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왔다. 그 이름은 노무현이다. 그러나 그 공포는 한편으로 너무나 매력적이다. 누군들 그 두려운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는가? 지금 필자가 무슨 소리 하고 있는지 아마 헛갈릴 것이다. 아! 헛갈리라고 한 말이다. 그렇다. 현실은 항상 헛갈린다. 이건가 하면 저거고 저건가 하면 이거다.
오늘 글은 좀 어려운 내용이기에, 늘 그렇듯이 어떤 개념없는 초딩이 필사적으로 오독하고 딴소리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미리 경고를 해두는 거다. 그렇다. 당신은 이미 오해하고 있다. 두 번 생각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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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들의 요즘 행태를 보면 노무현 장사를 하긴 해야겠는데,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쓰레기 좌파’들에게 멱살을 잡힐까봐 알리바이 만들어 대느라고 전전긍긍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젠장! 인간이 찌질하기는. 인간아 인간아! 왜 떳떳하지 못하나? 왜 그러고 사냐? 거울 좀 봐라. 네 모습이 추하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0397
이를테면 이런 쓰레기 기사 말이다. 이 기사를 한 마디로 줄이면 “나는 노무현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노무현을 팔아먹지 않았습니다. 아아 나는 단지 당신의 머릿속 생각만을 팔아먹았을 뿐입니다. 이건 절대 놈현 관장사 아닙니다. 아니라니깐요!” 이거다. 참으로 더러운 짓거리다. 오연호들이 늘 하는 쓰레기짓 말이다. 노무현을 팔아서 이득을 취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노무현이 다시 살아날까봐 꼭꼭 밟아서 단속하는 짓 말이다. 더러운 배반이다.
지난 지자체선거는 노무현 태풍의 위력을 십분 보여준 선거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이미 노무현의 진가를 알아버렸다. 그러나 그들에게 노무현은 계륵이다. 노무현을 받아들일수도 없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그들의 얍삽한 계략은 치고빠지기로 정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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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필자가 타블로에 대해 쓴 글은 외국인노동자에 병역기피자(법적으로는 합법이겠으나 국민의 법감정으로 볼 때, 헌재의 관습헌법 논리로 볼 때 확실히 병역기피 맞다. 그들은 한국인 자격없다. 더구나 대중의 인기로 먹고살려고 한다면.)에 불과한 타블로를 옹호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네티즌들이 왜 타블로에 대해 그렇게 몰입하는가이다. 목숨걸고 덤비는 거 같아서 안쓰럽기 짝이 없다. 필자는 그것을 ‘젊은이의 좌절과 분노’로 진단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핵심적인 고민인 병역문제와 외국어문제를 타블로는 약은 편법으로 보기 좋게 해결하고 ‘용용 죽겠지’ 하는 셈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젊은이의 좌절과 분노가 살아있는 한 지식인이 젊은이의 폭주를 비판해봤자 먹히지 않는다는 거다.(한국 젊은이들의 외국인 노동자 타블로 공격은 러시아 신나치의 한국인 유학생 공격과 본질이 같다. 러시아 젊은이들도 좌절하고 있다.) 그게 밑바닥 본질이다. 본질을 보라. 학력어쩌구는 걸고 넘어지려는 거고 본질은 이 나라 젊은이의 좌절과 분노다. 설사 타블로가 학력을 속이지 않았다고 완벽하게 밝혀진다 해도 그 좌절과 분노가 남아있는 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타블로는 이 시대 모순의 집약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타블로를 공격하는 방법으로 그 모순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노무현은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면에 서서 대한민국 근대사의 모순을 집약하고 있다. 거기서 위대한 소통이 일어난다. 즉 젊은이들은 타블로를 때리는 방법으로 자신의 좌절과 분노를 세상에 알리듯이, 또 문희준과 싸이와 박재범과 유승준을 때려서 자신의 좌절과 분노를 알려왔듯이, 또 문희준과 싸이가 병역을 잘 이행하자 곧바로 공격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신의 참뜻을 알려왔듯이, 오히려 전에 없던 친근감으로 보상하듯이, 또 지금이라도 타블로가 국군에 입대하면 공격을 멈출 것이 뻔하듯이, 또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유승준, 박재범, 타블로류의 ‘용용 죽겠지’ 하고 깐죽거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공격할 예정이듯이, 소통이 막혀있을 때 특정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격하는 방법으로 그 문제를 널리 알리려 하는 것이며,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과 쇠고기 문제 또한 이면에 이와 같은 소통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으며, 설사 이명박이 미국 쇠고기가 광우병이 전혀 없음을 백퍼센트 완벽하게 입증한다고 하더라도, 주한미군의 우월적 지위가 존재하는 한 한국인들이 이명박을 순순히 용서할 리가 없듯이, 소통의 코드로 실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중요한건 기능이다. 기능이 살아있는 한 그들이 아무리 꼭꼭 밟아서 비벼 끄려 해도 불씨는 죽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왜? 기능이 살아있으니깐. 그 기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깐. 소통이 막혔을 때의 답답함은 계속되니깐.
● 쇠고기는 단순히 해롭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미국이 대등해져야 한다는 국민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소통의 코드로 기능한다.
● 타블로는 단순히 학력을 속였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영어문제와 병역문제라는 두 장벽 앞에서 좌절하는 젊은이들의 분노를 사회에 알려 공론화 하려는 젊은이들의 소통의 코드로 기능한다.
● 구시대의 막차를 자임한 노무현은, 구시대와 새시대의 본질적인 모순과 괴리를 집약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코드로 기능한다. 좌파 떨거지들은 이를 노무현 개인에 대한 우상화로 착각하고 노무현 죽이기에 안달이 나 있다. 그러면서도 오른손이 모르게 왼손으로는 노무현 팔아먹기에 여념이 없다.
정리하자. 노무현은 기성세대지만 젊은세대를 짝사랑했다. 젊은 세대는 자신을 이해해 준 노무현을 상징으로 세워서 도무지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오마이뉴스류 떨거지들, 조중동 떨거지들을 압박하는 소통의 코드로 노무현을 활용한다. 중요한건 통했다는 거다. 누가? 누구와? 노무현과 젊은 세대가!
님은 스스로 구시대의 막차를 자임했지만, 실은 새시대의 기관차로 작동하고 있다. 이건 현실이다. 젊은 세대는 새시대를 열어젖히기 위해 힘의 결집을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한 소통의 수단으로 노무현을 필요로 한다. 노무현은 결코 죽지 않는다. 왜?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실제로 기능하기 때문에. 여전히 소통은 막혀 있기 때문에. 오마이뉴스의 쓰레기 좌파들은 그것을 노무현 우상화로 여기고 노무현 죽이기에 안달이 나 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이다.
결국 본질은 소통이다. 이명박과 쇠고기 이야기를 한다는게 말이 되나? 밤새도록 대화해도 본질에서 벗어나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되고, 설사 무슨 결론을 내리더라도 아무도 승복 안 한다. 애초에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이명박이 이를 국민투표에 붙여서 국민 70프로가 미국 쇠고기 수입 찬성해도 결코 승복 안한다.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그렇게도 모르겠는가?
왜냐하면 쇠고기는 구실일 뿐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효순이 미선이 촛불과 쇠고기 촛불은 정확히 같은 것이다. 그걸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들에게 백시간 강의를 한들 알아먹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건 사실의 문제가 아니고 존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존엄이 문제다. TV토론에서 효순이 미선이의 실명을 불러준 후보는 노무현 후보 뿐이었다. 이게 본질이다. 그냥 여학생이 아니라 실명을 불러주는 것.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존엄이다. 그럴 때 통한다. 통하면 전부다. 이미 완성되었다. 더 필요없다. 정책어쩌구 각론은 논외다. 참여정부의 자잘한 정책 따위는 대한민국의 총체적 역량이 결정하는거지 인간 노무현의 존엄과 본질에서 상관없다.
마찬가지다. 타블로죽이기에 여념이 없는 네티즌들을 상대로 조중동 종이신문 기자가 스탠포드에서 증명을 한답시고 무엇을 들고오든 애초에 대화 자체가 안 된다. 그게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좌절과 분노는 그대로다. 그 밑바닥 에너지는 그대로 간다.
노무현은 막힌 소통을 뚫었다. 막힌 것이 뚫렸을 때 그 댐의 낙차만큼 에너지가 쏟아진다. 그 에너지는 현실에 존재한다. 입으로 나불댈 뿐 근본 에너지가 없는 쓰레기 좌파들이 궁물을 훔치려고 달려든다. 그러면서 변명한다.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말이다. 그래서 튀어나온 단어가 ‘놈현 관장사’다. 이미 들통났다. 강용석의 헛소리로 성나라당이 그 본질을 완전히 들켜버렸듯이 그들은 이미 들켜버린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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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이 정해지면 모두 그 길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고,
그 길위의 각자 위치에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혹은 각자 자기 역할에 대한 오해를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혹은 역할에 대한 이해가 안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인데(조금 망가질지라도...)
모두 책임을 떠 넘기기에 바빴고, 그 길위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였기에, 국민들도 '노무현 때문이다'에 넘어갔으므로(그러나 국민은 원래 최종 책임을 질 수는 없고 단지 최종 상황을 껴안고,혹은 떠맡고 살 뿐이오.) 최종적으로 모든 책임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떠 넘겨졌소.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노무현 때문이다' 였다고 생각되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떠 넘겼는데 결국 다 같이 죽게 된 것이오.
방향이 정해져 버렸기에 그 방향에서 모두 나름대로의 책임을 졌다면 망가질 지언정 다 같이 자멸하지는 않을 수 있었는데...
결국 중간에서 책임회피, 떠 넘기기만 하였기에 남는 것은 국민과 노무현이었소. 그런데 노무현은 국민에게 떠넘기기를 할 순 없었소.
그래서 결국 노무현은 떠 넘겨진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죽었소.
아마도 국민에게 떠 넘기기를 한다면 진보는 더 깊은 자멸을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오. 이것은 보호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반증한다고 생각되오.
그래서 진보는 다시 살아났고, 저들은 지금 그 알맹이만 지속적으로 빼먹고 있소. 책임은 지지 않은체 과실과 세력에서 나오는 즙만을 빨아먹고 있다고 생각되오. 노무현 때문이다가 아니라 노무현 때문에 연명하고 있다가 맞는 것 같소.
가야하는 길위에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책임을 지지않고 회피만 하였고 떠 넘기기만 하였기 때문이오.
더 큰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과 책임을 회피하여 책임전가, 탓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 생각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