 말을 타고, 연주자는 악기를 타고, 농부는 흙을 타고, 운전자는 차를 타고, 사공은 배를 탄다. 긴밀한 상호작용에 인생의 진실이 있다. 말에서 낙마하고, 악기가 부서지고, 흙이 황폐해지고, 차가 고장나고, 배가 전복되면 망한다. 삶에는 동력이 있다. 공자의 의리로 이겨서 절대적인 존엄으로 사는 법, 노자의 처세술로 틈새를 파고들어 상대적인 비교우위로 사는 법, 지식인의 허무와 냉소로 타인을 비웃으며 이맛살을 찌푸려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투덜이로 사는 법, 종교집단의 봉건 가부장으로 사는 법, 주술의 환경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관종으로 사는 법이 있다.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바가바드 기타의 진실은 하나다. 인간은 붙잡은 것을 결코 놓을 수 없으며 답은 거기서 찾아야 하는 것이고 윤리학, 도덕학, 심리학 따위 철학합네 하는 개풀 뜯어먹는 소리는 의미 없다는 거다. 네 손에 무엇이 있는가? 답은 그곳에 있다. 핸들을 쥐었다면 돌려야 한다. 놓쳤다면 얼른 다시 잡아야 한다. |
눈팅이지만 댓글 달지 않을수 없다
엄청난 글이다 연속 세번 읽었다
앞으로 계속 읽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