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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947 vote 0 2009.04.14 (19:23:34)

구조론적 사고방식

- 오늘 동영상 강의 내용입니다. -

먼저 인간에게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방식이 있다. 자신은 어떤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의 뇌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구조가 있는지 헤집어 보고 싶다.

생각이라는 것이 뇌에서 그냥 송송송 샘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기술적인 과정을 거쳐서 생산되는 것이다. 어떤 상자 안에 2를 넣으면 5가 나오는 형태로 정교한 메커니즘이 세팅되어 있다.

상자 안에 심 1과 날 2로 이루어진 저울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 숨은 저울의 사용방식이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보통은 그 저울이 없다. 있어도 그 저울을 사용하지 않거나 아니면 사용법을 모른다.

보통 사고방식이라고 하면 긍정적이나 부정적 사고방식, 낙관적이나 비관적 사고방식, 극단적이나 중도적 사고방식 따위가 있는데 이는 대개 상대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사고방식이 아니다.

체계있는 사고형태가 아니다. 거의 본능 수준이다. 상대가 ‘아’ 하면 ‘어’ 한다. 초딩 반사놀이 처럼 무조건 반대로 돌거나 혹은 그 반대로 무조건 추종하거나다.

무조건 낙관하거나 무조건 비관하거나다.

그건 엄밀히 말해서 사고방식이 아니라 사고 안하는 방식이다. 대부분 예단을 가지고 사전에 답을 정해놓고 거기에 짜맞추는 식으로 줏어섬길 뿐이다. 뇌 속에 세팅되어 있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는다.

응원단이라 무조건 부추기고, 심판이라 무조건 옐로카드, 공격수라 무조건 드리블이라면 저울의 사용이 아니다. 낙관주의자서라 무조건 낙관하고, 비관주의자라서 무조건 비관하고 이건 사고방식이 아니다.

생각의 상자가 있다. 상자 안에 방정식이 들어있어야 한다. 바깥으로 난 두 구멍이 있어서 입력과 출력을 담당해야 한다. 그 구멍으로 에너지가 드나들어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을 성립시켜야 한다.

깨달음은 생각의 상자 속에 장치된 저울의 사용방식이다. 무조건 낙관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에너지의 입출력을 상자속 방정식 저울로 연산해서 얻은 값에 따라 일체의 예단이 없이 냉정하게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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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서 본 것인데 다음 대문에 뜬 블로그니까 많은 사람이 봤을 것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아마 미국교포일텐데 어느 마트에 들러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하는데 점원이 셈을 못해서 거스름돈을 더 준다.

계산기로 계산하고도 셈이 틀린 거다. 이 분이 잘못 받은 거스름돈을 돌려주니 얼른 받으려 하지 않고 눈이 똥그랗게 되어 쳐다보다가 더듬더듬 다시 계산하더니 얼굴이 빨개져서 감사해 하며 돈을 받아간다.

마치 엄청난 천재 암산맨을 발견한 것처럼 놀라워한다. 그 점원은 계산이 잘못된 것을 계산기도 두드려보지 않은 고객이 어떻게 금방 알아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양반은 대단한 진보주의였던가 보다. 블로그 제목도 뭐 그렇게 진보적으로 붙여놨고. 생각이 제대로 박힌 훌륭한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분의 주장은 결론적으로 ‘미국 사람은 셈을 못한다’는 인종차별적 발언이다. 전제를 그렇게 깔아놓고 그걸 교묘한 논리로 물타기 한다. 뭐냐 하면 미국인은 플러스 사고방식을 가져서 셈을 못한다는 거다.

한국인은 10-5=5의 마이너스 사고방식인데 미국인은 손님이 지불한 지폐 10 대 점원이 판 물건 5에다 플러스 1, 플러스 2, 플러스 3, 플러스 4, 플러스 5 해서 10 대 10으로 맞춰주는 사고방식이라는 거다.

웃긴 생각이다. 이게 1초만에 판단이 안 서나? 이 상황에서 나는 절망한다. 이 분이 몇 초만에 암산한 것을 점원은 계산기로도 계산하지 못하듯이 나는 1초만에 판단하는 것을 이 분은 판단하지 못한다.

슬프다. 이 분 한 사람 뿐이 아니라 거기에 리플 달아서 열광하며 ‘맞어맞어 미국사람은 플러스 사고방식을 가져서 긍정적 사고를 하므로 발전한 거야’ 하며 맞장구치는 바보들이라니. 얼간이 같으니라구.

구조론으로 보면 이게 맹랑하기 짝이 없는 허튼소리라는 것을 1초만에 알 수 있다. 구조론을 모르는 사람은 미국인 점원이 암산을 잘하는 한국인을 이해못하여 고개를 갸우뚱 하듯이 필자를 이해못한다.

그 블로거의 플러스 사고법 운운은 아마 이 대단한 진보주의자가 미국인은 셈을 못한다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당당하게 해놓고 거기에 죄의식을 느껴서 그걸 물타기 하려고 지어낸 생각이다.

미국인의 기특한(?) 플러스 사고법이 미국인의 수학실력을 망쳤다는 황당한 주장나왔다. 이게 말이나 되나? 만약 미국인의 사고방식이 플러스법이라서 그렇다면 이걸 마이너스법으로 바꿔주는 학원열면 대박나겠네.

이 방법만 알려주면 미국인도 동양인처럼 암산도사 되겠네? 그런데 왜 얼른 알려주지 않지? 1분만에 알려줄 수 있잖아. ‘10-5=5로 생각해봐. 그럼 당신들도 암산 잘할 수 있어!’

그러나 영화 ‘그랜 토리노’에 묘사되어 있듯이 동양인은 미국에서 태어나도 셈을 잘하고 또 아멜리 노통의 ‘두려움과 떨림’에 잘 설명되어 있듯이 백인은 일본과 중국에서 자라도 셈을 못한다.

이건 미국인의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한국인의 부정적 사고방식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들도 긍정적 사고방식 많고 미국인 중에도 부정적 사고방식 많다. 이명박 정권을 부정하면 부정적 사고방식인가?

노무현이 개혁하면 뺄셈정치고? 웃기고 있네. 긍정이 부정일 수 있고 부정이 긍정일 수 있다. 현재의 긍정은 미래의 부정일 수 있고 현재의 부정은 미래의 긍정일 수 있다. 이건 상대적인 거다.

구조론으로 보면 1초 만에 판단할 수 있다. 문제를 듣고 답을 한참동안 생각하는게 아니라 방정식이 뇌 속에 세팅되어 있기 때문에, 뇌 속의 저울에 달아보면 금방 답이 튀어나온다. 컴퓨터보다 빠르다.

물론 구조론적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생각을 한참 동안 해야하지만 그건 상자 속의 공식에 바르게 대입했는지를 검산하는 절차일 뿐 판단 자체는 거의 전광석화처럼 한 순간에 일어난다.

왜 그 블로거의 플러스 사고방식은 오류인가? 볼 것도 없다. 자의적으로 선택되는 것은 무조건 답이 아니다. 심미안 4월 12일자 ‘그림은 왜?’에 쓴대로다. 자의적으로 선택된 것은 무조건 틀렸다.

인간이 밥을 먹는 이유는 밥이 맛있기 때문도 아니고 배가 고프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필연이 아니므로 답이 아니다. 여러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은 무조건 답이 아니다. 이건 절대법칙이다.

● 맛있기 때문에 먹는다.(이것과 저것 중에서 선택)
● 배고프기 때문에 먹는다.(아까와 지금 중에서 선택)

선택되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심 1이 아니라 외부와 짝지은 날 2에 해당하므로 인과(因果)의 원인측이 될 수 없다. 선택되지 않는 필연의 메커니즘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기의 발병에 비유할 수 있다. 왜 감기에 걸렸지? 손을 씻지 않았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에. 이런건 정답이 아니다. 위생문제는 남들은 안걸린 감기를 하필 홍길동이 걸린 이유다.

● 손을 씻지 않았다. -≫ 하필 홍길동이 선택된 이유.
● 날씨가 추웠다. -≫ 하필 12월이 선택된 이유.

날씨는 11월이 아니라 12월에 걸린 이유다. 감기 자체의 원인이 아니라 하필 그 사람, 하필 그 날자가 선택된 이유일 뿐이다. 그러므로 적극적, 소극적, 긍정적, 부정적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식은 답이 아니다.

원인을 말하려면 똑부러지게 말해야 한다. 빼도박도 못하게 해야 한다. 감기의 원인은 감기인플루엔자가 인체 안으로 침투했기 때문이다. 감기바이러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건 똑부러진다.

감기바이러스 안에 감기질병을 발병시키는 특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메커니즘에 정답이 있다.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정답이다. 반면 플러스사고, 마이너스 사고 하는건 고무줄처럼 늘어진다.

정답의 법칙  
- 똑부러져야 한다.
- 빼도박도 못해야 한다.
- 독립적인 존재여야 한다.
- 절대성의 영역에 속해야 한다.
- 단단한 입체의 성질을 가져야 한다.
- 내부에 방정식이 있어야 한다.
- 내부에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 내부에 심 1과 날 2가 존재해야 한다.
- 개념화 되어 명사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 발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 밑에서부터 가득차오르는 뻑적지근한 충일감이 느껴져야 한다.
- 에너지의 입출력 순환구조가 드러나야 한다.
-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다.

반대로 물렁하고 변덕스러운 것, 옆으로 빠져나갈 샛길이 있는 것, 형태가 불명한 것, 다른 것과 짝지어져 있는 것, 상대적인 것, 메커니즘이 없는 것, 동사나 형용사로 표현되는 것, 내부구조가 없는 것은 답이 아니다.

또 내부에 방정식이 없고, 심 1과 날 2가 판명되지 않고, 발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 뭔가 아랫쪽이 허전한 느낌, 에너지의 출입구조를 알 수 없는 것은 가짜다.

직관해야 한다. 따져보고 알면 깨달음이 아니다. 구조론은 정답의 법칙을 알려주므로 보지도 않고 그냥 안다. 감기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감기의 이유인 것은 입체의 몸통이기 때문이다.

흔히 ‘몸통이냐 깃털이냐’는 표현을 쓴다. 깃털은 상대적이다. 적극적 소극적사고, 플러스 마이너스사고, 낙관적 비관적사고들은 물렁한 깃털이다. 어디까지 플러스고 마이너스인지 똑부러지게 판단할 수 없다.

원인의 인(因)에 큰 대(大)자가 들어있는 것은 몸통이기 때문이다. 몸통이라야 원인이다. 상대적인 것은 팔다리다. 원인을 제거하려면 몸통을 제거해야 한다. 팔다리를 자르면 잡초처럼 새로 돋아난다.

무엇인가? 미국인이 플러스 사고법 때문에 셈을 못한다면 어떨까? 미국인 중에서 우연히 마이너스 사고법을 시도해 본 사람이 있을 거고 그 사람이 마이너스 사고법을 퍼뜨려서 당연히 미국인이 셈을 잘하게 된다.

필자가 정치칼럼을 쓸 때도 항상 외부의 조건, 특히 지정학적 포지션을 논하는데 이유가 있다. 예컨대 한국이 북유럽의 어느 지역, 핀랜드나 스웨덴 옆에 있었다면 훨씬 진보했을 것이 뻔하다.

한국의 고립된 환경, 미일북중러에 포위된 지정학적 포지션이 한국을 이모양 이꼴로 만든 것이다. 이건 우리가 임의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이 한반도를 떠매고 유럽으로 옮겨갈 수 없다.

진보하고 싶다고? 한반도를 짊어지고 핀랜드 옆으로 이사가봐! 가능한가? 불가능해야 정당화 된다. 구한말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은 한결같이 말했다. ‘한국인은 게을러. 그래서 가난해! 코리언 타임 뻔하지!’

맞는 말인가? 틀렸다. 한국인은 게으르지 않다.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경제할 동기를 못찾아서 게으런 것이다. 중국인도 예전에는 만만디였는데 요즘은 콰이콰이디다. 이런건 변한다.

원인과 결과가 거꾸로 되었다. 미국인이 플러스 사고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미국인 점원이 5 플러스 1, 플러스 2, 플러스 3 하는 식으로 낱장을 일일이 채워주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간혹 셈을 못하는 소비자가 점원을 의심하고 항의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점원이 셈을 플러스로 하는게 아니라 셈을 못하는 고객을 위해서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건 내가 책에서 읽은 것을 옮기는 거다. 미국에는 암산을 못하는 소비자가 많기 때문에 암산 잘하는 한국인 점원이라도 한장씩 채워주는 방법을 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이는게 아닌가?’하고 째려본다.

미국인이 암산이 안 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필자가 그 블로그에 리플을 달았더니 IP를 막더라. 그 양반이 반박리플을 썼는데 ‘그럼 수학 못하는 서구인은 왜 근대화에 성공하고 한국인은 왜 못했냐?’는 거다.

초딩논리다. 당나라 때 중국인이 유럽을 가보면 뭐라고 말할까? 그 시절 유럽은 암흑시대다. ‘아니 유럽인들은 지능이 떨어지나. 왜 이렇게 할줄 아는게 없어. 종이, 인쇄술, 나침반, 화약 다 어디갔어?’

서양 수학도 16세기 전후로 아랍 수학이 전해져서 부흥한 것이다. 그리고 수학은 기하학과 논리학이 중요한데 기하와 논리 없는 동양수학은 한계가 있다. 그 기하와 논리가 원래 유럽 것은 아니다.

기하는 이집트인이 피라밋 만들다가 생각해냈고 아랍에서 발달했다. 논리학도 게르만족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계산능력과 수학은 다르다. 계산 잘한다고 수학 잘하나? 문제를 잘푸는게 수학 아니다.

한국학생 중고교 수학실력은 의미없는 거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둘 중에서 선택되는 것은 인과율의 원인측이 될 수없다’는게 논리학이다. 바로 이거다.

그 블로그를 쓴 양반은 기본적으로 논리가 안 되는 분이다. 논리가 안되면 수학이고 뭐고 다 안 된다. 구조론은 기본적으로 논리학이다. 논리학은 자연과 수학을 연결한다. 학문의 잃어버린 고리다.

성룡은 문맹이지만 암기로 대본을 소화한다. 뭐든 외우기 때문에 외국어에 능해서 한국어도 제법 안다. 난독증 때문에 글은 못읽지만 난독증을 극복하고 출세한 유명인사 많다. 대학교수가 된 사람도 있다.

서양사람 일부가 셈이 안 되는 것이나 필자가 노래를 못부르는거나 같다. 절대음감이 있는 사람이 나를 보면 ‘저 인간은 왜 저럴까?’ 하고 이해를 못한다. 본인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명스타 출신은 스포츠 감독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자신이 쉽게 하는 것을 선수들이 너무 못하는데 이해를 못하고 화만 낸다. '야 넌 그것도 안되냐?‘는 식이다.

선수시절 잘 못한 선수가 히딩크 된다. 자신이 못하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채워넣으니까. 서구가 발달한 것은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동양에서 아랍에서 아프리카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넣었기 때문이다.

그 블로그를 쓴 양반도 스스로 고백했듯이 미국인 중에는 계산기를 써도 계산이 안 되는 사람 많다. 아멜리 노통도 그렇다. 노통이 하루종일 끙끙거린 문제를 일본인 선배는 10분만에 해결해 버린다.

노통은 플러스사고법 때문에 암산이 안 되는게 아니라, 계산기를 쓰는데도 그 답을 종이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 헛갈려서 잘못 기입하고 만다. 사실 10-5=5나 10 대 5+5나 같은 거다.

이건 긍정적 부정적이 아니고 소극적 적극적이 아니고 같은 거다. 다르지 않다. 상대적인 것은 원래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극좌와 극우는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구조로 보면 보인다.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같다. 부지런한 자는 몸으로 때워서 돈을 벌고, 게으른 자는 머리를 써서 돈을 번다. 결과는 같다. 돈이 벌어지니까 부지런해진 것이고, 계산이 안되니까 플러스법으로 셈하는 것이다.

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과학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당연한 상식을 의심해야 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과학 교과서를 의심했다. 예컨대 황새는 왜 물에서 한쪽다리를 들고 있을까?

체온을 절약하기 위해서로 나와 있다. 아마 초등 3학년 아니면 4학년 방학공부 책에 나온 것일텐데. 나는 1초만에 이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관찰해보니 비둘기도 닭도 오리도 한쪽다리를 들고 있었다.

관찰해보고 안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관찰한 것이다. 물새만 한쪽다리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새가 한쪽다리를 들고 있었다. 의심되면 이미지 검색을 해보시라.

시골 초등학생의 대발견. 교과서가 틀렸고 문교부가 틀렸고 선생님이 틀렸다. 근데 이걸 어떻게 논문으로 써서 어디에다 발표하지? 나의 좌절은 시작된 거다. 그 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한 것이 무수히 많다.

다리는 둘이다. 둘이면 뇌가 두 다리에 힘을 배분해야 한다. 뇌가 두 다리를 통제하는 것은 힘들고 한 다리를 통제하는 것은 편하다. 1이어야 한다. 1이 아니면 무조건 답이 아니다.

정답의 법칙에서 말했듯이 답은 몸통이며 몸통은 1이고 팔다리는 2다. 팔다리로 된 것은 답이 아니다. 무조건 1로 막혀야 한다. 막혀서 빼도박도 못해야 한다. 막혀서 똑부러져야 한다.

2는 대체된다. 고무줄처럼 늘어진다. 휘어진다. 한국인이 1.3.5.7.9로 홀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홀수가 입체감을 주기 때문이다. 3은 삼각형이라 안정되고 5는 한 손이 안정되고 7은 소수라서 안정된다.

2나 4는 우회하는 수가 있다. 의자다리가 3이면 균형이 맞는데 4면 수평이 안맞아서 삐꺽거리는 수가 있다. 다리의 체온을 뺏기기 싫으면 깃털로 다리를 덮으면 된다. 빠져나가는 길이 있으면 답이 아니다.

물 밖으로 날아가도 된다. 역시 빠져나가는 길이 있다. 팔다리는 둘이므로 왼팔이 안되면 오른팔을 쓰면 된다. 오른팔도 안되면 다리를 대신 사용하면 된다. 이렇게 대체되는 것은 무조건 답이 아니다.

플러스사고법 때문에 셈못하면 마이너스사고법학원 열어서 대박내면 된다. 모든 미국인이 자녀를 마이너스법학원에 보낼거다. 마이너스 사고법은 1분만에 배울 수 있다. ‘더하지 말고 빼거라’ 수업끝. 땡!

기존의 과학시스템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서구에서 들여온 시스템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말고 의심해야 한다. 구조론은 그 부단한 의심의 결과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혈액형 담론을 들 수 있다.

최근에 떠오르는 학문이 뇌과학이다. 컴퓨터의 발전으로 뇌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나는 뇌과학의 발달에 의해 10년 안에 혈액형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가 나올 것으로 예견한다.

이런 위험한 예견을 구태여 하는 이유는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예견하여 맞혀서 여러번 재미를 봤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은 초기부터 직립했다거나 지놈 유전자는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1초만에 알았다.

오늘 뉴스에도 떴지만 초기 인류는 침팬지 무리와는 달리 나무에 오를 수 없는 신체구조를 가졌다. 발목이 꺾이는 각도가 다르다. 이는 과학계의 통설과 어긋난다. 나는 이걸 배우는 순간에 알았다.

초기인류가 직립하지 못하고 등이 구부정하다면 등이 덜굽거나 더굽거나 간에 적당한 각도가 선택된다. 선택되면 가짜다. 이건 무조건이다. 인간은 나무에서 살거나 아니면 땅에서 산다.

나무에서 살면 다리가 짧아야 하고, 땅에서 살면 다리가 길어야 한다. 다리가 길면 직립해야지만 그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필자가 직관적으로 알아맞힌 것이 매우 많다.

혈액형은 적혈구 뒤에 단백질이 하나 더 붙은 것인데 뇌 속으로 적혈구가 돌아다니면 호르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호르몬은 확실히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이에 대한 흔한 반격이 바넘효과로 치부하기다.

바넘효과는 균일하게 나타나므로 A형과 B형 사이에서 균일해야 한다. 대립구도로 나타나면 바넘효과가 아니다.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는 식의 대립구도로 나타나는건 바넘효과가 될 수 없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은 바넘효과가 아니다.  여자도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여길 수 있고, 남자도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여길 수 있다.

대칭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무조건 바넘효과가 아니다. 점장이가 찾아온 손님에게 ‘당신 집에 우환이 있어서 왔지?’ ‘어떻게 아셨죠?’ 이건 바넘효과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우환이 교통사고인지, 아니면 아들의 입시문제인지는 바넘효과가 아니다. 이건 서로간에 대립되므로 바넘이 될 수 없다. 입시문제로 왔는데 ‘남편때문에 왔지?’하면 남편때문에 온것으로 여겨지나?

점장이의 예측은 경험에 따른 통계학이다. 점장이의 과학이다. 무수히 점을 쳐봤기 때문에 척 보고 아는 거다. 또 흔한 반격 중 하나는 ‘무수히 많은 성격을 어떻게 네 가지로 규정할 수 있느냐’는 거다.

그럼 융은 왜 내향형, 외향형 둘로 나눴지? 인디언은 거의 O형인데 이건 네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다. 백인은 대략 A형 아니면 O형인데 이건 두 가지다. 중요한건 통계학적 유의미성이 있느냐다.

영화를 보고 곧장 집으로 가는 비율, 야외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비율, 까페나 술집, 서점으로 가는 비율을 조사한다. O형이 A형보다 15프로 이상 특정 코스를 선택하는 확률이 높다면 통계학적 유의미성이 있다.

인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여러 요소들 중에 혈액형도 한 가지 소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서구에 혈액형 성격학이 없는 이유는 B형과 AB형이 드물기 때문이다. A형과 O형이 충돌할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논의가치가 없다. A형과 B형이 충돌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건 실제로 문제가 일어났으며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거다. 90프로의 학생들이 혈액형을 믿는다면 중대한 문제다.

혈액형별 성격분류는 가짜다 하고 선언하면 문제가 해결되나? 현장에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런 식으로 과학 안에 비과학이 얼마든지 있다.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자아이에게 치마를 입혀 여자로 키우면 성격이 여자가 된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지금은 호르몬 작용에 의해 여자와 남자의 뇌가 다르게 발달한다는 사실이 규명되었다.

혈액형 문제도 조만간 밝혀진다. 나는 이런 것을 1초만에 알 수 있다. 생각해보고 아는게 아니라 그냥 안다. 절대음감이 있는 사람이 음을 바로 알아맞히듯이 바로 아는 것이다. 절대음감이 있다면 1초도 안 걸린다.

바닥에 발이 닿는 느낌이 들면 정답, 동사가 아니라 명사로 설명되면 정답. 내부에 메커니즘이 탑재되어 있으면 정답. 상대적인 판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판단이면 정답. 바로 나와준다.

둘 중에서 선택하면 가짜. 의하여가 아니라 위하여이면 가짜(주로 진화론에서, 공룡이 번식하기 위하여, 생존하기 위하여 하는 식, 어떤 새는 보호색인데 어떤 새는 눈에 띄는 색이다. 선택되면 위하여다.)

심 1로 막히면 정답, 날 2로 짝지으면 오답. 바로 나온다. 새가 한쪽다리로 서야 균형잡기 편하다. 뇌가 몸을 통제하기 편하다. 이렇게 세부사항을 따져보지 않아도 그냥 안다. 무조건 1이어야 한다.

벽돌을 쌓을 때는 어긋나게 쌓아야 한다. 그래야 2가 아니라 1이 된다. 벽돌을 田자 모양으로 가지런히 쌓으면 귀가 물리지 않아 분리된다. 2가 된다. 2가 되면 무너진다. 1이 되면 안정된다.

한국의 돌담은 수평으로 쌓지만 일본의 돌담은 마름모꼴로 쌓는다. ◇로 쌓으면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 왜? 1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선 상하는 중력에 의해 1로 통일되어 있다. 좌우가 문제다.

좌우로 흔들리면 어떻게 될까?  ◇ ◇로 쌓으면 좌우로 진행하는 힘 ↔가 이웃한 돌에서 ↕로 꺾인다. 인접한 돌이 위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힘의 방향이 꺾여서 1을 성립시킨다.

왜 에펠탑은 빗금 모양으로 이루었을까? 그래야 1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면 위와 아래가 위← 아래→로 방향이 다르게 밀릴 수 있다. 2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 하면 ↗로 작용한 힘이 ↖를 만난다.

즉 위에서 →로 간 힘이 다시 아래로 내려와서 →로 가기 때문에 힘이 한 방향으로만 전달되어 휠 수 없게 된다. 이렇듯이 힘의 진행이 1이 되면 안정된 구조, 2가 되면 위험한 구조다.

이런건 실험을 하지 않아도 그냥 나오는 거다. 2면 무조건 오답, 1이면 무조건 정답이니 볼 것도 없다. 정답을 고민할 필요없이 그냥 정답의 법칙만 외면 된다. 멀리서 답을 찾을 필요도 없다.

물고기 꼬리는 좌우로 흔들리지만 어떤 경우에도 몸통은 앞으로 간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도 뒤에 키가 있기 때문에 범선은 앞으로 간다. 이때 꼬리는 2 몸통은 1이다. 바람방향은 2 범선의 진행방향은 1이다.

몸통은 정답 꼬리는 오답이다. 문제는 어디가 몸통이냐다. 몸통은 앞에 있다. 앞만 찾으면 된다. 어디가 앞인가? 움직여보면 된다. 움직임이 먼저 시작되는 곳이 앞이다. 기관차가 끌면 객차가 간다. 기관차가 앞이다.

이를 정치에 비유하면 좌우로 갈라진 여야는 오답. ‘그래도 대한민국은 발전하는 길로 가야한다’는 국민은 정답이다. 여야가 다 국민을 판다. 어디가 국민인지 모르겠으면 선거를 해보면 된다.

무조건 몸통이 정답, 무조건 앞부분이 몸통, 움직여서 사건이 먼저 시작되는 부분이 앞부분이다. 이렇게 공식이 나와 있다. 이걸 외기만 하면 된다.

정답의 공식
- 몸통 1은 정답, 팔다리 2는 오답이다.
- 앞에오는 것이 몸통, 뒤에 오는 것이 팔다리다.
- 움직여 보아서 사건이 먼저 시작되는 지점이 앞부분이다.

오전은 오후에 앞서고 탄생은 죽음에 앞선다. 이건 절대적이다. 상대주의자라고 해서 오후가 먼저라거나 죽음이 먼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간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필자의 주장은 진보나 보수가 아니라 과학의 입장이다. 결국은 과학이 승리한다. 과학은 냉정하다. 기존의 굳어진 편견과 통념으로 보면 과학은 비도덕적이다. 이를 마키아벨리즘에 비유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돈 키호테의 세르반테스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이후 최초의 근대인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오해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사회학을 만들었듯이 마키에벨리는 정치학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모든 비난은 색안경을 낀 교회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신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그리고 강자가 아닌 약자의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체자레 보르자의 메디치 가문은 유럽의 열강 가운데서 약소국이었다. 메디치 가 문장에 알약 여섯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알수 있듯이 원래는 힘없는 약장수집안에 지나지 않았다.

강자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물리력을 쓰면 된다. 그 방법은 교회를 앞세우고 신을 파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메디치 가문과 같은 약자의 입장에서는 외교적 책략을 써야 한다.

적을 속이고 술수를 사용하라는 내용은 마키아벨리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봉건인들이 지어낸 술수일 뿐 마키아벨리즘의 진정한 알맹이는 이성과 휴머니즘이다.

신의 이름을 내걸고 자행되는 전쟁을 막고 인간을 회복하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본질이다. 프랑스로 시집간 메디치가의 왕녀 카트린에 의해 마키아벨리즘은 일정부분 전쟁을 외교협상으로 대체하는 성과를 올렸다.

나는 종교적 윤리적 편견과 인습에 가득찬 과학과 싸운다. 그 틀린 과학 중에는 진보의 얼굴을 한 부분도 있다. 모든 비과학은 진보가 아니다. 마키아벨리즘이 못마땅해도 그것이 과학이면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은 때로 못마땅하다. 다만 머무르지 않고 계속 진도나가준다. 그러한 진도나가기에 의해 과학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수습한다. 그러므로 과학을 믿고 과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보 안에 종교적 도그마가 너무 많다. 자본주의는 악 사회주의는 선 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는 동력을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재앙을 키울 뿐이다.

갈릴레이가 진실을 말하기 전에는 교회가 적반하장격으로 과학을 표방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짜 놓은 프레임이 진정한 과학이며 사이비한 갈릴레이가 이를 흔들었다고 주장했다.

구조론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이단으로 몰린다. 좌파가 짜놓은 프레임이 사회의 진보를 막기도 한다. 당차게 그 프레임을 깰 지적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 과학을 표방한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 프레임.
● 과학을 표방한 좌파의 마르크스 프레임.

아리스토 텔레스는 분명 뛰어난 과학자였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이전시대에 비해 뛰어났을 뿐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과학이 필요하다. 21세기를 해석할 수 있는 과학은 구조론이다.

ps.. 과거에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이나 범죄행위로 여겼지만 지금은 '뇌가 다르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인 일부가 셈을 못한다면 셈치로 볼 수 있다.

주변에는 음치도 많고 박치도 많고 길치도 많다. 여성과 남성의 운전습관도 다르다. 그러한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을 꾀하는 것이 진보다. 무조건 똑같다고 우기기 때문에 동성애자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생긴다.

http://gujoron.com


[레벨:6]id: 서피랑서피랑

2009.04.15 (10:30:12)

때론 정답을 말하고도 왕따 또는 싸가지 아니면 빨갱이로 몰리더군요.

단장 후 처음 인사 올립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4.15 (10:43:19)

그렇게 누군가를 왕따, 싸가지, 빨갱이로
몰아버리는 수법이 섬이나 반도로 고립된 나라에서의 생존술이지요.

수 틀리면 이웃나라로 튀면 그만인 유럽에서는 통하지 않는.
한국은 기본적으로 나라 땅덩이가 작고 만만한 이웃나라가 없고

인구가 많으며 선택의 폭이 많지 않아서 사회적 긴장이 높습니다.
기본적으로 가두어져 있고, 구석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몰아붙이면 네가 어쩔테냐?'하는 심리가 있어요.
땅이 넓은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

그러나 한국도 인구감소가 시작되었으므로 30년 후에는 달라집니다.
조금 더 여유있는 사고가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든 거기에 상대방이 말려들지 않고
회피하는 방법이 발달하게 되므로 사회적 긴장이 낮아집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4]꼬치가리

2009.04.18 (11:05:08)

음치 길치는 알것는데 박치는 뭐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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