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5289 vote 0 2005.08.18 (22:51:53)

성경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말씀이 첫 번째일까?
말씀 이전에 ‘뜻’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뜻 없이는
말씀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은 뜻을 실어서
전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태초에 ‘완전’이 있었다.
뜻 그 자체로는 완전한 까닭이다.

말씀이라는 운반수단에 의존하면서
모든 불완전이 시작되었다.

###

처음 신의 뜻을 빌어 완전이 있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이브처럼 그때 우리는 완전하였다.

이상의 높은 고지로부터 비추인
그 완전의 빛이 우리들 개개인의 가슴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실현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신의 말씀으로 실어 전한 뜻을
비로소 인간이 재현해 보여야 한다.

###

문제는 그 완전이
그 어떤 시간과 장소에 붙잡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 어디에서도 완전을 찾을 수 없다.
‘어디’ 혹은 ‘언제’ 찾으려 하는 한 찾을 수 없다.

완전은 다만 소통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대와 내가 소통할 때 그 소통된 정도 만큼만 완전하다.

또 우리가 소통에 실패할 때
그 소통에 실패한 정도 만큼은 불완전하다.

###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소통을 시도한다면 어떨까?

결혼이 목적이라면
만남에서 결혼까지 걸리는 시간은?

3개월? 6개월? 혹은 1년?
우선 만남에 이르는 과정 조차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섹스가 목적의 전부라면
더 쉽게 소통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소통하려 하지만
우리의 소통은 얕고 얇은 범위에서 가능할 뿐이다.

그 상스러움을 넘어 성스러움에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더 깊고 더 밀도있는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

나의 전부를 들어
당신의 전부와 만날 때 우리의 소통은 완전해질 수 있다.

###

한 송이 꽃은 한 마리 나비를 유인하기에 성공하는 것으로 완전할 수 있다.
한 마리 나비는 그 꽃에 꽃가루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완전할 수 있다.

그 방법으로 꽃과 나비는 소통한 것이며 그 순간 꽃과 나비는 완전해졌다.
그러나 우리의 소통은 늘 어제의 표절이거나 내일의 예고편이다.

그것은 복제된 것이고 짜깁기 된 것이며
그것은 습관이고 타성이고 진부한 것이다.

그런 식이어서는 불완전하다.
먼저 개인이 완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무리’로부터 독립하여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

완전은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의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그것은 기승전결의 완전, 3막 5장의 완전, 그리고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완전이다.

프레이즈를 시작할 때 작게 시작하지만, 그 프레이즈 전체의 기운을 담고 있는 것처럼 부분은 전체와 공명할 때 완전하다.

신의 몫이 ‘제시’라면, 자연의 몫이 ‘전개’가 되고 인간의 몫은 ‘재현’하는 것이다. 부분으로 전체의 뜻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작은 한 부분이 신의 설계한 바 우주 전체의 기운을 담아내는 방법으로 완전할 수 있다.

###

‘완전’은 미학은 근본적인 주제이다.
여기서 완전은 소통의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글자는 힘들여 한 명에게 전달할 수 있지만
예술은 100만명에게 바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글자는 부분을 이야기 하지만 예술은 전체를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전달하려는 목표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1세기가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가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종교는 적어도 전체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려고 한다.

설사 그것이 틀린 내용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과학은 많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다.

잘 모른다는 이유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도 포기해 버린다.
그런 식이어서는 진짜가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포기한 소통을 위하여,
종교가 실패하고 있는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예술이 필요하고, 미학이 필요한 것이며
그 예술을, 그 미학을 내 안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

우리는 또 만나야 하고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우리는 게시판으로도 만나야 하지만

이상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진정 만나야 한다.
눈으로만 만나지 말고 혼으로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겠지만
그 만남이 진정 술맛이 나는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신 앞에서의 동행자로 만나야 한다.
땀냄새를 공유하는 만남, 삶의 의미를 공유하는 만남

영혼의 빛을 공유하는 만남이어야 한다.
우리는 좋은 친구로 만나야 한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423 지만원은 솔직한 조선일보 2005-09-06 15857
1422 유시민과 정혜신 2005-09-05 14805
1421 한국의 북해유전은 어디에? 2005-09-05 16282
1420 최장집과 노무현 2005-09-05 15312
1419 소리 지르는 자 2005-09-02 17775
1418 오마이뉴스는 그렇게 까불다가 언제 한번 된통 혼날 것이다. 2005-09-01 12595
1417 우리당 일각의 내각제설에 대하여 2005-08-31 17616
1416 노무현, 그리고 진정한 사랑 2005-08-31 15113
1415 대를 이어 친일하는 박근혜 2005-08-30 14145
1414 경주 남산의 세가지 보배 image 2005-08-30 16997
1413 노무현식 산파정치(아제님 글입니다) 2005-08-28 13828
1412 곽호성이라고라? 2005-08-23 12461
1411 본 감독의 퇴장에 부쳐 2005-08-23 14212
1410 손석희와 노무현의 TV대담 2005-08-20 14016
» 밀도있는 만남을 위한 조언 2005-08-18 15289
1408 문희상은 물러가라 2005-08-18 12475
1407 실용정당의 몰락 2005-08-18 13770
1406 정동영아 김근태야 2005-08-17 15455
1405 얼굴보고 반한다는건 허튼소리(마광수의 경우) 2005-08-16 16803
1404 조갑제, 죽음의 키스 2005-08-16 16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