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구조론을 공부하는 방법의 하나는 필자가 구조론을 이루어간 경로를 추적해보는 것일 터이다. 구조론교과서 개념으로 지난 20년간 쌓아온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필자의 유년시절에 많은 것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구조론은 필자가 어렸을 때 얻은 강렬한 느낌을 조금씩 언어로 표현해온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겼는데, 돌이켜보니 아는 것을 써먹는 도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뇌간지럼증 탓이다. 오랫동안 머리 한 구석에 붙어다니며 나를 성가시게 했던 그것, 적당한 표현이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아 약올라 했던 그것은 대칭과 호응이다. 이 표현이 마음에 든다. 40년도 넘게 걸렸다. 필자의 남다른 점은 언어감각에 있다. 산수추리력은 꽝이다. 어쩌다 뇌의 자원이 한 쪽으로 쏠려버린 거다. 언어능력은 아기 때 세팅된다. 그런데 유아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 살 이전의 일을 기억못한다고. 열에 하나 꼴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단편적인 기억인 경우가 많다. 필자만큼 한 살 때의 일을 다수 기억하는 사람은 잘 없는 듯 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언어능력이 형성되는 시점에 유아 기억상실로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으며 필자는 뇌가 잘못 만들어지는 바람에 운좋게 그 능력을 보존한 것이지 싶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제거되는게 정상이고 제거되지 않은건 불량이 난 것이다. 나의 뇌는 불량인데 그것도 뜻 밖에 쓸모가 있더라. 연구하려고 작정한 것은 일곱 살 무렵이다. 계기가 된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느낌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그것은 어색함이다. 사람들이 도무지 말을 어색하게 하는게 거슬렸다. 뭔가 뽀대나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이런 거다. 사람들은 ‘있잖아.’ 하고 말을 건다. 근데 있기는 뭐가 있다는 게야? 주어가 없잖아. 나는 인사를 잘 안했는데 ‘안녕’이라는 말이 수상하다. 역시 주어가 없다. 경상도 아이들은 길에서 만나면 ‘어디가?’ 하고 묻는다. 남이야 어딜 가든? 어색하다. 헤어질때는 ‘가재이.’라고 말하는데 어딜 가자는 거지? 가자고 해놓고 왜 제 집으로 쑥 들어가 버려? 이거 반칙이 아닌가? 결국 말없는 아이가 되었다. 말에 불만이 있어 말할 수 없다. 무엇인가? 대칭과 호응이다. 대칭은 공간의 좌우대칭이고 호응은 시간의 앞뒤호응이다. 당연히 사건 안에서 대칭되고 호응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떳떳하고 자연스러운데 다들 대칭되지도 않고 호응되지도 않아 어설프고 어색했던 것이다. 아귀가 맞지 않고 비뚤어져 있다. 스트레스 받던 차에 중요한 발견을 했다. 국어사전 찾기 숙제다. 아홉 살 때의 일이다. 국어사전 뜻풀이가 돌려막기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자지=좆, 좆=자지 하는 식이다. 제자리걸음 뺑뺑이가 아닌가? 그래 이거다! 전부터 쭉 생각해오던 문제였기에 전율한 것이다. 전율했기 때문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줄기차게 생각을 모아왔다. 지금도 그 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진작부터 이 세상이라는 게임이 뭔가 허술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만만히 보며 기회가 오면 한 번 받아버리려고 벼르고 있던 차에 마침 결정적인 급소를 발견하고 들뜬 것이다. 나중 국어사전을 내가 고안한 메커니즘에 맞춰 새로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사전은 쓰지 못하고 있으나 사전기술의 논리를 사건 안에서의 대칭과 호응의 원리로 정리한 정도로 만족한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고, 내용이 있으면 형식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짝이 있고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절차가 있어야 그것이 있을 수 있다. 그래야 모양이 살고 자연스럽고 당당해진다. 그것이 없으면 뭔가 어색하고 어색하면 어떻든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메커니즘이다. 큰 형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데 중학생 형의 교과서에는 뭔가 아귀가 맞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게 이렇게 저게 저렇게 된다는 식의 대칭과 호응이 작동하는 그럴듯한 문장형태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내 교과서에는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는둥 얼토당토 않은 소리가 씌어져 있으니 허폐가 뒤집어질 노릇이 아닌가? 장난하나? 어린애라고 무시하는 건가?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라고한다의 법칙’이다. 선생님이 뭔가 납득이 안 되는 말을 하면 말 끝에다 ‘~라고 한다’를 붙여보았더니 훌륭하게 말이 되는 것이었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고 하면 말이 안 되지만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걸로 한다.’고 하니, 어 말 되네? 맞어! 선생님도 나름대로 입장이 있으니까 애들은 그렇게 가르쳐야지. 뭐 어쩌겠어. 선생님의 모든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납득됨과 동시에 인생이 허무해졌다. 중학생 때는 허무주의에 염세주의에 아나키스트가 되려고 했다. 내가 왜 세상과 한 편인거지? 왜 주인공에게는 박수치고 악당에게는 화를 내지? 우습잖아. 세상 인간들 노는 꼴이 가소롭게 보였다. 초딩 때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있었는데 중 2때 결별했다. 원래는 과학주의자였다. 선생님의 미신타파운동에 감명받아 과학자가 되어 세상의 모든 미신을 박멸해주려고 했는데, 결정적으로 내가 수학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기호 알레르기가 있다. 건전지의 양극과 음극을 나타내는 기호를 반대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식의 기호만 나오면 짜증이 확 나서 과학자의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자연과학을 포기하는 대신 꿩 대신 닭이라고 인간사회를 과학화 하는 걸로 방향을 틀었다. 어렸을 때는 만화 한심이표류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프리카에 가서 추장노릇 하는데 흥미가 있었다. 인류가 너무 멍청해. 내가 계몽을 해야겠어. 밑바닥부터. 아프리카 애들이면 일단 만만하겠지. 이상사회를 건설해보는 거야. 아뿔싸! 마르크스가 이 분야를 선점하고 있었다. 미신 비슷하게 돌아가는 후진사회를 고도의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돌아가도록 설계하는 구상을 하고 보니 그게 마르크스주의였다. 잠시 흥분했으나 곧 실망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답을 정해놓고 막다른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듯한 느낌이다. 결정적으로 에너지가 없다. 인간 내부에서 열정을 끌어내는 구조 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말이 되려면 딱 하나의 방법 뿐인데 그것은 사회주의 힘으로 국가의 모든 자원을 과학에 올인해서 상온핵융합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라고한다의 법칙’은 관점의 발견이다. 사물을 보는 데는 그저 눈을 사용하면 되지만 사건을 보는 데는 관점이 필요하다. 이후 의기양양해져서 교사를 우습게 보게 되었다. 세상이 우스꽝스런 연극으로 보여졌다. 깨달은 척 하며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4학년 때 자석에 쇠붙이를 붙이는 실험을 했는데 실험결과를 발표하란다. 누구도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나는 ‘자석과 쇠 사이에 어떤 힘의 방향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려는데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틀렸어’ 하고 화를 내며 다음 학생에게로 넘어갔다. 선생님이 스스로 말한 답은 ‘자석이 쇠를 당긴다.’는 것이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너무 없어보이잖아. 메커니즘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나중에 자기장의 존재를 알아내고는 ‘거봐! 선생님이 틀렸고 내가 옳았어.’ 바로 이거야. 난 자기장을 설명하려고 했던 거라고.'하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당긴다는 동사다. 명사로 설명되어야 하며 그 명사는 메커니즘을 가리켜야 한다. 만유인력과 같다. 그냥 당긴다고 말하면 곤란하고 메커니즘에다 그럴듯하게 명명해야 한다. 5학년 쯤에 방정식을 배웠는데 무릎을 쳤다. 바로 이거다. 방정식이야 말로 내가 찾던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메커니즘이다. X축과 Y축이 한 점에 맞물려 있다. 이거 멋지다. 뭐든 방정식 냄새가 살짝 나줘야 말이 되는 거다. 그 안에 X축도 있고 Y축도 있고 둘이 만나는 기점도 있어야 한다. 언어 안에 그런 구조가 없으면 가짜다. 아마 여름 방학때 나눠받는 방학공부책이었을 것이다. 학이 한쪽다리로 냇가에 서 있는 이유는 체온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건 아니잖아. 뭔가 위하여라고 하면 어색하다. 호응되지 않는 느낌이다. X축과 Y축이 따로 논다. 메커니즘은 방정식처럼 둘이 하나의 축에 꿰어져야 한다. 새들을 관찰했는데 닭도 오리도 비둘기도 심심하면 한쪽다리로 서 있더라. 원래 닭의 발가락은 앞뒤로 정렬된 사람의 발과 달리 좌우로 퍼져서 신체구조상 한쪽다리로 서 있을 수 있다. 일의성을 깨닫게 되었다. 뭐든 근본은 하나여야 하며 메커니즘이 적용되어 이것과 저것의 대칭과 호응으로 나타나야 한다. 의하여는 하나고 위하여는 둘이다. 의하여는 필연이고 위하여는 선택이다. 감이 왔다. 이것을 오랫동안 생각해서 스스로 깨달음을 선언하게 되었다.
대충 그림이 나왔다. 뭔가 깨달았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결정적 한 방이 부족했다. 린네의 분류법을 배웠는데 린네가 생물을 분류했으므로 나는 무생물을 분류하기로 했다. 린네는 종속과목강문계로 나누었으므로 나는 물질을 비슷하게 7단계 정도로 정리해볼 참이었다. 물리, 물질, 물성, 물체, 물건 따위를 나열하고 보니 뭔가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구조론의 매개변수 5가 찾아졌다. 물리 질에서 물질 입자가 나오고, 물질 입자에서 물성 힘이이 나오고, 물성 힘에서 물체 형태가 나오고, 물체 형태를 인간이 손대면 그것이 물건 상품인 볼펜이나 연필이다. 마디가 있고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분류학을 적용해야겠다 싶어서 공자의 육예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분류를 검토했는데 성의없이 대강 나눠놓은 것이다. 논리적 기초 없이 그냥 되는대로 주워섬기는 나열식이다. 이건 아니지. 왜 패턴이 반복될까? 고 2때 화학과목을 가르치러 온 교생선생님이 제논의 궤변을 이야기해주면서 이거 풀면 노벨상감이다 해서 생각해봤는데 그 문제가 풀렸는지와 상관없이 금새 내가 원하는 답을 얻었다. 검색해보면 다 나오지만 제논의 궤변은 수학자들이 오래 전에 풀었다고 하니 들여다 볼 것이 없고, 중요한 것은 공간이란 무엇인가? 크기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건 상대적이다. 크기란 원래 없고, 내가 사건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조직하여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을 찾았다. 그것은 만유가 한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바깥이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안에서 자체조달해야 한다. 안에서 밖으로 전개하면 제논의 궤변에 빠지게 되나, 사건을 밖에서 안으로 전개하면 똑 부러지게 해결된다.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뭔가 오도송 비슷한 것이라도 지어야겠다 싶어서 '모든 존재하는 것은 또한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라는 문장을 즉흥적으로 만들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존재하는 것은 필요하다.'를 덧붙였는데 단지 기억하기 좋게 하려는 것이었다. 언어가 호응되어야 기억이 박히는 거다. 오도송은 원래 스님들이 한시를 짓는 것이다. 한시는 필요없고 그 순간을 떠올릴 말이 필요했다. 언제든 생각이 막힐때 이 말을 떠올리면 해결된다. 세상은 밖에서 안으로 가는 한 방향으로 가므로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반드시 파트너가 있고 대칭이 있고 호응이 있으니 족보가 있고 시스템이 있으니 그것이 필연이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의 발견이다. 그것은 호응이다. 세상이 내게 물었고 내가 세상의 질문에 호응하여 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쏘아진 화살은 구태여 날아가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자체의 동력이 고갈될때까지 계속 간다. 날아가면서 자기만의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을 더 발전시켜 존재론과 인식론, 곧 연역과 귀납으로 정리한 것은 스물다섯 때다. 답을 알았으니 됐고 세상으로 돌아가 웃기고 자빠진 인간들의 연극에 동참해줄 이유는 없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했을 때 돌아왔다. 신과의 약속 같은 것이다. 신이 호응해주면 나도 호응하겠다는 거다. 세상에 발언하려면 통로가 필요한 거다.
PC통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남산신성비를 발굴해서 받은 보상금으로 컴퓨터를 샀다. 뭔가 호응해주는 느낌이다. 그런 사건이 여럿이다. 인류가 알아주지 않으면 인류를 비웃어주면 되는 것이니 계속 살아보기로 한 것이 이렇게 되엇다.
깨달음의 근본은 타자성이다. 나와 세상 사이에 거대한 벽이 있다. 한 살때부터 뇌를 간지럽혀온 에너지 덩어리였다. 나와 타자가 마주보고 있으니 어색하다. 호응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호응시킬 수 있을까? 나와 타자가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그것은 일이다. 그것은 사건이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에너지다.
역방향이면 막히고 막히면 에너지가 단절됩니다. 순방향이면 뚫리고 뚫리면 끝까지 가게 됩니다. 그 에너지는 개인의 열정 곧 의사결정의 에너지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진보의 동력이기도 하고, 자연의 물질이 작동하는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한 방향으로 이어지면 시계의 태엽이 풀리듯 쭉 나가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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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흡도 하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귀하게 읽었습니다 ^^
배울려고 하면 배울 수 없고
설명하려하고 가르치려고 해야 뭔가 느낌이 옵니다.
역설이죠
그럴려면 우선 관점을 얻어야하는데
구조론이라면 방대한 구조의 체계를 공부하는 것에 앞서서 반드시
꼬마 김동렬이 도대체 뭘 봤길래 남산 캄캄한 숲속에서 웅크리고 있게 되었나 궁금해야 맞습니다.
그럼 난 한번도 그런걸 본 적이 없나
삶의 궤적을 다시 돌이켜볼 일입니다
세상이 구조로 되어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한 번도 못본게 오히려 더 이상하죠
우리도 분명히 수없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무심코 넘어갔거나 용기가 없어서 피하고있는 거죠
인정하고 나면 인생에 생길 파장이 만만치 않거든요
설명하고 가르치려면 팀을 조직하는 게 좋습니다.
상대가 있어야 설명하죠
한방에 모두 깨달으려고 하면 욕심이죠
관점의 실마리만 잡아도 땡큐
어떤 천재가 수십년동안 만들어 온 것을 한 번에?
우리도 앞으로 30년은 더 가봐야겠다고 해야 공평하죠
인생사 역시 호응이지요.
모자란 것이 있으면 채워지는 법.
사건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보고 사람들은 이름을 붙였다지요?
신God이라고
무릎을 탁 치고 퍼 갑니다.
남산신성비.
글르가즘 느끼고 갑니다.
창의를 함에 있어 어떤 분야의 대가를 참고하고 싶다면,
대가의 작품을 볼 게 아니라, 그 대가가 어떻게 그 아이디어를 접하게 됐을지를 추측하는게 좋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가령 영화에서 김기덕이 대가라면 그가 방황했던 프랑스의 굴다리 밑에 가보는 식인 거죠.
이것은 관객의 입장이 아닌, 작가의 입장으로 그와 같은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과학 등에서도 아인슈타인이나 기타 등등의 사람들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조달했는지 알아볼 수 있으며,
그 기원을 따라가 봄으로써, 자신도 아이디어를 조달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의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세상의 이치를 의심해보는 겁니다. 뭔가 이상하다면 졸라리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것을 다가올 세상에 던질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