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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관점의 대안 좌파의 개입만능도 옳지 않고 우파의 시장만능도 옳지 않다. 최소의 개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게 하는 시스템 구조의 최적화가 필요하다. 부단한 재구축과 정교한 튜닝, 전문가에 의한 고도의 정밀제어에 의해 가능하다. 우주왕복선의 귀환과 같다. 나사의 지상기지가 우주왕복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장원리라는 부적을 써붙인다고 해서 우주왕복선이 자동으로 착륙되어 주는 것도 아니다. 구조주의 관점은 사람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회주의적 가치가 지상기지의 역할이라면, 우주왕복선의 성능은 자본주의 시장원리에 해당하고, 그 안에 탄 조종사는 구조주의가 강조하는 사람이다. 지상기지와 우주왕복선과 조종사 3자가 혼연일치가 되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사람이다. 깨달음이 필요하고 개인의 각성이 중요하다.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사람이 바뀐 만큼 시스템은 발전한다. 시스템에 의존해서 안 된다. 좌파든 우파든 시스템에 맡겨놓고 안주하려는 점은같다. 긴장을 회피하려는 심리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비겁한 도피다. 시스템은 절반을 책임질 뿐이며 나머지 반은 사람의 몫이다. 정확히 말하면 좌파의 관점이 시스템 만능에 해당하고, 우파의 신앙은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체의 밸런스 원리 숭배에 해당한다. 구조체가 시스템의 일부를 구성하므로 우파 역시 시스템 의존이다. ● 좌파의 도로체계 우선주의≫ 그들은 자동차를 운행하기 전에 길부터 잘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코 자동차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시스템에 의존하지만 그 시스템은 고장나고 만다. 그들은 끝없이 시스템을 보수할 뿐 끝내 자동차를 출발시키지 못한다. 완벽한 시스템은 원래 없기 때문이다. 일단은 자동차를 출발시켜야 시스템의 모순이 드러난다. 오류시정은 그 다음이다. 구조주의 대안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에 따른 단계적 재구축을 주장한다. 역사는 결코 사선을 그리며 점진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1보후퇴와 2보전진을 반복한다. 항상 밟아야 할 단계가 있다. ● 우파의 자동차 만능주의≫ 그들은 자동차의 성능만 좋으면 차가 스스로 길을 찾아간다고 우긴다. 자동차의 성능이 향상될수록 교통사고의 규모도 같은 비례로 커져왔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들 역시 시스템에 의존하고 인간의 역할을 가볍게 본다. 이들은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체의 밸런스 원리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 부르며 숭배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일정한 조건에서나 작동할 뿐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인간의 역할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사회가 100일 때 그 안에서 핵심적 경쟁은 그 1/5인 20프로 안에서 일어난다. 밸런스 원리는 1/5을 책임질 뿐이며 나머지는 시스템과 인간의 몫이다. ● 구조주의 관점의 인간 중심주의≫ 범진보 세력 안에 소수의 깨어있는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이 있다. 그들은 도로체계도 중요하고 자동차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좌파의 시스템이나 우파의 밸런스 원리를 전면부정하지 않고 역할분담을 통해 타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좌파와 우파의 포지션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법으로 긴장을 해소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발전단계다. 사회주의적 가치가 제 1단계라면 자본주의 원리는 제 2단계에 해당하며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의 입지는 그 다음 단계다. 후진국에는 도로체계의 개선이 가장 효과가 크다. 개도국에서는 자동차 성능의 개선이 먹힌다. 선진국에서는 운전자의 자질이 문제로 된다. 이는 어느 쪽이 옳으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발전 단계가 어느 단계에 와 있느냐는 성숙의 문제다.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금융시장의 붕괴는 이제 인간의 역할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방증한다. 새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관점, 새로운 방정식, 새로운 해법이 나와주어야 한다. www.drkimz.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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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이 되는 방법 인간이 자연을 관찰하여 진리를 발견하였다. 진리는 본래 접혀 있다가 점차 펼쳐지는(physica) 속성을 가진다. 씨앗처럼 움츠리고 있다가 봄을 맞이한 새싹처럼 펼쳐져 나온다. 그래서 자연학을 physica라 부르게 되었다. *** 라틴어 어원으로 보면 ‘육체, 자연, 생리, 물리’ 등이 모두 ‘펼쳐진다’는 뜻을 공유함을 알 수 있다. 점점 커지며 더욱 커진다. 사방을 망라한다. 폭넓게 전개한다. 활짝 피어난다. 그것은 자연의 원리이다. 인간에게도 그러한 성질이 있다. 문명의 진보가 그 증거다. 문명은 새싹처럼 자라나고 꽃처럼 피어난다. 점점 발달한다. 자연과 인간의 피어나고 뻗어가는 성질이 통한다. 자연의 그 씨앗이 완전하기 때문에 그러한 성질을 가진다. 불완전한 씨앗은 싹트지 않는다. 인간에게 또한 그 완전성이 숨어있다. 불완전한 인간은 문명을 꽃피우지 못한다. 자연에 본래의 완전성이 원리의 형태로 숨어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 완전성이 숨어 있다. 그것이 이성이다. 서구의 근대주의는 이성의 발견으로 부터 촉발되었다. 그 이성의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우는 것이 지성이다. 중요한 것은 펼쳐짐이다. 사방으로 폭넓게 뻗어나가야 한다. 큰 나무처럼 자라나는 그것은 시스템이다. 고립된 개인은 지성의 꽃을 피울 수 없다. 지식의 축적과 사회적 소통 형태로 시스템이 뻗어나가야 꽃 피울 수 있다. 지성은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의 중심에 대학이 있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으로 선전된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게 되었지만. 국민의 상위 5프로만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에는 그랬다. 지성은 인류가 지식을 축적하고 사회와 소통하여 문명을 건설하여 가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기계와 같은 단일 목적의 폐쇄형 시스템이 아니라 개방적 성격의 스스로 진화하는 생명 시스템이라는 데 있다. 기계적 폐쇄적 시스템이라면 훈육된 지식인으로 충분하다. 기계는 입력과 출력이 대응한다. 지식을 주입한 만큼 성과를 토해낸다. 생명 시스템은 다르다. 생명은 증폭한다. 하나가 울면 그 울림과 떨림이 천하에 전파된다. 봄에 새싹이 돋듯이 천하가 일제히 깨어난다. 폭발한다. 분출한다. 혁명한다.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다. 생명 시스템이 진짜다. 기계 시스템은 짝퉁에 불과하다. 생명 시스템에서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체내에서 세포 하나가 인간 유전자 전체를 가지듯이 누구든 한 개인이 신 앞에서 인류의 대표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이야말로 진정한 시스템이며 기계는 시스템이 아니다. 불완전하다. 가짜다. 기계는 불완전한 부품들이 의존적으로 협력한다. 피스톤은 왕복할 뿐이고, 샤프트는 전달할 뿐이고, 바퀴는 구를 뿐이고. 자판은 입력할 뿐이고 모니터는 출력할 뿐이고. 그 경우 부분이 멈추면 전체가 멈춘다. 생명 시스템은 다르다. 완전성이 그 안에 있다. 하나의 세포가 독립된 생명체와 같다. 한 명의 병사가 지휘관처럼 판단한다. 완전한 개인들이 평등하게 소통한다. 그러므로 하나가 고장나도 시스템은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 기계 시스템.. 불완전한 부품들이 전체에 의존한다. 부분이 멈추면 전체가 멈춘다. 사전에 세팅되어 있는 단일 임무를 가진다. 진보하지 않는다. ● 생명 시스템.. 완전한 개인들이 수평적으로 소통한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자유자재로 임무를 변경한다. 진보하고 발전한다. 뻗어나간다. 진리의 빛이라할 이성이 인간 내부에 탑재되어 있다. 그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불어 문명의 시스템을 건설하여 갈 수 있다. 그 시스템은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 소통 시스템이다. 지성인은 이상주의라는 꿈을 가지고 시스템 건설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문제는 지성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가이다. 이 땅에 지성인이 없는 이유는 아무도 그것을 주장하여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찌기 석가가 깨달음을 설파했으나 개인의 구원을 표방함에 불과했다. 대승불교가 사회에 눈 떴으나 위에서 아래로의 보살핌에 불과했다. 문명의 스스로 진보하고 발전하는 성질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선종이 수평적 소통 개념을 제시했으나 역시 진보의 개념이 없었다. 종교의 한계 때문이다. 천장이 있는 집 안에서 나무를 키운다면 어떨까? 그 나무는 방의 천장 높이 이상으로 자랄 수 없다. 분명한 한계가 있다. 모든 종교에는 천장이 있다. 교주가 있고 계율이 있다. 승려가 있고 신도가 있다. 이러한 차별이 울림과 떨림의 수평적 소통을 방해한다. 울림과 떨림의 증폭이 교회의 통제권 밖으로 달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노자가 무위의 도를 설파했으나 그 안에 문명의 진보와 발전이 없었고 공자가 시스템을 조직했으나 역시 기계식 상의하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상주의를 향한 가능성의 모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맹아 단계가 있었다. 조선의 선비 사회가 그렇다. 선비 계급에 한정되고 있으나 그 안에 이상주의가 있었다. 진보와 발전의 기운이 있었다. 오늘날의 산업사회와 모델이 다르지만 나름의 꿈이 있었고 비전이 있었다. 지성인의 모델이 그 안에 있었다. 퇴계, 율곡, 우암이 한때 아성으로 꼽혔고 그 밖에 화담, 남명, 추사, 다산이 말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화담과 추사가 근접해 있었을 뿐이다. 적어도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지성인은 학자여야 한다. 학문이 시스템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스템에 의존하는 인간은 아니다. 천장을 만들기 때문이다. 불교는 석가라는 천장에 갇혀 삭감당했고 조선의 사림은 퇴계라는 천장에 갇혀 낮아졌다. 천장을 두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탈출구는 문화 분야에 있다. 문화야 말로 그 어떤 권위에 의해서도 통제될 수 없는 순수의 영역이다. 서구의 르네상스가 기독교라는 천장을 능히 뚫을 수 있었듯이 말이다. 언제나 문명의 돌파구는 문화에 의해 개척되어 왔다.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면 동시대인들은 그들의 깃들어 사는 집이 좁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장을 높이는 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근대는 예술가가 만들었다. 화담과 추사가 각별한 이유는 문화의 탈출구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이 퇴계의 천장에 갇히지 않았던 이유는 타고난 열정 때문이다. 화담이 노장사상에 관심을 두었고 평민과 사귄 것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이다. 추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다양한 계급, 다양한 사상,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시스템을 존중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천장에 갇히지 않고 독립적인 소통의 코어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이 된 것이다. 그 종이 울릴 때 천하는 비로소 깨어난다. 만물은 싹이 트고 꽃을 피운다. 맥박이 뛰고 피가 흐른다. 만인이 각자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가 주어지는 것이다. 시스템의 완전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상주의를 품어야 한다.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어떤 목적이나 의도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악기를 울려서 소리를 내는 연주자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흔히 동량(棟梁)이라는 표현을 쓴다. 최악이다. 목수가 집을 짓듯이 사람이라는 재목 곧 인재를 깎고 다듬어 나라를 위하여 쓸만한 도구로 기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 시스템에 맞지 않다. 그 동량이라는 것은 우두커니 제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것은 19세기가 필요로 하는 인재일 뿐이다. 후진국의 모범에 불과하다. 연주자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악기라는 것은 손으로 잡으면 소리를 내지 못한다. 민중은 깎고 다듬고 제한하고 끼워맞춰 제 자리를 지키게 해야하는 건축재가 아니다. 손으로 잡지 말고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주면 각자의 다양한 소리를 낸다. 거기서 최고의 음을 끌어내는 것은 지휘자의 능력이다. 동량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끼어 자리나 지킬 뿐이지만 악기는 누구와 손을 맞추느냐에 따라 온갖 화음을 토해낸다. 최고의 음도 나올 수 있고 최악의 음도 나올 수 있다. 민중은 악기와 같아서 곱게 다루어야 한다. 동양정신에 진정한 지성의 모델이 있다. 깨달음의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담론이야말로 인간의 내부에 그 울림소리가 들어있다는 입장이다. 서구문명은 기독교라는 천장에 갇혀서 지성이 질식되었다. 칸트가 진리의 빛이라 할 이성을 주장했고, 헤겔이 진보 시스템 개념을 제시했으며 니체가 그 기독교라는 천장을 철거했다. 그러나 서구는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라는 천장에 제한당하고 있다. 반종교를 표방하는 마르크스의 언설이나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입장 역시 기독교라는 천장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반대해도 역시 기독교 논리로 반대할 뿐이다.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단지 기독교의 원죄 개념을 자본주의 개념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현대인은 모두 자본주의라는 원죄의 굴레를 쓰고 있어서 누구도 그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혁명 세례로도 부족하다.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철학담론은 원죄의 천장과 자본주의 천장 사이에서 ‘네 천장이 더 낮다’는 우기기에 불과하다. 그들에게서 진정한 자유혼을 찾기란 불능이다. 깨달음으로만이 그 천장을 뚫을 수 있다. ● 종교를 끊어야 한다. 담배 끊듯이 확 끊어버려야 한다. 종교의 신앙자들과는 일정한 단계 이상의 수준높은 대화가 불가능하다. 종교인은 말하자면 자발적 노예들이다. 노예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해롭다. ● 자유에 중독되어야 한다. 그대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그대를 규정하는 온갖 사회적 포지션에서 냉큼 벗어나야 한다. 계급, 신분, 성별, 명성 따위에 구애됨이 없어야 한다. 언제라도 고독한 무소속이어야 한다. ● 신의 편, 진리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 진보의 편,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무엇보다 역사의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성의 개념을 얻어야 한다. 현대성을 상실한 낡은 관념은 설 자리가 없다. ● 자기만의 세상을 보는 안목과 논리, 판단기준을 가져야 한다. 예컨대 심미안을 들 수 있다. 미학적 안목을 얻으면 쉽게 세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 최고인 사회야말로 진정한 이상사회다. ●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과학자, 모험가, 예술가, 명상가, 시민운동가, 작가와 교유해야 한다. 같은 직업, 같은 계급, 같은 그룹, 같은 연고를 가진 사람끼리만 모여서 지식의 근친교배를 일삼는다면 최악이다. ● 합리주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큰 강의 줄기에서 지류로 가지를 치듯 인류지식의 총괄이라는 큰 줄기에서 뻗어나가야 한다. 지식의 큰 바다와 연결의 접점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주의다. 종아리가 굵어지도록 자연과 접촉해야 한다. 직관력의 날을 세우는데는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칼같이 갈아서 감성의 날을 세워야 한다. 탈출구는 언제나 바깥에 있고 돌파구는 언제나 창의에 있기 때문이다.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생각을 해야 한다. 일만 편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직관력을 기르고 심미안을 길러야 한다. 가려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그럴 때 세계와 통할 수 있다. www.gujoro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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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진보는 비겁하고 보수는 야비하다’ ‘이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는 식의 환원주의 논법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는 과거 참여정부 때의 딴나라 악플과 마찬가지로 비이성적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구호를 써먹을 수는 있겠지만, 진지하게 그런 착각에 빠져있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희망은 없다. 지금 상황은 교착되어 있다. 그 따위 비겁하고 무책임한, 어리광 가득한 사고방식으로 난국의 타개는 없다. 활로의 개척은 없다. 비전의 제시도, 대안의 강구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도 불가능이다. 그저 뒤에서 구시렁거릴 뿐. 언제까지 그 따위로 살텐가? 투덜이 스머프는 이제 졸업하자. 문명의 본질은 생산력이다. 인류의 모든 전쟁, 모든 마찰, 모든 변동이 거시적으로 보면 생산력 향상 사이클과 일치한다. 문명의 본질은 생산력이며 경제도,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거기에 연동되어 일어난다. 종속변수다. 그러므로 생산력이라는 본질을 논해야한다. 구조론의 관점에서 보면 문명은 거시적으로 보아서 다섯 가지 큰 사이클이 존재한다. 몇 천년 단위의 큰 주기와, 몇 십년 단위의 짧은 주기가 공존하며 이토록 복잡한 역사의 흐름을 연출해낸다. 첫째는 발견시대다. 18세기 지리상의 발견을 예로 들 수 있다. 신대륙을 발견하고, 거기서 금을 발견하고, 전기의 원리를 발견한다. 발견이 가장 큰 생산력의 혁신을 가져온다. 그 다음은 발명시대다. 앞서간 맥스웰과 패러데이가 전기의 원리를 발견하면, 뒤에온 에디슨과 테슬라가 그 전기의 원리를 활용하는 전구와 변압기를 발명하는 식이다. 중요한 것은 이 순서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앞에서 발견해줘야 누가 뒤에서 발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흐름이 있다. 일정한 법칙이 있다. 시대정신이 있고 그 시대의 트렌드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지만, 너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고집을 피울 일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가 시대의 흐름과 맞는지 살펴야 한다. 19세기는 발명의 시대였다. ‘발명될 것은 다 발명되어버려서 이제 더 발명될 것이 없다’는 푸념도 그때 나왔다. 너도나도 발명에 혈안이 되어서 미국에서는 망치로 박는 못 하나만으로 3000가지가 넘는 특허가 나왔을 정도였다. 발명특허 한 두개는 가지고 있어야 신사대접을 받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는 발명이라는 로또에 집착해선 안된다. 시대가 바뀌었다. 발명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물론 지금도 삼성이나 LG에서 신제품 휴대폰이 발명되고 있지만 이건 다른 거다. 소발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20세기에 두각을 보인 일본과 독일의 제조업은 무엇인가? 세 번째 단계는 극대화 단계다. 이 시기에는 기존에 발명되어 있는 것을 어떤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방법으로 생산력을 창출한다. 미국은 거대주의를 숭상하니 우주로 로켓을 보낸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멀리 보낸다. 일본은 작은 것을 숭상하니 작은 워크맨을 만들고, 독일은 장인정신을 숭상하니 금속가공에 골몰한다. 스위스의 정밀공업이나 프랑스의 패션산업이나 다 자기 방식의 어떤 주제가 있고 타이틀이 있다. 각자 자기위치에서 나름대로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중국은 안 되니 인해전술로 밀어붙인다. 20세기는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이미 극한에 도달해 버리면 더 나아갈 수 없다. 독일은 아우토반을 잘 달리는 가장 좋은 차를 만들었고, 일본은 가장 작은 전자제품을 만들었고, 미국은 가장 멀리까지 우주선을 보냈고, 각자 해볼거 다 해봤다.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극점을 찍어버렸다. 끝났다. 네 번째 단계는 구조화의 단계다. 구조화 한다는 것은 밖으로 이미 극점을 찍어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으니 아래를 쥐어짜는 것이다. 대기업은 중견기업을 쥐어짜고 중견기업은 하청업체를 쥐어짠다. 이런 구조가 피라미드처럼 계속 내려간다. 다단계 사업과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쥐어짜기가 생각보다 많은 생산력의 향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예상 외로 더 많이 착취할 수 있다. 이게 문제다. 착취가 불가능해야 착취를 안할텐데 그게 가능하니까 문제다. 이런 유머가 있다. 손으로 오렌지 짜기 대회에서 한 거인이 오렌지를 쥐어 짜서 한 그릇의 즙을 너끈히 받아내었다. 그런데 체구가 마른 한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그 쥐어짜고 남은 바싹 마른 찌꺼기를 가지고 조막만한 손으로 쥐어짜는데 다시 한 그릇의 즙이 너끈히 나왔다. 그가 챔피언이 되었다. 그 사람의 직업은 세무서에서 일하는 세리였다고 한다. 그런 식이다. 농부가 500평을 경작하면 다섯 식구를 먹일 수 있다. 대기업은 하청기업에 요구한다. 혼자서 5000평을 경작하라. 대신 경운기를 지원하겠다. 이번에는 한술 더 뜬다. 혼자 5만평을 경작하라. 대신 트랙터를 지원하겠다. 아니 50만평을 경작하라 대신 종자를 뿌릴 비행기를 지원하겠다. 이런 식으로 터무니없이 착취를 늘려나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만큼 많은 농부는 땅을 잃고 고향에서 쫓겨난다. 무엇인가? 신자유주의는 지구촌 인류의 생산력이 구조론의 다섯 단계 중 네번째 단계에 도달한 결과로 나타나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생산력의 혁신을 가져올 발견도 발명도 극대화도 없으니 구조화로 몰리는 것이다. 구조화로 인한 생산력의 향상이 분명히 있다. 무엇인가? 신자유주의가 나타난 것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효율성이 일정부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오렌지 짜기 시합에서 그 짜고남은 찌꺼기에서 즙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생산력 향상에 실패한 미국의 거대자본이, 발견과 발명, 극대화에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 손쉬운 방법인 구조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지구촌 전체를 대상으로 착취피라미드를 가동한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고약하다. 필자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 약은 수가 아니라 인간의 무능에서 나온 실패의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사악함이 아니라 무능의 결과다. 그리고 역사는 필연적으로 이 단계로 가게 되어 있다. 왜? 더 이상 발견, 발명이 나오지 않으니까. 이미 경작할 토지는 바닥났고 인구는 늘대로 늘었다. 신대륙은 없다. 신발명은 없다. 인류는 더 나아갈 곳이 없다. 최근에 발명된 신통한 물건은 세그웨이 뿐이다. 그거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대박 아니었다. 이런 식이다. 19세기처럼 자고 나면 새로운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에디슨 혼자 다 만들어내는 그런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인정해야 한다.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구촌 인류는 이만치 실패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불행한 것은 악한 마음을 품고 신자유주의로 나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이 문명이 더 이상 갈 길이 없으니 신자유주의라는 벼랑끝에 몰려서 우왕좌왕하게 된 결과다. 그 벼랑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무리가 길을 간다. 앞에 큰 강이 길을 가로막는다. 강을 건널 배가 없으니 강변에 몰려서 와글와글 떠들어댄다. ‘이게 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강 때문이다’고 외치며 화를 낸다. 그런 다고 답이 나오겠는가? 오직 생산력 향상이라는 돌파구로만이 그 강을 건널 수 있다. 냉전시대에는 차라리 좋았다. 소련이라는 큰 적이 있으니 함부로 밑에 있는 식구를 쥐어짜지 못한다. 그러나 냉전해소로 적이 없어지니 마음놓고 쥐어짠다. 미국은 일본을 짜고, 일본은 한국을 짜고, 한국은 중국을 쥐어짠다. 무엇인가? 이 비극적인 구조화의 시대에 그 착취피라미드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향한 폭주를 멈추게 하려면 가장 위에 있는 대기업을 말려야 한다. 재벌이 하청기업을 착취하니, 그 하청기업이 다시 재하청기업을 착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맨 앞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먹이사슬의 정점에 누가 있는가? 그 자가 가장 나쁘다. 미국이다. 미국이 모든 재앙의 주범이다. 그렇다면 말려도 미국을 말려야 한다. 그런데 미국을 갈구기는 엄두가 나지 않고, 미국에게 쥐어짜임을 당해서 손에 쥔 사탕마저 빼앗긴, 만만한 김대중과 노무현을 나무란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보수는 야비하고 진보는 비겁하다고. ### 대안은 있다. 희망은 있다.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다. 난국의 타개는 가능하다. 꿈꾸기를 멈추어선 안 된다. 그러나 우리 과학정신으로 무장하고 합리주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비겁하고 무책임한, 어리광 가득한 ‘이게 다 누구 때문이야’라는 주술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문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덤태기 씌우기 환원주의 논법 버려야 한다.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구조화로 인하여 착취가 일어났으므로 구조적 접근으로 풀어야 한다. 또다른 생산력의 혁신을 끌어내야 한다. 18세기 발견의 시대, 19세기 발명의 시대, 20세기 극대화의 시대, 21세기 구조화의 시대, 그리고 다음에 올 또다른 시대가 있다. 다른 시대에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응해야 한다. 구조화의 시대에는 거기에 맞는 구조화된 형태의 최적화된 사회구조가 있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들은 어떤가? 그들이 말하는 혁명은 19세기 발명 아이디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좋은 세상을 ‘발명’하려고 한다. 에디슨이 전구 만들듯이 신통한 물건을 혼자서 뚝닥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발명의 시대는 끝났다고. 지금은 구조화 시대이므로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역사의 필연에서 비롯된 이 문명차원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사회 시스템의 최적화 방법으로 그 압박을 최소화 할 수 있다고.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몰리게 되어 있는 그 압박을 고루 분산시켜낼 수 있다고. 모두가 행복하게는 할 수 없지만 모두가 불행해지지는 않게 할 수 있다고. 선과 악의 논리, 감정을 자극하고 동정심에 호소하는 수법, 구세주를 기다리고 기적을 바라듯이 혁명적인 한 가지 신통한 방법에 골몰하는 태도를 버리는 대신, 인내심을 가지고 끈덕지게 대응하며 조금씩 구조를 개선하며 전 인류가 참여하는 집단지능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과학이고 합리주의다. 왜 포기하는가? 왜 과학을, 합리주의를, 시스템을, 전략을, 최적화를 포기하고 무모하기 단기돌진 하여 역사의 격랑에 치어 희생되려고만 하는가?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노무현이 포기하지 않고 있듯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