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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606 vote 0 2019.12.09 (18:22:05)

      
   인류의 새로운 항해

   
    만일 대재앙이 일어나 인류의 모든 과학지식을 잃게 되었는데 딱 한 문장만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거기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 파인만은 원자설이라고 답했다. 틀렸다. 원자설은 여전히 가설이다. 더욱 양자역학은 원자개념을 깨뜨려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다.


    뉴턴은 원자를 두고 내부가 채워져 있고, 질량을 가지며, 단단하고, 관통할 수 없으며, 운동하는 입자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런 것은 없다. 세상은 원자로 되어 있지 않다. 원자보다 작은 소립자나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도 마찬가지다. 뭐든지 다 틀렸다.


    원자설이 중요한 개념인 것은 사실이다. 원자는 자연의 존재가 아니라 일종의 방법론이다. 수학자가 좌표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 자연에 좌표는 없지만 평면 위에 그려놓으면 이해를 돕는다. 좌표를 이용하면 평면 위에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 물론 꼼수다.


    숫자는 1로 시작한다. 원자는 1과 같다.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고, 지지고, 볶고, 삶고, 달이고, 양념하고 어쨌든 간에 숫자는 1로 출발한다. 어떻든 출발점은 있어야만 하고 원자는 그 출발점이 된다. 틀렸다. 어떤 것을 지목하든지 그것은 공간상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시간은?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며 사건은 시공간상에 존재한다. 원자든 전자든 쿼크든 뭐든 그것은 공간상에 존재한다. 왜인가? 관측자인 인간에 의해 지목되기 때문이다. 지목되면 관측자인 인간과 공간에서 대칭을 이루게 되어 사건의 시간성을 잃고 왜곡된다.


    사건은 자체의 메커니즘에 의해 내부적인 대칭성을 가진다. 외부의 인간과 대칭되는 순간 그 내부 대칭성이 깨진다. 그러므로 관측자인 인간에 의해 지목되는 것은 모두 가짜다. 원자는 기본단위가 될 수 없다. 원자설이 힌트는 되므로 중요한 지식이다. 다만 근본 틀린 지식이다.


    세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과학의 출발점을 정하는 문제다. 기본 중의 기본인 그것은 기본단위다. 우리는 그것을 원자라 부른다. 틀렸다. 존재는 being이다.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사건이다. 세상은 기본단위의 집합이 아니다. 우리는 용감하게 근본의 근본을 질문해야 한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무언가 질문한다는 것은 바른 방법인가? 왜 둘이 마주보고 앉아 질문하고 응답하지? 인간의 언어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묻고 답하기는 근본에 대한 바른 접근법일까? 질문한다는 것은 맞은 편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이미 틀려버렸다는 말이다.


    어떤 것을 바르게 설명하려면 그것을 관측자 맞은 편에 두지 말아야 한다. 관측자와 대상이 대칭을 이루는 즉 잘못된다.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다. 수박이 익었다는 사실을.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사실을. 냄새를 맡고 알 수 있다. 색깔도 정보를 제공한다.


    우리는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으로 정보를 얻는다. 바른 방법일까? 틀렸다.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으로 얻은 정보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장님이 손으로 만져보고 얻어내는 정보는 빙산의 일각이다. 진실한 것은? 세상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 안쪽으로 쳐들어가야 한다.


    ‘A면 B다.’ 이것이 우주의 절대지식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의 지식은 인과율이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인과율을 발전시킨 석가의 연기법이다. 이것과 저것은 마주 보고 있지 않다. 그것은 상호작용이며 존재는 상호작용 매커니즘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세상은 어떤 단단하고 관통될 수 없고 내부가 채워져 있고 질량을 가지며 운동하는 것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것으로도 되어 있지 않다. 숫자는 1로 되어 있지 않다. 세상은 being이며 1의 집합이 아니라 A+B=C다. 존재는 사건이므로 기본단위는 지목되는 개체가 아니라 시간과정이다.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론의 입장이다. 원자론은 틀렸고 구조론이 맞다. 원자론은 관측자가 있고 관측자에 의해 대상이 지목되며 관측자와 대칭을 이룬다. 대상화되고 타자화되고 객체화되는 것이다. 작용에 반작용한다. 그런데 원래 세상은 서로 상호작용할 뿐 반응하지 않는다.


    자석과 쇠붙이는 작용에 반작용하는가? 아니다. 자기장이라는 에너지장 안에서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역사 이래 인류는 작용과 반작용 곧 시간간격을 두고 이해해 왔다. 틀렸다. 전기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천칭의 두 접시처럼 동시에 작용하며 그것은 상호작용이며 이는 다른 세계다.


    세상은 둘이 동시에 움직이는 상호작용 메커니즘에 의해 해명된다. 그것은 외부의 관측자를 배제하는 것이다. 관측자가 어떤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사건은 언제라도 시간상에서 전개되는 법이다. 대상이 공간에서 가리켜져 지목되면 틀려버린 것이다. 사물은 틀렸고 사건이 옳다.


    구조론의 출발점은 원자설의 부정에 있다. 진화론이 맞다면 창조설은 틀린 것이다. 원자설은 관측자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이미 틀렸다.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보든지 그것은 틀린 것이다. 보기 때문에 틀렸다. 왜 보는가? 음악은 보는게 아니다. 그것은 함께 몸을 맡기는 것이다.


    음악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맞은편에서 대적하면 일단 틀렸다. 흐르는 연주에 탑승해야 한다. 버스 안에 파리가 있다. 버스는 부산행 버스다. 파리는 열심히 날아서 부산에 갔을까? 당신이 버스 밖에서 어떤 주장을 하든 그것은 틀렸다. 당신은 버스에 타지 않았으므로 무조건 틀린 것이다.


    구조론의 출현은 좋은 소식이다. 구조론은 인과율을 업그레이드한다.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 둘로 설명한다. 원인과 결과는 공간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인과율이 시간과정임을 알고 있다. 뭔가 어색하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의사결정이 있다. 구조론은 인과율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구조론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통제가능성에 있다. 뉴턴이 말한 원자의 정의는 쪼갤 수 없고, 관통할 수 없고, 어쩔 수 없고, 별수 없다는 거다. 통제불가능성이다. 옛날에는 자연수를 쪼갤 수 없다고 생각했다. 1보다 작은 것은 없다. 그런데 0.5가 등장하자 곤란해졌다. 쪼갰는데 쪼개졌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그것이 존재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것은 이미 쪼개진 것이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절차가 반드시 있다. 아기가 자궁 속에서 자라는 절차가 있다. 그 과정은 아기보다 작다. 아기를 쪼갤 수는 없다. 왜? 그건 살인죄에 해당되니까. 현실의 엉뚱한 접근이다.


    원자를 쪼갤 수 없다는 말은 아기를 쪼갤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신의 분노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만 원자를 만질 수 있다. 인간의 한계는 여기까지 하고 스스로 한계를 정했다. 왜? 선을 넘으면 피곤하니까. 판도라의 상자는 열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 그런데 이미 열렸다. 양자역학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이르러 인간은 쪼갤 수 없는 세계에 뛰어들어 무수히 쪼개고 있다. 열일곱 가지 기본 입자가 밝혀졌지만 그 입자들도 내부구조가 있다. 구조가 없는 것은 존재가 없다. 구조는 존재가 성립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미시세계를 무한히 탐구한다면? 


    무한히 머리가 아파진다. 인간들은 정도껏 하자면서 스스로 한계를 정한 것이 원자설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한계가 깨졌다. 이제 인간은 무한히 머리가 아프게 되었다.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것은 구조론이다. 그것은 마치 우주에서 가장 큰 숫자를 찾아내겠다는 노력과도 같다.


    세상에서 가장 큰 수는 무엇인가? 구골인가? 나무위키를 검색해봐도 스크롤을 한참 아래로 내려야 한다. 고골, 구골, 기골 하면서 계속 이름들이 나오는데 TV에 나오는 퀴즈박사라도 이름들을 다 외려면 식은땀을 흘릴 판이다. 그러다가 무한대 개념으로 얼버무린다. 그딴 짓은 필요가 없다. 


    메커니즘이 진정한 답이다. 가장 큰 숫자 따위는 없고 숫자를 생성하는 연산자가 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주에 마이너스만 있다. 여러 존재가 널려 있는게 아니라 편리에 따라 하나의 존재를 바라보는 인간의 여러 가지 행동들이 있다. 우주 안에서 오직 마이너스 개념만 진실하다.


    다른 것은 인간이 마이너스를 다른 방식으로 틀어서 바라본 것이다. 그렇다. 원자개념은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인간은 여기까지. 스톱. 멈춰. 제발 선을 넘지마. 선을 넘으면 혼날거야. 너희는 신이 두렵지도 않느냐?' 이런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문제이지 존재의 사실이 아니다. 


    구조는 통제가능성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존재할 수 있는 조건들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원자론은 통제불가능성이다. 선을 넘으면 안 되는 성질에 의하여 존재하므로 선 넘지마 이거다. 결론은 통제된다. 우주는 통제되는 존재이며 그러므로 탄생이라는 통제절차를 거쳐 존재한다. 


    그것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통제가능성은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은 시간따라 통제할 수 있고 사물은 공간따라 통제할 수 없다. 흐르는 물이나 부는 바람은 통제된다.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는 뭐든 통제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쪼갤 수 없고 금은 녹일 수 없다. 공간 속에서 정지해 있는 존재는 통제할 수 없다. 천만에. 다이아몬드는 불에 타고 금은 왕수에 녹는다. 정지한 공간의 사물을 통제할 수 없다는 관념은 단단한 방패나 장벽에 막혀 좌절한 경험을 덮어씌운 것이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원자는 모든 과학의 출발점이다. 기본이다. 기본이 틀렸다. 기본은 관점이다. 관점이 틀렸다.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세상을 관측자 곧 주체에 의해 지목되는 공간의 어떤 대상으로 보면 안 되고 대상 자체에 내재하는 시공간적 프로세스와 메커니즘 곧 사건 안의 의사결정구조로 봐야 한다.


    어떤 것이든 반드시 내부에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안팎에 걸쳐져 경계면에 있다. 그것은 상호작용한다. 세상은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상호작용구조로 설명되어야 한다. 자기홀극이 없으므로 그것을 둘로 나눌 수는 없다. 그것은 둘이서 계를 이루고 동시에 움직인다.

 

    핵심은 대칭이다. 대칭은 공간에 성립하고 호응은 시간에 성립한다. 사건의 연결 안에서 시공간적 대칭과 호응에 따른 의사결정구조로 설명해야 한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계가 있고 족보가 있고 계통이 있고 프로세스가 있고 메커니즘이 있다는 말이다. 사건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말이다. 


    흐름에 올라타고 있다. 변화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왜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 제자리에서 나란히 가며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변화이며 움직임이며 출렁거림이며 운동이며 멈춰서 제자리를 지키는 것은 절대로 없다. 그러나 나란히 가면 멈춘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저기에 있구나' 하고 안심한다. 그러나 속지 말라. 그것은 에너지를 타고 출렁거리며 내부에서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새로운 지식은 그동안 쌓아온 인류 학문의 기반을 허물 수 있다. 그러나 침착하라. 인류는 창조설에 속으면서도 그동안 잘 살아왔지 않은가? 


    먼 훗날 인류는 말할 것이다. '구조론이 당연히 맞지. 원자설이라니 말이나 돼? 뭐 쪼갤 수 없다고? 장난하냐? 왜 못 쪼개? 힘이 없어서 못 쪼개? 원래 내부구조가 없다는 말이야? 얼버무리지 말고 말해봐.' 자석의 N극과 S극은 쪼갤 수 있지만 쪼갤 수 없다. 진정한 것은 상호작용 그 자체다. 


    우주는 쪼갤 수 없는 것의 집합이 아니라 쪼개면 안 되는 것의 연결이다. 사건은 쪼갤 수 있지만 쪼개면 안 된다. 자궁을 쪼갤 수 있지만 쪼개면 아기가 죽는다. 쪼개면 연결이 끊어지고 흐름이 막히고 에너지가 손실되어 사건이 죽는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생명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레벨:5]국궁진력

2019.12.09 (22:45:26)

"우주는 쪼갤 수 없는 것의 집합이 아니라 쪼개면 안 되는 것의 연결이다."

실로 "인류의 새로운 항해"다운 글이라 하겠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르네

2019.12.09 (23:33:09)

자석의 N극과 S극은 쪼갤 수 있지만 쪼갤 수 없다. 진정한 것은 상호작용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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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홀극은 없다는 것이 맞겠군요.

양자역학에서
연산자는 관측행위를 의미합니다.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됩니다.

고유값문제 AX = λX에서 
A가 연산자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12.10 (04:00:53)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가 있고 족보가 있고 계통이 있고 프로세스가 있고 메커니즘이 있다는 말이다. 사건이 현재 진행중이라는 말이다. 

- http://gujoron.com/xe/1147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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