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분학 시간에 벡터를 배우고 나서
방향과 양이 결정되는 개념을 알고 나서
그 방향성을 가진 직선으로 힘의 합력을 구하고 나서
벡터의 선적분으로 면적분이 나옴을 구한
스토크스 원리를 알게되면서,
빨려들듯이 삶의 방향과 양을 생각하게 된다.
내 삶의 방향은 어디고, 그 방향성에 어떻게 질량을 얹을것인가.
작위적이지 않으면서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정확히 포인트로 향하는
그 화살촉의 방향성과 질감.
그걸 찾고 싶었다.
꿈이 있다면,
저위의 식당 테라스에 앉아서
와인한잔과 쾌사딜라 한조각만으로도
배불렀으면 좋겠다.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하고,
80프로의 노력만으로도 말끔히 끝내고,
샤워하고, 조깅복으로 갈아입고,
흥건히 땀에 젖으며
자연을 벗했으면 한다.
거창하게 자선사업을 하는게 아니라,
삶의 자기형태가 완성되어,
그 어떤 다른 자가적인 형태와도
공명했으면 한다.
미추를 나누지, 선악을 나누지 않고,
궁극에는 누구와도 대화하되,
주책부리지 않을수 있다면,
그 약간의 아쉬움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를
보였으면 한다.
미소에는 약간의 외로움이 있지만,
신파는 사절.
눈물은 아기시절의 그 두려움의 눈물로도 한가득.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유머를 날릴수 있는
베테랑의 미소를 갖고 싶다.
작은 승리들을 통해
큰싸움에서의 이길확율을 높이고,
실패하더라도, 구조를 기록하여,
다음싸움을 위한 노하우로 쓰고 싶다.
그렇게 80프로가 찬 인생을 통해.
나머지 20프로는 우연에 맡기고 싶다.
그걸 신의 주사위라고 누군가는 말하더만.
그 방향성에 질량을 싫어나른다.
인생을 공학이라거나 수식으로 표현하는 재주는 없지만, 오래전부터 삶의 모델을 형상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소. 초딩시절부터 시작된 생각의 실마리를, 최근에 그런 생각의 조각들을 정리해보았는데, 정작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소.
분명한 것은 삶에 시작점이 있으면 끝 점도 있고, 그 끝점은 생의 종말이 아닌 완전성이오. 신은 창조하였고, 인류는 입자로 독립하였고, 인류의 역사와 우연, 연기의 결과로 나의 삶이 시작된 것이고, 각자의 삶에서 수천, 수만의 삶의 방향과 경우의 수가 발생하지만, 결국은 완전성으로 종결된다는 것이오.
인간이 남녀가 만나 아이를 낳는 완전성은 인류의 량의 증가를 가져오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완전성(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문명의 질적인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오. 인류의 역사는 개체의 량과 문명의 질적인 성장이 합쳐진 결과요.
우리사회가 서구 학문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기술적양식으로 받아들였음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해야할 일로 받아들이다 보니,
엔지니어들은 그 나름대로 고립되고,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주술과 막연한 믿음이 횡행하는...
벡터는 수학 자체라기보다는 표현양식.
방향과 양이라는 표현양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질입자힘운동량 이라는 구조론의 5단계와 비슷하구요 (similar)
실은
포지션과 양입니다.
질입자힘운동 양
(포지션) (에너지)
우리가 막연히 차원을 높인다 높인다 하지만,
그건 무의미,
벡터들의 inner product, outer product를 통해서
힘에서 에너지가 구해지고, 선에서 면이 나오는 겁니다.
다시, 선에서 면이 아니라, 각에서 면이 나오는게 선명해지는거죠.
세상의 교외에 나앉아 빈둥거리면서도
이런 생각 때문에 초조하지 않았죠.
저렇게 빨리 달려봐야 방향이 틀려먹었는데 더 빨리 죽을 뿐이지.
굼벵이 걸음이라도 방향이 맞다면 아무래도 괜찮아.
삶의 승부는 거기서 이미 결정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