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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575 vote 0 2009.01.28 (20:39:38)

바람이 불다

그것은 하나의 생각이다. 하나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처음 그것을 생각해낸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그 생각이 이루어져가는 시간과정을 따라가며 접근경로를 추적해 보는 것이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내 소년시절 이야기 하는 것은 그 인식의 근간을 이루는 깨달음의 성립에서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합리론이냐 경험론이냐’, ‘연역법이냐 귀납법이냐’ 하는 방법론적 접근경로를 분명히 해두려는 의도에서이다.

말한 적이 있다. 철학이란 그 어떤 책의 서문을 쓰는 일이라고. 법학책의 서문을 쓰면 법철학이 되고 역사책의 서문을 쓰면 역사철학이 된다. 마찬가지다. 인생이라는 드라마의 서문을 쓰면 인생철학이 된다.

무엇인가? 유년기다. 유소년기에 내 인생의 서문이 씌어져 버렸다. 소설이라면 첫 페이지가 가장 중요하다. 문예공모의 심사위원들은 원고지 첫 매의 첫 한 단락을 읽어보고는 곧장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고 한다.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심사위원들에게 읽혀지기까지 성공하려면 첫 문단을 잘 써야 한다. 신과의 관계맺기에 성공하려면 인생의 첫 시작점을 잘 찍어야 한다. 구조론은 존재의 서문을 쓴 것이다. 거기서 대략 결정된다.

서문의 서문

걸작의 서문을 모아서 책을 엮는다면 어떨까? 훌륭한 소설이라면 그 첫 페이지에 명문이 있는 경우가 많더라. 어떤 일이든 그렇다. 서문을 쓰는 것이 제일 어려운 법이다. 첫 시작 부분이 가장 힘들다.  

첫 페이지라면 몇 백번이라도 고쳐쓰고 싶을 것이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그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덞 달 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

또 이상의 ‘날개’ 서문을 인용하면.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 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 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 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로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놓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이런 서문이 마음에 든다. 어떤 글이라도 그 글의 정수는 서문에 모여있는 법이다. 서문은 그 책의 전부를 하나의 컷으로 압축하여 담아보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본 풍경’과도 같다.

박상륭이나 이상이나 정상에서 본 풍경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무엇인가? 무릇 인생이란 것은.. 소년이 15세 때 본 것을 두고 자기표절에 자기복제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말할 자 누구인가?

모든 소설가는 자신의 처녀작을 복제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얻은 깨달음의 크기는 초발심에서 일어난 의심의 크기와 같다. 새끼오리가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알고 따라가는 각인효과처럼.

생각하면 나는 인생이란 것의 서문을 쓰고, 또 그 서문의 서문을 쓰고, 그 서문의 서문의 서문을 지금껏 고쳐 쓰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점점 유년기에 다가간다. 처음 본 것이 그 사람의 일생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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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살 아니면 일곱살일까. 처음 남산 해목령 고개 위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서울은 과연 어디쯤일까. 저 산 너머너머너머 어딘가에 석관동 누나가 산다는 서울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장면.

내 발길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가 어딘가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잘 가늠되지 않았던 거. 정상에서 외친 고함은 그 산 전체에 전달된다. 조그만 마대 하나에 갈쿠리 들고 땔깜하러 뒷산에 오른다.

해목령 게눈바위에 오르면 경주 시내가 보인다. 시가지를 보고 놀랐다. 어쩌면 저것이 말로만 듣던 그 서울일지도 몰라.

“형아. 저기가 서울이야?!”
“저건 시내야. 서울은 저 산 너머 너머 너머 너머 까마득히 멀리 있어.”

문득 불안해졌다. 서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전모를 볼 수 없다는 것.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작은 세계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 어쩌면 끝내 바깥세계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산너머 중턱에 집이 한 채 있다. 송아지만한 동물이 한 마리 보인다.

“형. 저기 사자 있어.”
“저기에 사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동물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세계가 저 산 너머너머에 있었으며, 나의 작은 동그라미(바운더리)와 그 커다란 동그라미(세계)가 그렇게 충돌하고 말았다는 거다.

나중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열 번도 넘게 왕복했다. 이 나라 땅덩어리가 작다는걸 확인했다. 빠른 걸음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열흘거리. 옛날 짐꾼들은 90키로 짊어지고 하루 백리씩 갔다고.

소년의 나, 저 산 너머 어딘가에 있을 서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아쉽고 미진한 느낌을 반추하면서, 그 보이지 않는 산 너머너머너머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 산과 들판과 강과 바다 사이에 상상력으로 채워넣기.

경주에서 서울까지.. 그 산과 들과 강과 도시 사이를 상상력으로 채워넣는 과정이 인생이라면, 내 인생의 서문은 그때 그 해목령 봉우리 위에서 씌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첫 페이지가 넘어가고 다음 페이지가 열린다는 불안감.

서울의 ‘서’는 정수리의 ‘수리’와 같은 의미다. 꼭대기다. 산봉우리 이름을 흔히 수리봉이라고 하듯이. 그래서 서울로 가는 열차는 항상 상행선이고 서울 가는 길은 내리막이라도 올라가는 길이다.

정상은 어디일까? 여섯살, 일곱 살 때 나의 정상은 남산 중턱에 해목령이었다. 정상에서 본 풍경을 아는 사람은 더 큰 정상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한번 정상을 본 사람은 일상의 시시한 일에는 시큰둥해져 버린다.

정상을 본 사람의 시야는 넓어지고 성격은 대범해져 버린다. 그것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동그라미가 된다. 그 정상의 이미지로 가득 채워버리기다. 이후 모든 아이디어는 그 이미지의 자궁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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