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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167 vote 0 2005.10.05 (21:52:55)

(데일리 칼럼이 뜨기 전에는 펌하지 마오)
  
여전히 대통령 얼굴만 쳐다 보는 박정희 세대의 슬픔

근간 경향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다수는 노무현 대통령이 일을 잘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의 퇴임은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유권자들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유권자들이 대통령께 상당히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기대를 버리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욕구불만이 쌓여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러하다. 며칠 전 음식점에서 배 나온 50대 남자 네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한 배불뚝이 아저씨가 말했다.

“오늘 자 동아일보 시론 봤나. 거 참 잘 꼬집었더군. 박정희가 18년 독재 했는건 뭐라 그러면서 김일성 부자가 50년 간 해먹은건 왜 가만있나 말이야. 그거 참 기가 막히게 잘 꼬집었어. 그런데 노무현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안본다구. 노무현이 이걸 봐야 되는데 말야. 거 참 잘 꼬집었는데.”

그들은 무릎을 치며 탄식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그들은 여전히 대통령께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대통령이 자기네들 쪽을 쳐다봐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일생 동안 한나라당만 찍었을 그들이 미련을 못버리고 무언가를 아쉬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대통령은 탈권위주의를 실천했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에서 총체적으로 권위라는 것이 작아졌다. 가부장 남성은 집안에서 권위를 내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회사 사장들은 종업원 앞에서 위신이 깎였다. 교장선생님은 제자들 앞에서 더 조심하게 되었다. 주성영은 술집에서 큰소리도 못치게 되었다. 시어머니들은 며느리 눈치를 더 자주 보게 되었다.

대통령 한 사람의 권위가 꺾인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힘있는 자들의 권위가 작아진 것이다. 그 박탈감이란 참으로 큰 것이다. 많은 대한민국의 가진 자와, 힘있는 자와, 웃어른들이 상실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개혁의 바른 작용이면서도 부작용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개혁의 부작용은 금방 나타나고 효과는 서서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수술의 아픔은 당장이지만 환부의 새살은 천천히 돋아나는 것이다.

50대 남자의 박정희 이야기는 황당한 거다. 김일성 부자의 독재는 물론 나쁘지만 그걸 시비하자는건 전쟁 하자는 거다. '수신 제가' 후에 '치국 평천하'라 했다. 박정희 찌꺼기를 청소하는 것은 '수신'하여 내 몸을 닦는 것이고, 북한 형제를 걱정하는건 '제가'하여 가족을 아우르는 일이다. 김정일 문제는 당연히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다.

그런데도 그 50대 아저씨의 푸념이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박정희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박정희 귀신 뒤에 숨어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그들은 독재자에 대한 비판을 박정희 세대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대통령의 탈권위주의로 해서 그들이 실질적으로 기득권을 제약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명백히 가부장은 집안에서 위신이 깎였고 시어머니들은 며느리 눈치를 더 보게 되었으며, 교장선생님은 평교사와 학생들의 입장을 더 헤아려야 했고, 기업가는 노동자의 눈치를 더 보게 되었다. 심지어 삼성의 이건희 조차도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는 필연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다.

그들은 하소연하고 있다. 박정희 뒤에 숨어서 실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집안에서 자신들의 가부장된 작은 권력을 빼앗기기 싫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나도 불쌍한 가장이야’ 이런 표정이다.

그렇다면? 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도 장은 담가야 한다. 그들의 푸념소리가 귀엽기만 하다. 그들은 그 방법으로 욕구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맞다. 그렇게 불만은 털어버리고 우리는 또 진도 나가는 것이다. 그들의 푸념이야 말로 개혁이 잘 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나는 믿는다. 인간을 믿는 것이다. 알고보니 그들도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들도 위대한 한국인들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푸념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통령이 고개를 돌려 상실감에 빠진 자기네 처지를 돌아보고 어루만져 주기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기대하고 있는 그들의 가엾은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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