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read 16037 vote 0 2008.10.05 (22:07:44)

“왜 노무현인가?”
‘민주주의 2.0 출범에 부쳐’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 공간(원문은 민주주의 2.0 연구마당 가칭 시민민주주의 연구회)은 노무현의 사상을 정립하고 계승하기 위한 공간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봉하 오리쌀이 노무현 농부의 농사대박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것 만큼이나 명백하다.

설마 노무현이 농민의 소득 몇 푼을 가로채기 위해 전업농을 택했겠는가? 농삿일은 상징이다. 마찬가지로 이곳은 무대다. 극장이름은 민주주의 2.0극장이라고 써붙였지만 그 무대에서 공연하려는 극은 노무현주의다.

노무현주의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극은 아직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무현주의라 앞세우지 않고 뒤로 한걸음 물러나서 민주주의 2.0이라 써붙이는 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무현주의를 탐구해야 한다.

노무현주의는 노무현 개인이 만들지 않는다. 범 노무현 세력이 함께 만들어가는 거다. 그 노무현 세력 역시 노빠 몇몇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무대 안에서 시대정신이라는 극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노무현은 그저 한 명의 의원에 불과했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눈 뜨고 보니 청문회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만인의 가슴 속에 어떤 꿈이 심어졌다.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데’.. 그 꿈!

그 꿈들이 움직여서 가만있는 노무현을 종로로 부산으로 이리저리 끌고다녔다. 청와대 찍고 다시 봉하로 내려보냈다가 이제 막 세계로 끌고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상인 것이다.

사상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며, 철학은 여러 과학적 성과를 종합하여 보는 것이다. 그것이 많아서 한 눈에 전체를 조망할 수는 없으므로 일정한 시야가 필요하다. 관점이 있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서 볼 것인가다. 멀리서 크게 보면 크게 보이고 가까이서 작게 보면 작게 보인다. 그것이 철학이다. 사상은 그 여럿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좋지만 5천만이 가는 길은 하나다.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좋지만 60억 인류가 함께 가는 길은 하나다. 딴나라당이 가는 길은 강남부자들만 간다는 좁고 읍습한 뒷골목길이며, 민주당이 간다는 길은 호남지역만 간다는 작은 지방도로다.

5천만이 함께 가는 길, 남북한 7천만이 함께 가는 길, 우리의 선열들과 함께 가는 길, 미래의 후손들과 함께 가는 길, 60억 인류와 함께 가는 길은 하나 뿐이다. 우리는 다른 길 버리고 그 길을 선택해야 하며 그것이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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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세력이 노무현 사상을 만든다. 노무현 역시 그 세력 중의 하나다. 노무현 세력이 모여서 노무현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 시대정신이 노무현 사상을 만든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이고, 그 역사가 어떤 역사이며, 그 노무현 세력이 어떤 얼굴들인지 알 필요가 있다. 노무현 사상은 그 얼굴들의 총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합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의 약속 말이다.

노무현의 노선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좌파의 길도 아니고, 노예근성에 찌든 수구의 길도 아니고, 전혀 다른 것이다. 노무현이 있기 전에 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노무현을 발굴했다.

그들은 왜 노무현을 선택했을까? 노무현이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대선출마 때 천정배가 있었다지만 나이롱이었음이 나중 밝혀졌다. 우광재, 좌희정이 있었다고들 하지만 그 광재, 희정이 하는 짓 보면 역시 나이롱이다.

노무현은 그 때도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이며, 앞으로도 혼자일 것이기 때문에 노무현인 것이다.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나? 386? 세대가 다르다. 강금원? 이기명? 명계남? 삶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다. 급이 다르다.

그들이 노무현 주변에 있는 이유는 노무현과 맞는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왜? 역할분담이 되므로. 즉 그들은 노무현 주변에 있어도 노무현을 침범할 수 없다.

반면 김근태, 정동영, 천정배, 추미애 등은 노무현을 조금씩 파먹었다. 그들은 노무현 주변에서 노무현을 매우 해쳤다. 이해찬, 유시민, 강금실은 노무현을 도왔지만 확실히 노무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무엇인가? 만약 노무현이, 좌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집단과 조직과 패거리와 강령과 도그마에 의존하는 유형의 권위주의적인 인간이라면 노빠들은 결코 노무현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또 수구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학벌따라 연고따라 뒷구녕으로 사사로이 인맥을 형성하고 보스와 졸개로 서열을 매기는 즉 봉건구조에 기반하는 그런 유형의 권위주의적인 인물이었어도 노무현을 버렸을 것이다.

좌우에 두 유형의 권위주의가 존재하며 노무현은 그들과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그 개인주의를 보고 노무현주의자들이 모여든 것이다. 왜 개인이어야 하는가? 또 그것이 인터넷 시대의 신조류와 어떻게 맞아떨어지는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결론적으로 노무현주의의 출발점은 개인주의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는 좌파와 수구의 국가의존적 사고와 다른 것이다. 좌파들은 입으로는 국가주의를 반대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국가에 맡기려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국가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편의점에서 ‘국가 하나 주세요’ 하면 ‘예 있수다’ 하고 국가 하나를 내준다던가? 과연 존재감이 있는가? 그렇다면 유엔은? 유엔은 과연 존재하는가?

유엔이 존재감 있게 그루지야 사태도 해결하고, 북핵사태도 해결하고, 이라크전도 해결하고 있나? 아니다. 유엔은 민주당 만큼이나 존재감이 없다. 본질에서는 국가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엔보다는 확실히 존재감이 있다.

그러나 국가란 결국 국가단위의 문제해결에만 나서는 것이며 수구들은 주로 전쟁에서 그것을 찾고 좌파들은 주로 법률과 제도에서 찾는다. 세상 모든 문제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럴수록 인간은 왜소해진다. 먼저 인간이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로 말하자면 제발 국가의 존재감을 잊자는 주의다. 그리고 대신 그 자리에 되도록 개인을 내세우자는 입장이다.

예컨대 비정규직 문제가 민노당이 주장하는 법률안 하나 통과시킨다고 싹 해결되나? 한국인들이 그 법률안에 동의하나? 민주주의란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개인이 반대하면 도덕적으로 옳아도 안하는게 맞다.

먼저 그 개인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개인의 수준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을 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을 바꾸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삶이다. 그래서 노무현이 봉하로 내려간 것이다.

법과 제도를 바꾸어 해결된다고 믿는 좌파는 조직을 결성하고 정당을 건설할 것이며, 힘으로만 해결된다고 믿는 수구는 돈을 모으거나 힘센 미국에 구걸할 것이다. 노무현의 방식은 다른 것이다.

나는 노무현주의가 개인주의+민족주의+합리주의+자생적 철학과 사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라고 하면 2차대전과 파시즘을 떠올리며 오버할 사람 많겠지만 필자가 말하는 민족주의는 다른 것이다.

개인주의가 국가 단위의 의사결정 앞에서 한 개인의 입장을 앞세우듯이, 마찬가지로 그것을 세계 단위에 적용하여 세계단위의 의사결정 앞에서 민족의 입장을 앞세우는 것이다.

백 명이 모인 집단에서는 한 명의 입장을, 만명이 모이면 열 명의 입장을, 60억 앞에서는 5000만 한국인의 입장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민족, 다른 국가, 다른 공동체의 입장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구한말 제 정치세력은 친러파, 친영파, 친미파, 친일파, 친청파에 속할 뿐 친한파는 없었다. 오늘날 좌파라는 자들은 유럽의 생각을 이식하려는 자들이요, 수구라는 무리는 미국과 일본의 힘에 굴종하자는 자들이다.

그런 중에 백범이 홀로 우뚝했다.

지금도 구한말의 모든 정치세력이 외세에 의존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 나는 좌파들의 집단주의, 국가의존, 법률과 제도의존, 조직위주, 강령위주, 서구위주, 지식인 위주 경향을 거부한다.

마찬가지로 수구들의 노예근성, 전쟁책동, 강자숭배, 물질숭배를 반대한다. 우리는 개인을 앞세우고, 소규모의 공동체를 선호하며, 통제되지 않는 조직, 이심전심에 의한 의사결정, 대중과 함께 가는 노선을 주장한다.

우리가 중도를 걷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르다. 본질이 다르다. 뿌리가 다르다. 삶이 다르다. 스타일이 다르다. 기호가 다르다. 취향이 다르다. 좌파나 수구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 섞일 수 없다.

나는 조직과 강령을 앞세우는 자들, 혹은 금전과 인맥을 앞세우는 무리들과는 비위가 상해서 5분 이상 대화하지 않는다.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쇠털처럼 많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묶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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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무현이라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자연인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원칙과 상식밖에 모르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봉하마을 노무현 농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는 조직되지 않은 개인이고, 더 많은 개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있으며, 그 시선의 교차점에 다른 사람이 아닌 노무현이 특별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 노무현이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2.0이든 시민민주주의든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점이 있고 바로 거기서 출발되는 것이다. 물론 이상은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나는 이 정도가 우리가 대략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시선의 교차점이라고 생각한다.

2천년 전 희랍에 자기 돈으로 창들고 방패든 사람들이 모여 민주주의라는 것을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는 없었다. 500년 전 조선에 붓과 지식으로 무장한 선비라는 집단이 출현했다. 역시 다른 나라에 없었다.

물론 그 시점의 페르시아나 이집트에도 스스로 무장한 자가 있었고 중국에도 생원이니 거인이니 하는 신분이 있었지만 관료 희망자였을 뿐 조선의 선비들만큼 확고한 정체성을 확보한 집단은 아니었다.

한국에 예전과 다른, 서구의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특별한 인간들이 출현했으며 그들은 근본에서 다르기 때문에 다른 길을 걸을 것이며 그것이 노무현이 지향하는 시민민주주의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는 작은 나라들의 집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조선 역시 변방의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페르시아나 이집트에서 불가능하고 중국에서 불가능했듯이 한국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라가 작으면 정보의 전파속도가 빠르고 의사결정 속도가 빠르다. 그러므로 삶의 스타일이 거기에 맞추어 변한다. 물론 나라가 너무 작아도 국가 단위의 의사결정이 불필요해져서 역시 불가능해진다.

적당한 크기, 적당한 지정학적 조건, 적당한 시점에 그런 무리가 출현한다. 과연 한국에 그 신인류가 출현했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나의 생각 역시 노무현주의라는 거대한 물줄기 안의 한 작은 지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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