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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190 vote 0 2020.06.28 (19: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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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이 감독의 역할 일부를 떠맡아 영화를 직접 편집해서 봐야 하는게 규칙이라면 그 바뀐 룰을 당신은 받아들일 것인가?



    영화 사라진 시간의 미덕


    한식은 양식의 관점에서 보면 덜 조리된 음식이다. 직접 쌈을 싸야 하는가 하면 손님이 직접 고기를 불판에 올려서 구워야 한다. 다 구워진 고기를 내와야 정상인데 생고기를 내오다니. 외국인이 한식을 처음 보면 기겁한다. 심지어 살아있는 낙지를 손님이 보는 앞에서 토막 친다.


    비위가 약한 외국인이라면 그 장면을 보고 도망칠 것이다. 이거 동물학대 아닌가? 그러나 한식의 방법에 익숙해지면 혀로 느끼는 맛 외에 직접 조리하는 맛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그 세계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도망칠 것인가?


    양식은 조용하게 먹어야 한다. 한식은 뜨거운 국물을 입으로 호호 불고 난리다. 후르르 쩝쩝 소리를 내며 먹는다. 중국인은 대화를 나누며 요란하게 먹는다. 외국인은 그것을 혐오한다. 식사 매너도 모르는 동양인들 같으니라구. 교양이 없구만. 천만에. 나라마다 규칙이 다른 거다.


    양식은 선택권이 없다. 고기는 구워져서 나온다. 미디엄인지 레어인지 미리 정해야 한다. 그러나 한식은 자신이 직접 구워 먹으면 된다. 한 번은 살짝 익히고, 다음은 바싹 익히고 입맛대로 구워 먹을 수 있다. 의사결정하고 그에 따라 돌아오는 결과를 알아보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맞아떨어진다. 이렇게 구우면 이런 맛이 나겠지. 어라? 예상과 다른 맛이 나네. 탐구하는 재미가 있다. 스무 가지나 되는 반찬 중에 온갖 조합이 가능하다. 좋잖아. 한식의 방법이 싫다면, 인생을 그런 자세로 삐딱하게 산다면 당신은 세계의 절반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의사결정하는 재미, 탐구하는 재미, 참여하는 재미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다. 영화 사라진 시간은 한식처럼 반쯤 조리된 음식을 관객이 각자 조리해 먹어야 하는 불편한 영화다. 펄프픽션도 처음에는 불편했다. 벙찐 사람이 많았다. 평론가들이 이게 대세라고 말해주니 납득되었다.


    요즘은 시간을 뒤섞어 놓는다거나 하는게 유행이다. 일부러 불편하게 만든다. 이케아 가구도 마찬가지다. 반제품을 관객이 직접 조립해야 한다. 이제는 관객이 영화 안으로 상당히 들어온다. 관객에게 편집권 일부를 내준다. 좋잖아. 그 안에서 권력의 작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정진영 감독의 사라진 시간. 이런 영화 좋다. 왜냐하면 스포일러가 있어도 욕먹지 않을 것 같으니까. 식스센스 이후 반전영화는 사라졌다. 식스센스가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이후 관객은 감독의 테크닉을 의심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사라진 시간은 제목부터 스포일러다.


    초반의 부부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다. 아내는 전지현이고 아들 둘은 박지성과 박주영이다. 그런게 어딨어? 비현실적이라는 말이다. 초반에 나오는 부부의 연기도 연극처럼 비현실적으로 한다. 마을 사람이 모두 회관에 모여서 나 하나를 속여 먹이려고 한다는 설정도 비현실적이다.


    밤이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도 비현실적이고 그렇다고 자물쇠를 달아서 사람을 감금한다는 내용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은 어지간히 비현실적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은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이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하는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충돌이다.


    거기에 어떤 아찔함이 있다. 비현실을 받아들이는 지점에서 현실은 시작된다. 주인공은 저항을 포기하고 마침내 비현실을 받아들인다. 관객은 별점테러를 포기하고 마침내 영화를 받아들인다. 평행세계의 충돌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다들 그렇다고 하니 맞춰가며 살밖에.


    말도 안 되는 영화지만 평론가들이 극찬한다고 하니 관객이 맞춰줄밖에. 그것은 또 다른 리얼리즘이다. 실존주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건 개소리다. 평행세계든 꿈이든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만들기 쉬워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게임의 규칙을 살짝 틀어버리면 영화가 된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저게 그림이라면 나도 화가 하겠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것이 진일보요, 이 영화의 성취다. 저렇게 엉성하게 찍어도 영화가 된다면 나도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자들이 이 영화를 극찬한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비난할 것인가 옹호할 것인가? 양식만 고집하는 편이냐 한식도 받아들이는 편이냐? 어쩌면 당신은 또 다른 평행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영화를 옹호하는 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진 자에게 발언권이 있고 세상은 바로 그러한 권력의 법칙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 속에 이야기를 간직하지 않은 자는 자동적으로 을이 된다. 그들은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불평을 던진다. 감독의 제안에 반응하는 특별한 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20.06.30 (04:14:24)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진 자에게 발언권이 있고 세상은 바로 그러한 권력의 법칙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http://gujoron.com/xe/121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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