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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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483 vote 0 2009.01.07 (01:06:00)

 참된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education)의 어원은 겉(e-)으로 당겨(-duc)서 끌어낸다는 뜻이다. 교육은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다. 교육의 참된 의미는 고립된 개인의 재능을 넓은 사회로 끌어내어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연결하는데 있다.

‘e-’는 끝(edge) 혹은 밖(exit)이다. ‘duc-’는 앞(pro-)에서 끌어주는 프로듀서(producer), 사물에 숨은 가치를 끌어내는 생산(production), 일반명제를 앞세운 다음 뒤(de-)로 끌어당겨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는 연역법(deduction), 안(in-)으로 끌어들이는 설득하다(induce)와 같이 밖으로 당겨 끌어낸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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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아마를 단련시켜 프로를 만드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되 장비를 갖추고 오르느냐 아니면 아무런 준비없이 맨손으로 기어오르느냐의 차이와 같다.

정상을 꿈 꾼다면 반드시 장비가 있어야 한다. 교육은 장비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라는 눈에 보이는 장비도 필요하지만 경험과 노하우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장비도 구비되어야 한다.
목수가 연장을 사용하듯이 베테랑은 반드시 장비를 쓴다. 교과서로 전달되는 하드웨어 장비는 아마추어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인성교육으로 전해지는 소프트웨어 장비는 베테랑만이 가질 수 있다.

오늘날 교육계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아마추어와 풋내기에게는 없고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프로패셔널과 베테랑만이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장비의 중요성이다. 그것은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한 경험’이다.

그림을 배운다면 연필로 긋고 붓으로 칠하는 기교 보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를 구상하는 단계에서부터 그림을 완성하고 난 다음 학부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여는 단계까지 1 사이클로 이루어지는 전 과정의 체험이 중요하다.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만 해서는 같은 길을 열번 갔어도 막상 핸들을 잡으면 길을 찾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내 손으로 핸들을 잡는다면 길치가 아닌 이상 한 번 가본 곳은 반드시 찾아갈 수 있다. 전 과정의 체험이 중요하다.

전체과정을 체험한 어린이는 집으로 돌아와 체험한 것을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그 ‘이야기’가 내 안에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갖추어지지 않고 있다면 교육은 실패다.

동기유발≫과제실행≫성과보상으로 이어지는 1 사이클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엄마 앞에서 이야기 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셋 중에서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두 번째의 과제실행 뿐이라는데 있다.

동기유발과 성과보상에 대해서는 평가가 불능이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참된 교육이 그것이다. 평가가 가능한 부분만 수업하는 기술교육에서 벗어나 평가할 수 없는 부분까지 훈련하는 전인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인교육을 위해서는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다. 그 장비는 교과서처럼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 장비가 아니라 체험이라는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장비다. 체험과 노하우가 또한 하나의 장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교과서 위주의 하드웨어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문제는 창의력이라는 소프트웨어다. 경험부족에다 노하우 빈곤이다. 인간의 창의가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 한 번도 선두에 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베테랑과 풋내기의 차이는 어느 지점에서 발견되는가? 내 안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추어 있는가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어디서 줏어들은 ‘카더라’ 말고 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프로라면 누구나 그 이야기를 갖추고 있다. 베테랑들은 다들 그 ‘이야기’라는 장비를 하나씩 구비하여 두고 있다. 베테랑은 그 연장을 쓴다.

자유방임이든 스파르타식이든 세간에 유행하는 교육방법들은 그 장비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학교건물이나 교보재로 이루어진 하드웨어를 판매할 뿐 체험과 노하우라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없으면 힘을 쓸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있는데 집으로 돌아와 엄마 앞에 털어놓을 것이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집요하게 말하려고만 드는 아이가 제대로 배운 아이다.

‘동기유발≫과제실행≫성과보상’이라는 전체과정에의 참여가 없으면 아이는 말하지 않는다. 배운 것을 말한다는 것은 곧 소통한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그 분야를 떠나 다른 모든 분야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다. 그것이 소통이다. 교육은 소통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계몽에서 소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소통하고 진리와 소통하고 역사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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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이후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추락한 예는 없다. 왜일까? 한 국가의 운명이 그 집단 전체의 집단지능의 수준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집단지능의 계발에 의해 진보한다.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든, 식민지 지배를 당한 나라이든 어떻게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의 접속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모두 일시적 좌절을 딛고 재도약에 성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나타낸다. 교육의 최종목표는 인류전체의 집단지능과 접속하는데 있다. 그리고 소통하기다. 한 사람의 지식은 전체 인류문명의 일부로 기능할 때 한해서 유의미하다.

기존에 알려진 교육사상들은 그러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여전히 계몽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이 없는 교육은 실패다. 내 머리 속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미술수업을 받아 실력이 늘었다 해도 그 실력이란 것은 손가락을 운용하는 하드웨어 장비에 불과하다. 그리고 싶어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노력한 만큼 성과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소통의 한 단위가 되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욕망을 일으켜야 하고 성과를 달성해야 하고 보상이 따라야 한다. 욕망과 성과와 보상이 한 줄에 꿰어지고서야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이야기의 요건이 구성된다. 그 이야기가 획득될 때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고 소통할 수 있다.

참된 교육은 과제의 수행에 그치지 않고 그 성과를 타인에게 전파하고 타인의 마음과 공명함에 의해 완성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기를 쓰고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말듯이 모두 털어놓게 하는 것이다.

주입식 교육은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하여 길을 암기함과 같다. 알기는 아는데 아는 것을 한 줄에 꿰어내지는 못한다. ‘이야기’를 구성하지 못한다. 혼자 알 뿐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지 못한다. 널리 소통하지 못한다.

존 듀이에서 몬테소리, 로웬펠드로 이어지는 교육계의 경향도 구호가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교육포기이기 쉽다. 요즘 유행하는 미국식 실용주의 교육은 환경을 조성하고 자극을 가하면 저절로 된다는 식이다. 

교육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교육은 이야기를 만드는 장비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교육은 실패다. 스승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고 친구가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인류문명과의 접속은 실패다.

이끌어줄 스승이 없고 들어줄 친구가 없는 교육은 실패다. 인류의 집단지능과 동조화 되지 못하므로 실패다. 혼자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모든 교육학자가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일 사이클의 완성을 통한 전체과정의 체험이라는 연장이 없으면 창발성은 유도되지 않는다. 자연의 진리에 기초한 완성형의 재현이라는 본질에서 멀어지면 연장은 사용될 수 없다.

자연의 진리≫완성형의 포착≫모방을 통한 재현≫전체과정의 체험≫이야기의 획득을 거쳐서 교육의 성과는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한다. 자연의 진리로부터 완성된 패턴을 끌어내는 과정을 안내하지 않으면 창발성 유도는 실패다.

교육(education)은 내부에 감추어진 것을 밖(e-)으로 당겨(-duc) 끌어내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그것을 끌어내려면 장비가 필요하다. 그 장비는 연역의 장비다. 연역(deduction)과 교육(education)은 어원이 같다.

연역은 일반명제를 앞세운 다음 이를 뒤(de-)로 끌어당겨(duc) 개별적 사실에 적용한다. 연역하기 위해서는 일반명제의 전제가 필요하다. 일반명제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찾아진다. 창발성은 그로부터 연역하여 유도된다.

창발성은 자연과 접촉하고 자연에서 마구 뒹구르며 그 자연의 완성된 모습 안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을 읽어내는 직관력에서 얻어진다. 자연의 내부에 감추어진 이야기와 동조화 되는 능력이 직관력이다. 

평범한 하나의 돌멩이,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부는 바람, 누워있는 흙들도 다들 자기 내부에 이야기를 하나씩 감추고 있다. 자연의 이야기는 ‘결’이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질 때 자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자발성과 창의성은 교실에 가둬놓지 않고 막연히 들판에 풀어놓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완성된 모델로 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읽는 직관력에 의해 포착되고 그로부터 연역적으로 유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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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끌어내는 데는 장비가 소용된다. 그 장비는 ‘이야기’라는 장비다. 자연의 완전성과의 소통을 통해 나의 내부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창의력에 주목하는 교육이론가들 많으나, 교육이 끌어내는 것이며, 끌어내야 할 것이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가 사전에 세팅하고 장착해야 하는 하나의 장비라는 사실을 모른다. 존 듀이 이래 강조되어 온 실용주의의 한계이다.

합리주의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듀이가 강조하는 경험은 자연의 완전성에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에 불과하다. 자연에서 여러가지를 자유롭게 경험하다 보면 우연히 창의력이 샘솟는다는 식이다.

우연히 자연의 완전성과 소통할 수도 있다. 직관력이 뛰어난 어린이는 자연에서 뒹구르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패턴을 읽어내고 이를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이는 방임할 경우 저절로 PC방에 가두어져 버린다.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어 여러가지를 체험하게 하고 갖가지 장난감을 던져주고 자유방임하면 우연히 교육이 이루어질거라는 추측은 무책임하다. 교육은 우연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다. 엄격한 지도에 의해서도 가능하지 않다.

시골 어린이들에게 있어 자연은 감옥과 같다. 저절로 갇혀버린다. 시골의 단조로움과 무료함 속에 갇혀 버린다. 자연의 완전성에서 숨은 규칙성을 읽어내지 못한다. 동기부여와 성과보상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 어린이들에게 도시는 감옥과 같다. 저절로 게임방에 갇혀버린다. 미술관에서 걸작을 감상한다해도 그 안에 숨은 미학적 완전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그 완전성과 공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육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깨달음은 이야기의 획득이다. 그것은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어내는 능력이다. 그것을 갖출 때 비로소 공명할 수 있다. 자연의 완전성과 교감하고 걸작의 미학적 완전성과 교감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반하게 된다. 빨려들게 된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규칙성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써먹고 싶어하게 된다. 누구에겐가 자랑하고 싶어하게 된다. 그렇게 소통하게 된다.
동기부여에서 과제수행을 거쳐 성과보상으로 진행되는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하는 데서 이야기는 획득된다.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어낼 수 있으므로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게 될 때 베테랑이 된다. 프로가 된다.

자연의 완성된 모습에서 포착된 진리를 모방하고 재현함으로 하여 나만의 이야기를 유도할 수 있다. 나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전체과정을 체험함에 의해 결(나이테)을 품듯이 전체과정을 체험하고서야 내 안에 결을 품을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할 수 있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할 때의 전율에 의해 동기가 유발되고 이를 토대로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의 접속할 때의 쾌감에 의해 성과가 보상된다. 이로서 완전해진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규칙성에서 패턴을 읽으며 그 리듬감에서 진리의 완전성을 포착하게 될때 인간은 전율한다. 긴장한다. 고조된다. 그리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여 공명시킬 때 이완된다. 편안해진다. 보상된다.

인간의 행동은 긴장으로 촉발되고 이완으로 보상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밸런스가 있다. 긴장이 동기유발이면 밸런스가 과제수행이고 릴렉스가 성과보상이다. 이 셋을 한 줄에 꿰어낼 때 이야기는 완성된다.
옛 친구를 만났을 때 반가움이 사무쳐 정신이 번쩍드는 것이 긴장이면 마주앉아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밸런스이고 그럴때 엄마 품의 아기처럼 혹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게 이완되는 것이 릴렉스다.

그 긴장의 출발점과 이완의 종결점이 다시 만나 동그라미를 완성시킬 때 이야기가 얻어진다. 완전히 정신차릴 수 있으면서 완벽한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으면서 완전히 릴렉스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의 경지다.   

긴장은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고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완은 지방이 중앙을 통제하고 몸이 뇌를 통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완할 수 있는가이다. 릴렉스하기 어렵다. 릴렉스는 밸런스를 거쳤을 때 한하여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긴장은 병사들이 정렬하여 연단 위의 대장을 바라봄이고 이완은 병사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놀되 대장의 통제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완을 위해서는 밸런스가 필요하다. 병사와 대장 사이에 완벽한 소통이 있어야 이완될 수 있다.

긴장의 목적은 밸런스의 유지에 있고 밸런스에 도달하면 이완할 수 있다. 소통될 때 릴렉스할 수 있다. 최고의 팀은 구성원이 제멋대로 흩어져 각개약진하되 대장이 정한 금지선을 넘어서지 않으면서 최고의 팀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완전히 이완된 상태에서 탐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지방이 중앙을 통제하는 것이고, 병사 개개인이 대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팀원 간에 완벽한 밸런스와 완벽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밸런스 없는 릴렉스는 팀을 붕괴시킨다. 밸런스 없는 긴장은 팀을 경직시킨다. 긴장이라는 노력이 릴렉스라는 보상으로 결실하기 위해서는 밸런스라는 고지를 넘어야 한다. 내 안에 이러한 구조를 갖추는 것이 이야기의 획득이다.

내 안의 이야기를 모뎀삼아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할 때 인간은 완전히 긴장한다. 전율한다. 내 안의 이야기와 자연의 이야기가 소통할 때 밸런스가 얻어진다. 이를 토대로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할 때 완전히 이완된다. 깨달음의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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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장비의 획득이다. 장비는 자연의 진리와 인간의 문명을 연결한다. 접속을 위해서는 모뎀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만남의 기쁨으로 벅차오른 만큼 릴렉스의 편안함으로 가라앉히기가 ‘이야기’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한다. 하드웨어는 학교와 교과서와 수업으로 이루어진 정규교육의 교육시스템이다. 소프트웨어는 어떤 일의 일 사이클의 전체과정에 참여한 체험에 의해서만 세팅되는 프로와 베테랑의 노하우다.

듀이 이래 강조되는 묻지마식 방임주의는 극소수의 재능있는 천재를 우연히 찾아낼 뿐 전체적으로는 교육포기에 가깝다. 서머힐스쿨을 비롯하여 한국에 유행하고 있는 대안학교들도 투입한 비용에 비해서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들은 주입식교육의 단점을 소극적으로 보완할 뿐 넘어서지 못한다. 참된 교육은 떠먹여주는 주입식교육도 아니고 내버려두는 방임식교육도 아니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끌어내기 교육이다. 소통의 교육이어야 한다.

한 명의 천재가 다수의 범인을 먹여살린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바른 이해가 아니다. 거꾸로 다수의 범인이 세팅해 놓은 인류의 집단지능이라는 장비가 그 한 명의 천재가 숨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천재는 그 천재가 속한 그룹의 집단지능에 의해 생산된다. 토대가 부실하고 바탕이 척박하면 천재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한 명의 영재를 가르쳐서는 어떻게 가르쳐도 천재가 되지 않는다.

천재가 털어놓는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열 명의 동료를 만들어줄 때 그 한 명의 천재는 탄생한다. 참된 교육은 천재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것은 열명의 평등하게 소통하는 동료를 양성하는 것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장비운용 능력이다. 자연의 완전성이 있고 이로부터 유도된 문명의 진보가 있으며 교육은 그 사이를 연결하는 모뎀이다. 자연에서 유도해낸 성과물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으로 전송하여 보내기다.

참된 교육은 큰 집을 짓듯이 일층부터 차례로 쌓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강변에서 모래로 까치집을 짓듯이 단순한 단계에서 먼저 전체를 완성하고 난 다음 그 완성된 모델에 밀도를 높여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초등교육에서 중등, 고등교육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1층 위에 2층과 3층을 올리는 식이 아니라 초등교육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기본형의 내부에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이 밀도를 채워나가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초등교육 단계에서 이야기의 완성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 까지 완성될 수 없다. 자연에서 유도한 것을 내 안에서 재현하여 문명으로 전송하는 본질을 간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 집단지능의 진보에 기여할 수 없다. 

한국에서 어학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유아 수준의 낮은 단계에서 듣기와 말하기의 전체과정을 완성하지 않은채 알파벳과 단어학습의 높은 단계로 건너뛰기 때문이다. 1백단어 안팎의 낮은 단계에서 결이 완성되어야 한다.

알파벳에서 단어≫문장≫문법 순으로 단순에서 복잡으로 진행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야 한다. 교육은 하나씩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는 부분을 조직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일이 없다. 자연에서는 작은 하나의 씨앗 속에 배아형태로 이미 미래의 완성형이 들어있다. 씨앗 속에 완성된 나무의 모습이 있다. 유전자 속에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자연의 방법은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배아에 수분과 당분을 집어넣어 크기를 부풀려 겉으로 드러내기다. 어학교육도 이와 같아야 한다. 1백 단어 만으로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다음 단계로 가지 말아야 한다.

아기는 단어보다 문법을 먼저 배운다. 낮은 수준의 문법을 익힌 다음 문장과 단어를 그 문법의 틀에 집어넣어 의미의 밀도를 높인다. 아기가 비록 ‘엄마’라는 한 단어를 말했어도 맥락으로 보면 이미 문장을 말한 것이다. 

자연에서는 항상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아기의 언어학습도 전체가 먼저다. 그 전체는 물론 유치한 수준이다. 그러나 ‘엄마’ 한 마디로 타인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이미 문법은 완성되어 있다.

자연은 언제라도 완성되어 있다. 진리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찾아지는 규칙성으로 드러난다. 완성이 먼저다. 일반명제가 먼저다. 전체가 먼저다.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내용을 채운다. 형식을 완성한 다음 밀도를 높인다.

그러므로 항상 깨달음이 먼저고 소통이 먼저고 이야기가 먼저다. 생각을 조직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유발과 성과보상의 일 사이클로 먼저 이야기를 완성해 놓고 그 안에 생각을 채워넣는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이에 전율하면서 그 완전성과 소통하는 능력이 없다면 교육은 실패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과 리듬감을 읽는 능력이 없다면 원초적으로 실패다. 감응이 먼저고 교감이 먼저고 생각은 나중이다.

인간의 그릇 크기는 애초에 그 지점에서 정해져 버린다. 감응하지 못하는 작은 그릇에 고등교육으로 밀도를 높인들 어차피 한계가 있다. 원초적으로 큰 그릇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큰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그것을 내 안에서 재현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조개가 진주를 품듯이 이야기 하나를 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고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다.  

자연과의 접속을 유지하고 또 문명과의 접속을 유지함으로 하여 널리 세상과 소통하는 큰 그릇을 먼저 완성한 다음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고등교육을 통하여 그 그릇의 내부에 단계적으로 밀도를 채워넣기다.

그림을 그려도 그렇다. 먼저 투박하게 스케치를 완성한 다음 세부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하여 낸다. 음악을 연주해도 그렇다. 먼저 하나의 프레이즈를 완성한 다음 그 프레이즈를 도구로 삼아 가능한 모든 음역에 도전하고 탐색한다.

[한국의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서 말한다면 가장 위험한 교육은 하나의 획일적 교육방법을 대한민국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선수가 골키퍼가 되거나 아니면 모든 선수가 공격수가 되려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평준화교육이든 엘리트교육이든 어느 하나에 올인한다면 실패한다. 포지션이 나누어져야 하듯이 사교육도 있고 공교육도 있어야 한다. 주입식 교육도 있어야 하고 창의적인 교육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다양한 교육방법의 역할분담에 의해 인류의 집단지능은 완성된다. 만약 모든 한국인들이 같은 교과서로 같은 내용을 학습한다면 포지션의 조합에 실패하게 되므로 한국형 집단지능의 완성은 실패로 된다.

조중동식 교육이든 전교조식 교육이든 어느 하나로 획일화 되는 것이 가장 나쁘다. 조중동식 교육은 모방에 능한 하급 기술자를 양성하고 전교조식 교육은 창의적인 지도자를 양성한다. 가장 좋은 교육은 동료를 양성하는 것이다.

왜 엄기봉씨는 불행해졌는가? 그 주변에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 한 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에서도 불행했고 철원으로 이주했어도 역시 불행해졌다. 왜 모두들 그를 속였을까?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한 명의 지성인이 엄기봉씨 주변에 있었다면 그렇게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어느 지역, 어느 공장, 어느 구석을 가더라도 반드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한 두명은 있어야 한다.

만약 대한민국의 어떤 집단, 어떤 지역, 어떤 그룹에 지성인이 한 명도 없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겨난다. 그 사회는 위험에 처하고 만다. 지성인은 시골에도, 공장에도, 도시에도, 정부에도 고루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교육은 이상적인 포지션의 조합이다. 그것은 바깥을 감시하고 방향을 판단하는 리더와, 안을 감시하고 조직을 통제하는 총무와, 과제를 수행하는 기술자가 제각기 역할을 분담하고 조화롭게 팀을 유지하는 것이다.

강남식 교육은 기회를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교육포기로 이끈다. 동기부여에서 배제되고 성과보상에서도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어떤 지역이나 어떤 공간에서는 엄기봉씨를 도와줄 지식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공간이 섬이나 집창촌과 같이 고립되고 단절된 공간이라면 인권유린이 일어나도 사회가 모르게 된다. 그 경우 사회는 대단히 위험해지고 만다. 유영철 같은 사이코 패스가 나타난다. 그 경우 사회는 몇 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뉴욕타임스는 인구 1만3천에 불과한 수족 보호구역 내에서 지난해 193건의 자살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공중위생국 집계에 따르면 대평원 지역에 산재한 인디언 보호구역 청소년 자살률이 미국 전체 평균에 비해 10배나 높았다고 한다.(연합) 

2003~2006년 알래스카 원주민의 자살률은 미국 평균보다 5배나 높았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원주민 전통 사회가 붕괴되면서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라는 분석을 전하고 있다.(연합)

교육의 완성은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하는데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와 동료를 가지고 있고, 그 동료로부터 동기를 얻고 성과를 공유하는 사회화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만약 강남식 교육이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면 미국 인디언 사회의 붕괴에서 보듯이 국가로부터 유리되어 동기를 상실하고 성과보상에서 배제되어 삶을 포기하는 예가 속출하게 된다.

한국인이 금메달을 따고 한국팀이 월드컵 우승을 하고 한국사람이 노벨상을 받고 한국의 GDP가 두 배로 상승해도 그것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되기 때문이다. 참된 교육은 사회구성원 모두를 상관있게 만드는 것이다.

동기부여를 하려면 성과의 공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성공이 모두의 성공으로 될 때 우리는 서로 상관있는 존재가 된다.

인류의 집단지능과의 접속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하다. 모든 한국인이 주변에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와 동료를 한 명 이상 가지게 하는 방법으로 인류문명과의 접속은 가능하다. 성과의 공유에 의한 동기유발은 가능하다.

한국의 지정학적 구도에 맞는 교육을 펼쳐야 한다. 미국처럼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면 인적자원이 풍부하므로 어떻게든 집단지능이 형성되어 소수의 천재가 다수의 범인을 이끌어 갈 수 있으나 한국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변에 비교될 나라가 없어 가치판단이 어려운 고립된 반도국가인 한국은 모든 국민이 고르게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작은 내부갈등에도 사회전체가 동요하게 되어 개인의 삶이 극도로 피곤해진다.

한국은 한 명의 전여옥급 사이코 패스가 국가 전체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특성에 맞는 교육제도가 창안되어야 한다. 모든 한국인이 주위에 지식인 친구나 동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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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테이지 A에서 스테이지 B로 상승하게 하는 것이다. 참된 교육은 A와 B 사이를 연결하는 장비의 제공에 있다. 나는 남들이 쓰지 않는 특별한 장비를 고안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구조론이라는 장비다.

구조론은 존재의 매커니즘을 파악함으로 하여 어떤 일의 진행에 있어서 다음 단계의 진행을 예측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물론 예측은 빗나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검증가능한 객관적인 장비를 사용하는가이다.

장비를 사용한다면 예측이 빗나가도 보완할 수 있다. 자(尺)를 사용하여 건축한다면 설사 그 자의 운용에 오류가 있더라도, 그 자 자체에 오류가 없는 이상 운용상의 오류를 시정하여 마침내 그 건축을 완성할 수 있다.

[월간 온오프][교육/문화] 한국의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 김동렬 07-07-2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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