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프로필 이미지
[레벨:4]일반이론
read 5499 vote 0 2011.03.04 (15:46:24)

1.  일본의 "참근교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뒤 그의 가장 골치거리는 지방 영주(다이묘)들이었다. 이 다이묘들은 사실상 독립국이기 때문에 중앙정부(막부)가 조금만 힘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반기를 들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고안한 제도가 일종의 기인제도(인질)인 "참근교대"이다.  각 다이묘들은 교대로 적어도 몇 개월은 수도(도쿄)에서 살아야 했으며, 그 가족들은 거의 도쿄에서 상주해야 했다. 이 제도가 가져 온 후폭풍은 실로 엄청나다

 

첫째, 국가 총력 체제 이다. 예를 들어 죠슈번의 경우 일본 내에서 중간정도 서열이었는데 교토로 갈 때 수행원이 약 3,000 명 정도였다.  도쿄까지 보통 90일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럼 상상해 보자, 이것이 가능하려면 3,000명을 수용하는 여관이 적어도 90개는 있어야 한다는 예기다(큰 다이묘는 만명정도가 움직였다고 한다). 또한 다이묘가 30-50명 사이였으니 겹치거나 하는 것까지 생각해야 한다. 각 교통의 요지에는 엄청난 상업이 일어난 것은 불보듯 뻔하다. 또한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양의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막부(중앙정부)가 이 선물이 적다는 이유로 다이묘를 교체했기 때문에 이 선물마련을 위해 전세계 물품을 구입하는데 혈안이 된다. 또한 체면이 한번 구겨지면 다시 회복이 어려웠기에 하다못해 짐꾼의 옷차림도 최상의 품질을 보장받았다. 즉 사치와 과소비가 국가산업이 된 것이다

 

각 다이묘들은 이 참근교대로 인하여 자본축적이 불가능했다(히데요시는 애초 이런 이유로 시작했다). 오히려 빚더미에 나 앉아 파산하는 다이묘가 속출했다.  그러나 반대급부도 생겼다. 우선 능력위주의 관료선발이다. 다이묘들은 나라 재정을 맏을 최고의 두뇌를 찾았다. 사스마번의 경우 훌륭한 재상이 들어오면서 논을 다 갈아없고 사탕수수, 담배, 차, 등 철저한 계획경제로 5년만에 흑자재정으로 만들면서 각 다이묘들이 경쟁적으로 능력위주의 인사를 실시했다.(전라도 크기의 땅에서 쌀농사를 한군데도 안지었다고 생각해 보아라. 상업과 교통이 얼마나 발달해야 가능한 것인지)  

 

둘째, 상인의 출현이다. 18세기에 이르면 일본은 3개의 100만 도시를 가진다(도시화율 10%이상).  이 당시 파리의 인구가 5만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성장이다(물론 중국이 가장 발전했었다) . 오사카에는 매년 일본 전체 쌀의 50%정도가 거래되었다고 한다. 참근교대 경비를 대기위해 각 다이묘들은 쌀이 아니라 화폐가 필요했던 거다. 또한 초창기 다이묘들은 한국에서처럼 힘(?)을 통해 상인들의 부를 약탈했다. 하지만 한 번 그런 다이묘는 다시 시장에서 거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연히 상인의 안전이 보장되는 방향을 타게 된다. (이것이 근대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셋째, 농민의 권익신장이다. 다이묘들은 농민을 자기 영토에 붙잡아 두기위해 필사적이였다. 이유는 농사보다 더 좋은 일자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참근교대로 인하여 도시에는 직업이 수만가지로 늘어났다. 가부끼 등 지금의 연예인만 10만이라고 할 정도로 도시에는 각종 수공업자, 상공업자, 패스트푸드점, 여관 등 일자리가 넘쳐났다. 따라서 다이묘들은 어쩔수 없이 농민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나중에 근대화의 주역들이 된다) 농민들의 신장된 권익만큼 자연히 토지세는 줄어들게 되고 상업세가 중요한 세수로 자리잡는다

 

넷째,  교류의 확대이다. 이 참근교대에 동행한 사람들은 늘 마음 한켠에 여행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각종 여행기가 이때부터 폭발하기 시작했고(출판산업도 엄청나게 발전, 이때부터 10만부는 예사로 발매), 이로 인해 전 국민이 여행을 하고, 각종 서적들이 앞다투어 발매되는 매우 개방되고 활발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 대표적 뉴라이트 학자인 이병완씨에 따르면 그 당시 조선에서는 평생동안 평균 190명 정도 사람만 만나고 죽는다고 하니, 확실히 일본은 조선보다는 개방적인 사회였을 것이다.  

 

 

 

2. 조선의 도자기

 

일본을 이해하는 데 조선의 도자기가 빠질 수 없다. 명,청 교체기 약 100년간 세계사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데 이때 중국이 내부단속을 위해 무역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이 당시 전세계는 도자기 광풍이 불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결국 중국의 도자기를 사오기 위해서 였는데(왜냐하면 당시 유럽은 오로지 금,은 밖에 중국과 교환 가능한 물품이 없었다. 따라서 유럽은 광산업이 발달했고, 새로운 신대륙의 은광은 유럽을 무역가능국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도자기를 거래할수가 없게 되니까 전 유럽 상인들이 생존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이 때 나타난게 일본이다.

 

이 당시 일본은 전세계에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조선의 도공이 모두 일본으로 끌려가서). 이로인해 유럽의 상인들은 일본으로 몰려든다. 이들은 일본에서 거의 감금생활(인공섬에서 삶)을 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또한 기독교로 인한 무지막지한 탄압에도 상업적 이득을 위해 버티고 버틴다. 이들이 버티면서 일본에 남기고 간 유산은 엄청나다. 1700년대에 영어사전이 나타나고, 번역문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나타난다. 일본은 이미 1600년대 부터 근대화를 하고 있었던 거다

 

이때 유럽과 일본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중국과의 무역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당시 최첨단 물품이 널렸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일본,유럽 물품이 전혀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금,은 만이 거래가 됬는데, 이를 위해 일본, 유럽은 광산개발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때 개발된 일본의 은광은 이후 일본의 근대사에 가장 큰 버팀목이 된다(전세계 은 유통의 1/3을 차지함). 중국이 이 은부족(공황)으로 망할 때 일본은 오히려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었다.

 

 

 

3. 결 론

 

재목은 동.서양의 차이인데 왠 일본 예기만 나오느냐 할 것이다.  이 차이가 결국 동,서양의 차이이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쉽게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가 "대원군이 쇄국을 안했으면,,,,,,어쩌구 저저구" 이런 류의 오류이다.  자 지금도 대원군이 우리나라 근대화의 주범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미 차이가 400년 전부터 시작된거다.

 

일본은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지 5년뒤인 1868년에 메이지 유신(중앙집권)을 단행한다. 이후 10년도 안되 전세계에 약 1만 5000명의 유학생을 보낸다. 거의 자비로(이미 이때 국민소득이 최고의 수준에 있었던 거다), 또한 160개의 외국인학교가 생기고, 관료의 절반이 전세계 일주를 했다(2년정도 걸림). 이들은 전세계에서 우수한 것만 골라 연구해서 자국에 들어왔고 이들은 곧 근대일본의 주역이 된다.

 

 1904년 러일전쟁은 전세계에 일본이 최강국임을 선포한 날이었다.(당시 영국조차 감히 러시아와 전쟁을 하지 못했다) 불과 개방한지 30년 만의 성과이다.  이 성과가 몇몇 관리 혹은 제도로 인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하는가?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to be continue .................


프로필 이미지 [레벨:6]지여

2011.03.04 (18:54:08)

역사에 관심 많은 역사팬으로서 .. 역사이야기는 항시 설레이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오.   E H 카의 "역사란 현재 나와의 호흡" 이란 정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나의 역사관이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과  남북한분단 탓에 제대로 된  역사공부.... 역사관은 커녕 .. 객관적 사실조차 왜곡된 ..역사수업시간조차  있다가 없다가,,,    하여    거짓아닌 역사기록 그 자체만으로도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장남감을 손에 쥔 듯한... 즐거움이라 할까?    만일 제대로 된 역사관점이면 많이 흥분하게 되고...... 

 

작년 11월쯤  동렬님의 구조적 역사(본인은 십수년전에 공부.. 이후 못했다고 하나...) 관점 ... 맛만 잠깐 보였지만  흥미로웠고... ( 조선이 역동적인 사회였다..체코용병  무기.. 은유입.. 일본의 국가위치..  숙종에 대한 평가  청3대황제와 조선역사 연계..  삼정문란거짓말  등등...)

 

노무현 님도 봉하연설에서 밝혔듯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역사공부가 의미있다고 하였고 본인 스스로도 대통령 되기 훨씬 이전부터  대통령 재임시절에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수준 높았지요.

 

십수년전  서울대 안병직교수의 한일 역사관...  그후 뉴라이트란 단어에는 치가 떨리지만 지피지기 차원에서  잠시 공부해보기도 하고...  아직 갸우뚱? 이지만 ...  주입식 암기식 입시교육보다는 그래도 한 수위 위인것은 인정했더랬고...

일제강점의 원인 들어가면... ?? (아직 저는 결론 못내리고  호흡 가다듬고 공부중...)

 

최근에는 윤은숙의 만주역사...이성계... 이방원 세종 그리고 훈민정음창제과정 등을...  동렬님의 징키스칸 이야기와 연계시키며 혼자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제대로 토론하고 서로 배우고 하려면... 역사 사이트 하나 따로 운용해야 하겠지요

 

암튼... 감사하고... to be continued    기대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4]곱슬이

2011.03.07 (10:24:30)

러일전쟁 결과가 준 충격이 사실 생각보다 대단했나보더군요.

당시 아시아의 작은나라들 뿐아니라  중동국 사람들 조차  흥분하며 기뻐했다나요.

아시아가 이겼다고.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032 장자연 결정적인 증거. image 3 김동렬 2011-03-10 4473
1031 봄은 혹독한 겨울을 지나 찾아 온다 image 11 참삶 2011-03-10 4341
1030 나무 그림에 관하여...저의 단상.... image 4 아란도 2011-03-10 3690
1029 영어 이야기(둘) 3 지여 2011-03-10 4120
1028 영화 <만추> 탕웨이 image 5 하루 2011-03-07 13173
1027 dipole antenna image 1 눈내리는 마을 2011-03-06 4867
1026 봄도 오고 하니 이 그림 한번 보시죠!! 인사아트센타 전시작 image 4 나무그리는이 2011-03-06 3642
» 동.서양 근대화의 차이 2 일반이론 2011-03-04 5499
1024 [공지]구조론 연구소 서버를 이전 하였습니다. 8 오리 2011-03-04 3252
1023 아이패드2가 나왔소. image 3 양을 쫓는 모험 2011-03-03 3935
1022 행복한 느낌 6 지여 2011-03-02 3111
1021 고래, 춤, 칭찬? 고래가 먼저다. image ░담 2011-03-02 9898
1020 그라운드 동물 잔혹사 8 양을 쫓는 모험 2011-03-02 3244
1019 조선독립만세 3 김동렬 2011-03-01 5971
1018 프레시안 강양구의 근거없는 윤봉길 의사 모략극 image 김동렬 2011-02-28 6357
1017 재오 이넘도 만만치 않아. image 3 김동렬 2011-02-28 3311
1016 서그퍼진 서프를 보며 1 지여 2011-02-27 3937
1015 스타일리스트 카다피 image 4 김동렬 2011-02-24 6471
1014 기 소르망의 한국문화에 대한 강연 3 아란도 2011-02-23 3506
1013 구조론으로 빚은 '굽는 삼계탕' 5 양을 쫓는 모험 2011-02-23 3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