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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786 vote 0 2020.04.13 (14:45:39)


    천재의 비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따르면 천재란 규칙을 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과제를 잘 수행하는 사람을 수재라고 부른다면 창의적인 사람은 천재라고 부른다. 머리가 좋은 건 아니지만 남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를 연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천재라고 불리는데 이게 칸트가 말한 맥락이다. [나무위키]


   천재는 리얼리즘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천재다. 이 말은 우리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영화 초록물고기에 한석규가 기차 안에서 양아치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있다. 여러 번 재촬영을 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감독이 실제로 때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실제로 때렸더니 그게 지금까지 찍은 것 중에서 가장 어색했다고 한다. 박찬욱은 올드보이에서 좁은 공간에서의 액션을 성공시켰는데 말이다. 리얼은 리얼이 아니다. 필자가 감독이라면 주변 공간을 활용했을 것이다. 액션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벽에 부딪혀서 되돌아오는 반동력을 촬영해야 리얼이 산다.


   한석규가 양아치들에게 얻어맞아 머리를 기차 벽에 부딪혀서 반동으로 튀어나올 때 땀방울이 사방으로 튀는 장면을 찍었어야 했다. 가짜 피를 조금 뿌려주면 효과 백 배다. 그게 리얼이다. 과거 국군이 반공영화 찍는 충무로 감독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탱크행렬이 지나가는 장면을 찍도록 협조한 적이 있다.


   국군이 매번 전차를 내줄 수 없으므로 한꺼번에 찍으라는 거다. 다른 감독들은 촬영에 정신이 없는데 신문기자가 지켜보니 임권택 감독만 여유 부리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임권택 감독은 그 장면을 초가집 담장 너머로 찍을 계획이어서 전차행렬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추가된 거다.


   필자가 꼬맹이 때 처음 본 영화는 임권택의 울지않으리였는데 도입부에 형이 자전거를 타고 비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너무 역동적인 화면이어서 한동안 자전거 타기가 무섭게 여겨졌다. 74년인데 핸드헬드로 찍은 것처럼 보였다. 보통이면 레일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편안하게 찍는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의 일점이 있느냐다. 하나여야 한다. 임권택은 몹씬을 잘 찍는데 군중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여야 한다. 김두한과 구마적이 종로에서 대결한다면 구경꾼은 두 싸움꾼의 움직임에 따라 일제히 쏠리곤 하는 것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군중이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게 보여진다.


   이소룡 영화라면 군중은 보나마나 동원된 고등학생들인데 너무 늘어지는 촬영시간 때문에 지쳐서 피곤해하며 억지로 서 있다. 졸고들 있다. 이소룡은 군중을 단지 배경으로 썼을 뿐이지만 임권택은 구경꾼들에서조차 에너지를 끌어냈다. 즉 군중은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이며 일점이 존재한다.


   코어가 있다. 대칭이 작동하고 있다. 김두한과 구마적 두 싸움꾼과 지켜보는 군중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전선이 있고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으며 밀당이 일어나고 있다. 그 긴장감을 보여줘야 한다. 보통사람은 보지 못하는 그것 말이다. 우리는 사실 평면을 볼 뿐 눈으로 입체를 보지 못하고 더욱 밀도를 보지 못한다.


   무게중심을 보지 못한다. 코어를 보지 못한다. 의사결정 지점을 보지 못한다. 코어가 있으면 소실점이 있고 계의 통일성이 있다. 고흐는 무언가를 본 사람이다. 고흐는 그것을 정념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그림의 배경이 대체로 어두웠다. 어두컴컴하고 묵직한 공기 속에 끈적끈적한 코어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아를에서는 그림이 밝아졌는데 고흐는 일본의 우키요에를 연구하여 밝은 색감의 대칭 속에서 나름의 코어를 발견한 것이다. 우키요에는 극단적인 원근의 대비를 활용하고 있다. 고갱의 그림은 고흐의 초기작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고갱도 무언가를 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타이티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그것은 타이티 소녀의 검은 팔뚝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양감이었다. 고갱도 거기서 생명력의 에너지를 포착한 것이다. 아를에서 그린 고갱의 그림은 평면적인데 타이티에서는 입체적이다. 무언가 하나가 추가된 거다. 그것은 원근의 대칭이기도 하고 강렬한 원색의 대비가 되기도 하고 굵직한 양감이 되기도 한다.


    사진은 전혀 리얼을 담아내지 못한다. 기운을 담지 못한다. 저녁 시간의 묵직한 공기를 담아내지 못한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잎새의 싱그러운 느낌을 담아내지 못한다. 보이는 대로 봐서는 볼 것을 보지 못한다. 내부질서를 보지 못한다. 리얼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거기서 대칭이 보이고 코어가 보인다.


   전부 연결되어 있음을 봐야 그 중심점을 볼 수 있다. 리얼은 사실이고 사실은 움직이는 것이며 한 줄에 꿰어 전체를 움직이는 근원을 드러내야 한다. 모든 창의가 그러하다. 창의는 보이지 않는 하나를 더 보는 것이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의 배후에서 에너지를 공급하는 절차다. 그것을 볼 때 인간은 전율한다.


   액션이라면 때리는 사람을 찍어도 안 되고 얻어맞는 사람을 찍어도 안 되고 둘의 관계를 찍어야 한다. 때리고 맞는 사람은 둘이지만 그 관계는 하나다. 에너지의 출렁임은 언제나 하나다. 팽팽한 긴장감은 하나다. 올드보이에서 박찬욱은 좁은공간효과로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좁을수록 그 점이 잘 보인다.


   초록물고기에서 이창동은 좁은 공간 때문에 촬영에 실패했다. 초가집 담장 너머로 지나가는 전차부대 행렬을 찍은 임권택은 담장을 이용하여 관측자의 시선을 드러냈다. 즉 탱크가 지나가는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라 담장 너머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심장의 두근거림을 담아낸 것이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다.


    이창동은 소설가이고 임권택은 영화인이다. 항상 그런게 있다. 뭔가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그것은 보인다. 무언가 어색함을 느낀 사람이 그것을 보려고 한다. 이건 아니지 하고 느껴진다. 뭔가 느꼈다면 그게 뭔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찾아내려고 혹은 표현하려고 기를 쓰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노력으로 보이지만 나는 그것이 반응이라고 본다. 둔재는 반응하지 않고 천재는 반응한다. 그 차이다. 바보는 천재를 이길 수 없고,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자기계발서 장사꾼들이 써먹는 거짓말이다. 즐기는 자는 누구인가? 


    그 코어를 본 사람이 즐긴다. 보지 못하면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으면 느낌이 없고 느낌이 없는데 어찌 즐거울 수가 있겠는가? 즐겁지 않은데 어떻게 명상을 한다며 몇 달씩 한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석가가 나무 밑에 6년씩 앉아있었던 이유는 즐거웠기 때문이다. 본 것이 있기에 즐길 수가 있다.


    범재가 갑자기 천재로 돌변할 수는 없지만 천재가 어떤 기술을 쓰는지 안다면 복제할 수 있다. 묻어갈 수 있다. 역사에 천재는 한꺼번에 우르르 등장하곤 한다. 시너지 효과다. 고흐가 무언가를 봤다는데 고갱은 가만 있을 수 있나? 고갱도 무언가를 봐야만 한다. 약이 올라서라도 보고야 만다. 잘 보면 보인다.


    당신이 고흐는 못 되어도 고갱은 될 수 있다. 진정한 천재는 될 수 없어도 묻어가는 천재는 될 수 있다. 분위기를 타면 창의는 한꺼번에 우르르 일어난다. 처음 길을 열기는 어렵지만 열린 길을 넓히기는 쉽다. 탁월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단, 처음부터 작심해야 한다. 다른 것을 꿰뚫어 보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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