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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317 vote 0 2009.03.04 (21:32:39)

죽음이란 무엇인가?
- 동영상 강의 해설입니다. -

 

1.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 연관시키는 방법 (삶 속으로 풍덩 뛰어들기)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자신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에 더 많이 개입하고 깊숙히 관련될수록, 삶의 비중은 올라가고 죽음의 비중은 낮아진다. 삶에 연관되는 방법은 창작이나 연구, 일 외에도 다양한다. 돈, 권력, 명성, 식욕 따위를 탐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삶에 더 밀접하게 연관되는 방법으로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닐까?

● 단절시키는 방법 (죽는 연습으로 극복하기)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세상과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과의 사슬을 끊고 해탈을 얻어 죽음을 극복할수 있다. 모든 경제적, 육체적, 사회적 결핍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죽음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다. 삶에서 보다 많은 것을 잃을수록 죽음의 무게는 더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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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허구적인 관념 그 자체를 명석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늘 하는 말이지만 빛은 있어도 어둠은 없다.그  실체가 없다.

죽어본 적 없으면서 함부로 죽음을 말하면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삶과 그 삶의 완성, 그리고 째깍째깍 다가오는 완성의 시한이다.

어둠이 빛의 결핍에 불과하듯이 죽음은 삶의 결핍에 불과하다. 인간이 진정 두려워 하는 것은 삶의 실패다. 삶의 공허다. 삶의 무의미다. 그것을 죽음이라는 단어로 대표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은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원초적 본능이다. 인간은 막연히 두려워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어둠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 두렵다.

벌레가 두려운가? 호랑이가 나타날까 두려운가? 귀신이 나타날까 두려운가? 함정에 발이 빠질 것이 두려운가? 그 실체가 없다. 그럴수록 무섭다. 달걀귀신이 무서운 이유는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얼굴이 없어서 무섭다.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두렵다. 귀신은 가짜다. 가짜라서 무섭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말하면, 두려움은 인간의 본능이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으로 다가서게 하는 신의 수단이다.

게으런 인간들에 대한 신의 다그침이다. 그러므로 삶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의 반대편에서 적극적으로 삶을 희구해야 한다. 지우개로 어둠을 지우려 들 것이 아니라 삶의 촛불을 켜야 한다.

월든의 소로와 같이 삶 그것을 온전한 자기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제 삶이 온전한 제것이 아니고, 타인을 의식한 연극이기 때문에, 역할게임이기 때문에, 타인을 의식한 삶이기 때문에, 가짜라서 두려운 것이다.

진실로 말하면 인간은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이 고픈 것이며 우리는 늘 삶에 굶주려 있다. 문제는 두려움 자체가 아니라 두려움의 증폭이다. 긴장이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죽음을 상상할 때 인간이 긴장하는 것이 문제다. 그 점이 굉장히 중요한 사건으로 되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머리속을 맴돌며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방해한다. 죽음의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상상할 때 긴장하는 이유는 근원의 허무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삶이라는 항아리를 하나 가지고 태어난다. 그 항아리에 의미와 가치와 미션을 채워넣어야 한다. 그 방법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채워넣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삶에 주려서 죽음을 생각할 때 마다 긴장이 되어서 작은 두려움이 크게 증폭되어서 자연스러운 우리의 일상이 방해받으니까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사랑으로서 죽음은 극복된다. 세상과의 관계맺기를 통한 의미와 가치와 미션의 획득이다. 나아가 그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완성이다. 그럴 때 빛이 어둠을 물리치듯 죽음이라는 관념은 사라진다.

● 죽음이(명사) 두렵다.(동사)
● 무엇을(명사) 사랑한다.(동사)

착각해서 안 된다. 죽음이라는 관념은 명사, 두려움은 동사다. 명사는 가짜다. 헛된 관념이다. 진짜는 동사다. 동사는 행동이고 따라서 실재한다. 명사를 버리고 동사를 취해야 한다.

가짜인 죽음의 관념을 바라보지 말고 ‘두려움’ 그 자체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적극 달려들어 해체해야 한다. 사랑 역시 그 대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사랑의 열정 자체를 가득 채워넣어야 한다.

의미와 가치와 미션을 엮어서 하나의 큰 동그라미를 이룰 때 그 열정은 얻어진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작은 이별에서 인류의 큰 슬픔을 헤아려 보는 눈을 얻을 때 비로소 시야가 열리고 열정은 불타오르게 된다.

열정을 얻고 사랑을 받아들일 때 죽음의 두려움은 사라진다. 사랑은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 자신의 마음이 긴장되고 선선하게 깨어있게 된다는 사실, 그것이 우선 순위 1번의 문제로 된다는 사실.

그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다. 뽀뽀 백번하고 문자 백통 보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그 일을 확실히 해두면 다른 일은 술술 풀려서 진도가 잘 나가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은 세상과의 관계맺기다. 자기 정체성의 확보다. 자기 자신의 오리지날리티 획득이다. 자기 일관성이다. 인간은 사랑에 의해 자기다움을 얻고, 일관되고, 안정되며 진정한 삶에 도달하게 된다.

그럴때 죽음의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것은 자기 주변의 사람과 확실한 관계를 맺는 일이다. 연인이든 부부든 부모든 자식이든 선후배든 제자든 스승이든 확고한 관계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자기 포지션을 완성하기다. 또 자기가 관심을 두는 분야에서도 미학적 양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일이든 취미든 사회적인 포지션이든 아름답게 완성하여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것이다. 진짜는 신과, 그 신의 진리와, 그 진리의 나타난 바 되는 역사와, 그 역사의 결실인 문명과, 그 문명의 본질인 약자의 편에서 동지가 되는 것이다.

세상과 한 편이 되어 그 인류네트워크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인류와 함께 호흡하기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기다. 그럴 때 오케스트라의 합주처럼 전 인류의 마음이 내게 메아리쳐 온다.

거대한 울림과 떨림이 있다. 리듬이 있고 멜로디가 있다. 그 사이에 빛이 있다. 그 빛으로 자기 내부를 가득 채우기다. 외롭지 않게 된다. 그렇게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미션의 획득이다.

그럴때의 모습은 붓다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죽음은 얼굴이 없다. 실체가 없다. 빛이 아닌 그림자니까. 달걀귀신처럼 죽음의 얼굴이 없어서 더 무섭다. 허무가 무서운 거다. 진짜 얼굴은 삶에 있다. 삶의 의미와 가치와 미션에 있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의 전개다. 사실은 열심히 사는 것, 의미는 세상과 연결되는 것,(부부든 가족이든 동아리든 일이든) 가치는 그 중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여 짜임새있게 사는 것이다.

그 다음은 개념. 개념을 얻어야 삶이 삶답게 된다. 그것이 미션. 미션이 없기 때문에, 삶에 개념이 없기 때문에, 삶에 나사가 빠져서, 자신이 왜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 허무가 엄습, 공허가 덥쳐서 두려운 것이다.   

그 다음은 원리. 원리는 신과, 진리와, 역사와, 문명과, 약자의 편에서 하나됨이다. 장성하여 출세한 자식을 둔 부모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듯이 신과 한 편이 될 때 인간은 죽음을 극복한다.

실로 말하면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생에 일어나지 않는다. 삶의 다함이 있을 뿐. 시한이 다하기 전에 그 삶을 아름답게 완성하라는 신의 채근을 받는다. 인간은 삶의 완성에 주려있을 뿐이다.

극장에서 흥미있게 보는 영화가 제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초조한 마음. 즐거운 방학도 끝이 다가오니까 두려운 것. 왜냐하면 방학숙제를 안했으니까. 그러나 이미 숙제를 마쳤다면 어떨까?

이미 삶을 완성한 붓다라면 어떨까? 매일이 재방송이요 리바이벌. 언제 죽어도 후회는 없다. 두려움도 없다. 이미 세상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가서 세상 그 자체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근본 삶의 허무에 기인한다. 삶에서 자기다움의 미학적 완성에 실패하고, 자기가 자기답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편이 어디인지 모르고 허둥댄다면 그때마다 허무가 엄습한다.

그 허무가 조금씩 잠재의식에 축적되어 있다가, 죽음의 관념을 떠올릴 때 마다 두려움으로 공격하여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반성하게 한다. 왜 진정한 자기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왜 사랑 속으로 풍덩 뛰어들지 않는가? 왜 진정한 내편을 찾지 않는가? 왜 신의 내민 손을 덥썩 잡지 않는가? 왜 밝은 빛 가운데로 성큼 걸어나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허둥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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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의 어원은 live. live의 어원은 leaf. leaf는 너풀(ruffle)거린다. 잎새가 바람에 나비처럼 너풀거리듯.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 삶, 삶이 사랑. 살아서 마음이 나비처럼 살랑살랑 나풀거리게 하는건 사랑.

사랑이 살랑살랑 나풀(live)거릴 때 삶은 완성. 세상과 하나로 연결되어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이 내 마음에 live로 생중계될 때, 그 울림과 떨림이 내 속을 가득채울 때 두려움은 진정으로 극복된다.

http://gujoron.com


[레벨:3]우리보리

2009.03.05 (08:01:54)

눈물....
[레벨:1]백당시기

2009.03.13 (11:57:51)

먼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35억년 생물의 진화와 유전으로 각인된 본능임을 인정하는 것이 낫다.
그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으면 않된다. 그것이 생물학적 본능이던 아니면 사회적 관계에서 학습된 것이던.

그렇기에 모든 살아있는 유정들이 두려워하는 그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인간이 아니던가? 인간이 신을 닮아 전지전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을 본능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인식하고 있다면 그 두려움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다. 도교의 방식으로 영원불사를 추구하는 것이다. 방법만 잘 찾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교의 일부 종파도 그런 방식으로 행하고 있다. 영생교가 그런 방식이다.

둘째, 예수교나 이슬람교처럼 사람은 죽어도 육체만 죽는 것이지 영혼은 영생불사한다는 것이다. 

셋째,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재생을 말하는 힌두교, 윤회를 말하는 불등이 있다.

넷째, 단멸론이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어차피 죽는데 뭐가 두려운가? 따라서 살아 있을 때 실컷 인생을 살아라.
          그것이 쾌락이 되었던, 서원이 되었던.

위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숙명론도 있다. 어차피 정해진 것이니 아무런 노력도 필요없다. 되는 대로 살면 된다는 것도 있다.
또한 존우론이라고 하여, 절자대인 신이 모든 것을 다 좌지우지 하는데 신경쓸 일이 무엇이겠느냐라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여러가지 것들을 잘 엮어 개인적 결단을 하는 것이 맞다. 진실이나 과학적 성과등과는 별 관계없이 자신을 설득할 수 있고 자신이 스스로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 믿는 것이 맞다. 스스로 만들어낸 논리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자기가 만들어낸 논리에 안주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을 왔다가는 입장이니
나에게 이롭고/남에게도 이롭고/나나 남인 인간들만이 아닌 모든 것에게 이롭고/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이롭고/단기적인 이익보다는 지속적으로 유지가능하게 이롭고/// 이런 것들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고, 나도 좋고/남도 좋고/모두가 좋고/더욱 좋고/쭈욱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게 우리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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