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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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647 vote 0 2018.05.28 (17:08:26)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라


    세상을 물질적 존재가 아닌 에너지적 사건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물질은 고유한 속성이 있고 인간은 그 물질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선택하는 자가 된다. 나쁜 것을 피하고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다가 망한다. 선택을 요구하는 자가 갑이고 선택으로 내몰리는 자는 을이다. 선제대응 해야한다. 먼저 와서 판을 설계해놓고 상대방에게 선택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적 사건이다. 사건은 다르다. 사건은 주최측이 있다. 그들은 선택하지 않는다. 자체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운용하기 나름이다. 나쁜 것도 써먹을 일이 있고 좋은 것도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 사건은 조율되어야 한다. 먼저 에너지원을 장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세상을 권리와 권력으로 바라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주도권을 잡아야 하며 사건의 원인측에 개입해야 한다.


    선택하는 자는 결과측에 대응하는 자다. 이미 늦었다. 좋은 것을 남들이 다 가져간 다음에 찌꺼기를 취하게 된다.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사실 자체로 실패다. 돈을 따려고 하지 말고 하우스를 운영해야 한다. 주최측은 언제나 승리한다. 돈을 빌리는 자는 부도위험이 있고 돈을 빌려주는 자는 떼일 위험이 있지만 수신과 여신 양쪽을 제어하는 은행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 구조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수신과 여신 양쪽을 동시에 장악하고 여신의 리스크는 수신에 떠넘기고 수신의 리스크는 여신에 떠넘기며 자신의 리스크는 제로에 둔다. 이것이 강자의 철학이다. 강자의 철학은 챔피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도전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게임의 주최측이 되는 것이다. 에너지의 원천 공급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가 아니고 보수도 아니며 중도파도 아니고 양쪽을 동시에 통일하는 더 높은 층위에 서는 것이다. 


    진보를 전위에 세우고 보수로 뒤를 받치게 하며 중도로 균형을 잡아 양 방향을 두루 통제하는 것이다. 그 포지션은 천하인의 눈높이다. 무엇보다 천하인의 기개를 가져야 한다. 주최측이 되려면 선수를 쳐야 한다. 먼저 와서 유리한 시스템을 설비해놓고 확률을 기다린다. 불안요소가 있지만 보험에 들어 위험을 헤지하므로 안전하다.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챙기려는 부족민의 채집경제 관습을 버려야 한다. 


    적을 제거하기보다는 적을 제압하여 달고다니면서 통제해야 한다. 피아구분의 벽을 넘어야 한다. 공자의 철학은 강자의 철학이다. 노자의 철학은 약자의 철학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자를 싫어하고 노자를 좋아한다. 약자의 철학은 사실이지 철학이 아니라 처세술에 불과한 것이다. 에너지를 조직하고 운용하는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에너지를 조직하고 운용하는 기술이며 약자의 철학에는 그것이 없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약자의 철학에 끌리는 것일까? 본인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약자로 태어난다. 당연히 자신을 약자로 규정한다. 인간을 규정하는 그릇은 소년기에 형성된다. 소년은 약하다. 그러므로 약자가 된다. 그러다가 수렁에 빠진다.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린다.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악순환의 수렁이다. 사슴으로 태어나도 사자로 자라야 한다. 계속 사슴에 머물러 있겠다면 철학은 필요없다.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수집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조직되는 것이다. 남이 주는 것을 받아먹지 말고 스스로 에너지를 생성해내야 한다. 내 안에서 낳아야 한다. 내 안에 에너지의 자궁을 건설해야 한다. 에너지는 환경과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환경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팀플레이를 해야만 한다. 유비는 떠돌이 한량이었지만 장비와 관우를 만나고 달라졌다.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어야 한다. 환경과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거기서 에너지가 얻어진다. 에너지를 유도하고 운용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보주의다. 아기는 부모가 있어야 에너지를 얻고 소년은 친구가 있어야 에너지를 얻고 청년은 동료가 있어야 에너지를 얻고 인류는 진보가 있어야 에너지를 얻는다. 노인이 보수하는 이유는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외부와 닫아걸고 만나지 않는다.


    만나도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르몬이 나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가서 만나지 않고 내부에서 억지로 호르몬을 짜낼 수는 없다. 열정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타오르는 가슴의 불은 꺼저버렸다. 방어모드로 들어가면 걱정된다거니 우려된다거니 하며 소심해진다. 왜 우리는 진보해야 하는가? 그것이 에너지라는 관성의 힘을 유도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진보는 관성력이며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계속 가는 것이다.


    구조론은 강자의 철학이다. 대승사상과 화엄사상도 강자의 철학이다. 원효의 화쟁과 원융도 강자의 철학이다. 판을 설계하고 판을 짜고 적을 제압하고 상황을 통제한다. 노자의 철학은 소를 키우고 공자의 철학은 소도둑을 죽인다. 약자는 지극정성으로 농사를 짓지만 강자는 황무지를 제거하여 경지면적을 늘린다. 소를 키울 필요가 없다. 소는 알아서 크는 거다. 사람이 할 일은 소를 해치는 늑대를 잡는 것이다.


    약자의 철학은 플러스 철학이다. 무언가 얻으려고 한다. 노력을 투입하고 보상을 기대한다. 강자의 철학은 마이너스 철학이다. 시스템을 건설한 다음 지출을 줄이면 남는게 이익이다. 늑대를 제거하면 양떼가 남는다. 소도둑을 제거하면 소떼가 남는다. 약자는 티끌모아 태산을 기대하지만 강자는 네거리를 차지하고 병목현상을 제거한다. 조폭과 양아치를 제거하면 고객은 저절로 모여든다. 방해자를 제거할 뿐이다.


    이렇듯 크게 지르는 것이 화엄사상이다. 현찰을 취하지 않고 시장의 세력을 키워가는 거다. 빚을 내서라도 시장규모를 키우는 것이 진보주의 경제철학이다. 근검절약하며 알뜰살뜰 챙기다가 망해먹은 것이 조선왕조의 보수주의 경제학이다. 자연은 환경이 양호할 때 세력전략을 쓰고 환경이 불리할 때 생존전략을 쓴다. 세력전략이 강자의 철학이면 생존전략은 약자의 철학이다. 환경을 장악하는 자가 다 먹는 거다. 


    양자역학 시대이다. 입자가 물질이면 양자는 에너지다. 입자가 질서라면 양자는 무질서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얻는 것이 정답이다. 우리는 질서에서 질서를 찾지만 질서에는 질서가 없다. 엄마는 아기를 낳지만 아기는 아기를 낳지 않는다. 질서에서 질서를 구하는 것은 아기에게서 아기를 구하는 격이라 실패다. 무질서를 질서로 바꿀 때 에너지 효율은 발생하며 에너지는 결따라 가고 인간은 결을 조직할 수 있다.


    무질서를 추구하여 개판치면 망한다. 그들은 히피들이거나 무정부주의자나 정의당이다. 에너지를 장악하지 못하고 반대로 에너지에 휩쓸려서 망한다. 흐르는 물을 이용하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는다. 질서를 추구하여 복종해도 망한다. 그들은 자유한국당 꼴통들이다. 그들은 남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편승하려 할 뿐 자기 질서를 조직하지 못한다. 그들은 남의 버스에 승객으로 만족할 뿐 자가용을 운전하지 못한다.


    무질서를 질서로 바꿔야 한다. 남의 버스에 편승하지 말고 자가용 몰아줘야 한다. 좌파꼴통은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지 못하니 에너지가 없고 보수꼴통은 질서에서 질서를 찾으니 에너지가 있지만 소모되므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진짜는 무한히 순환하는 에너지의 원천을 조직하는 것이다. 샘은 수맥이 연결되므로 물을 퍼올릴수록 더 많은 물이 몰려든다. 물을 퍼내지 않고 아끼면 수맥이 막혀서 마른 우물이 된다.


    원인이냐 결과냐다. 물질은 결과이고 에너지는 원인이다. 결과는 답이 정해져 있고 원인은 미지수다. 물질은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만 에너지는 운용하기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물질의 세계에서는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린다. 에너지의 세계는 선도 되고 악도 된다. 선으로 선을 키우고 악으로 악을 막는다. 에너지는 만남에서 나오고 시스템에서 나오고 팀플레이에서 나오고 구조에서 나오고 환경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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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17: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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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이냐 대응이냐


    공간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망하고 시간에서 긴밀하게 대응하면 흥한다. 맞대응하면 피아간에 게임이 성립하고, 게임에서 이기려면 계통을 만들어야 하고, 계통은 3세대가 전개되어야 하나의 족보가 성립한다. 1세대는 외부에 호소하여 외연을 얻는 단계이며 작용반작용을 쓴다. 외부를 타격해서 반동력을 모으는 방법으로 에너지롤 결집한다. 2세대는 자체 구심점을 만든다. 축을 중심으로 날개를 벌려 주류와 비주류 간에 역할을 나눈다. 3세대는 관성력을 일으켜 역으로 외부에 진출한다. 상대성에서 절대성으로 상승한다. 외부로 뻗어나가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탄탄해진다. 중단없는 전진이 된다. 

    대응에는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호응이 있다. 공간의 대칭에서 각자 역할을 얻고 시간의 호응에서 사건을 완결시켜 복제, 증폭한다. 공간의 대칭은 여당과 야당의 대립처럼 긴밀하게 맞대응하여 토대를 공유하며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에너지가 전달되는 루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간격이 벌어지고 맞물린 톱니를 잃으면 에너지가 전달되지 않아서 역할이 사라진다. 사건은 희미해지고 이야기는 완결되지 않는다. 각본이 허술해져서 떡밥이 회수되지 않고 주제가 부각되지 않는다. 에피소드들 간의 연결성이 떨어진다. 호응한다는 것은 환경의 공격에 맞대응하여 복수한다는 것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선대가 이룬 것을 내가 보상받고 반대로 내가 이룬 것은 후대가 보상받는다. 그렇게 족보를 일으켜 계통을 연결시켜야 한다. 노력하여 보상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계통의 연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복수한다는 것은 곧 통제한다는 것이다. 계통을 연결시켜 관성력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환경의 억압을 극복할 수 있다. 계의 통제가능성이 에너지다. 통제할 수 있으므로 통제하는 것이다. 총이 있으므로 쏘는 것이며 그렇게 총으로 완성한다. 활이 있으므로 쏘는 것이며 그렇게 활로 완성한다. 인간성이 있으므로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인간으로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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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3 (11: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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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http://gujoron.com/xe/99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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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5 (10: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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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보상을 기대하는 것, 결과에 서는 것. 원인에 서면 보상받기가 아니라 복수하기를 원해. 계통의 연결이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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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6: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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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조주의 선언

헷갈리지 말자. 구조론을 서구 구조주의 철학의 일종으로 안다면 곤란하다. 아이디어가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본질에서는 180도로 상반된다. 구조론은 에너지를 조직하고 운용하는데 따른 기술이다. 에너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구조론은 강자의 방법론이다. 반면 서구 구조주의 사조는 약자의 철학이다. 왜냐하면 서구 구조주는 근본 양차 세계대전의 과오에 대한 지식인의 반성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강자들이 전쟁을 일으켜 망쳐놓았다. 약한 지식인들이 수습해야 한다. 그러나 에너지의 세계는 역설이 작용한다. 에너지를 다루는 기술의 부족이 전쟁이라는 재앙을 빚은 것이다. 제대로 에너지를 다룰 줄 아는 기술자가 나서줘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20세기에 인류는 근대문명이라는 자동차를 발명했지만 운전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구조론의 기술로 근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20세기는 혁명의 세기이자 전쟁의 세기다. 제국주의가 전쟁의 원흉이다. 왜 제국주의가 등장했는가? 국가가 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통제할 기술이 없었다. 민주주의가 옳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통제할 세련된 기술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소제국주의 형태로 남아있다. 다른 국가와 민족을 지배하는 제국주의는 사라졌다.



  대신 소수민족을 지배하는 제국주의는 건재하다. 다른 피부색과 언어와 집단을 지배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이름이 그럴듯 할 뿐 느슨한 국가형태이며 덜 만들어진 국가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소제국주의다. 아프리카와 남미에는 교육받지 못한 부족민이 존재한다. 중국과 베트남과 미얀마에는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이들 국가들은 소련의 방법으로 소제국주의를 지향한다. 



  서구 구조주의 철학은 문화상대주의 이름으로 이들을 방치한다. 그리고 재앙은 끝없이 이어졌다.구조론의 정치사상적 입장.

구조론은 진보주의다. 구조론은 상부구조다. 구조론은 강한 개인이다. 구조론은 보편주의다. 

국민은 계통을 원한다. 

변별력과 대칭과 호응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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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20: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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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법칙


    우주의 제 1원리는 '승리의 법칙'이다. 이기는 것이 살아남는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이겼다는 것이다. 진 것들은 모두 녹아 없어졌다. 물질이든 생물이든 사회든 마찬가지다. 모두 에너지 효율성에 지배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상대적인 에너지 효율성을 달성한 것이다. 이 말을 승리지상주의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동료를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환경을 이겨야 이기는 것이다. 이긴다는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능동적으로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공자의 극기복례와 같다. 역시 본능에 굴복하지 않고 이성이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게 하라는 말이다. 어떻게든 환경을 이기고 의사결정권을 행사해야 살아남는다. 


    많은 경우 남을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부구조의 개입에 따른 역설 때문이다. 이기든 지든 계의 밸런스를 깨뜨리면 에너지를 틀어쥐고 있는 상부구조가 개입한다. 거기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극강의 역설이 작용한다. 오늘을 이기면 내일을 진다. 부분을 이기면 전체를 진다. 단기전을 이기면 장기전을 진다. 


    도덕으로 이기면 의리로 진다. 개인의 도덕으로 이겨봤자 집단의 의리에 지게 된다. 언제나 이기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승리가 환경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물리력으로는 사자가 이기고 출산력으로는 사슴이 이긴다. 만약 사슴이 뿔을 예리하게 갈아서 사자를 이긴다면 어떻게 될까? 포식자가 사라지고 생태계의 균형이 깨진다.


    사슴도 죽는다. 거기에 균형이 있다. 균형이 중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1 대 49다. 되도록 균형을 따라가야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조금이라도 이겨야 한다. 어떻게든 에너지 효율성을 달성해야 한다. 작은 것을 져주고 큰 것을 이겨야 한다. 물질도 그러하고 생물도 그러하고 사회도 그러하다. 진보의 전략도 그러해야만 한다. 


    상대를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고 환경을 이겨야 한다. 하부구조에서의 변화가 계의 균형을 깨뜨리게 되면 상부구조가 개입하여 바로잡기 때문이다. 개인의 불균형은 이웃이 바로잡고 이웃의 불균형은 지역이 바로잡고 지역의 불균형은 국가의 개입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국가간 불균형은 인류의 개입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기는게 능사는 아니다. 이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환경과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다. 둘째 매 순간 환경에 대한 에너지 효율성의 달성이다. 고립되면 죽는다. 상호작용이 멈추는 순간에 죽는다. 식물은 광합성을 멈출 때 죽고, 동물은 호흡을 멈출 때 죽고, 물질은 중력이 끊기면 죽고, 사회는 진보를 멈출 때 죽는다. 


    긴밀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동動에 두어야 한다. 관계가 멀어져도 죽고 활동을 멈추어도 죽는다. 계를 균일하게 만드는 에너지의 속성 때문이다. 가만 두면 균일해지므로 조금씩 에너지를 뺏겨서 식어버린다. 절대온도 0도에 수렴된다. 물질은 영하 273.15도에서 완전히 균일해지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힘에서 밀려도 죽는다. 


    물은 지류가 주류에 휩쓸릴 때 죽는다. 에너지는 전체가 부분을 흡수하여 계를 설정하는 성질이 있다. 흡수되면 죽는다. 모든 것의 근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가 있을 뿐이다. 확산과 수렴이다. 확산되면 흩어져 없어지고 수렴되면 모여서 존재한다. 최초상태는 확산상태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존재가 없었다. 


    어떤 계기로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수렴이 시작되었다. 태양도 달도 지구도 우주의 먼지가 수렴된 것이다. 왜 수렴되는가?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에너지 확산상태에서는 충돌한다. 확산하다가 보면 부딪힌다. 비효율적인 구조는 깨지고 보다 효율적인 구조가 살아남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우리는 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믿는다. 아니다. 이유극강이라 했으니 움직이는 것이 살아남고 긴밀한 것이 살아남는다. 잘 반응하는 것이 살아남고 무뚝뚝한 것은 죽는다. 민감한 것이 살아남고 둔감한 것은 죽는다. 활력있는 것은 살아남고 우울한 것은 죽는다. 근사한 것이 살아남고 우둔한 것이 죽는다. 처음에는 균일해야 산다.


    다음에는 우수해야 이기고 그 다음 센 것이 이기고 그 다음 빠른 것이 이기고 최종적으로는 숫자가 많은 것이 이긴다. 우리가 진보를 해도 이기는 진보를 해야 한다. 진짜 진보다. 강한 것이 부러지듯이 도덕적인 것은 부러지고 의리있는 것이 이긴다. 아름다운 것이 살아남는다. 아름답다는 것은 관계가 긴밀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혼자 잘난 것은 죽고 동료와 화합하는 것이 산다. 리스크를 증대시키는 자는 죽고 확률을 올리는 자는 산다. 적을 물리치는 자는 죽고 토대를 공유하는 자가 산다. 환경을 자기편으로 만든 자가 마지막에 살아남는다. 모든 종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이 우위에 서려고 한다. 방법은 집단 안에서 자기 역할을 가지는 것이다.


    생물이라면 학계의 입장은 모든 종은 유전자를 남기려고 한다는 거다. 그런 목적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다른 동물에서 보기 어려운 인간 여성의 폐경은 그러한 목적과 배치된다. 유전자를 남기는게 목적이라면 늙어서 죽기 직전까지 최대한 출산하는게 낫다. 전제가 틀렸다. 살아남으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집단 안에서 역할을 얻을 수 있다면 굳이 자기 유전자를 남겨야 할 이유가 없다. 즉 진화의 근본 전제는 유전자의 전달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우위이며 그것은 어떻게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환경에 대한 우위이다. 생물의 진화든 사회의 진보든 어떤 목적이나 의도와 같은 정신적 요소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바다를 향한 강렬한 열망 때문이 아니고 지구의 중력 때문이다. 유전자를 남기려는 의도는 없고 환경에 대한 우위가 있다. 왜 우위인가? 우위가 아니면 열위이고 열위는 결정권이 없으므로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기는 선택과 지는 선택이 있으며 이기는 결정이 남아서 결과적으로 진화되는 것이다.


    '이긴다'는 표현은 오해될 수 있다. 결정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결정당하면 진다. 계 안에서 토대를 공유하며 모순을 일으켜 에너지의 확산상태에서 서로 충돌했을 때 상대적인 에너지 효율성을 달성한 쪽이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 비효율적인 쪽은 깨져서 흩어지거나 흡수된다. 죽는다는 말이다.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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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16: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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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에 대한 교과서적인 지식은 죄다 잊어라. 그건 철학이 아니다. 이발소 그림은 그림이 아니고, 뽕짝은 음악이 아니고, 주먹구구는 수학이 아니다.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의 전통적인 회화는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으며 서양의학이 등장한 후 한의학이나 민간요법은 더 이상 의학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옛날에는 무당의 주술도 의학의 범주에 포함되었지만 지금은 주술을 의학으로 치지 않는다. 동의보감에는 다양한 치료용 부적이 등장하지만 지금은 한의사도 부적으로 치료하지 않는다. 옛날 철학자들의 여러가지 언설들이 당시에는 철학이었지만 지금은 철학이 아니다. 강신주들은 철학을 전공했다 해도 철학자가 아니다.


    새것이 나오면 낡은 것은 사라진다. 구조론이 새로 등장했다. 구조론에 의해 철학은 평정되었다. 사회에서는 아직도 낡은 개소리가 먹히겠지만 구조론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틀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그런 것이다. 여기서는 받아들여야 하며 받아들이기 싫은 사람은 강퇴된다. 새로운 것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틀린 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틀린 수학은 수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틀린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마구잡이로 지껄여대는 이유는 누구도 맞다 틀렸다 판정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은 검증하고 과학도 증명한다. 수학은 검산해보면 되고 과학은 재현하면 된다. 강력한 검증도구가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도 구조론이라는 강력한 검증도구가 나왔으므로 이제 다양한 개소리는 제껴버릴 때가 되었다. 구조는 사건을 연결하는 단위다. 모두 연결해보면 하나의 통짜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며 거기서 각자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옛날에는 철학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가 해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답은 영혼이다. 원큐에 해결한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모든 철학적 의문은 소용없게 된다. 문제는 한 방에 해결되었다. 교회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헌금을 듬뿍 내면 된다. 그러나 아뿔싸! 영혼에도 급수가 있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노예는 영혼이 오염된 자다. 농노는 영혼이 더럽지만 세탁할 수 있다. 기사는 영혼의 급수가 높다. 승려는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다. 영혼의 급수를 올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 결국 해결된 것은 없다. 칸트의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영혼의 대체재로 이성을 제시한다. 이성은 급수를 올리기가 쉬워서 나름 히트상품이 된다.


    영혼의 급수는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지만 이성은 평민이나 농노라도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면 된다. 선을 실천하고 악을 물리치며 정의를 행하여 집단 안에서 높은 평판을 받으면 이성의 급수가 올라간다. 그러나 쉽지 않다. 집단 안에서 갈고닦은 고상한 이성을 제시하여 높은 평판을 받으려면 기득권들에 고개숙여야 한다.


    니체가 해결책을 제시한다. 집단 안에서 점수를 올리기 어려우므로 자기 안에서 사건의 완결성을 추구하면 된다는 것이 생의 철학이다. 그래봤자 오타쿠가 혼자 노는 것이니 지적 자위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비아냥 댈 수 있다. 실존주의다. 니체가 개인의 가능성을 조명한다면 실존주의는 집단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무엇이 다른가? 종교가 제안하는 영혼의 급수는 태어날 때 결정되고 칸트가 제안하는 이성의 급수는 학창시절에 교육받은 정도에 따라 결정되니 과거의 것이며 니체가 제안한 생의 철학은 현재가 중요하고 실존주의는 미래까지 포함되는 점이 다르다. 영혼> 이성> 생의철학> 실존주의는 시간을 투입해 사건의 규모를 키운다.


    우주적으로 시간을 연장하고 사건을 키우면 어떻게 될까? 대신 나와 상관이 없어진다. 긴밀하지 않다. 공허해진다. 철학은 영혼을 찾는 것이다. 물론 영혼은 없다. 영혼이 있으면 철학할 이유가 없다. 하느님에게 잘보여서 천국 가면 된다. 그게 거짓임을 알기에 철학을 고민하게 된다. 이성이라는 단어가 근사하지만 다를게 없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의 잘난척에 불과하다. 공부 잘 하는 애들에게만 이성이 있다. 범생이들만 칸트를 좋아한다. 영혼은 결국 권력의 다른 표현이다. 권력은 노골적인 단어라서 포장지를 바꿔놓은게 영혼이니 이성이니 하는 거다. 문제는 권력이 개인이 아닌 집단에 있는 점이다. 니체를 따르다 집단을 추종하는 파시즘 된다.


    실존주의 어쩌고 하지만 다분이 집단주의다. 개인을 강조하면 반항적이 되고 반사회적, 반동적, 퇴폐적이 된다. 그들은 사회와 마찰하다가 고립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답은 자명하다. 철학은 인간의 의사결정권이다. 의사결정권은 어디에 있는가? 신이 부여한다. 종교의 영혼설이다. 공부하면 점수 따서 의사결정권 획득한다.


    칸트의 이성설이다. 생각하자. 인간의 존엄성을 신이 줄 리가 없고 학교에서 줄 리도 없잖은가? 운전면허는 면허시험장에서 따지만 인간자격증은 누가 주는가? 공부 잘 하면 인간자격증 주나? 그건 아니잖아. 인간자격증은 사건의 통제가능성에서 주어지며 사건의 통제권이 권력이며 그러므로 권력의지가 철학의 출발점이다.


    실존주의는 필연 사회적 권력으로 나아간다. 노자의 무리와 니체의 무리가 주장하는 권력은 대항권력일 뿐 주도권력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상대가 잘못을 저지를 때 거기에 맞서는 소극적 권력일 뿐 내가 스스로 창의하여 일을 벌일 적극적 권력은 아니다. 진정한 사건의 통제가능성 곧 인간 의사결정권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건의 완전성에서 비롯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원인에서 결과까지 간다. 시작에서 종결까지 간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간다. 질문에서 답변까지 간다. 부름에서 응답까지 간다. 권력은 부름에 호응하는 데서 얻어진다. 내게 권력이 주어지는 이유는 누군가 나를 불러냈기 때문이다. 엄마가 꼬마에게 심부름 시킨다.


    꼬마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역할 안에서 권력을 가진다. 그러나 꼬마의 권력은 심부름을 시킨 엄마에 의해 제한된다. 을의 권력은 갑에 의해 제한된다. 수동의 권력은 능동에 의해 제한된다. 받는 권력은 주는 권력에 의해 제한된다. 노예권력은 주인권력에 의해 제한된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부름에 응답하는 포지션에 서 있다.


    원초적인 인간의 한계다. 이 별이 내가 만든 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뜻하지 않게 불리워진 존재이며 태어날때 부터 성별과 피부색과 계급과 신분이 정해져 있다. 인간의 권력적 한계다. 철학은 부름에 호응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불리워졌는가? 어떻게 응답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이 되는 것인가? 초딩들은 쉽겠다.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심부름은 맞게 하면 되고 공부는 백점 맞으면 되고 취직은 대기업 들어가면 되고 결혼은 좋은 파트너 만나면 된다. 부름에 응답하기 쉽다. 어른은 어렵다. 어른은 불리워지는 자가 아니라 부르는 자 포지션에 서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사는가? 삶은 무엇인가? 맞대응해야 한다.


    내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과 임무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게임이다. 환경과의 게임에서 내가 이겨야 한다. 하필 이 성별로, 하필 이 피부색으로, 하필 이 나라에, 하필 이 지능으로, 하필 이 신체로, 하필 이 시기에 나는 태어나 버렸다. 망한 거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거기서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방법은 대표성의 획득이다. 답은 권력에 있으며 권력은 필연 집단주의를 내포한다. 집단주의는 인간을 친다. 인간이 다친다. 권력이 있으면서도 집단주의로 퇴행하지 않고 인간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광야에 맨 먼저 도착하여 깃발 꽂아놓고 부르는 사람이다.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기승전결로 전개하여 간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오단계로 진행된다. 질의 포지션에 서서 입자를 불러내는 사람은 권력을 가지면서도 권력에 중독되지 않으며 집단으로 나아가면서도 집단에 종속되지 않는다. 정답은 부름에 호응하는 것이며 호응하면 이미 권력없는 을의 포지션이며 호응하면서도 갑이 되는 것은 질에 서서 대표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사건의 선두에 서서 다음 단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3대까지 전개해야 한다. 그래야 상부구조를 건설할 수 있다. 독립적인 에너지의 계통을 확립해야 한다. 사건을 이어갈 제자나 후배나 부하나 자식을 얻고 자식의 자식까지 제자의 제자까지 후배의 후배까지 부하의 부하까지 계통을 이어야 비로소 다음 단계가 보장된다.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은 질 입자 힘까지 전개해야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내면에서 영혼을 발견하려고 하지만 그런거 없고 외부에서 영혼과 동일한 것을 발견해야 하며 그것은 곧 우주이며 그 우주 안에서의 사건이며 그 사건의 전개이며 그 사건의 통제가능성이며 그것은 권력이며 그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광야로 나아가 깃발을 꽂고 불러 일으켜세워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질러야 한다. 적극적으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 거기에 권력이 있다. 그것이 대표성이다. 대표성이 진정한 권력이다. 내가 응답하고 내가 호응하고 내가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노예짓이다. 남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점수딸 이유 없다.


    반대로 문제를 출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악이니 도덕이니 평판이니 하는 것은 타인의 인증을 받으려는 퇴행행동이다. 진정한 것에는 선악이 없고 도덕이 없고 정의가 없고 평판이 없으며 다만 권력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 권력자가 되려고 하면 권력의 노예되는 것이며 권력을 이기려면 공자의 극기복례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권력을 추구하되 권력을 획득하지 말고 타인으로 하여금 권력을 욕망하게 하는 것이다. 권력이 작동하는 시스템을 건설하는 것이다. 본인이 권력을 획득하려 하므로 괴력난신의 삿된 길에 빠지고 만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성권력의 줄 뒤에 가서 서는 방법으로 작은 권력을 획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노예의 길이다. 


    남을 지배하려면 동시에 남에게 복종하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답은 영혼이다. 내 안에 영혼이 있음과 우주에 영혼이 있음은 완전히 동일한 무게에 완전히 동일한 비중을 가진다. 우주의 영혼은 완전성이며 사건의 통제가능성이며 에너지 방향성이며 우주가 하나의 통짜덩어리로 존재함이며 사건의 다음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 구조 안에 인간의 역할과 기여와 포지션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주와의 그리고 진리와의 또 신과의 일대일 만남이 인생의 정답이다. 대표성이다. 진리의 부름에 응답하여 호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우주를 온전히 만났을 때 하나의 영혼이 성립하는 것이다. 찾아야 할 답은 바깥에 있으며 바깥과의 관계설정에 있다.


    인생의 의미는 내 안에서 무언가 견고한 알맹이를 찾아내 타인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우월함을 인증받는게 아니라 내가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 전체와 만나 대표성을 얻는데 있다. 그것이 찾아야 할 우주의 알맹이이며 우주의 영혼이다. 우주의 완전성이다. 신의 모습이다. 우주의 나아가는 방향성이며 지속가능한 생명성이다. 


    계통을 만들고 족보를 만들어 부름에 호응해야 한다. 부름은 환경이다. 당신의 피부색, 당신의 성별, 당신의 국적, 당신의 외모, 당신의 탄생시기가 당신을 불러낸 부름이다. 당신은 그렇게 세상에 의해 불리워졌다. 마땅히 응답해야 한다. 소년의 응답은 쉽다. 심부름 하라는 대로 하고 시험은 백점을 맞으면 좋은 응답이 된다.

 

    청년의 응답은 어렵다. 서울대 합격하고 미인 파트너 맞고 대기업 직장 알아봐야 한다. 그래도 해낼 수 있다. 어른의 응답은 매우 어렵다.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 남의 권력에 줄대지 말고 나의 권력을 이루어야 한다. 내 자식을 낳고 내 패거리를 만들고 내 사업을 일구고 내 제자를 키우고 나의 벌여놓은 일을 승계시켜 가야 한다.


    2대로는 부족하다. 나의 자식은 부모에게 맞서고 나의 제자는 스승에게 맞서고 나의 부하는 상사에게 맞먹으려 하니 제자리에서 맴을 돌게 된다. 머리와 꼬리 사이에 방향성이 없다. 자식의 자식가지 제자의 제자까지 3대를 가는 에너지 흐름을 조직할 때 사건은 지속가능성을 얻는다. 그럴 때 1대에 대표성 권력이 주어진다. 


    세상은 질문과 대답,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앞과 뒤, 머리와 꼬리가 연결되어 완전해지는데 의미가 있다. 개인에서 멈추지 말고 세계로 사회로 나아가 사회의 에너지를 끌어내야 한다. 사람들의 권력의지를 들추어야 한다. 내가 무언가 보상받으려 하지 말고 세상을 격동시켜야 한다. 그럴 때 모든 것은 떳떳하고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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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8 (18: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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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인과 이상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아니다. 악하다. 아니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이다. 선하다는 말은 악하다는 말과 같다. 길다는 말은 짧다는 말과 같고, 넓다는 말은 좁다는 말과 같다. 선은 인간의 사회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선하다. 악은 개인이 적응하고 있는 사회의 범위가 좁다는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선은 절대적으로 성립하고, 사회화된 정도에 따라 혹은 사회에 적응된 정도에 따라 악은 상대적으로 성립한다. 인간 무리 전체는 절대적으로 선하지만 개인이 적응하지 못한 환경에서는 상대적으로 악하다. 인간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가 상대적이다. 동물은 냄새를 공유하는 그룹을 사회로 친다. 자기 오줌냄새가 묻어 있으면 호랑이도 먹잇감을 공격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가 가족과 부족을 넘어 국가와 인류 단위로 확대되고 있다. 더 높은 단위의 사회를 받아들인 즉 교육된 자는 선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악하다. 혹은 선천적으로 사회성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도 있다. 정신병자나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도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 악이 될 수 있다. 정신병자가 병원을 탈출하거나 범죄자가 교도소를 탈출하거나 혹은 무면허인 자가 핸들을 쥐면 곧 악이 된다. 대개 능력이 없는 자가 집단의 리더가 되거나 혹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물리력과 경제력을 지니고 그것을 과시하면 본의 아니게 악을 저지르게 된다. 여기서 결론은 인간은 선하다 악하다고 좁게 단정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이라고 폭넓게 정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다. 큰 것을 작은 자루에 집어넣으려고 하니 헷갈리게 된다. 그런데 동사로 가면 범위가 작다. 기본적으로 세상을 동사로 바라보면 안 된다. 선악이 있는 것은 자로 재기 때문이다. 자를 버리면 선악도 없다. 대신 밸런스가 있다. 선이나 악을 따르지 말고 밸런스를 따라야 한다. 통제가능성을 따라야 한다. 흥부처럼 선해도 망하고 놀부처럼 악해도 망한다. 흥부가 나름 밤일을 꽤 한다지만 요즘이라면 곧바로 이혼을 당하고 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선한 사람이나 혹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균형잡힌 사람, 합리적인 사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 경험치가 쌓인 베테랑이어야 한다. 선하거나 악하다면 아마추어다. 프로의 경지에 이르면 선악이 없다. 선악이 없으므로 진보, 보수도 없고 정의, 불의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그들은 평가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화 되어야 하고 환경에 적응되어야 하며 사회화 된 정도, 적응된 정도에 따라 선악이 판별된다. 그러나 주최측은 평가되지 않는다. 신은 시험에 들지 않는다. 하인은 평가되지만 주인은 평가되지 않는다. 직원은 승진을 앞두고 평가되지만 CEO는 평가되지 않는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선택한다. 선택하는 자는 평가된다. 그러나 선택하게 하는 자는 평가되지 않는다. 진정한 자는 평가되지 않으며 선악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진보 보수도 없으며 그러므로 완전하다. 눈 길을 처음 가는 자는 평가되지 않는다. 두 번째 가는 사람이 앞사람을 발자국을 잘 밟고 갔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하든 악하든 실패다. 선이든 악이든, 진보든 보수든, 정의든 불의든, 옳든 그르든 좋지 않다. 추구해야 할 삶의 정수는 이상주의에 있다. 이상주의는 모든 것을 넘어서 있다. 이상주의는 서로 떨어져 있는 둘을 만나게 한다. 정상에 오른 자가 만날 수 있다. 무르익어야 피어나는 법이다. 선과 악은 무르익었는가 그러지 못한가를 판정하는 것이다. 정상에 이르지 못한 자를 두고 기슭에 머무르고 있는지 제법 언저리에 도달하고 있는지를 구분한다. 정상에 올랐다면 또다른 정상을 연결한다. 만인이 큰 길을 함께 가지만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처음 연결하는 사람은 하나다. 이상주의는 그 하나의 진정한 만남을 끌어내는 것이다. 만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이 서로 다른 둘을 연결한다. 그리고 에너지는 폭발한다. 그 한 명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자는 찾지 못할 것이며 그 만 사람을 품는 자가 마침내 해낼 것이다. 선악을 버리고 진보, 보수를 버리고 정의, 불의를 버리고, 옳고 그름을 버리고 기슭을 벗어나 정상에 도달하여 또다른 정상을 연결할 일이다. 이상주의는 그곳에 있다. 밸런스를 품고 균형감각을 품고 합리주의를 품고 통제가능성을 얻은 자가 둘을 연결하여 에너지를 소통시킨다. 이상을 품은 자는 정상에 이르러 초인이 되고 초인을 찾는 자는 기슭에 머무르며 노예가 된다. 초인超人은 초인招人이기도 하다. 초인은 한계를 넘고 장벽을 넘고 국경을 넘어 다른 세계로 그대를 초대한다. 모세가 그런 사람이다. 신세계에 먼저 도착하여 동료를 부르는 사람이다. 부름에 호응할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인은 한 명의 초인을 낳는 자궁을 이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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