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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기자의 현장속으로>노무현후보 부산유세 동행취재기 2002년 12월 09일 (월) 13:56

"유세 현장 한번 가보실래요?” 기자의 신분으로 현재 가장 핫이슈가 되고 있는 현장으로 투입되 는 것처럼 영예롭고 행복한 일은 없다. 유세(遊說)란 본시 춘추(春秋) 고전시대의 사(士)의 역할에서 유 래된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 유세의 대상은 열국의 제후(諸侯) 였다. 그러나 지금 유세의 대상은 일반 백성(百姓)이다. 제후가 될 사람이 자기가 다스릴 민중에게 유세를 하는 것, 이것이 민주 라는 정치행태의 매우 중요한 프로세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김해공항에 내린 것은 6일 오후 2시쯤이었다. “아무래도예, 나이먹은 사람은 이회창 지지고예, 젊은 사람은예 노무현하고 이회창으로 갈라져 있지예.” “그럼 부산은 이회창 우세군요. 왜 그렇게 자기 고향사람을 박대합니까?” “사람보고 찍는 게 아니구예, 당보고 찍는다 이 말씀이지예.” 정치부 김성훈 기자의 핸드폰 지시에 따라 부리나케 자갈치시장 으로 달려가는 택시안에서 내뱉어지는 기사의 일성은 부산민심의 현황을 정확히 전달해주고 있었다.

언제나 시장은 나를 흥분케 만든다. 왁자지끌한 소리, 부산한 움 직임, 싱그러운 비린내, 하역인부의 구성진 가락…. “노후보 어디로 갔습니까?” 유세장을 몰라 묻는 나의 질문에 생선 파는 아줌마가 별 관심을 쏟아주지 않는다. 저기저기 하고 손짓하는 아줌마의 얼굴은 매우 무뚝뚝했다.

“나도 모르는 30억원 짜리 땅이 있으면 찾아내라 하십시오. 찾 아오면 이후보에게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흑색선전을 하면 이길 선거도 집니다. 그런데 지고있는 선거, 확실하게 집니다”

“와아!”하고 울려퍼져야 할 함성도 풍겨오는 갯냄새에 묻혀버 리고 만다. 한마디로 기대와는 달리 썰렁했다. 우선 유세장에 사람이 없었다. 유세장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생선을 파는 아줌마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니깐 그냥 훌쩍 일어나 버린다.

“99% 지지율이라구요? 그건 과장된 숫자구요 한 74.5%는 됩니다 . 그렇지만 이 경상도 노무현이가 전라도에서 지지받는다는 것이 왜 나쁘단 말입니까.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입니까. 여태 까지 대통령은 모두 반쪽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무현이 는 호남에서 지지받고 경상도에서 지지받고 충청도에서, 강원도 에서, 경기·서울에서 지지받아 국민통합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 이제 이 노무현은 호남·영남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남이 나보 다 못되어야 한다는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납시다. 호남, 영남이 따로 없는 새나라! 반목, 질시가 없는 새로운 나라를 만듭시다! ” 자갈치의 썰렁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노후보는 매우 또박또박 명연설을 했다. 한마디로 그의 자세는 매우 성실했다. 연설 도중 , 매우 빈한하게 보이는 꺼칠한 수염의 늙은 지게꾼이 지갑을 털 어 5만원 가량의 빳빳한 지폐를 연단 아래 서있는 김근태의원에 게 들이민다. 너무도 그 모습이 측은하게 보였는지 김의원이 그 냥 거두셔도 될텐데 하니깐, “내가 우리나라 바른 정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더 있겠소? 받으시오!”하고 손을 부르 르 떨었다.

그 모습은 순간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우리 국민의 바 른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저런 것인데. 다음 일정지는 서면 롯데백화점 앞이었다. 어차피 또 썰렁하겠거 니 하고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새벽 6시에 출근한 이래 변변히 식사를 하지 못해 배가 몹시 출출했던 것이다. 국수나 한 그릇 훌러덩 먹고 올라가려고 국수코너에서 기웃거리는데 순식간에 아주머니가 수북이 국수 한 그릇을 퍼준다.

“돈은 어디서 내지요?” “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그릇 맛있게만 드셔주시면 더 없는 영광이겠습니다”하고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힌다. 내 인생에서 먹어본 가장 맛있는 한 끼였던 것 같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정문 앞에 당도했을 때 나의 두 눈은 휘둥 그레 뒤집어지고 말았다. 연변을 가득 메운 군중, 밤의 열기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남녀노소 층도 다양했고 무엇보다도 듣는 자세가 진지했다. 노후보의 연설은 자신과 열정이 넘쳤다.

“제가 동북아시대를 열겠습니다. 동북아경제협력공동체를 마련 하여 자주적인 외교를 펼치겠습니다. 부산에서 베이징으로, 부산 에서 모스크바로, 부산에서 파리로 갑시다. 동북아시대가 오면 부산은 세계물류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잘살 게 되고 부산은 쾌적한 삶의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 부산을 세계의 물류중심으로 만들어 가 겠습니다. 지방화시대를 엽시다. 이제 우리나라는 영·호남의 대 결이 아니라 중앙·지방의 대결의 장으로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말만 지방자치이지 진정한 분권이 실현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지 방화시대의 핵심은 지방대학의 집중적 육성입니다. 수도권대학??집중되어 있는 연구개발재원을 파격적으로 지방대학에 돌리고, 지역별로 특성화하여 지방산업과의 유기적 연대를 강화하겠습니 다. 그렇게 해서 독자적인 지방산학공동체의 기획능력을 키워나 가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그 능력을 대접 받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지향적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아! 우렁찬 박수가 계속 터져나왔다. 나는 길거리 청중 속에 묻 혀, 박수를 치는 한 여성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자발적으로 나오셨습니까? 혹시 동원된 것은 아닙니까?” “금품동원? 그런 것은 요즈음 인터넷시대엔 통하질 않습니다. 예전에 제 언니가 억울하게 곤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노후보가 무료변호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노후보를 소신껏 후원하는 사람 이지요.”

이때 노후보의 유세소리는 높아지고 있었다. “우리 보통사람들의 삶이 문제입니다. 그 고난을 아는 것이 문 제가 아니라 그 고난을 위해 어떠한 실천을 할 수 있으며 과연 얼마나 지속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회 창 후보는 서민을 모릅니다. 지방을 모릅니다. 서울의 밀집한 지 역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산 적이 없습니다. 최소한 지방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치러봐야 지방을 알게 됩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 면 행정수도를 지방으로 옮기겠습니다. 이 문제는 신중한 국민적 합의를 요구하는 문제이므로 국민투표 에 부쳐서 결정하겠습니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로 잡읍시다. 우리 후손에게 떳떳한 역사를 물려줍시다. 집에 와서 아들에게 내가 오늘 산 모습을 정직하게 다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듭시다.”

노후보의 열변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의전담당 관에게 다음 행선지까지 노후보와 같이 동행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다. 나의 청은 기민하게 처리되었다. 넉넉히 마 주보고 앉아있을 수 있는 관광버스 속에서 우리의 대화는 이루어 졌다.

“서민의 대통령후보임을 자처하는 후보님의 유세에 서민지역인 자갈치에서는 별 호응이 없고 비싼 쇼핑을 하는 롯데백화점 앞에 서는 열기가 느껴지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 정치의 현장입니다. 서민은 하루 먹고사는데 급급해서 정치라는 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그 리고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일수록 자기표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들의 침묵은 기나긴 우리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어온 지도자들의 과오를 극복해온 침묵입니다. 한국의 민중들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 후보는 역시 정치인이었다. 내 질문에 즉각 대응하는 탁월한 감 각이 있었다. 그리고 언어구성이 매우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었다 . TV토론에서 받은 엉성한 느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부산에 오셨으니까 부산사람들 구미를 부추기는 화끈한 공약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저는 지역적인 선심공약을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체 를 고려하는 큰 틀의 비전을 우선적으로 제시해야한다고 생각합 니다. 그 전체의 틀 속에서만 지역의 득실을 얘기해야겠지요. 저 는 지금 유세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유세라는 것을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수단의 한 작은 단락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유세야말로 정치의 핵심이며 바로 국민의 정치수준의 바로미 터입니다. 이 유세의 장에서 수준 낮은 언행이 저질러지면 곧 우 리 국민의 정치 그 자체가 타락하는 것입니다. 제가 비록 낙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유세의 장에서만은 바른 말을 해야하고 야 비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선거, 그것이 바로 국민정치의식 의 훈련장입니다.” “오늘 구덕체육관에 희망돼지 모으러 가신다는데 희망돼지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희망돼지는 제가 말씀드리는 새 정치의 상징입니다.” “새 정치라는 건 또 뭡니까?” “저는 정치라는 것을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된 후에 이렇게 하겠다라는 약속은 모두 엉터리 약속입니다. 그런 식으로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희망이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선 생님! 정치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정치는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정치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태 까지의 모든 정치인은 돈줄에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계파를 만들 고 조직을 만들고 가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액의 돈을 보 이지 않게 큰손들로부터 갹출했습니다. 결국 표는 서민대중들로 부터 얻습니다. 그러나 당선만 되면 서민에게 등을 돌리고 온갖 큰손들의 이익에 굴종하는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풀이돼온 악폐에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저의 희망돼지는 바로 지금 여기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보자는 서민대중들의 절규입니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돼지저금통에 한 푼 두 푼을 모아 단기간에 50여억원의 성금을 보냈겠습니까? 이 것이 바로 새 정치의 출발입니다. 계보도 없고, 가신도 없고, 조 직도 없고, 돈도 없고, 청와대도 없고, 동교동도 없고, 4번이나 선거에 떨어진 제가 어떻게 국민의 후보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제가 대통령 단일후보가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나라 정치혁명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지방화전략 운운하시는데, 현재 지방자치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재원불리기, 예산낭비, 유기적 통제의 단 절로 민심이 추락하고 국토가 타락하고 있습니다.”

“어린애가 넘어진다고 울밖에 나가 걷지 못하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대안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나는 이날 밤 구덕체육관 희망돼 지 모으는 행사에 참석했다. 이은미의 발랄한 노래도 좋았고 분 위기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건강했다.

나는 김해에서 일박을 했다. 7일 새벽에 김해평야를 가르는 찻간 에서 나이 먹은 운전사 양반이 한마디 거든다. “양산군수 될래, 김해 대저면장 될래 하면 누구나 김해면장되겠다 했다 아입니꺼 . 그만큼 유족한 곳이지예. 노무현이가 이곳 한림면 아라예. 고 생 많이 했지예.”

나는 김해평야를 바라보면서 이곳이 가야의 고도라는 것을 생각 했다. 철기문화를 가장 선구적으로 도입한 개방적 문명의 요람이 었다. 그러한 풍요 속에서 태어난 우륵의 가야금 튕기는 소리가 서낙동강에 너울치는 갈매기 날갯짓 사이로 울려퍼지는 것 같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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