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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왜 분열하는가?

공공의 적이 뜰때 진보는 통합된다



진보가 분열하고 있다. 민노당 분열이 그 서막이 된다. 손학규가 대통령과 그 주변을 무능한 진보라고 꾸짖으며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을 보니 자신을 유능한 진보로 포장하고 싶은 모양이다. 별 놈의 진보가 다 있구나 싶다. 통합당 초선그룹은 또 끝없이 반성만 반복하는 낮아지는 진보인지, 생활 속의 진보인지 뭔지 하여간 얄궂은 진보를 새로 표방했다고 한다. 유시민은 또 나름대로 무슨 독특한 진보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참 다양하게도 나타난다. 이런 진보, 저런 진보 다들 하나씩 표방하고 나온다. 온갖 진보가 다 나온다. 오색깃발 들고 나온다. 떼지어 나온다. 폼 잡고 나온다. 거들먹거리며 나온다. 유유상종으로 나온다. 구석구석 나온다. 씩씩하게도 나온다. 보기도 좋다. 나는 이들이 모두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 쓸데없는 짓거리다. 이런 진보 저런 진보 구분하는 금긋기 놀이가 취미생활은 될 것이다. 웃기셔들. 그냥 진보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진보가 분열된 것은 전부 김대중, 노무현 때문이다. 두 분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진보라는 양반들은 천상 야당이나 할 팔자인데, 야당에 맞도록 체질이 세팅되어 있었는데, 팔자에 없는 여당을 하려니까 온갖 분열상이 다 나타나주는 것이다. 민노당도 그렇다. 딱 시민단체나 할 수준인데, 점조직이나 꾸려갈 수준인데 노무현 덕에 지갑 주워 주제넘게도 무려 10석이나 가진 어엿한 정당을 하려니까 NL이니 PD니 하며 알차게 분열하는 것이다.


이 산산이 흩어진 진보들을 이명박이 원위치 시켜줄 것으로 믿는다. 공공의 적이 뜨면 진보는 저절로 통합된다. 진보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 필자는 진보의 분열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까짓거 분열해라. 천갈래 만갈래로 분열해라. 공공의 적 이명박이 큰싸움판 벌여서 모두 재집결 시켜 줄 테니까. 지금이 좋은 시절이다. 분열해도 좋은 시절이다. 이명박 쓴맛을 봐야 정신 차리고 통합되지.


국민이 진보를 통합시킨다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손잡고 탄핵 강행하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 있다. 별놈의 보수가 다 이쪽에 숨어있었더라는 거다. 그들은 본질이 수구인데 김대중 한 사람 때문에 억지춘양 격으로 진보편에 짱박혀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또 새로운 김대중, 새로운 노무현이 나타나서 온갖 진보를 통일할 것이고 그 때는 박상천류 보수들도 수구본색 감추고 진보깃발 뒤에 살그머니 숨어들 것이다. 진보/보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느냐가 중요하다. 국민이 이쪽이나 저쪽을 가리키면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진보로 혹은 보수로 위장하여 양지로 숨어들다가 역사의 물꼬가 한번 돌려져서 국민이 그 가리키는 방향을 바꾸면 기어이 본색을 드러내며 천갈래 만갈래로 분열하는 것이다.


전두환 시절 이야기를 해보자. 그때 그시절 빛나리아저씨 인기 있었다. 야간통금 해제하니 조선백성 살판났다. 과외폐지 두발자유화에 교복자율화가 덤이니 학생들도 살판났다. 국풍81로 여의도에서 잔치 베풀어 주시고 깡패소탕 삼청교육대로 깨끗하게 청소해 주시니 지화자 좋을시고 쾌지나 살판났다. 컬러방송 베푸시고 3S정책 내리시니 오죽아니 좋겠는가. 우민정책 좋을시고 스포츠, 섹스, 스크린으로 놀아보세. 전두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야당이 고분고분해졌다. 민한당 말이다.


민한당은 왜 어리석게도 어용정당의 길을 걸었을까? 오늘날 이명박 인기가 하늘을 찌르듯, 그때 그시절 전두환 인기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전두환식 깡패개혁(?)이 오늘날 이명박 인수위 꼴값시리즈 뺨칠 정도로 참으로 눈부셨기 때문이다. 하루걸러 하나씩 새로운 개혁안이 터져 나왔다. 언론통폐합으로 썩은 언론 청소하시고, 법란 일으켜 땡중스님 청소하시고, 잔치잔치 벌였네. 아시안게임에 이어 올림픽 유치하시고 광주? 광주는 또 선택적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이 있으니 문제없다. 그건 잊어버리고.


국민이 전두환을 지지하니까 야당이 협조한 것이다. 야당이 국정협조를 얼마나 잘했던지 85년 212총선 앞두고 국회의원 전원에게 훈장을 포상할 것을 상신했다고 한다. 그때 그시절 기억하시는가? 그런데 왜 민한당이 212 총선때는 개박살이 났을까? 전두환 따르던 국민이 갑자기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왜?


왜 국민들은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을까? 오늘날 이명박 인기도 그때 그시절 전두환 인기에 지나지 않는다. 손학규가 이명박 인기에 놀래서 독하게 싸우지 않고 한나라당 이중대 노릇을 하는 것은 그때 그시절 민한당이 전두환 인기에 놀라서 투쟁은 하지 않고 훈장받을뻔 한 것과 일맥상통이다.


85년 즈음 전두환 일당의 개혁드라이브(?)도 바닥이 났다. 국민들이 하룻밤 사이에 태도를 바꾸었다. 이제부터 딱 3년이다. 3년이면 이명박 인기도 백담사시절 전두환 인기 만큼은 된다. 연예인들이 다투어 성대모사한 전두환의 명언 ‘왜 나만 갖고 그래?’ 이명박 버전 나와주신다. ‘왜 삽만 갖고 그래?’ 지금 이명박 흉내내는 손학규 일당은 민한당 신세가 된다. 국민의 마음은 한 순간에 변한다.


지금 진보의 분열상은 놀부집안 박타듯이 하루걸러 하나씩 뭔가를 내놓는 이명박 서슬에 놀라서 그런 것이고, 3년이 지나 이명박 진영에서 더 이상 보수개혁의 아이디어가 나타나지 않을 때, 영어몰입식교육인지 뭔지 하는 별놈의 보수개혁안들이 단지 세상을 시끄럽게 할 뿐이라는 것을 모든 국민이 깨달을때, 그놈의 대운하라는 것이 성능 후진 국산자동차 밉다고 속도 빠른 신품 미제경운기로 갈아타는 노릇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아차릴 때, 이명박 추락하고 자동으로 진보는 통합된다. 212총선 직후 양김씨가 뜨자 제 세력이 저절로 신민당으로 통합되었듯이. 그때 그시절 민한당 공중분해 되었듯이.


역사가 가는 길이 진보다


진보는 앞으로 가는 것인데 길이 없어서 못 가고 있다. 길을 찾아야 할 터인데 길은 찾지 않고 ‘원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뻔뻔하게 거짓말을 반복한다. 조금씩 신뢰를 쌓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원큐로 해결될 것이라며 ‘한방’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한방의 찬스를 잡기 위해 거짓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NL이니 PD니 다 한 방에 대한 환상이다. 평등 하나로 혹은 자주 하나로 다 되는 드라마는 20세기 소식이고 우리의 21세기는 그렇게 녹록치 않다.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꾸준하게 신뢰를 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의 권위가 추락한 이유는 먹히지 않는 거짓말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무수한 예측들이 다 빗나갔기 때문이다. 구소련의 몰락과 이에 따른 냉전의 해체 그리고 EU의 통합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FTA체결 등 신자유주의 시장환경의 대두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변화된 현실 앞에서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경제의 대두를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환경의 변화가 그 한방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한방의 논리는 환경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무려 200년 전에 프로그래밍 된 것인데 환경이 변해서 진보가 새로운 버전으로 말을 갈아타야 한다면 한방이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예견하지 못한 것이다.  


진보는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려면 길을 뚫어야 한다. 길은 에너지로 뚫을 수 있다. 에너지는 과학, 산업, 공동체, 지식, 그리고 개인의 각성에서 얻어진다. 진보가 과학과 산업을 부정하면 안 된다. 산업을 지탱하는 시장경제 시스템를 부정하면 안 된다. 모든 변혁의 동력원이 되는 밑바닥의 에너지를 부정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의 존립을 정당화 하는 사회의 온갖 모순들도 그 시장경제 시스템 안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환자가 있으니 의사도 살고 시장이 있으니 진보도 산다. 만병통치약은 없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되어도 환자는 끝없이 나타나고 그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인 진보 자신도 끝없이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자도 없고 의사도 없는, 사회가 완벽하게 진보해 버려서 더 이상 진보할 필요가 없는 꿈의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1만년 후에도 의사는 진료를 열심히 해야 하고 1억년 후에도 진보는 오늘과 같은 고민을 안고 끝없는 모색을 해야 한다.  


진보의 본질은 이상주의다. 각자는 각자의 이상주의를 가져야 한다. 마르크스 혹은 모택동이나 혹은 북유럽이 표준을 세웠다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의 무수히 많은 종류의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그 무수한 이상주의들 속에서 합의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합의해 가야 한다. 그것은 끝까지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경우에도 인간 개개인의 가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 진정한 진보다.


진보의 주체는 역사다. 다만 역사의 진보가 진보다. 역사가 존재하는 한 진보의 모색은 계속된다. 한방의 혁명으로 진보를 완성시키고 역사가 스톱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마르크스 버전이든 모택동 버전이든 한 개인의 꿈에 불과하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쳐도, 그 위치에서 옹호해야 할 인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주의자의 삶의 형태가 중요하다. 어떻게 살것인가가 진보의 근원적인 해답이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은 날로 통합된다. 냉전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FTA는 EU통합에 대한 대응이다. 당장 유로가 달러를 이기는 것이 유럽통합과 무관치 않다. 중국은 2천년 전에 진시황이 이미 거국적으로 FTA를 해버렸다. 중국은 국가 자체가 FTA고 유럽통합이다. 진보가 유럽통합은 찬성하면서 FTA를 반대한다면 사기다. 일본은 FTA를 할 나라가 주변에 없으니 고립되어 경제가 망하고 있다. 이건 정치를 떠나, 이념을 떠나 진보/보수를 떠나 과학의 영역이고 산업의 영역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은 구소련을 굴복시키고 세계를 자국시장에 편입시켜 레이건과 클린턴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지금 유럽은 EU라는 이름의 FTA로 미국을 제쳤다. 결국 시장을 먹는 자가 이기는 거다. 1라운드는 미국이 구소련 몰락으로 시장을 먹었고 2라운드는 유럽이 이에 대한 반격으로 EU를 만들어 시장을 먹은데 비해, 고립된 일본은 시장이 없어 한때 GDP 2위에서 지금은 18위로 추락했다.


무엇인가? 세상은 위에서 끝없이 통합되고 있다. 2천년전 진시황의 통일부터 작금의 EU통합까지 위로는 계속 통합되고 있다. 전 세계가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통합된다. 이동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18세기 원양항해의 시작, 철도와 자동차의 등장, 비행기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지구는 자꾸 좁아지고 있다. 이건 찬성/반대의 차원이 아니다. 진보/보수의 차원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그것이 역사다. 진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옹호함은 무엇인가? 이동수단의 발명이 세계를 좁게 만들고 있다. 세계를 하나의 시스템 아래 통합시키고 있다. 그럴수록 인간들은 획일화 된다. 모든 인간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같은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같은 팝송을 부르고, 같은 꿈을 꾸며 잠든다. 왜? 헐리우드 영화의 공습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공습 때문이다. 햄버그와 피자의 공습 때문이다. 이명박의 영어몰입교육 때문이다. 이에 대항하는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인간 하나하나를 낱낱이 쪼개놓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다움을 얻을 때, 우르르 몰려다니는 나약한 군중에서 벗어나 개인이 각성하고 강해질 때, 프랑스 여성이 그러하듯이 모든 사람이 남과 다른 디자인의 옷을 입으려 노력할 때, 합쳐지는 만큼 다시 쪼개진다.


진시황의 통합에 의해, EU통합에 의해, FTA에 의해, 그리고 비행기와, 자동차와, 인터넷과, 햄버그와, 콜라와, 스타벅스와, 헐리우드영화의 무차별 공습에 의해 우리가 획일화 된다면, 그만큼 개인이 강해져서, 개인이 다양화 되어서 그 합쳐지는 속도 만큼 도로 쪼개놓는 것이 우리의 대응인 것이다. 진보의 저항인 것이다. 문명의 이기가 고속도로로, 인터넷으로, 시장통합으로, 신자유주의로, 세상을 하나의 울타리로 합쳐놓는 만큼 개인의 각성이 세상을 다시 잘게 쪼개놓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한때는 야후가 빅브라더 였는데 지금은 네이버가 빅브라더다. 빅브라더는 날로 탄생한다. 그만큼 우리는 동호회로 쪼개고, 블로그로 숨고, UCC로 쪼개지고, 웹 2.0으로 착실하게 분열해서, 각자의 해방구를 가지고, 각자의 소도를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고수하며 비밀스런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빅브라더의 감시망을 피하고 그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위로 크게 시장이 합쳐지는 만큼 밑으로는 악착같이 쪼개놓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임무다. 생텍쥐뻬리가 말한 어린왕자의 소행성을 생각할 일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기다. 개인과 개인의 간격을 하늘과 땅만큼 벌려놓기다.


이는 역사의 영원한 두 수레바퀴다. 헤겔이 말한 정과 반의 대응이다. 한쪽에서는 계속 합치고 한쪽에서는 계속 쪼갠다. 위로 시스템이 합쳐지는 만큼 같은 비례로 밑으로 쪼갠다. 악착같이 쪼개놓는다. 개인주의는 날로 강화된다. 빅브라더의 통제권을 벗어나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가져야 한다. 문화의 전선, 예술의 전선, 문학의 전선, 교육의 전선, 패션의 전선에서 그 싸움 벌여나가야 한다. 이문열 같은 얼간이는 패대기치고 이외수처럼 이미 그 개인의 왕국을 건설해 놓은 선각자는 옹호하고.


한국모델의 완성이 진정한 진보다


마찬가지로 진보는 개별 문명의, 개별 국가의, 개별 민족의, 개별 사회의, 개별 공동체의, 개별 동호회의,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 개개인의 값어치를 올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 각각의 값어치는 각자의 모델의 완성도에서 얻어진다. 한 개인의 값어치는 한 개인의 각성에서 얻어지고, 한 사회의 값어치는 그 사회가 일구어놓은 문화적 양식의 완성도에서 얻어진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양식을 완성할 때, 마침내 한국모델을 완성할 때 비로소 가치를 수출할 수 있게 된다. 가치를 수출할 수 있어야 진짜다. 한국모델은 이거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선진국이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서구나 특정 외국모델을 추종하는 것이 수구꼴통이다. 말로는 진보를 표방하지만 본질은 북유럽을 추종하는 좌파 수구꼴통 많다. 남의 정신을 수입하여 뇌이식수술 하려는 자는 어떻게든 결과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해치게 된다. 개인의 가치를 훼손하게 된다. 그들은 우리편이 아니다. 친일파나 친미파나 친유럽파나 본질은 같다.


합의될 수 있는 부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진보의 궁극에 이상주의가 있다. 그 이상주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요임금 순임금 때가 이상이라고 말해서 안 된다. 그것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낡은 이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이상이 다르고 모택동의 이상이 다르고 어제의 이상이 다르고 오늘의 이상이 다르고 내일의 이상이 또 달라야 한다. 날로 새로와지는 것, 그렇게 부단히 다름을 일구어 가는 것이 바로 진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상이 다르고 미국의 이상이 달라야 한다. 한국모델이 다르고 미국모델이 달라야 한다.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고 우기는 폭력이 파시즘이다. 달라야만 우리의 가치를 수출할 수 있다. 진보가 명목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획일화된 가치-그것도 외국에서 수입된 철지난-를 주장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이상주의는 합의될 수 없다. 한국의 이상과 미국의 이상, 스웨덴의 이상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같지 않은데 각자의 존재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같다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이유가 없다. 다르므로 각자의 존재가 정당화 되는 것이다. 한 개인의 가치는 개인이 꾸는 꿈의 가치에서 얻어지고 그 꿈은 자기 안에서 퍼펙트하게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의 이상과 나의 이상이 절대로 다르기 때문에 너와 내가 각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실천에 있어서는 합의될 수 있다. 그리고 정치는 다만 합의될 수 있는 부분을 합의할 뿐이다. 너의 이상과 나의 이상은 절대로 다르지만 공공의 적을 퇴치하는 부분에서는 합의될 수가 있다. 각자의 꾸는 꿈은 달라도, 그 다름을 존중하면서 행동통일은 가능하다.  


참된 이상은 예술가가 골방에서 혼자 만든다. 경제인들은 그 이상향으로 갈 수 있는 에너지의 토대를 제공할 뿐이고, 정치인들은 그 실천과정에서 조금씩 합의해 갈 뿐이다. 정치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해서 안 된다. 정치는 경제를 일정수준 이상 지배할 수 없고, 경제가 효율의 이름으로 문화를 왜곡해서도 안 된다. 최종적으로는 문화적 양식의 완성도가 남는다. 그것은 각자 제 위치에서 제각기 완성된 거룩한 개인들 사이에서의 소통의 양식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이상주의를 품을 때 그 모든 것은 가능하다.





진보진영의 재편을 바라보며

‘가짜 자주와 가짜 평등의 동반퇴장을 환영한다’


“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있었던가?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아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1960년 2.28 대구학생의거 선언문 일부다. 이승만 독재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여 대구가 먼저 일어났고 마산이 그 뒤를 이었다. 서울은 김주열님의 죽음이 알려진 후에 일어났다.


왜 대구와 마산인가? 과거 대구, 마산은 야도로 불렸다. 해방전후 중요한 노동자 파업은 섬유공장이 있는 대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곳에 강한 변혁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건 사회학 이전에 물리학이다. 에너지가 뭉쳐있는 곳을 때리면 터진다. 뇌관을 건드린 셈으로 된다. 폭발한다. 분출한다. 실제로 그곳에 밑바닥의 에너지가 고여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촌야도라는 조어가 널리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70년대다. 그 시점에 도시빈민이 변혁의 주체였다. 서울을 야도로 만든 것은 농촌에서 상경하여 달동네에 정착한 빈민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여촌여도가 되어 있다. 도시빈민이 목청을 높이던 시절은 지나갔고 바야흐로 강남부유층, 일산중산층, 분당아파트 거주자들이 목청을 높이는 시대가 되었다. 가난뱅이도 참고 있는데 부자가 울다니 세상이 바뀌긴 바뀐 것이다.


농가부채 탕감이 단골 대선공약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김영삼도 농기계 반값 공약을 내놓았다. 그때는 농민이 중심이었다. 농민의 불만이 태풍의 핵이었다. 불과 십여년 전이다. 한국인의 1/3이 농민이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을 이끈 세력은 대학생이었다. 왜 대학생인가? 대학생 숫자는 80년대에 급증했다. 절대 숫자가 증가한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대학을 다니는 나라에서 대부분의 젊은이가 대학진학을 하는 나라로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인가? 실제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 힘이 어디서 작동하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해방직후 대부분의 공장들은 북한에 있었다. 남한에서 그나마 공단이 돌아가던 곳이 대구였기 때문에 대구가 먼저 일어난 것이다.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빈민이 되었기 때문에 70년대와 80년대의 여촌야도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슈퍼 301조 폭탄을 맞아 농촌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발언권이 높아졌고 그 결과로 여촌야도 현상이 역전되어 일부 농촌지역의 지지를 받아 김대중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97년 이후 여촌야도라는 조어는 언론 지면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2002년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주역은 인터넷이었다. 변화는 끝없이 일어났고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는 현장에서 그 변화의 중심을 지배한 자가 항상 역사의 큰 줄기를 주도했던 것이다.


50~60년대의 대구파업≫70~80년대의 도시빈민≫80년대의 학생시위≫90년대 농민의 분노≫2002년의 인터넷 혁명으로 변혁의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이동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화는 또 일어난다. 이명박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는다.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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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모르는 지식인이 골방에서 어설프게 소설 쓴 사회학의 관점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물질의 토대를 근거로, 두 눈 부릅뜨고 변화의 현장을 지켜보며 물리학의 관점에서 논해야 바르다. 물질에서 에너지가 나오고, 그 에너지에서 변혁의 토대가 얻어지는 것이다. 역사이래 항상 그래왔다.


역사에서 항상 반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참여자의 절대숫자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PC통신 초창기에는 소수의 똑똑한 사람이 네티즌이었다. 국민의 절대 다수는 네티즌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분위기 좋았다. 악플러는 거의 없었다.


네티즌들은 먼저 와서 동호회를 건설하고 공동체의 문화를 일구어 놓은 선배 네티즌을 존중했다. 내부에 질서가 있었다. 이심전심 의사결정구조가 확립되어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초딩이 대세를 점하고 있다. 물이 흐려졌다.


아무개님 하며 ‘님’자를 붙이는 호칭도 90년대 초 소수의 선도적 네티즌들이 만들어 전파한 것이다. 이제 ‘님’ 호칭은 인터넷 동호회를 넘어 사회 일반에 두루 쓰인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지금 한국은 씨파와 님파로 나누어졌다. 2002년의 승리가 님파의 약진에 놀란 씨파가 숨죽이며 ‘저 사람들이 무슨 묘기를 보여줄란가’하고 관망한 결과라면 2007년의 패배는 ‘지켜봤는데 별볼일 없네’하고 씨파가 반격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밑바닥에서 부터 바뀌고 있다. 님파가 지난 5년간 뿌려놓은 씨앗이 자라나는 5년후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하나의 동그라미 안에서 참여자의 숫자가 증가할수록 초기에 리더십을 발휘하던 명망가들의 권위는 추락하고, 보다 대중화된 노선이 대두된다. 그러한 세력교체 과정에서 리더십 자체가 소멸해버리는 수가 있다.


학생운동도 그렇다. 초창기는 소수 엘리트 명망가 중심이었다. 대중화 되어 참여자 숫자가 늘어나면서 지도부의 선도적 역할이 붕괴된다. 명망가도 없고, 엘리트도 없고, 선배도 없고, 지도부도 없는 난맥상이 일어난다. 그것이 반동의 원인이다. 지금 한총련은 거의 붕괴되고 있다.


전교조도 그렇다. 2000년 전후로 온건파가 지도부를 구성하고 세불리기를 시도하자 많은 교사들이 전교조에 가입해서 외부적으로 힘은 커졌는데 내부적으로 의사결정은 오히려 어렵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우향우 되어서 전교조의 존재가 무의미해졌다. 몸집은 커졌지만 대사회적인 발언권은 도리어 축소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혼자가는 열 걸음이 아니라 함께가는 한 걸음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뒷걸음질 친 셈이다. 이를 단순히 역사의 후퇴로 보고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싸움걸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 위치에서의 진보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대중화 되었다면 다시 소수 명망가 위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지금 민노당 PD파의 돌출행동은 명망가 중심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있을까?


대중화 되었을 때는 대중을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노선이 나와주어야 한다. 절대숫자가 늘어났을 때는 다수의 의사를 결집할 수 있는 혁신된 의사결정구조가 나와주어야 한다. 그러한 의사결정구조의 건설에 게을렀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서태지 때문에 가요시장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확실히 서태지 이후 가요시장이 10대 위주로 옮겨가서 전체적으로 몰락했지만 그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되어온 역사발전의 변증법이다. 언제라도 정반합의 법칙은 적용된다.


누구 탓이나 하며 주저앉아서 안 된다.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가요인들 모두의 책임이다. 시장의 파이가 커지면 당연히 질이 떨어진다. 하향평준화 된다. 끊임없는 의사결정 구조의 혁신으로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운동이 70년대의 엘리트 위주에서 80년대의 보다 대중화된 노선으로 바꾸면서 농활운동, 그림패, 탈춤패, 노래패 등이 활약한 사실을 기억하라. 몸집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늘어난 몸집에 맞게 내부에서 부단히 의사소통 구조를 혁신해왔기 때문에 전두환 독재를 끝장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NL의 가세로 민노당의 몸집이 커졌다. 커진 몸집에 맞게 내부적인 의사결정구조의 혁신이 일어나 주어야 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민중과의 소통 노력이 증대되어야 했다.


민노당은 어떠했는가? 내부적으로 혁신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도 소통하지 않았다. 내적인 의사결정구조의 실패 그리고 외적인 의사소통구조의 실패다. 그리하여 그들은 붕괴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질을 지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발뺌하며 네탓하기에 주력할 뿐이다. 왜 망하는지도 모르고 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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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변하고 있다. 공룡이 멸종하고 포유류가 득세한다. 그렇다면 구조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내적인 의사결정구조와 외적인 의사소통구조를 부단히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더 이상 농민의 힘을 빌어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농민의 숫자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대학생의 역할도 감소되고 있다. 대학생 숫자가 급증하던 80년대는 선배의 권위가 후배를 이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선배의 권위가 소멸하고 있다. 이는 자연계의 물리현상이므로 이명박류 신권위주의로 되돌아간다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2002년은 네티즌 숫자가 급증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먼저 기반을 닦은 선도적 네티즌들의 발언권이 커져서 노사모의 역할이 가능했다. 지금은 초딩대란이 일어나 완전히 물을 버려 놓았다. 구성원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지 않으면 선도적 대학생, 선도적 네티즌의 역할은 소멸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선도적 지식인의 역할도 소멸하고 있다. 진보가 이러한 본질을 외면해서 안 된다.


홍세화, 진중권 등의 돌출행동은 과거 한때 먹히는듯 했던 선도적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함에 불과하다. ‘그때 그시절이 좋았지’ 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과거회상에 불과하다. 조선시대라면 양반이 집권해도 나라가 태평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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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은 ‘노조+주사교+지식수입상’의 3자결합이라 하겠다. 노교학 연대다. 내부에 다양한 세력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내부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건설하는데 실패했다.


그 책임을 소수 주사교 신도들의 머리나쁜 탓으로 돌리고 있다. NL파 다수가 주사교 신도는 아닐 것이다. 명망가 PD들이 머리나쁜 NL들과 함께 머리 맞대고 의사결정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넌더리를 내는 것에 불과하다.


노조의 힘은 약화되었다. 노조가입자 수가 급증할 때 선도적 노동자의 역할이 주목되었듯이 지금은 가입자 수가 정체된 때문이다. 홍세화, 진중권, 박노자류 지식수입상의 선도적 역할도 감소되었다. 그들이 번역해주는 외국책을 읽기 보다는 배낭메고 직접 해외여행 해서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명망가의 선도적 역할은 구성원 숫자가 급증할 때, 현장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때 물리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며, 그 시점이 지나면 쇠퇴한다. 민노당의 노교학 연대의 모델은 이제 그 수명을 다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의미있는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변두리에서 추임새나 넣고 양념이나 쳐주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에너지가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학이 아니라 물리학이다. 배터리 고갈에다 기름이 엔꼬다.


여촌야도 옛말이고 야촌여도 옛말이다. 대학생도 옛말이고 노동자도 옛말이다. 농민도 옛말이고 도시빈민 옛말이다. 지식인도 옛말이고 네티즌도 옛말이다.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새로움을 낳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민노당 딜레마는 자주파가 있어야 대중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평등파에 속하는) 명망가 논객이 있어야 자신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선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주파를 배제하면 민노당의 장기인 시위, 집회에 아무도 안 온다. 홍세화, 진중권이 둘이서 1인시위는 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PD출신이 대부분인 명망가 논객 배제하면 방송에 나갈 사람이 없어서 홍보가 안 된다.


무엇인가? 민노당의 딜레마를 역으로 접근하면 문제해결의 정답이 찾아지는 것이다. 진보를 재건하려면 머리와 몸통이 있어야 한다. 머리는 논객이고 몸통은 대중이다. 머리는 PD고 몸통은 NL이다. 문제는 그 머리와 몸통이 가짜라는 데 있다.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붕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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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자주와 가짜 평등의 대결이다. 자주라는 개념은 민족 이전에 개인에게서 나와야 한다. 철저한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사기다. 그것은 파시즘의 변종일 뿐이다.


자주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 자기세계를 가져야 한다. 나의 하늘이 있어야 하고 나의 땅이 있어야 한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한 나의 마지노선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내 안에 이상주의를 품어야 한다.


그 이상주의는 철저하게 나다움에 초점을 맞춘 나만의 이상주의라야 한다. 나의 이상주의와 너의 이상주의가 공동의 적 앞에서 전술적 행동통일을 꾀할 뿐 절대로 나의 본질을 양보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이 없이, 그러한 자기세계 없이, 줏대도 없이, 정체성 없이, 자기다움이 없이, 민족이나 국가를 들먹이는 자가 있다면 사기다. 나가 없는데 어찌 무수한 나들의 모임인 민족이 있겠는가? 철저한 개인주의에 근거를 두고 그 개인의 연장선상에서 국가와 민족을 말해야 진짜다. 강한 개인이 아니면 안 된다.


그 나라, 그 사회의 자주의 수준은 그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개인주의의 수준의 평균값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자주가 옳다. 철저한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민족운운, 자주운운은 사기다. 그것은 파시즘의 변종이다.


그래서 민노당 자주는 가짜 자주다. 가짜라서 문제일 뿐 진보가 절대로 자주를 버려서는 안 된다. 진보는 외국에서 수입해 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낳아낸 진보가 아니면 안 된다. 진짜가 아니라서 안 된다.


PD가 평등을 말하지만 실로 외국에 유학한 선도적 지식인의 헤게모니에 불과하다. 민노당 평등은 가짜 평등이다. 비정규직의 울분 주장한다고 다 평등은 아니다. 진짜는 대외적인 의사소통 구조의 합리화다. 이것이 본질이다.


의사소통 안 되는 평등은 가짜 평등이다. 진정성에 기반한 민중과의 이심전심 소통이 비정규직 문제보다 더 근원의 문제다. 그런데 홍세화, 진중권들이 어디 의사소통이 되는 자들인가? 이심전심이 되는 자들인가?


민중은 정치가의 진정성을 읽고 이심전심을 하는데, 진정성이 없으니 이심전심이 안 되고, 이심전심이 안 되니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학적인 논리로 우겨대고 그럴수록 민중과의 거리는 멀어질 뿐이다.


소통이 안 되므로 그들의 평등은 가짜다. 대중이 그들의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언해서 극소수 먹물들이 살롱에서 수다떠는 코드가 맞아졌을 뿐 대중의 눈높이가 상승한 것은 전혀 아니다.


진정한 평등은 소통의 평등이다. 대중과의 수평적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 차별이다. 그들은 진정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다. 맡바닥 세계를 겪어보지 않은 그들에게는 대중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방송에 출연하여 대중을 모욕하는 발언을 일삼아 한나라당에 백만표를 안겨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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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재건되어야 한다. 민노당의 난맥상을 되짚어 보면 그 안에 정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적으로는 합리적 의사결정구조의 건설, 외적으로는 수평적 의사소통구조의 건설이 이 시대 진보의 정답이다.


의사결정구조는 반드시 자주의 노선이어야 하고 그 자주는 민족나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서 출발하는 진짜 자주여야 한다. 북한 추종하는 가짜 자주 버리고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낳아내는 자주여야 한다.


의사소통구조는 평등의 노선이어야 하고, 그 평등은 분배의 평등 이전에 의사소통의 평등, 눈높이의 평등이어야 한다. 허풍떠는 지식 수입상들은 일단 배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언제라도 구조의 혁신에 정답이 있다.


민노당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성공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빈 터에 스스로 깃발을 꽂고 새로 설계도를 그리고, 기초를 놓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경쟁하여 이겨보여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2002년에 이겨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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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룹의 사상”

‘생존할 것인가 성취할 것인가?’


미운오리새끼가 못생겼다며 오리새끼들로부터 따돌림받는 이유는 백조의 어린 병아리가 생존을 위하여 잿빛 보호색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 자라서는 본래의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게 된다.


인간에게 동기부여는 두 가지 뿐이다. 생존동기와 성취동기가 그것이다.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은 두려움과 욕망이라는 보호색을 가진다. 성취하기 위해서 인간은 철학과 이념과 사상을 가진다.


생존을 위해서는 사상이 필요하지 않다. 사상은 공유하는 것인데 가족도 친구도 생존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취를 위해서는 사상이 필요하다. 진정한 성취는 자기완성과 자기실현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철학을 가진다는 것은 미운오리새끼가 본래의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다 자란 어미 백조가 보호색을 벗어버리고 눈부신 흰 깃털을 얻듯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이제는 사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이 생존에 집착하는 유아단계를 벗어나 어른이 되었다면 말이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어른대접을 받으려면 말이다. 2만불시대에 걸맞는 품격을 유지하려면 말이다. 수준 좀 높이자는 말이다.


의식이 족하면 예절을 안다고 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졸업하고 사상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한 마리 어린 백조가 화려한 비상을 꿈꿀 때가 되었다.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에 집착하는 조중동류 정신적 거지들은 계속 그렇게 살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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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이다. 유전인자가 그렇다. 누구 밑에서 종속되고 지배될 수 있는 인간들이 아니다. 천성이 그렇다. 그들은 유교주의 문화의 억압을 피해 인터넷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그들이 노무현을 발견한 것이다. 노무현이 위대해서 그들이 노무현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대표할 노무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노무현은 그들을 위해서라도 위대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 천상 민족주의자들이며 타고난 개인주의자들이다. 진보주의와 이상주의, 강한 독립성과 자부심, 진취적인 정신들로 특징될 수 있는 그들은 친일파와 친미파를 혐오하고 가부장적인 기성세대의 관습에도 저항한다.


그들이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기존의 알려진 어떤 철학도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인터넷에서 해방구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노무현의 사상이라 해서 노무현이 서재에서 혼자 사색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백범사상 역시 김구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가 일생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의 생각과 체험이 김구의 사상 속에 조금씩 녹아있다.


노무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브랜드 인지도를 활용하여 대표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희망이 과연 무엇이었느냐가 중요하다. 이심전심으로 합의된 우리들의 상식이 무엇이었느냐를 밝히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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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은 누군가에 의해 작위적으로 설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상의 토대는 공기처럼 물처럼 본래 존재한다. 흙 속의 보석처럼 우리 주변에 숨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올곧게 찾아내느냐가 중요하다.


노무현의 사상은 정치인 노무현의 개인적 체험과 그의 추종자그룹의 사회적 특성과,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성과, 21세기 이 시대에 시대정신의 요청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림 하나 그려내는 것이다.


그리스의 사상은 그리스의 도시국가 특성이 만들어낸 것이다. 중국의 사상은 황토지대의 지정학적 특성이 만들어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지정학적 특성과 한국인의 공유된 체험이 한국의 사상을 만들어낸다.


봄이 되어 꽃이 피듯이, 마른 섶이 불씨를 만나 큰 들불로 타오르듯이 여러 조건이 맞아져야 한다. 한국동란으로 처음 국제사회에 그 존재를 알린 한국이 이제는 잿빛 보호색을 벗고 백조의 진짜 모습을 알려줄 때가 되었다.


그것은 5천년 한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이거다' 하고 보여주는 것이며, 60억 인류의 행진이 한반도라는 정거장을 만나서 한 장의 기념사진을 남긴다면 어떤 포즈로 어떤 구도를 잡아서 거기서 어떤 그림이 얻어지느냐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서구의 그들이 한국인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드라마 초기에 마초 가부장 진(대니얼 대 킴)이 선(김윤진)에게 했던 한심한 행동은 대다수 한국인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잿빛 보호색을 띤 미운오리새끼가 오리떼들에게 보여진 모습이다. 식민지와 625를 겪은 한국의 기성세대가 서구인들에게 비친 인상이다. ‘츄잉껌기브미’ 하고 양키들에게 엉기던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추한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르다. 우리에게는 날개가 있다. 비상할 수 있다. 생존동기에 지배되는 단계를 극복하고 성취동기를 따라 움직이는 단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로스트의 대니얼 대 킴이 외국인들 앞에서 행하는 비굴한 행동은 결코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국제사회에 그들 오리떼들의 착각을 당당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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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무엇이 다른가? 그는 세계를 발견했다. 눈을 뜬 것이다. 무엇인가? 상위 단계의 질서를 발견한 것이다. 로마 안에 이미 기성질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질서의 정점에 원로원이 있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세계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들에게는 오직 로마가 존재할 뿐이며 로마 바깥은 되도록 건드리지 말아야 할 야만인들의 영역이었다. 로마 밖으로 진출함은 공연히 벌집을 건드려 화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오직 로마가 정통이고 로마 아닌 것은 모두 이단이며 쳐다보지도 말아야 하고 관심을 가지지도 말아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달랐다. 그들은 로마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세계를 사유했다.


모든 사상은 세계와의 대면이다.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평가하고 적응할 것이냐다. 세계는 곧 하나의 질서이다. 한국이 고립된 동북아의 주변부 질서에서 세계의 존재를 발견하고 중심부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민노당의 태도는 로마 원로원의 태도와 비슷하다. 그들은 이미 완성된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 질서는 지식인을 위주로 한 강단의 질서다. 혹은 노조의 질서이거나 서구의 사민주의 질서다. 그것을 사회 일반에 이식하면 그만이다.


한나라당의 태도는 로마시민권을 따고 싶어서 안달났던 게르만족의 태도와 비슷하다. 스스로 질서의 중심이 될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로마가 은전을 베풀어 시민권이라도 나눠주기를 바라며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다.


세가지 태도가 있다. 개혁을 거부하는 원로원이 될 것인가, 물리력에 굴복하는 게르만족이 될 것인가, 스스로 개혁하는 카이사르가 될 것인가? 우리가 스스로 위대해지고자 한다면 그 안에서 선택은 자명하다.


● 원로원 민노당 - 강단의 기성질서를 사회일반에 이식하려 한다.
● 게르만족 한나라당 - 세계의 기성질서에 순응하며 그 속에 편입되고자 한다.
● 네티즌 노무현그룹 - 우리 안에 세계를 건설하고자 한다.


고립되어 우리끼리 오순도순 산다면 사상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관습과 전통을 따르면 그만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세계를 만났고 바야흐로 세계 앞에서 우리의 대응방식을 결정해야 하므로 사상이 필요한 것이다.


사상이란 어느 지점에 각을 세우느냐는 것이며, 우리 시선의 끝을 어디에 두느냐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우리는 변방에서 소수민족의 특색을 살려 구색이나 맞춰주며 조용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일본처럼 침략하여 제패하기를 꾀할 것인가 아니면 담장 쌓고 은둔하며 세계의 한 귀퉁이에서 구색맞추기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길을 갈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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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스인은 자유로운가? 그리스가 산악국가이기 때문이다. 산으로 막혔기 때문에 작은 도시국가를 이루어 중앙의 통제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므로 그들은 남의 사생활에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는다.


왜 그리스인은 진취적인가? 아테네가 그렇듯이 그리스가 해양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산으로 막히고 동시에 바다로 열렸다. 그들은 산악에 고립되어 은둔하지 않고 바다로 나아가 세계를 사유했다. 진취적인 사고를 가졌던 것이다.


오늘날 서구는 과거의 중국처럼 하나의 거대한 대륙국가가 되어버렸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개척시대의 진취적인 기상은 사라지고 없다. 도시구경을 해본 적이 없는 시골노인처럼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버렸다.


유럽은 본래 작은 나라들의 집합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은 EU로 통합되어 점차 페르시아가 되어가고 있다. 해양국가의 색채가 엷어지고 있다. 과거에 그들이 경멸했던 중국을 닮아가고 있다.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사생활에 간섭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유럽에서 살려면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은 복잡한 공존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서구의 사민주의가 한국인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우리들은 어떠한가? 인터넷은 바다다. 우리는 그 바다를 항해한다. 동시에 인터넷은 산악이다. 골짜기마다 아기자기한 사이트가 숨어 있다. 네티즌이 그리스적인 특성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로마는 세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패권을 추구했다. 그리스도 세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공존을 추구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이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은 그들의 지정학적 특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 내부에 산이 있다. 산악국가 그리스처럼 산이 있다. 유교주의 산에서 진지함을 배우고, 선종불교 산에서 달관한 이의 미학적 고결함을 배우고, 도교주의 산에서 여유로움을 배우고, 기독교의 산에서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이런 특성은 다른 나라에 없다. 한국에만 있다. 우리는 다르면서 공존할 수 있다. 세계 앞에서 그러한 모범을 보일 수 있다. 그것으로 양식의 완성을 끌어낼 때 세계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가치를 수출할 수 있다. 그래야 진짜다.


우리 안에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세계의 축소판이었던 고대 그리스가 그랬듯이. 지배하려고 말고, 배척하려고도 말고, 굴종하려고도 말고, 대등하게 맞서며 한편으로 공명하고 감응해야 한다. 우리의 모범으로 그들을 감화시켜야 한다.


세계에 인정받겠다는 한국이 아니라 한국 안에서 세계를 재발견해야 한다. 완전하면 통한다. 모든 완전한 것에는 보편성이 있다. 먼저 우리 스스로 완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완성형이 60억 인류의 완성형의 축소판이 될 수 있다.


모든 사상은 질서의 사상이며 그 질서는 세계와의 대면에서 얻어진다. 그 질서가 물리력 위주의 단순한 질서가 아니라 문화적 양식의 완성, 삶의 스타일의 완성, 한국다움의 완성에서 얻어지는 가치우선의 질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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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내각의 면면을 보라! 부패하기가 패망직전의 월남정부와 다르지 않다. 이래서는 영이 서지를 않는다. 부시정권 철수되면 바로 사이공 함락이다. 그러므로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상이 없다는 것은 정신이 없다는 것이고 매력이 없다는 것이고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가치를 수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존경받지 못하는 한국은 한국이 아니다.


상품의 거래가 가능한 것은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므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사회에서 집단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은 합의된 가치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판단되므로 의사결정을 끌어낼 수 있다.


사상의 부재는 가치기준의 붕괴로 나타난다. 원칙의 실종과 상식의 부재로 나타난다. 상식이 상식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명박현상으로 지금 확인되고 있다. 내부에서 의견일치를 못하게 된다. 집단의 의사결정에 실패하게 된다.


가치의 붕괴가 우리를 허탈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기어이 젊은이의 기를 꺾어놓고 만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다. 앞으로 5년 내내 ‘이산이 아닌게벼’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허비되는 국력이 얼마이겠는가?


특정인의 도그마를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다. 붕괴된 가치판단의 시장을 새롭게 건설하자는 것이다. 말해야 한다. 한국인 당신들은 누구인가를 말해야 한다. 잿빛 보호색의 미운오리새끼인지 아니면 빛나는 한 마리 백조인지 지금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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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화두

대략 생각해 보고.. 두서없이 끄적끄적


노무현이 뜨니까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뜨고.. 인터넷이 뜨니까 또 소통이라는 단어가 뜨더라. 이명박이 앙시앙레짐을 부활시키고 있으니 개혁그룹의 자유주의 경향과 이명박류 썩은 실용주의를 구분하기 위해 ‘가치’라는 단어가 뜨고.. 요즘 노무현의 인기가 다시 올라간다 하니까 흩어졌던 노무현그룹이 다시 뭉치면서 구심점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사상’이라는 단어가 뜬다.


‘노무현 따라하기’가 유행할 때였다. 그런 좋은 시절이 있었다.(정동영, 손학규 그 같잖은 것들 지금은 이명박 따라하기에 열심이지만) 정동영이 카메라 불러놓고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치운다. 쇼다. 손학규는 한술 더떠 민생투어라는 이름으로 삽질대장정을 시작한다. 그런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기 위해 진정성이라는 말이 그 시점에 소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또 웹 2.0이니 시민주권운동이니 개인주의니 하고 논의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노무현이 화두를 던진 것이다.


글 모두에 이런 말을 줏어섬기는 것은.. 그냥 생각나는데로 자판을 두들겨 대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그 시대의 격랑과 맞서면서..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간다는.. 수순대로 간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하여간 진정성≫소통≫가치≫사상으로 전개되는 개념의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할 일이다. 노무현과 그의 시민주권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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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다. 그게 심각해서 병이다. 어느 정도로 고질인가 하면 사람이 셋 이상 모인 곳에는 아주 가지를 않는다. 몰려다니기 잘 하는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억지 미소짓기 싫으니까.


인터넷 덕분에 나와 같은 군중혐오, 조직혐오, 집단혐오, 패거리혐오의 개인주의자들이 살 판이 났다. 그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개인주의의 득세가 시대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또 자유주의자이고 진보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이며 시장주의자(!)다.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자이고 세계주의자이기도 하다. (민족-세계 이 부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민족 혹은 세계와 다른 것으로 설명이 필요하다.)


패권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저항적 민족주의다. 오늘날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반도의 반 식민지적 현실과 일제식민지 피지배 경험 및 분단상황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민족주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그 민족주의가 아니다. 민족-국가 운운하면서 깃발들고 떼로 몰려다니는 인간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인터넷 리플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외국인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쓰레기들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문제는.. 외국인혐오, 여성부혐오, 지역주의 조장의 그 병이 쉽게 낳을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직시해야 한다는데 있다.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피식민지의 콤플렉스를 벗어던질 자부심이 필요하고.. 그래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저항적 의미에서의 민족주의를 일컫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없으므로.. 민족주의라는 단어를 빌려 쓰는 것이다.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단어를 만들고 개념을 정의하고 컨셉을 잡아주는 것이 지성의 역할이고 철학자의 역할인데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그런 일을 해낼 한 명의 스승이 없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나의 민족주의는 세계주의와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로 나아가기를 원하지만 나의 세계지향은 조중동의 막장 세계화주의와 다르다. 한국의 반식민지적 상황과 분단현실의 극복이 없는 조중동식 세계화주의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 뻔하다.


세계로 나아가되 빈 손으로 나아가면서 서구의 가치 (인류의 보편가치로 알려져 있지만 알고보면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에 기반한 특수가치이기 십상인 유목민 모델)를 학습하고 모방하고 추종하는 조중동식 세계화주의가 아니라, 민노당식 신사대주의가 아니라.. 먼저 우리의 가치를 찾아서 그것을 우리 안에서 완성하고.. 기어이 한국모델을 완성하고 그 한국적 가치의 주인으로서 서구와 대등한 위치에서 세계로 나아가자는 견해다.


가치를 수출하지 못한다면 결코 존경받지 못한다. 존경받지 못한다면 결코 대등해질 수 없다. 들러리 역할이나 할 뿐이다.


완성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자기 포지션을 확보하지 못하고는 어디를 가도 들러리 신세다. 우리 세계로 가야하지만 남들이 가니까 묻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포지션을 들고 가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이러한 견해는 한국의 역사적 체험을 반영한 것이다. 예컨대 일본 지식인의 과거 역사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현실도피 수단으로서의 코스모폴리탄입네 하는 사이비스러운 태도와도 구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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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시장, 민족과 세계를 동시에 추구하는 나의 견해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헛갈린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좌파와 우파의 주장이 뒤섞여 있어서 모순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보기 때문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해한다면 요즘 노무현그룹이 주장하고 있는 시민주권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임을 알게 될 것이다.


평면의 버전 1.0으로 보면 모순되어 보이지만 입체의 버전 2.0을 넘어 밀도가 작용하는 장(場)으로서의 버전 3.0의 관점으로 보면 다른 지평이 보일 것이다.


개인주의, 이상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에 대해서는 그동안 충분히 말했고 여기서는 시장주의에 대해서 대략 말하고자 한다.


나는 철저한 시장주의자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시장은 아담 스미스의 시장 1.0이 아니다. 케인즈의 시장 2.0도 아니다. 이건 다른 거다. 조중동이 말하는 시장만능주의는 아담 스미스의 시장 1.0에 불과하다. 낡은 버전이다.


수요와 공급이 시장의 전부라고 믿는다면 유치하다. 나는 국가도, 정부도, 가계도, 시민사회도 시장의 중요한 주체라고 생각한다. 기업활동만이 시장의 전부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정말이지 초딩다운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무엇이 시장인가? 시장은 시골의 5일장이 아니고, 남대문시장도 아니고, 명동의 백화점들도 아니고, 인터넷쇼핑몰도 아니고, 가리봉동 오거리의 인력시장도 아니고, 증권시장도 아니다. 시장은 그 모든 것이면서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다.


시장의 근본은 자연에 있다. 그것은 생태계의 시장이다. 시장원리는 본질에서 자연법칙이다. 그것은 검증된 진리다. 물리학과 수학에 토대를 둔다. 누구도 시장원리를 본질에서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이냐다. 조중동은 그것을 협소하게 해석한다. 그들은 말로는 시장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광고를 주는 대기업의 주도권을 의미한다.


대기업이야 말로 시장의 방해자다. 그들의 독점횡포는 시장기능을 마비시킨다. 보이지 않는 손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시장은 이상 속에나 있을 뿐 현실에는 없다. 시장을 교란하는 방해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자율에 맡기라는 말은 시장의 파괴자인 재벌, 언론, 투기꾼, 탈세범들에게 맡겨두라는 말과 같다.


조선시대에도 시장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하는 자들은 있었다. 그들은 산적이었다. 시장이 없으면 통행이 없고, 통행이 없으면 보부상을 등쳐먹는 산적도 굶주리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조중동이 하는 짓이 이와 같다. 시장자율은 시장방해의 자유, 시장에서 삥뜯기의 자유이기 십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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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들도 가만 놔두면 더 이상 해킹할 것이 없어져서 저절로 사라지고.. 도둑놈도 가만 놔두면 더 이상 훔칠 것이 없어져서 저절로 사라지고.. 침략해 오는 적들도 가만 놔두면 더 이상 침략할 데가 없어서 저절로 사라지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시장은 적극 관리되어야 한다. 문제는 시장을 관리할 정도로 우리가 현명하냐일 뿐이다. 한국에 그린스펀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시장원리가 작동하는 시점도 있다. 93년 무렵 PC통신 초창기에 네티즌 숫자는 40만 안밖이었다. 인터넷이 등장하자 100만 200만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3백만, 6백만, 1200만, 2400만으로 증가했다. 그때가 좋았다. 그때는 해커들도 귀여웠다. 그때는 정부의 개입이 역효과를 내었다. 네티즌이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문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시장의 팽창이 정지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초딩대란에 알바대란이 일어났다. 이제는 관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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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형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수요와 공급, 공격과 수비가 마주치는 경쟁과 대결의 현장에서 1이 2를 통제하는 구조가 있다. 거기에 밸런스가 있다. 밸런스의 축과 날개가 있다. 그것이 시장이다. 시장원리는 밸런스의 원리다. 밸런스의 원리는 1이 2를 통제함으로서 1의 잉여를 성립시켜 효율을 낳는 원리다.


마호멧은 ‘내가 일생동안 돼지가 새끼를 치는 것은 봤어도 돈이 새끼를 치는 것은 못봤다’며 자본주의를 금지시켜 버렸다. 그래서 요즘도 아랍의 은행들은 이자를 받지 않고 대신 뒤로 뇌물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평형계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돈이 새끼를 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시장은 혼자서 수요와 공급의 양쪽을 동시에 통제하므로 잉여를 성립시킨다. 효율을 낳는다. 시장참여자 모두가 이익을 보게 된다.


시장은 어디에 있는가? 장터에 있지 않다. 시장은 정치에도 있고 경제에도 있고 사회에도 있고 자연에도 있다. 우주에 가득차 있다. 1이 2를 통제함으로써 잉여를 성립시키는 즉 밸런스의 원리가 작동하는 평형계가 있는 어디에나 있다.


왜 시장이 중요한가? 아담스미스의 시장 1.0은 평면 위에 있으므로 한 사람이 더 먹으면 다른 한 사람은 그만큼 굶어야 한다. 케인즈의 시장 2.0은 입체 위에 있으므로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도 커진다.(시장은 밸런스다. 친칭 저울이 균형을 잡으려면 이쪽과 저쪽이 같이 커져야 한다)


밀도가 작용하는 시장 3.0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저울의 축이 움직인다면 친칭저울이 한쪽으로 기운다 해도 축을 움직여서 밸런스를 회복시킬 수가 있다. 더 많이 긴밀하게 상대와 맞물린 더 복잡한 구조가 있다.


평면의 시장 1.0이냐, 입체의 시장 2.0이냐, 밀도의 시장 3.0이냐는 상대와 몇 개의 변수로 맞물려 있느냐다. 살짝 걸쳐있느냐 더 많이 걸쳐있느냐다.


타인과는 살짝 걸쳐져 있으므로 내가 이익을 보면 너는 손해를 본다. 2명이 경쟁하는데 내가 승자면 너는 패자다. 그러나 가족이라면 다르다. 아버지가 이익이면 아들도 이익이다. 더 밀접하게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평면적 관계가 아니라 입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에 두 식당이 같은 메뉴로 경쟁하고 있다고 치자. 한쪽이 장사가 잘 되면 다른 쪽은 파리를 날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될 수도 있다. 같은 식당이 여럿 몰려있으면 먹자골목으로 소문이 나서 더 장사가 번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원조집들은 한 골목에 몰려있다. 장충동에는 족발집이 몰려있고 마포에는 주물럭집이 모여 있다. 1.0과 2.0의 차이다.


3.0은 무엇이 다른가?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을 가득 넣으면 더 넣을 수 없을 것이다. 속에 가득찼기 때문이다. 이게 입체의 사고다. 그러나 최홍만이 펌프질을 하면 얼마든지 더 넣을 수 있다. 거의 무한정 들어간다.


오렌지를 짜서 즙을 컵에 따른다면 어떨까? 오렌지의 부피보다 더 많은 즙이 생길 수는 없을 것이다. 최홍만이 그 악력으로 오렌지를 짜도 그렇다. 한계가 있다. 그러나 원자력은 다르다. 짜고 또 짜낼 수 있다. 오렌지를 손으로 짜서 한그릇의 국물을 받아내고 그 찌꺼기를 회수하여 한번 더 짜서 다시 한그릇을 받아낼 수 있다. 우라늄을 다 태우고 그 재를 회수해서 얻은 플로토늄을 다시 태울 수 있다. 그것이 밀도의 세계다. 3차원 입체 위에 4차원의 전혀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면이나 입체를 볼 뿐, 밀도의 세계가 존재함을 깨닫지 못한다. 평면이 상극의 세계라면 입체는 상생의 세계다. 밀도의 장(場)은 순환의 세계다.·


우리는 물질이 딱딱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으므로 더 정밀항해가 필요한 고도의 경제원리가 작동하는 세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린스펀의 금리정책은 시장자율의 세계가 아니다. 시장간섭의 세계다.


그린스펀은 시장자율에 맡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시장을 통제한다. 금리의 느슨함과 조임이 밀도가 작용하는 세계이다. 이는 종래의 시장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돈이 1원이나 2원의 갯수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사람은 돈이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밀도차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돈의 밀도는 금리나 환율의 형태로 존재한다. 상품에도 밀도가 있다.


농산물의 경우 신선도가 밀도다. 공산품의 경우 품질 혹은 브랜드의 형태로 밀도가 존재한다. 밀도가 작용하는 세계에서는 일반적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무시하는 전혀 다른 법칙이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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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밀도는 개개인의 역량으로 존재한다. 노무현 그룹의 시민주권 운동이 과거의 진보와 다른 점은 개인을 앞세우는데 있다. 군중이 아닌 개인이다. 그러므로 개인주의고 자유주의고 이상주의다. 개인에게도 밀도가 있다.


금리가 5프로인 돈과 1프로인 돈은 같은 돈이되 같은 돈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상주의를 품은 인간과 맹탕인 인간은 같은 인간이되 같은 인간이 아니다.


밀도란 무엇인가?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그 전체의 밸런스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밸런스가 이쪽으로 기울면 노무현이 당선되고 저쪽으로 기울면 이명박이 당선된다. 개인의 전투력은 소용없다. 숫자만 많으면 이기는게 선거다. 이에 집단의 조직력만 강조된다. 리더에 대한 충성심만 있으면 된다. 오늘날 좌파들이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는 블로그와 리플이 중요하다. 구성원 개개인의 자질이 중요하다. 물론 아직도 대선은 숫자싸움으로 결판나고 있다. 그러나 5년후, 10년후라도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2002년의 승리는 인터넷에 의해 이루어졌다. 2007년에 인터넷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무엇인가? 이쪽과 저쪽이 팽팽할 때 나비 한 마리가 어디에 내려 앉느냐에 따라 천칭이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질 수 있다. 2002년에 인터넷은 실로 한 마리 나비에 지나지 않았다. 나비 한 마리 덕분에 이겼으니 나비만 모아서 이길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진 것이다.


2012년은 다르다. 2017년도 있다. 2002년에 인터넷은 플러스 알파의 역할이었다. 2007년에 인터넷은 몸통 역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2012년에는 다르다. 인터넷이 몸통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집단지성을 형성하는데 성공한다면.. 금리 1프로의 돈과 금리 5프로의 돈이 같은 돈이되 실로 같은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데 성공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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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의 세계는 각 부분에 저울이 있다. 전체의 밸런스 뿐만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의 밸런스가 있다. 과거의 대중은 미디어에 의해 통제되는 다수였다. 그 경우 오직 숫자만이 유의미하며 숫자를 끌어내는 데는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원된 군중에 불과하다.


시민은 강한 개인이다. 이들은 미디어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이심전심에 의해 움직인다. 명령이나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포지셔닝에 따라 움직인다. 마침 골키퍼가 자리를 비우고 없다면 명령받지 않은 누구라도 즉시 그 자리를 채워주는 식이다.


지금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안에서 극소수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을 역량을 갖출 때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개인의 역량과 수준이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 병사처럼 스스로 무장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 바닥인 채로 신분상승을 위해 싸우는 노예나 혹은 빈손인 채로 전리품을 위해 싸우는 용병이 아니라.. 이미 상승해 있으면서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질이 다르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좌파의 반시장정책도 아니고 수구떼의 시장만능 정책도 아니고.. 적극적 시장관리의 실험이 필요하다. 이 실험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그린스펀을 탄생시켜야 한다. 기존의 수요공급 이론을 무색게 하는 밀도의 장(場)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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