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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926 vote 0 2006.09.25 (20:46:12)

 

김인 9단의 일침.

“그동안 한국바둑은 과분한 호사를 누렸다. 몇몇 신예들이 가끔 이창호를 넘어서니까 다른 신예들도 모두 자신과 세계 정상의 거리를 너무 짧게 본다”.

최근 세계기전에서의 부진한 성적에 역정이 난 김인 9단의 꾸짖음을 인용하였다. 관련뉴스(‘한국바둑 최대의 적은 자만’이라는 제목의 스포츠칸 기사 클릭)

요즘 한국 바둑이 요즘 고전하고 있다는데.. 필자가 뜬금포라도 쏘아서 한국 바둑계를 진단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옵고.. 돌부처 이창호를 논하려는 것이다.

어쩌다가 이창호를 한 번 이겼다 해서.. ‘이창호 만큼 둔다’고 생각하는 신예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창호는 한 번 진 상대에게 두 번 지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창호의 욕심은.. 상대방이 가진 실력의 최대한을 끌어내는 데 있다.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도 건너지 않는 신중함 때문이기도 하고, 첫 판을 져도 둘째 판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창호는 첫 판에 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이세돌이 이창호를 2 : 0으로 이기고 있을 때도.. 기자의 누가 이길 것 같으냐는 질문에 조훈현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래도 이창호다’라고 말했다는데.. 결국 이창호가 2패 후 3연승으로 LG배 기왕전 타이틀을 방어했다. 이것은 5년 전 이야기다.(요즘은 이창호가 3연패를 당하기도 한다니까.)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래도 이창호

신의 한 수.. 라는 말이 있던데 .. 신의 한 수는 어떤 것일까? 결론은 신의 한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왜인가? 신이라면 고작 한 수로.. 신 자신의 완전성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을테니까. 세상을 만만히 보지 말라. 더 넓고 더 깊고 더 큰 세계가 있다.

최고의 바둑은 승자나 패자나.. 자신이 가진 실력을 남김없이 토해놓은 한 판일 것이다. 이창호에게는 상대가 가진 실력의 전부를 끌어내려는 본능이 있다. 그러다보니 두어본 사람 중에.. 이창호와의 대국은 ‘지도대국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좋은 바둑은 상대를 이기고 상대를 제압하고 상대를 박살내는 바둑이 아니라 상대의 숨은 힘을 남김없이 끌어내는.. 그러므로 후회없는 한 판인 것이다.

상대방이 가진 힘을 바닥까지 완전히 끌어낼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고수다. 고수와 한 판을 둔다면.. 이기고 지는 일과 상관없이 자신의 기력이 급상승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좋은 바둑은 통쾌하게 이기는 바둑이 아니고 만방으로 이기는 바둑이 아니다. 이창호는 최고의 바둑을 두고 싶어 한다. 상대방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수를 두고 자신도 역시 최고의 수로 맞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압박하여 작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국면에서도 굳이 추궁하지 않는 배려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국면의 복잡함을 피하고 단순함을 추구하는 까닭이다.

고수가 대마싸움의 복잡함을 피하는 이유는.. 국면이 복잡할수록 우연성이 끼어들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바둑이 극도로 단순하게 진행된다면.. 단 반집 차로 졌다고 해도 패자는 결과에 승복할 수 밖에 없다. 실수로 졌다거나 혹은 운이 없었다거나 하고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 이창호와의 승부에서 지면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신의 한 수는 없고.. 신이라면 2연패 후 3연승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의 최선에 자신의 최선으로 맞서는 것이다.

어쨌든 초반에 기선제압을 해서 상대방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멸하게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더욱 미학이 아니다. 반집차로 져도 패자가 전혀 아쉬움이 없는 완벽한 한 판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바둑은 집 짓기 시합이 아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바둑은 집을 짓는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361로의 바둑판은 그 자체로 투명한 한 채의 완성된 건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완벽하게 지어진 집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게임이 바둑이다.

집 짓기와 집 허물기.. 그것은 관점의 차이다. 무엇이 다를까?

9개의 화점은 그 투명한 건물의 급소다. 급소는 기둥과 대들보가 만나는 접점이다. 그 부분을 타격하면 건물은 일시에 와르르 무너진다.

바둑이 중앙의 천원이 아닌 변방의 화점 부근에서 시작하는 것은 완성된 건물을 해체하기 위하여 지붕의 기왓장부터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기둥과 대들보부터 쳐내는 것과 같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점이 아니라 화점에서 옆이나 아래로 한 칸 이동한 위치다. 기둥에서 한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도끼를 휘둘러 기둥을 찍어내는 것이다.

지붕에서 기왓장 한 장을 벗겨낼 때.. 그 에너지는 바둑판 전체에 전달되지 않는다. 울림과 떨림이 없다. 그러나 기둥 하나를 온전히 무너뜨리면 그 에너지는 그 건물 전체에 완전히 전달된다.

무엇인가? 첫 한 점을 놓을 때.. 그 울림과 떨림이 바둑판 전체에 전달되어야 한다. 거기서 거대한 긴장감이 유발되어야 한다. 못 하나를 빼면 와르르 무너지는 건물이 있을 수 있다. 첫 한 점을 두었을 때 이미 못 하나가 빠져나간 것이다.

바둑은 밸런스의 게임이다. 첫 한 점은 아무데나 놓아도 되지만.. 그 건물 전체의 밸런스를 흐트려 놓는 완벽한 한 방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아름답다.

 

완벽한 연주

연주자가 프레이즈를 시작할 때 작게 시작하지만, 그 프레이즈 전체의 기운을 담고 있는 것처럼 부분은 전체와 공명할 때 완전하다.

하나의 프레이즈가 그 곡 전체의 기운을 온전히 담아내고 그 곡의 생명성과 긴장감과 밸런스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 나아가 첫 음이 그 프레이즈 전체의 기운을 담아내는 것이다.

최고의 연주자라면.. 하나의 곡은 길게 이어진 선(線)이 아니라.. 콩나물 대가리라는 점(點)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동그라미다. 그 곡 전체의 밸런스들의 집합을 하나의 동그란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연주의 첫 음은 바둑의 첫 한 수와 같다. 그 울림과 떨림은 곡 전체에 완전히 전파되어야 한다. 완전은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의 완전이다. 그것은 소설에서 기승전결의 완전이기도 하고, 희곡에서 3막 5장의 완전이기도 하고 교향곡에서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완전이기도 하다.

신의 몫이 ‘제시’라면, 자연의 몫은 ‘전개’, 인간의 몫은 ‘재현’이다. 신은 전체를 표상하고 인간은 부분을 달성한다. 부분의 완성으로 전체의 뜻을 담아내는 방법으로 신의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 르네상스 이래 추구된 고전주의의 정신이다.

인간이라는 보잘것 없는 작은 한 부분이.. 신의 설계한 바 우주 전체의 기운을 온전히 담아내는 방법으로 신의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성’이라는 개념의 전제가 필요하다. 바둑이 빈 공간에 집을 지어가는 게임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361개의 벽돌로 이루어진 투명한 집을 허물어가는 게임이라는 말은 그러한 뜻을 담고 있다.  

361로의 바둑판은 그 자체로 완전한 건축이다. 첫 한 수는 그 건축의 주제를 제시한다. 그 곡 전체의 기운을 담아낸다. 곡은 밸런스와 밸런스의 대결이다. 바둑 역시 밸런스와 밸런스의 대결로 점철된다.

높은 음과 낮은 음의 대칭이 있는가 하면 빠른 음과 느린 음의 대결도 있다. 이러한 대칭구조가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연주자는 30분이나 1시간 동안 그 곡의 구석구석에서 이를 묘사하고 탐색하고 풀어낸다.

높은 음역에서도 풀어내고 낮은 음역에서도 풀어낸다. 그것은 마치 파트너의 몸 구석구석 애무하여 잠들어 있는 감각을 낱낱이 깨워내듯이 거듭 조이고 풀어주면서 완전히 소진시키는 것이다.

제시는 긴장의 제시다. 전개는 밸런스의 전개다. 재현은 부분과 전체의 공명이다. 이들은 각각 초반의 포석, 중반의 행마, 종반의 끝내기를 담당한다. 하수의 눈에는 이것이 차례차례 진행되지만 고수의 눈에는 한꺼번에 동시에 진행된다. 포석 단계에서 이미 끝내기 수순을 보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명언

도공이 백자 달 항아리를 빚을 때 완전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어야 한다. 백자 달 항아리가 가치있는 이유는 백자를 굽는 흙으로는 그 정도 크기로 대형 항아리를 만들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양이 좋은 달항아리는 국내에 5점 정도 밖에 없다고 한다. 해외에 유출된 것까지 다 합쳐도 몇 십점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백자 달 항아리는 그 만치 만들기가 어렵다.

무엇인가? 백자 달 항아리는 부분을 쌓아 전체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크기가 큰 항아리를 만들기는 쉽다. 된장독 만들듯이 다른 흙을 조금 섞어주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백자가 아니다.

달항아리는 처음부터 완전의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백자를 굽는 흙으로는 그 이상 크게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완전히 동그란 모양의 백자 달항아리는 세상에 없다.

백자 달항아리는 약간 이지러져 있다. 완전을 고민하고 완전을 탐색하고 완전에 도전한 도공의 땀과 눈물과 고민의 흔적이 그 약간은 이지러진 모양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왜 달항아리에는 아무런 그림도 장식도 부여하지 않는 것일까? 왜 상감을 넣어 장식하거나 그림을 그려놓은 달항아리는 없는 것일까?

그림이라도 그려넣었다가는 도공이 완전을 고민하고 완전을 탐색하고 완전에 도전하고 완전의 문제에 부닥쳐 애쓴 증거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공은 거기에 조금도 손 댈 수가 없다.  

미켈란젤로는 ‘작품은 돌 속에 원래 숨어있는 형상을 살려내는 것’이란 말을 남겼다. 조각가는 돌을 쪼아 점차 작품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돌안에 숨어있는 완전한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처음부터 있었던 완전성에 숨결을 불어넣고 이름을 붙여주어 되살려내는 것이다. 조각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처음부터 그 돌 속에 숨어 있었던 완전성을 되도록 손상하지 않고 되살려내기 뿐이다.

 

정상에서 본 풍경

하수 위에 중수 있고, 중수 위에 상수 있고, 상수 위에 고수 있고, 고수 위에 달인있고, 달인 위에 명인 있고, 명인 위에 대가 있고, 대가 위에 도사 있고, 도사 위에 지존 있고, 지존 위에 세존 있고, 세존 위에 하느님 있고, 하느님 위에 백성있다. 실력차가 있고 기량차가 있고 수준차가 있다. 굳이 이렇게 열거함은 그 차이가 작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하여간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않는 것이 좋다. 정상에는 더 넓고 더 깊고 더 큰 또다른 세계가 있다.

18급에서 1급까지의 실력 차이는 매우 크다. 그것은 하수와 중수와 상수와 고수의 기량차이가 큰 것과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프로 1단과 프로 9단의 기력 차이는 불과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상을 한 번 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한다. 중턱에서는 정상이 보이지만 정상에서는 또다른 정상이 보인다. 정상에서는 정상과 정상의 또다른 만남이 빚어내는 하모니가 보인다. 정상에서 보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그것은 중턱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정상에 도달하면 아래를 굽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거기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중턱에서 보면 정상은 가만히 있다. 정상은 변하지 않는다. 정상은 돌부처처럼 우두커니 있다. 그러나 정상에서 보면 다르다.

정상은 분주하다. 정상은 긴장한다. 정상은 설레인다. 정상은 쉬지 않는다. 무엇인가? 18급과 1급의 차이가 1이라면 이창호와 이세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와 같다. 거기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8급과 10급의 차이는 무(無)다. 무의미하다. 등산을 한다면 그렇다. 집에서 출발하여 산악회 버스를 타고 집결지에 모인다. 18급과 1급의 기력차이라는 것은 집에서 버스를 타고 집결지에 도착하기 까지의 여정에 불과하다. 실력차이는 분명 있지만 미학으로 보고 의미로 보면 거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도공은 단 하나의 흠집만 있어도 망치로 깨뜨려 버린다. 도공의 입장에서 100프로가 아니면 무(無)다. 18급이나 7급이나 1급이나 도공이 무심하게 망치를 휘둘러 깨버리기는 매 한가지다.

프로 1단에서 9단까지의 기력차이는 집결지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의 기력차이와 같다. 역시 큰 차이는 아니다. 계곡에서 보는 것 보다 중턱에서 보는 것이 더 시야가 넓고 전망이 좋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인가? 정상에서 한 걸음 남겨놓고부터 달라진다. 정상에서 한 걸음 못미친 위치와 정상에서 본 풍경의 차이가 집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집결지에 모여서 등산을 시작하여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차이보다 더 크다.

1에서 99까지의 차이보다 99와 100의 차이가 더 크다. 그것은 양(量)의 차이가 아니라 질(質)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비상(飛上)한다. 18급과 1급의 차이가 무(無)와 같다면 이창호와 이세돌의 차이는 우주와도 같다. 한국의 신예들은 김인 9단의 말씀을 새겨들어 그 이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선등자는 누구인가?

선등자는 다 죽고 후등자가 선등자의 몫을 가로챈다는 말이 있다. 암벽을 타는 산악인들은 그렇게 자조하곤 한다. 용기있게 선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깎아지른 벼랑에 매달려서도 동료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선등자의 몫이다. 산악인에게 듣기로 한 번이라도 제 힘으로 루트를 개척하고 선등을 하여 명명권을 행사하며 정상을 밟아본 사람의 인격은 이후로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어떻게 다른가? 타인과 비교하고 평가하고 채점하고 품평하는 인격에서 탈피하여 정상의 경지를 탐미하고 연주하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비교하고 평가하고 채점하기에 부지런한 사람인가 아니면 연주하는 사람인가? 타인의 성과를 놓고 품평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창호가 그러하듯이 상대방이 가진 실력을 온전히 끌어내는데 전념하는 사람인가?

인간들 사이에서 난무하는 이런저런 투덜거림들은 결국 ‘나는 상대방에게서 그 미(美)와 선(善)과 진정성을 십분 끌어내지 못했다는 실패자의 자기고백에 불과하다.

‘저녀석은 뭐를 잘못했어.’ 하는 말은 ‘나는 저 사람에게서 진짜 실력을 끌어내지 못했어.’ 하는 말이다. 그것은 결코 자랑이 아니다. 상대방의 최고를 끌어내는데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기에 성공한다면 승패와 무관하게 상대방을 칭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불만은 그렇다. 왜 정상을 욕망하지 않고 중턱에 주저앉아 거기서 점방(店房)을 열려고 하느냐 말이다. 정상이 바로 저긴데 왜 거기서 ‘뻥튀기 있어요 삶은 옥수수가 맛나요’ 하고 주절대고 있느냐 말이다.

저 높은 곳에 빛나는 완전함이 있다. 고개를 들어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기를 주저하지 말라. 정상을 욕망하라. 신의 완전성을 네 안에서 재현하라. 거기서 연주하고 춤 추라. 정상에서 초극을 노래하라.

 

노무현의 돌부처 정치

처음 이 글을 구상할 때는.. 노무현의 정치가 이창호의 바둑이 그러하듯이.. 상대방의 숨은 힘을 밑바닥까지 닥닥 긁어내는 정치라는 점을 말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고수가 달리 고수가 아니고.. 자신의 힘은 되도록 숨기고 상대방의 힘은 몽땅 쏟아붇게 하는 사람이 고수다. 명계남, 이기명, 김두관, 이런 사람들은 자중해서 우리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숨겨놔야 한다. 막판 뒤집기를 하려면 그렇다.

그러나 보라. 오늘도 김한길이 고건을 팔아서 연명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대연합론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런 짓은 우리 진영의 숨은 힘을 상당히 노출시키고 훼손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당이 민노, 민주, 고건, 국심당과 대연합을 성사시킨다면.. 이건 역으로 한나라당이 우리쪽 진영의 힘을 밑바닥까지 완벽하게 긁어낸 격이다. 그 경우 완벽하게 말려든 것이다. 어휴 인간들 하고는.. 바보 아냐?

전술이 별거냐. 우리는 최소의 탄약을 소비하고 반대로 상대방은 가진 탄약을 몽땅 쏟아붇게 하는 것이 전술이다.

노무현은 역전의 명수다. 창이 먼저 확실히 대세를 잡았는데 몽과 연대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몽과의 여론조사에서도 몽이 먼저 앞서갔는데 뒷심을 발휘하여 역전시켰다.

이후 재신임파동이나 탄핵때도 그렇다. 첫게임을 내주고 뒤에 역전시킨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적의 힘은 완벽하게 끌어내고 이쪽의 힘은 최대한 아껴두었기 때문이다.

이창호가 뒷심이 있다.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는 신중함으로 힘을 아껴두는 것이다.  

어떻게 잔머리 굴리고 협잡해서.. 지역감정 조금 이용하고.. 인위적인 정계개편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짓.. 졸장부 짓이 아닐 수 없다. 혼전을 만들어놓고 상대방의 실수에 편승하여 운좋게 이기기.. 이건 이창호 바둑이 아니다.

지금 어렵지만.. 생각해 보면 모든 상황은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는 분명 나보다 머리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왜?

뒷심의 노무현, 뚝심의 노무현 아닌가. 노무현이 자초한 일이니 잘못돼도 노무현 탓이고 잘돼도 노무현 탓일 텐데.. 생각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인데 도무지 무엇이 그리 걱정이라고 그렇게 사시나무 떨듯 하는가?

불안해 할 것 없고 우왕좌왕 할 것도 없다. 이창호는 언제든지 2연패 후 3연승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조훈현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래도 이창호라고 말했듯이 나 역시 말할 수 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래도 노무현이다.

걱정 말고 길게 보고 원칙대로 가자. 설사 딴거지들이 정권 가져간다 해도 금방 되찾아올 수 있다. 민주화 세력을 소외시킨 탁신의 몰락, 같은 코스로 에스트라다의 몰락, 후지모리의 몰락, 와히드의 몰락에서 보듯이 정통 민주화 세력이 참여하지 않은 정권은 모두 망하게 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딴나라는 정권잡아도 망할 수 밖에 없게 세팅되어 있다. 걱정도 팔자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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