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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347 vote 0 2006.08.08 (11:31:19)

실존주의.. 이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 말은 본래 뜻이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냥 존재라고 해도 충분한데.. 굳이 실존이라고 하니 뭔가 멋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굳이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 근거는?

그렇지만 이 말은 용도가 다양하니 생명력이 길 것이다. 생각하자. 실존이란 무엇인가? 아니 그 이전에.. 실존이 아닌 것은 또한 무엇인가?

인간은 시스템 속에 갇혀 있다. 그 시스템은 1차적으로 사회다. 사회 이전에 2차적으로 자연이다. 자연 이전에 3차적으로 신이다.

인간은 신과 신의 진리로부터 일차적으로 보호된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이차적으로 보호되고 사회와 가족공동체로부터 3차적으로 보호를 받는다.

무엇인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고민할 사항이며..

더 나아가 마을의 촌장님이나 나라의 대통령이 고민할 사항이며.. 내게 직접 닥친 상황은 아니므로 일단 그 문제를 피해갈 수 있다는 거다.

더 나아가 세계 대통령을 자처하는 부시 원숭이나.. 오늘도 지구 방위에 여념이 없는 독수리 오형제나..

혹은 슈퍼맨과 배트맨을 비롯한 각종 맨류들이 걱정할 사안이지.. 힘없고 미미한 존재인 내가 나설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단 안전하다. 문제가 있다 해도 아빠가, 서울시장이, 대통령이, 부시가 걱정하고 더 나아가 역사가 고민하고 진리가 걱정하고

자연이 해소하고 신이 해결할 일이지 그것이 어찌 당장 내 앞에 닥친 내 문제이겠는가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된다구.

그렇다. 세월이 흐르면 자연이 자연스레 해결한다. 한국과 일본이 조낸 싸운다 해도 그것은 지구라는 생태계 안에서 적자생존을 도모하는..

자연의 질서에 불과하니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레바논과 이스라엘 또한 자연의 형평원리에 의한 자정작용의 일종으로 생존경쟁 이론에 따라

강한 넘이 살아남을 것이니.. 우리는 잠자코 지켜보다가 굿이 끝나면 떡이나 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전쟁의 포탄이 내 눈앞에서 작열하면? 가족이 죽고 형제를 잃으면? 병에 걸려 죽음앞에 서면?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으면?

그리운 사람과 부득이하게 헤어져야 한다면? 실존주의는 양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나타난 사상이다. 설마가 아니라 아뿔사다. 우리는 보호받고 있지 않다.

가족이라는 우산, 사회와 공동체라는 우산, 국가와 세계와 신이라는 우산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식의 어리광은 7살 때 까지만 허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내버려진 존재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안전한 요람의 신세를 질 수 없다. 인간은 고아처럼 버려졌다.

신도, 진리도, 자연도, 역사도, 국가도, 사회도, 가족도, 형님도 그대를 보호하지 않는다. 시스템을 믿지 말라!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고독하게..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그대는 독립하였지만 한편으로 버려진 것이다.

실존적 자각.. 그것은 그대가 누구의 보호도 받지 않는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절절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때는 철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철들지 않았다. 가족을 찾고, 사회를 찾고, 국가를 찾고, 신을 찾고 방패막이가 되어줄 시스템을 찾는다.

누군가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믿음. 정의, 의리, 명분.. 제도, 법률, 원칙, 상식.. 이런 것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기대.

그 믿음을 날려버려야 한다. 그것이 실존적 환멸이다. 세상에는 심지어 국제법이나 UN 따위를 믿는 얼간이도 있다. 우낀 소리.

정의도 없고 의리도 없고 명분도 없다. 국제법도 없고 UN도 없고 심지어는 국가도 없다. 법률도 제도도 상식도 원칙도 교과서도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

가족이라는 것도.. 기실 그대의 전화를 그대의 아내나 남편이 친절하게 받아주는 동안만 유효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하기사 아직 당신의 통화는 잘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다. 레바논에서의 11살 소녀의 통화는 끊어졌다. 아무도 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진실로 말하면 그대는 혼자다. 가족도 사회도 공동체도 국가도 법률도 제도도 원리도 원칙도 상식도 정의도 없다.

그러한 이름들은 당신이 당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떠넘기기 위해 고안해 놓은 허상이다. 17살 때 까지만 유효하게 작동하는. 그러므로 환멸이어야 한다.

그 환멸을 넘어섰을 때 실존적 지평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럴 때 그대는 신대륙으로 간다. 혼자서 간다.

그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 새로운 세계에서 당신은 부족의 족장이다. 족장의식을 가져야 한다.

당신이 모든 사태를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족장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족장에게는 거꾸로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바로 당신의 문제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꼬마가 쪼르르 달려와서 당신에게 해결책을 묻는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문제로 울면서 다가와 당신에게 엉긴다.

부당하게도 당신에게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신의 고독을 이해하는 일이다. 당신이 신 입장에 서는 것이다. 당신이 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스라엘 애들이 쪼르르 몰려와서 울면서 “아부지요. 헤즈볼라 쟤들이 때렸는데요. 때찌해 주세요.” 이러고 엉기면 어쩌겠는가?

“이스라엘 네가 더 잘못했어. 짜샤!” 하고 굴밤을 멕이겠는가? 그런 식으로 함부로 개입하면 일은 터무니없이 복잡해지고 만다. 개입할 수 없다.

싸우는 두 사람을 말리는 유일한 방법은 파이를 늘리는 것이다. 먹을 것이 두 배로 늘어나면 인간은 싸우지 않는다.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나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의 크기를 늘릴 수는 없다. 크기를 늘리지 않고도 늘어난 효과를 내는 방법은?

그것은 소통이다. 막힌 곳을 뚫고 길을 열어야 한다. 정보와 물산이 더 빠르게 이동하면 그만큼 더 넓어진 효과를 얻는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파이를 늘리기 위해서는? 무질서한 예비상태가 존재해야 한다. 신대륙이 예비되어야 하고 황야가 존재해야 하고 배후지가 있어줘야 한다.

모든 것이 질서화 되면 가족의 질서, 가부장의 질서, 사회의 질서, 국가의 질서, 법과 제도와 윤리와 예의와 에티켓과 매너와 교양과 상식과

원칙과 원리의 질서.. 그 질서들에 의해 질식당한다. 그렇게 꽉 막혀 있어서는 소통할 수 없다. 새로 길을 낼 수 없다. 예비자원을 동원할 수 없다. 파이를 늘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서로간의 간격을 벌려야 한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싸우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한국과 네덜란드 만큼 떨어져 있다면

서로를 그리워할 것이다. 질서의 폭주를 막는 무질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황을 교착시키는 일이다. 남자의 폭주에 제동을 거는 것은 여자다.

만약 여자가 없었다면 남자끼리 전쟁해서 인간은 씨가 말랐을 것이다. 지식의 폭주에 제동을 거는 것은 대중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다.

부시의 폭주에 제동을 거는 것은 인도와 중국과 러시아의 연합이다. 부시가 폭주할 수록 러시아와 중국과 인도는 이익이다. 그들의 힘은 자연스레 커진다.

계는 평형이탈하여 새로운 차원의 평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지식인은 대중의 폭주를 두려워 하지만 나는 지식의 폭주를 두려워 한다.

지금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서울대와 강남을 중심으로 한 학벌주의가 조선시대의 사농공상 신분질서로 되돌려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질서의 강한 힘이 실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 힘을 파괴하고 해체해야 한다. 질서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강호의 호걸들이 나와줘야 한다.

각 분야에서 한 가닥 하는 고수들이 자기들끼리 편먹고 떼거리 짓고 조직하고 회합하여 힘을 내는 지식 위주의 주류질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 질서를 강제하는 폭력과 질서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힘이 맞서서 황까황빠현상을 낳은 것이다. 그것은 일방이 폭주하려 할 때 제동을 거는

자연의 자동보상 작용이다. 그러므로 군중을 봉기시켜 난리를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저강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질서를 만들려고 하는 욕망.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질서, 정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질서.

학교와 언론을 중심으로 한 지식집단의 질서, 제도와 법률과 자본에 의존하는 기득권 집단의 질서.. 이 모든 질서에 의존하려는 노력.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응석이다. 그 질서를 깨뜨려서 당신이 철저하게 혼자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한다.

가족과, 공동체와, 국가와, 자연과, 하느님이라는 5중의 안전한 보호막 아래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그러므로 레바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부시나 코피 아난과 같은 윗선에서 고민할 사항이며 말단의 나는 몰라도 된다는 당신의 믿음을 나는 쳐부수려고 한다.

아직도 제도를 믿고, 사회를 믿고, 공동체를 믿고, 가족을 믿고, 아내를 믿고, 친구를 믿고, 의리를 믿고, 원칙을 믿고, 상식을 믿고,

국제법을 믿고 미국을 믿고 하느님을 믿는가? 그런 어리보기와는 대화 안한다. 당신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려 할때 ... 응석 부리며 달려들 때..

“헤즈볼라 애들이 때렸어요. 때찌해 주세요.” 하고 엉길 때 하느님은 짜증이 나는 것이다. 당신은 왜 하느님이 아닌가?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당신은 버려진 존재라는 사실을.

시스템에의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에서 헤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실존이란 가족과, 국가와, 사회와, 제도와, 하느님이라는 5중의 방패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당신이 2차대전이라는 재앙을 만나 ..

시스템이라는 보호막이 깨졌을 때의 당신의 전략을 묻는 것이다. 어쩔 것인가? 그때 당신은 어쩔 것인가?  당신이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시스템의 해체에 대비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수 있는 황야라는 이름의 자궁을 예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는 더 무질서한 상태로 스탠바이 상태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기득권과 주류질서와 자본의 폭력과 지식의 횡포에 대응하여 저강도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 전쟁은 영원히 지속된다. 변방에서 나의 싸움걸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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