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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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99 vote 0 2019.05.03 (13:46:22)


   허무는 없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빛이 있으므로 어둠은 없다. 빛 입자는 광자가 있는데 어둠 입자는 존재가 없다. 삶이 있으므로 죽음은 없다. 죽음은 삶의 일부를 구성할 뿐 별도의 존재자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목격할 수 없다. 죽음은 내 인생 중에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상실이다.


    인생이 허무한 것은 도처에서 실패하고, 좌절하고, 상실하고, 소외되고, 밀려나고,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 없으므로 궁극적으로 허무는 없다. 타자성의 문제다. 피아구분이 있다. 나와 남들 사이에 경계가 있다. 그 상호작용의 경계를 잘 지정해야 한다. 대개 나를 작게 규정하므로 실패하고 좌절하고 상실하고 소외된다. 


    작은 것에 의미를 찾으려 하므로 실패한다. 소확행이라고 한다. 작은 것에 투자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중에게 아부하는 상업주의 술책이다. 구조론연구소는 0.000001퍼센트에 속하는 엘리트의 공간이다. 반대로 봐야 한다. 큰 것에 투자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다. 묻어갈 수 있다.


    항상 이기는 메시나 호날두에 투자하면 성공확률이 높다. 큰 일에 참여하되 이기는 편에 붙어 묻어가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나는 묻는다. 여기에 왜 왔는가? 구조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엘리트의 자부심과 자존감이 아니던가? 엘리트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하고 동정을 구하려는 태도라면 곤란하다.


    어리광쟁이는 강퇴된다. 구조론사람의 자격이 없다. 자존감이 강한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주눅이 들면 진다. 위축되면 손해 본다. 약자의 처세술을 구하면 약자가 된다. 강자의 철학을 얻어야 이긴다. 약자의 처세술도 때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구조론연구소의 방향과 맞지 않다. 절에 가서 찬송가는 곤란하다.


    교회 가서 염불하면 안 된다. 맞게 행동해야 한다. 구조론연구소는 강자의 눈높이를 논하는 공간이다. 강자는 자신을 크게 규정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사촌이 타인이기 때문이다. 약자의 태도다. 자식이 논을 사면 배가 부르다. 자식은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자의 관점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는 강자다.


    타자성의 문제다. 손흥민이 골을 넣으면 다들 좋아한다. 손흥민을 남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아구분이 중요하다. 나냐 남이냐 금을 잘 그어야 한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죽고 난 다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으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럼 살아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지? 살아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1억 년을 살아봤자 봤던 연속극을 1억 번 재탕해서 보는 것이다. 지루할 뿐이다. 물론 바보는 봤던 거 또 봐도 재미를 느끼지만 말이다. 인간은 살아도 의미가 없고 죽어도 의미가 없다. 살면 쾌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호르몬 반응에 불과하다. 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동물의 생존본능에 불과한 것이다. 


    불로장수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어리석다. 어린이의 치기 어린 행동이다. 과자가 달다고 먹는 건 어린이다. 어른이라면 본능의 명령을 극복하고 스스로 의미를 조직해야 한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은 사실 죽은 이후를 느끼려고 하는 것이다. 그게 느껴질 리가 있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면 허무하다?


    전혀 논리가 아니다. 그냥 느낌일 뿐이다. 그게 어떤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내가 예수라고 느꼈다. 내가 예수다. 누가 이렇게 선언한다면 정신병자의 헛소리다. 실제로 이런 헛소리 하는 정신병자 많다. 뭐를 봤다거나 뭐가 들렸다거나 하면 그게 조현병이다. 그런데 왜 죽은 이후를 느끼려고 하지? 탄생 이전은 안 느껴보나?


    내가 태어나기 전도 느껴 보라지! 혹은 타인도 느껴보라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은 너무 허무해 하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죽고 난 다음이 허무하다면 태어나기 이전도 허무하다고 말해야 맞지 않을까? 혹은 타인의 인생도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손흥민이 너무 허무하네. 안 느껴지네.


    이런 말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의 허무는 불성립이다. 허무란 것은 내가 사건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 내가 대응할 이유가 없으며 타인의 삶에 내가 대응할 이유가 없으며 탄생 이전에 내가 대응할 이유가 없다. 안드로메다에서 어떻게 되어 허무하다네. 우간다가 어째서 허무하다네.


    1과 2 사이에 자연수가 하나도 없어서 너무 허무해. 이런 말은 불성립이다. 죽은 이후의 허무라는 것은 어휘력 떨어지는 사람의 언어착각에 불과하다. 허무하다고 말하는 것도 허무하다는 말이다. 시간여행은 언어도단이니 여행은 시간성이라 시간시간이 된다. 공간이 목적어면 시간은 동사가 되어야 한다.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허무가 아닌 것은 의미있는 것이며 그것은 내가 대응할 수 있는 것이며 나와 어떻게든 연결되는 것이다. 안드로메다가 어떻든 사건이 나와 연결되지 않는다. 나하고 관계가 없으면 당연히 배척된다.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건 속으로 풍덩 빠져버리는 것이다. 손흥민의 골이 내게 큰 의미가 있으려면 축구를 알아야만 한다. 


    모르면 허무하다. 심리적으로 손흥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손흥민이 남이 아니어야 한다. 커다란 사건 속에 빠지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큰 물결을 따라 함께 흘러가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근본 우주가 곧 사건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사물로 보면 모두 단절되지만 사건으로 보면 모두 하나가 된다.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자극이 있으면 반응이 있다. 부름이 있으면 응답이 있다. 투자가 있으면 이익이 있다. 프로포즈가 있으면 수락이 있다. 입력이 있으면 출력이 있다. 문제가 있으면 해답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의미다. 문제는 내가 뭔가 보상받는 것을 의미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것은 생존본능이나 사회적 본능이다.


    쾌락이나 행복이나 내세나 천국이나 명성이나 신분이나 이런 것을 의미로 여긴다. 생존본능의 문제는 어린이의 것이며 어른들의 논의에 끼워줄 수 없다. 어린이는 어른들에게 인정받으려든다. 증거가 필요하다. 엄마 나 백 점 맞았어. 엄마가 머리 쓰다듬어준다. 아이고 우리 딸 잘했다. 그걸 의미로 친다. 초딩도 아니고 말이다.


    적어도 나이 스물을 넘겼으면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에서 의미를 찾지는 말아야 한다. 사건의 원인에 서느냐 결과에 서느냐다. 반노 지식인들은 말한다. 노무현 정권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문재인은 어쩌구.. 말머리에 노무현은 실패한 사람이라고 못 박아놓고, 확인사살을 해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비열하게도 말이다. 


    정권재창출 실패로 국민에게 인정을 못 받았으니 실패라고 단정하여 축구장을 기울여 놓고 시작하는 숨은 전제 후려치기 수법을 쓰는 것이 빌어먹을 오마이, 한겨레, 경향 개들이다. 결과를 보지 말고 원인으로 보라. 노무현은 문재인을 복제했다. 그러므로 사건은 실패가 아니다. 노무현이 일으켜놓은 사건은 계속 연결되어 간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백 점 맞고, 칭찬 듣고, 명성 떨치고, 쾌락을 누리는 게 의미는 아니다. 그거 환상이다. 바보들의 판타지다. 누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두들겨 줘야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불을 질렀으면 성공이다. 자극해서 반응을 끌어내면 성공이다. 부름을 통해서 응답을 끌어내면 성공이다.


    부모는 자식을 복제하면 성공이고, 스승은 제자를 복제하면 성공이고, 선배는 후배를 복제하면 성공이고, 투자는 이윤을 복제하면 성공이고, 부름은 응답을 끌어내면 성공이고, 자극은 반응을 끌어내면 성공이고, 프로포즈는 수락을 끌어내면 성공이다. 사건이 다음 단계로 연결되면 성공이다. 의미는 천하에 하늘의 별처럼 있다.


    의미가 내게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내가 의미의 바다에 풍덩 빠져버리는 것이다. 천하의 의미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신이 있고 천하가 있고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대에게 커다란 지구가 하나 주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다. 악기는 소리가 나면 의미다. 텍스트는 읽어지면 의미다. 그대가 지구에 초대받은 사실이 의미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어린이의 마음, 이룬 성과를 데이터로 출력하여 타인에게 증명하려는 유치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의미가 아니다. 동물의 본능이다. 철학은 진지한 이야기다. 어린이의 유치발랄한 태도로 어른의 논의에 끼면 안 된다. 생각하라. 일찍이 세상이 그대를 불렀거든 세상의 부름에 그대 응답했는가? 


    그대의 부름에 누가 응답할 것인가? 그것이 의미다. 당신이 세상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다면 허무요, 당신이 누구를 불러내지 못하면 허무다. 우주 자체가 부름과 응답의 구조로 되어 있거든 우주 안에서 우주의 부단한 전진과 함께 호흡하면 이미 허무를 벗어나 있다. 모르고 역주행하는 자들은 허무해지니 길이 끊어져 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9]kilian

2019.05.04 (03:01:23)

"우주 안에서 우주의 부단한 전진과 함께 호흡하면 이미 허무를 벗어나 있다."

- http://gujoron.com/xe/1086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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