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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497 vote 0 2013.03.20 (22:44:05)

 

        대선에서 이겼다면 필자는 이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힘이 필요하다. 힘은 질서에서 나온다. 기성질서는 금전으로 이루어진 질서다. 뒤집어 엎어야 한다.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자기규정, 둘째 이에 따른 타자규정, 셋째 그 둘의 사이에 대한 규정, 곧 관계규정이다. 그것은 삶이라는 무대에서 자기 포지션을 정하는 일이다. 이게 잘못되면 계속 꼬인다.


    자기규정이 중요하다. 나는 누구인가다. 이는 내가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스스로 정해야 한다. 왕을 상대하는 자는 왕이다. 귀족을 상대하는 자는 귀족이다. 지식을 상대하는 자는 선비다.


    신분차별은 사라졌다. 이제는 자기차별의 시대이다. 카스트 개념을 빌릴 수 있다. 브라만이 될 것인지, 크샤트리아가 될 것인지, 바이샤가 될 것인지, 수드라가 될 것인지는 자기가 결정하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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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 하는 자가 노예면 절 받는 자 역시 노예다. 노예를 상대하므로 노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묘사된 바 굴뚝 속에서 흰 얼굴로 나온 청소부와 같다. 어떻든 그곳은 굴뚝 안이다.


    구조론은 모형이다. 모형은 1이다. 2를 세팅하여 1로 만들고 남는 1의 효율성을 에너지로 삼아 세상을 바꾼다. 2를 1로 만들려면 둘의 사이를 공략해야 한다. 남녀 2가 1로 되었다면 둘 사이는 부부다.


    부부는 2가 1로 행세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냥꾼이 한 발의 총알로 두 마리를 잡으려면 어미곰을 쏴야 한다. 어미곰을 잡으면 새끼곰은 자연히 따라온다.


    둘 사이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를 조직하여 우리는 자연에서 효율을 얻고 에너지를 얻는다. 물고기 두 마리를 한 번에 잡으려면 물을 움직여야 한다. 물고기는 물이 가는 데로 따라온다.


    물고기 사이에는 물이 있다. 물을 움직여 물고기를 다룬다.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은 무엇인가? 봉건사회에서 그것은 신분이다. 근대사회에서 그것은 포지셔닝이다.


    주체성이냐 타자성이냐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 둘의 사이가 있다. 둘은 시소에 태워져 있다. 내가 너를 상대하면 타자성이다. 시소의 축을 상대하는 것이 주체성이다. 그 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이를 상대해야 한다. 사이를 상대하려면 사이를 발견해야 한다. 사이의 관계를 포착해야 한다. 부부관계인지 친구관계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 사이를 조정하려면 내 안에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에너지가 없으면? 가만 있는다. 가만 있으면? 누군가 먼저 나를 자극한다. 그 자극에 내가 반응하면? 곧 상대하는 것이다. 타자성이다. 이때 그 상대가 나를 규정하게 된다. 상대에 의해 규정되면?


    신분이 하락한다. 그 사람의 존엄이 훼손된다. 물고기 사이의 물이 흐려진다. 흰얼굴과 검은얼굴 사이에 굴뚝이 들어선다. 현정은과 노예 사이에 신분차별이 들어선다. 주체성은 깨뜨려지고 만다.


    카스트와 같다. 브라만은 낳음에 의해 규정된다. 이때 너는 배제된다. 없다. 시소의 반대편에는 아무도 없다. 크샤트리아는 권에 의해 규정된다. 기승전결의 기에 포지셔닝하고 승, 전, 결을 지배한다.


    역시 너는 배제된다. 상대하는 대상이 없다. 이는 물고기가 아니라 물을 상대하는 것이다. 바이샤는 거래에 의해 주고받기로 규정된다. 이때 반드시 거래의 상대방이 있다. 상대방이 나를 규정한다.


    타자성이다. 수드라는 순수하게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노예와 같다. 누구를 상대하느냐는 에너지에 달려 있다. 에너지가 있으면 화가든 음악가든 작가든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독자를 상대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를 상대한다. 진리 안에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시소의 양쪽 날개에 올라탄 두 사람은 상대편을 상대한다. 오른쪽은 왼쪽을 상대하고 왼쪽은 오른쪽을 상대한다.


    가운데의 축은? 그 상대가 없다. 대신 중력을 제어한다. 작가의 성취는 작품에 의해 규정된다. 브라만이다. 게임 안에 너는 없다. 엄마의 지위는 자식에 의해 규정된다. 자식을 낳았기에 엄마인 것이다.


    자식이 올라가면 자신도 올라가는 것이다. 역시 너는 없다. 운전사의 지위는 승객에 의해 규정된다. 운전사는 기에 포지셔닝하고 승객은 승, 전, 결이 된다. 감독 밑에 코치 있고 코치 밑에 선수 있다.


    감독이 작전을 내리면 코치가 전달하고 선수가 수행한다. 감독의 지위는 코치와 선수가 작전을 잘 수행했느냐로 규정된다. 이것이 크샤트리아의 권이다. 여기서 너는 없다.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피드백이 있다. 선수가 작전에 실패하고 감독에게 항의한다. 당장은 상대가 없지만 결과에 따라 성적표를 받는다. 상대가 있는 것이다. 상거래라면 바이샤다. 고객의 지위는 쇼핑에 의해 규정된다.


    돈을 내면 고객이고 돈을 내지 않으면 추방된다. 노예는 주인에 의해 규정된다. 노예가 훌륭한 일을 했다고 해서 지위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개가 승진하는 일은 없다. 개사료로 대접받는다.


    ◎ 브라만 – 엄마의 낳음으로 상대한다.
    ◎ 크샤트리아 – 갑의 권(權)으로 을을 상대한다.
    ◎ 바이샤 – 거래관계의 50 대 50으로 상대한다.
    ◎ 수드라 – 일방적으로 규정당한다.


    구조론은 5이므로 불가촉천민까지 끼워줘야 하겠지만 이는 비유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정도만 하겠다. 브라만은 전혀 상대하지 않는다. 크샤트리아는 거의 상대하지 않는다. 바이샤는 반을 상대한다.


    수드라는 거의 상대당한다. 불가촉천민은 완전히 지배된다. 인생에 있어서 어떤 포즈, 어떤 포지션으로 어느 정도의 세상을 상대할 것이냐다. 세상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그래야 브라만의 지위를 얻는다.


    그러면 그 전체를 일컫는 단어가 있어야 한다. 개념이 필요하다. 신(神)이다. 이러한 구조는 물리적 진실이다. 노예해방과 상관없이 자기차별 안에 노예포지션은 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김미경은 바이샤 포지션이다.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지위가 올라간다는 생각은 상거래의 법칙이다. 1억원어치를 구매하면 VIP로 대접받는다. 지하 식품코너에서 공짜 시식만 하면 뜨내기로 규정된다.


    식당의 단골손님으로 대접받는가 혹은 뜨내기 손님으로 대접받는가는 자신의 지갑이 결정한다. 엄마가 자식을 상대하는 것은 다르다. 엄마의 지갑에 몇 푼이 있든 엄마다. 상대당하지 않는다.


    엄마가 거지여도 엄마이고 귀족이어도 엄마다. 한글은 세종이 발명했다. 저작권료 한 푼 받지 않았다. 상관없다. 세종의 지위는 요지부동이다. 절대적이다. 상대적이지 않으므로 상대하지 않는다.


    그것이 브라만의 상대하기다. 양반은 노력하여 쟁취하는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왕조시대 법률에 양반의 신분을 규정하는 조항은 없다. 양반은 묘비에 학생부군신위라고 쓴다. 신분은 학생이다.


    학생은 지식을 낳는 사람이다. 지식을 낳기 때문에, 지식의 엄마이기 때문에 브라만 계급으로 대접받는다. 인류문명을 낳는 사람, 역사의 진보를 낳는 사람, 문화와 예술을 낳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간단하다. 우리편에 들면 된다. 어차피 지식은, 학문은, 예술은, 진보는, 문명은 인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이다. 함께 가는 대열에 들면 우리편이 되고 브라만의 지위를 얻는다. 어차피 자기규정이다.


    개는 끼워주지 않는다. 훌륭한 개라도 개와의 공동작업은 아니다. 개가 될 것인가 인간이 될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한다. 김미경들은 개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90도 절을 받는 현정은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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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이 양반인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양반으로 대접하기 때문입니다. 왜 양반은 서로를 존중했을까요? 양반의 직업은 학생이고 학생은 학문을 구축하는 사람이고 학문의 구축은 공동작업이므로 서로를 존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진리요, 진보요, 문명이요, 역사요, 예술입니다. 금전은? 지불하는 만큼 대접해주면 됩니다. 고객의 지갑을 보고 거기에 맞추어 상대해주면 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적인 존중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편에 서면 우리편이고 우리편이면 존중합니다. 존중해야만 작동하도록 세팅되어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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