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마음의 병리에 존엄으로 답하라.
구조론은 마음을 메커니즘으로 본다. 차갑고 죽어있는 기계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따뜻하고 살아있는 생명의 진화하는 메커니즘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메커니즘이 그러하듯, 마음의 메커니즘도 고장 날 수 있으며, 그 고장은 고칠 수 있다. 마음의 메커니즘은 다섯 단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장 역시 다섯 단위에서 일어난다(김동렬, 2010a).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신의 문제는 존엄을 확보하지 못한 데 따른 비참으로 나타나며, 의식의 문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억압으로 나타나며, 의도의 문제는 사랑을 머금지 못한 소외로 나타나며, 생각의 문제는 성취에 이르지 못한 실패로 나타나며, 감정의 문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함, 바로 불행으로 나타난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존엄을 확보하지 못한 데 따른 비참함으로부터 억압-소외-실패-불행에 이르게 되지만, 인간의 인식은 마음의 일처리의 최종 열매인 불행을 가장 먼저 인식한다. 불행에 대응하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만으로 불충분해 의도를 품고, 의도만으로도 불충분해 자아의 주도권을 되찾아 의식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것으로도 부족해 마침내 세상 전체를 내 품안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존엄성을 자각한다. 마음의 병은 우리가 정신, 의식, 의도라는 마음의 상부구조를 사용하지 않는 데에서 발생한다.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위해 예전에 미리 내려놓은 판단을 반복해서 써먹으며 마음의 일처리를 생략하고 정신에서 감정으로 바로 건너뛰는 데에서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김동렬, 2010a).
"정신 : 오늘 새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의식 : 오늘 내가 새롭게 준비하여 갖출 것은 무엇인가?
의도 : 오늘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은 무엇인가?
생각 : 오늘 일은 새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감정 : 오늘 일로 새로 무엇을 얻었는가?"(김동렬, 2010a)
원래, 인간의 마음은 위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나날이 새로운 과제를 처리하는 역할이 주어져야 하지만, 현대인의 경우엔 일처리가 하루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고 수능시험이나 취직, 직장의 프로젝트처럼 적어도 몇 개월에서 몇 달, 심지어 몇 년에 이르는 과제가 주어지기 때문에 정신을 지속적으로 긴장시키지 못하고 했던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기가 쉽다. 노력에 따른 보상이 곧바로 주어졌던 수렵채집사회와 달리 노력에 대한 보상이 적어도 월단위로 이루어지는 현대사회에선 정신-의식-의도라는 마음의 상부구조를 생략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일처리를 반복하며 살기가 쉽다(김동렬, 2010a).
정신-의식-의도를 사전에 미리 세팅해 두면 상황에 재빨리 대응할 순 있지만, 만약 이전엔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 새롭게 펼쳐졌을 땐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은 편리함과 효율성을 대가로 의사결정의 정확성과 올바른 대응을 놓치게 되며, 결국 부정확한 상황파악과 그에 따른 그릇된 행동으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채 불행해진다(김동렬, 2010a).
정신-의식-의도를 사전에 미리 세팅해두기 때문에 평상시엔 이 마음의 상부구조를 자각하지 않고 있다가 마음의 일처리에 문제가 생길 때, 즉 불행해질 때 비로소 마음의 의도-의식-정신 순으로 점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귀던 연인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자신이 어떤 의도로 상대를 만나고 있었는지, 관계에서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었는지(의식), 그리고 자신이 상대를 어떤 눈높이에서 만나고 있었는지(정신),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고 있었는지, 그냥 시간을 때울 상대로 여기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김동렬, 2010a).
이처럼 평상시엔 상부구조는 거의 무의식으로 남아 있으며, 무언가 마음에 비상상황이 걸렸을 때, 비로소 의식하게 된다. 대부분의 심리치료들은 바로 이 정신-의식-의도라는 상부구조를 의식화하는 것을 치료기제로 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마음의 하부구조인 생각-감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을 취한다.
구조론에선 마음의 병리를 단 두 가지로, 바로 외로움와 귀찮음으로 압축해서 표현한다. 외로움은 소통의 단절이고, 귀찮음은 부당한 개입으로 전자의 경우엔 소통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해결이 되고, 후자의 경우엔 부당한 개입을 차단하여 자아의 바운더리를 확보함으로써 해결된다. 구조론에서 소통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수준이 다른 데에서 기인하며, 자신과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과 억지로 소통하기 보단,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아 더 넓고 높은 세계로 나아갈 것을, 즉 지성의 세력에 가담함으로써 인류의 부단한 진보와 보조를 맞출 것을 권한다. 인간의 외부 상황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진보이고, 인간의 소통은 진보하는 세력 내에서 이루어지지, 머물러있거나 퇴행하는 집단 내에서의 소통은 불가능이다. 머물러있거나 퇴행하는 집단 내에선 이미 결정된 역할에 따라 마음이 무의식적인 일처리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이라는 마음의 일싸이클을 온전히 가동하지 못한 채 가장 낮은 감정 수준에서의 소통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감정-생각-의도-의식-정신에 이를수록 질적 수준이 높아지며 오직 진보하는 세력 내에 속해있어야만 새로운 외부환경에 맞서 의도-의식-정신이라는 마음의 상부구조를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마음의 상부구조를 진보하는 집단 지성 내에서 자각하고 사용하고, 공유할 때, 인간은 존엄성을 누릴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의식의 자유, 의도의 사랑, 생각의 성취, 감정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김동렬, 2010a).
마음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외부의 개입이 과도할 때, 즉 의식이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한 채 상황 또는 인간 관계 속에서 종속될 때 불행해진다. 과도한 개입은 보통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식의 상부구조가 사전에 세팅된 채, 즉 무의식화된 상태로 남아 있을 때 이루어지며, 이 경우 인간은 자신의 외부환경과의 관계, 자아의 정체성, 역할을 고정시켜 놓은 대가로 외부의 부당한 개입에 시달리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역할을 ‘아내’. ‘며느리’로 고정시켜 놓은 경우엔 계속해서 남편과 자식, 시어머니로부터의 개입에 시달리게 되며, 남편, 자식, 시어머니와 정신 단계에서부터 새로운 관계를 맺지 못하면 고정된 역할을 강요받으며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시어머니와도 친구 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고, 남편과도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만이 아니라 함께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동지의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며, 자식과의 관계도 뒷수발 혼자서 다하는 전통적인 어머니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라 서로의 영역과 책임을 존중하는 성숙한 개인 대 개인의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구조론에서 외부의 개입에 대한 극복은 마음의 상부구조의 자각, 그리고 이를 통해 부단히 자신의 인격을 상승시켜 세상과 관계 맺는 수준을 질적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있다(김동렬, 2010a).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음이 최초에 문제를 인식하는 단계는 바로 감정의 수준이며, 이 감정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가장 큰 부분이 바로 두려움이다. 구조론은 이 두려움의 극복을 다른 모든 감정의 극복의 단초로 보고 있으며, 두려움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알면 이를 훈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모든 두려움은 외부 환경과 나의 관계에서 외부환경을 우위에 놓는 것이며, 두려움의 공개적인 표출은 나에겐 문제해결 능력이 없으니 도움을 달라는 신호로 주변에 전파된다. 두려움의 인식과 표출은 그 자체로는 유기체를 위험에서 구하고 동료에게 도움을 구해 생존확률을 높이는 적응적인 행동이지만, 이는 어린 아이의 적응행동이고 성인기에 도달하면 대부분의 두려움들은 홀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극장에서 귀신이 무섭다며 애인의 포옹을 유도하는 수준의 행동은 괜찮지만 면접이 두렵다며 엄마를 끌고 면접장에 들어서는 것은 불가한 것이다(김동렬, 2010a).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며 두려움에 따른 일련의 행동들은 ‘싸움 혹은 회피(fight or flight)’처럼 미리 세팅되어 있다. 인간은 두려움의 감정에 압도당할 때 의식의 상부구조를 활용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사전에 세팅된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이는 인류가 정글에서 살아남는 데는 유용한 방식이었을지 모르나 현대사회처럼 고도로 안정적인 환경에서, 특히 생명을 잃을 위험이 거의 없는 상황에선 오히려 부적응적일 수 있다. 외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을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도 두려움의 신호에 그대로 반응하여 본능적인 행동, 싸움 또는 회피를 하게 되면, 결국 외부인의 개입을 끌어들이게 되어 마음의 상부구조를 활용하지 않은 채 상황을 종결짓게 된다. 이는 어린아이의 어리광처럼 당장의 문제해결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땐 반드시 문제해결의 실패를 낳는다. 외부에서 항상 24시간 개인의 문제에 개입하여 해결해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조론에선 인간이 훈련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함으로써 여타의 두려움들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세상과의 수준 높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즉 나의 육신이 죽어도 역사는 진행되고, 문명은 발전하며, 인류는 존속하고, 신의 완전성이 세상을 통해 구현되고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때 온갖 환경의 위험에 대해 자아가 우위에 설 수 있으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의도 수준에서 마음 먹은 대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고 안 느낄 수도 있게 된다. 두려워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의도를 정하고 나면 두려움의 대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이어지고, 생각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이 나옴에 따라 두려움의 감정이 해소되는 것이다(김동렬, 2010a).
우선 세상과 전체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즉 아군과 적군을 설정하여 어떤 경계, 예를 들면 죽음을 기준으로 아군(나를 살게 하는 것)과 적군(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을 구분할 때, 적군에 대해서 두려움이 생겨나게 되고, 모두가 아군일 땐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구조론에서 두려움의 극복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여 자아의 바운더리를 인류 전체로까지 확장하는 데에 이르러 이루어진다.
감정 수준에서 두려움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행동을 위한 신호탄이자 연료로서 대뇌의 호르몬 분비와 관련이 있다.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 뇌에서 불안물질이라고 불리는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분노와 적개심을 가지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고맙다와 같은 평온한 마음, 이른바 "안심"하고 있을 때엔 β 엔돌핀과 엔켄파린, 도파민같은 뇌내 마약들이 분비된다(다이스케, 2001). 감정에 의해 분비된 호르몬은 행동을 촉발하는 연료로 활용되며 이 때 호르몬의 분비가 과다하면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게 되며, 그것이 욕망으로 발전되어, 다시 정신으로 피드백 된다(김동렬, 2010a). 그 구조를 그림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정신-의식-의도의 점검 없이 바로 감정에서 행동에 이르고, 그 행동을 반복할 경우 이것이 욕망이 된다. 도박을 예로 들자면, 처음엔 도박 중독자가 아니라 잠깐 시간 때우기 용으로 할 의도를 품고 만원정도만 따도 되돌아갈 생각을 하고 가벼운 감정 상태로 왔다가 우연찮게 한 번에 판돈의 배를 따 십만원을 번 뒤 그 때 주어진 감정의 보상인 행복감, 희열감에 도취되어, 정확히 말하면 감정이 낳은 행복 호르몬들에 도취되어 도박을 반복하고, 결국 도박에 중독되어 가산을 탕진하는 지점에까지 이르지만, 정작 자신이 애초에 도박을 시작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의도로, 어떤 생각으로 왔는지는 까맣게 잊은 채 무의미하게 도박을 반복하는 바로 그것이 욕망이다.
욕망은 결국 마음의 원인이 아니라 마음이 일처리를 하고 남은 찌꺼기와 같은 것이다.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 중 감정에 촉발된 호르몬이 일단 한 번 분비가 되고 나면 회수가 되지 않고 호르몬의 분비가 행동을 촉발하는 데 딱 필요한 만큼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과다하게 분비되기 때문에 행동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남은 호르몬을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욕망이다(김동렬, 2010a).
우리가 마음의 문제에서 욕망에 대응할 때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욕망의 문제를 욕망의 억압으로 해결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구조론으로 보면 잘못된 개입이다. 구조론에선 무조건 하위수준의 문제는 상위수준에서 해결해야 한다. 에너지의 입구에서 가까운 쪽, 원인 측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개입할수록 효과적이며 욕망 같은 감정 수준의 문제는 적어도 생각 수준에서 개입해야 하고 정신 수준에서 개입하는 것이 가장 최적의 효과를 발휘한다. 예를 들어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의 모임(AA)은 바로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환자가 신과 일대일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것을 치료동기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상당한 치료효과를 볼 수 있었다(Hawkins, 2006).
구조론에 따르면 모든 욕망은 오직 새로운 외부에서의 동기부여에 의해서만, 즉 정신 수준에서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가만히 앉아서 욕망에 맞서 싸우는 것으론 결코 욕망을 극복하지 못한다. 정신 수준에서의 개입, 즉 정신차리기는 세상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가능하며, 세상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구조론에선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진보 세력의 편에 서서 욕망보다 더 높은 차원의 동기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기존의 심리치료 이론들은 욕망의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 이 정신의 수준까지 다루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는 오히려 종교적 접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가장 최우선적으로 나와 나를 제외한 세상 전체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냐에 대한 답하는 데 있으며 기독교의 경우엔 신앙을 통해 신과 일대일 관계를 맺어 존엄성을 확보하고, 불교의 경우엔 깨달음을 통해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존엄성을 확보한다는 답을 가지고 있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존엄성은 심리학이 강조하는 자아존중감과 의미는 비슷하면서도 자아존중감의 범위와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은 차원을 달리 한다. 심리학에서의 자아존중감이 “내가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도”, “긍정적인 자아상” 정도로 한정 짓는다면, 구조론의 자아존중감은 자아의 범위를 우주 전체가지 확장시키는 데에서 진정한 자아존중감이 확보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저 신체, 가족,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만을 자아의 영역에 포함시켜 존중하는 것은 오히려 자아를 축소하는 것이며 그 경우 자아의 영역 바깥의 타자를 차별하게 되고 이에 따라 차별되는 대상들이 정신의 외부환경에서 소외되어 버린다. 이렇게 소외된 타자는 이제 거꾸로 차별시킨 자아를 차별하게 되며 그 결과 자아는 자신이 버린 자신의 일부에 의해 소외되고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아존중감은 구조론에선 마치 축구팀이 시합을 할 때 나도 이기고 상대팀도 이기고 심판도 이기고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이기는 경기를 하는 것과 같아 그냥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최고도의 역량을 발휘해 진보하고 혁신하고 우일신해야 가능하다(김동렬, 2010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