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글입니다.) '신은 없다' 호킹 발언 호킹은 최근 발간한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를 통해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데 이어 '과학이 신을 불필요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0일 방송 인터뷰서도 "신이 존재할 수 있지만 과학은 창조자의 도움 없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게 아니라는 호킹의 발언을 두고 어떤 박사 수전 그린필드는 "호킹 박사처럼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물리학자들이 탈레반처럼 행동한다"고 혹평했다. 그는 "과학이 일부 학자들의 우쭐거림과 안일함에 종종 시달린다"면서 패러데이의 말을 인용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린필드는 이어 "과학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것은 호기심과 열린 마음이지 안주나 오만이 아니다"며 "과학자들이 탈레반식으로 스스로 모든 해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비판했다.(언론 보도 발췌) 이런 논쟁이 슬픈 것은 말이 나오기 무섭게 곧장 인신공격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인신공격 나왔다면 이미 항복을 선언한 셈이다. ‘탈레반’ 운운하고, ‘우쭐거림’이니, ‘안일함’이나, ‘무서운’ 어쩌구 하는 비열한 암기들이 등장했다면 이미 토론이 아니라 전쟁의 영역이라고 봐야 한다. 즉 소통은 실패한 것이다. 소통의 의지도 없다. 하여간 모든 인신공격, 인상비평은 “여긴 내 나와바리다.”하고 눈알을 부라리는 양아치 짓에 다름 아니다. 그들과 대화할 필요는 없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이유는 호킹이 결론만을 제시하고, 본질인 중간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토론이 이런 식으로 가서 유익한 결론이 도출되는 일은 없다. 호킹의 주장은 돌도끼를 쓰는 부족민들에게 쇠도끼를 권유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들을 설득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실패한다. 물론 과학가는 성공하고 실패하고를 떠나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신이 있건 없건 간에 기독교나 회교의 신, 혹은 지구상에 알려진 모든 종교의 신은 일단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상대방의 주장을 논파하려면, 상대방의 주장을 액면에서 인정하면서 상대방 주장 안에서 자체모순을 지적해야 한다. 종교를 비판하려면 과학의 입장과 다른 종교 특유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종교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는 형태로 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절대 승복하지 않는다. 결국 소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쇠도끼로 돌도끼를 제압하려면 두 도끼를 비교할 것이 아니라, 돌도끼 논리의 연장선 상에 있는 주술사의 억압과 횡포를 지적해야 한다. 주술사가 마을을 잘 이끌고 있다면, 주술사가 부족 내의 모든 질병을 잘 치료하고 있다면, 쇠도끼는 결코 채택되지 않는다. 주술사가 부족의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는 모순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전략을 바꾼다. 이건 전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들은 귀신을 숭배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을 언급하는 목적은 자기 내세의 보장에 있고, 자신의 내세는 곧 귀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회교는 일신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귀신을 인정하고, 유령을 인정하고, 영혼을 말하는 순간 이미 다신교가 되어버렸다. 일신교를 주장하면서 사탄을 말하고 천사를 말하고 내세를 말하면 모순이다. 신 외에 신이 없다면 죽음 뒤에 내세도 없어야 한다. 내세를 인정하는 순간 이미 다신교다. 지구상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일신교는 없다. 모든 종교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대전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신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종교 중에 신을 옳게 인정하는 종교는 없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내세를 숭배하며 그것을 보장할 보증인 격으로 신을 세워둔 것이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다케다 신겐이 가케무샤를 내세움과 같다. 그들은 신이 아니리 신의 포지션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들이 호킹의 주장을 간단히 비웃어 넘기는 이유는 ‘그들 종교인들 중에 진정으로 신을 믿는 자는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본질에서 벗어난 엉뚱한 이야기를 호킹이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신을 믿는게 아니라 자기의 내세를 믿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 내부의 불안감 때문이며, 호킹이 그들 마음 속의 불안을 제거해주지 않는 이상, 호킹의 어떤 과학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래서 호킹을 비웃는다. 흥! 한마디로. 주술사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돌도끼는 버려지지 않는다. 마음 속의 두려움이라는 주술사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신의 문제일 뿐이다. 결국 내가 있느냐 없느냐가 우선이다. 우습지만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내가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 ### 신의 개념에 필자의 입장을 언급하고 진도나가야겠다. 중요한 것은 냉철하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일 지적인 용기가 있느냐이다. 자신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필자가 말하는 신은 말 그대로 신일 뿐 다른 것은 없다. 문제는 종교인들의 신이다. 종교는 숫자도 많고 그들의 입장이 통일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들이 말하는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다. 그러나 대략 어떤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내세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죽었는데도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다. 이것은 자가당착이다. 문법에 맞지 않는 비어이고 허어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내세를 정당화 할 목적으로, 신의 존재를 끌어대는 것이며 그러한 목적만 달성되면 그 뿐 신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과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신은 자신과 상관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신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나는 종교인들이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신이라고 이름붙인 거울에 자기들의 욕심을 비추어 보였을 뿐이다. ‘신’이라고 씌어져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는 죽고 싶지 않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말하자면 신이 종교인들의 언행을 관찰하였을 때, 종교인들의 언행에서 신 자신에게 유익한 언어를 발견할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종교인들이 한 말 중에서 신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적시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호킹에 의하면 외계인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점은 과학적으로 거의 틀림없다.지구에 인간이 있으니까 다른 별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며, 우주에 별이 허벌나게 많으니까 확률적으로 있다고 보는게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거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를 물질 이전의 영역에는 왜 적용하지 않는가이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폭넓게 전개됨과 동시에 시간적으로도 폭넓게 전개된다. 그리고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에너지와 시공간의 관계로 비약하며, 같은 패턴은 한번 더 반복된다. 시공간을 결정할 제 3의 원인이 인정되어야 한다. 물질≫에너지 에너지≫시공간 시공간≫? 우주의 역사를 빅뱅 이후 우리우주의 역사인 140억년으로 한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140억년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 탐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비과학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인간이 별나라에 갈 수 없다는 이유로 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외계인을 본 적 없다는 이유로 외계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구 밖으로 나가보지 않고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할 수 없지만, 월식때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추론의 힘이다. 구조론적으로는 논리의 출발이 입자가 아니라 질이다. 존재는 입자 수준에서 통제될 수 없으며 질 수준에서 통제된다. 우리가 보통 사유의 출발점으로 삽는 것은 입자이며 입자는 하부구조다. 하부구조는 거울에 비친 상이다. 달에 비친 지구 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하부구조라는 거울에 비친 물질의 모습을 바고 상부구조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 존재론으로 신이 있어야 물질의 전개를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논리적 당위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호킹이 외계인의 존재를 긍정하는 논리와 정확히 같은 논리로 신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의미다. 이는 구조론의 결론일 뿐 다른 것은 없다. 기독교의 창조주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중요한건 소통이다. 신을 자기 밖의 어떤 대상으로 본다면 이미 소통은 불발이다. 자기를 포함하여 자기 연장선 상에서 계속 전개하여 발견되어야 바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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