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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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874 vote 0 2018.07.30 (13: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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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4:15)
*.92.147.219

  사과 안에는 사과가 없다.


  사과 한 개가 있다. 우리가 사과의 존재를 아는 것은 사과의 색과 향과 맛과 촉감과 무게를 통해서다. 우리는 이것들이 사과 내부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착각이다. 사과의 질량은 지구의 중력이 결정한다. 색과 향과 맛과 촉감도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상이라 할 것이니 그림자와 같다. 사과를 사과로 규정하는 요소들은 사과 자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사과와 바깥 환경과의 관계로 존재한다. 어떤 그것을 그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 안에 있지 않고 바깥과의 관계로 걸쳐 있다. 사과 안에는 사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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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4:29)
*.92.147.219

 구는 대칭이고 조는 호응이다.


  구조構造의 구構는 얽음이고 조造는 지음이다. 구構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어긋나게 겹쳐 쌓는 것이라 이는 공간의 얽힘이 되고 조造는 지음이니 이는 시간의 진행이 된다. 건물을 짓되 공간상에서 기둥과 보를 짜맞추는 것이 구構라면 시간 상에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조造다. 구조는 공간과 시간에서 존재를 짓는다. 만물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호응으로 지어져서 존재한다. 그 존재를 짓는 주체는 에너지다. 대칭과 호응은 각각 공간과 시간에 대응하는 에너지의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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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4:47)
*.92.147.219

  에너지는 계를 형성한다.


  존재의 근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방향이 있을 뿐 형태가 없다. 에너지의 방향에는 확산방향과 수렴방향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에너지는 최초 플라즈마 상태의 무질서한 확산방향으로 존재하다가 일정한 조건에서 수렴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며 질서있는 존재의 형태를 연출한다. 인간은 그렇게 연출된 형태를 보고 사물을 분별하지만 많은 중요한 결정들은 형태의 성립 이전에 일어난다. 곧 형이하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다. 에너지가 확산에서 수렴으로 방향을 바꾸며 닫힌계를 형성할 때 많은 부분들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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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5:03)
*.92.147.219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사물은 형태가 있고 사건은 형태가 없다. 근래에 보고된 영자역학의 성과로 알수 있듯이 물질의 형태는 인간이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일 뿐 존재 자체의 전개하는 방식이 아니다. 물질의 형태는 외력에 대항함으로써 얻어진다. 외력에의 대항은 그만큼의 에너지 손실을 야기하므로 보다 효율적인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일정한 조건에서 닫힌계 내부가 균일해졌을 때 확산을 수렴으로 바꿔 축과 대칭의 구조를 갖추면 상대적인 효율성을 얻어 외력의 작용에 반작용으로 대항하게 되고 그럴 때 인간은 비로소 존재를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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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5:18)
*.92.147.219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사건 안에서 에너지의 상태를 변경하는 데는 반드시 비용이 든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그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반면 엔트로피의 법칙은 그 비용을 감안한다. 상태변경에 비용이 지불되므로 1+1+비용=2다. 2에는 1+1에 없는 입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포함되어 있다. 1+1+비용=2+상호작용이다. 비용문제에 따라 사건을 논할 때는 닫힌계를 설정하여 외부변수를 닫아야 한다.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비용조달은 효율에 의해 가능하고 효율은 대칭에 의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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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5:31)
*.92.147.219

  에너지는 결따라 간다.

  모든 존재는 그것이 그것으로 되는 절차를 거쳐서 그렇게 된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조달되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조달되는 경로가 결이다. 사건은 결따라 간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신념이나 의도나 목적 때문으로 본다면 틀린다. 심리적인 동기는 거짓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것이 가장 쉬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할줄 아는게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수렁에 빠지듯이 빠져드는 것이 진짜다. 에너지의 흐름에 휩쓸려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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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6:23)
*.92.147.219

  대칭과 호응이 존재의 날줄 씨줄이다.


  날줄은 공간에 칼날처럼 날이 서 있고 씨줄은 시간의 북에 씨앗처럼 심어져 있다. 구조의 구構가 날줄이면 조造는 씨줄이다. 최초 플라즈마 상태의 무질서한 에너지가 외력의 작용에 의해 닫힌계를 형성하며 질서를 얻어 확산방향 <- ->를 수렴방향 -><-로 바꾸어 대칭시킨다. 대칭축이 만들어져 원래 2였는데 외력의 작용에 1로 맞서므로 보다 효율적이다. 존재는 그 효율성을 따라간다. 이때 큰 파장 <- ->를 짧은 파장 -><-로 바꾸는 것이 호응이다. 파장이 짧아졌으므로 상호작용이 감소한 만큼 효율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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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6:37)
*.92.147.219

  엔트로피가 결정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호응에 따라 상호작용이 감소한 만큼 효율이 발생한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정부가 두개에서 한 개로 줄어드는 것이 공간의 대칭에 따른 효율성이고, 호주에서 사오는 철광석을 북한에서 가져오면 운반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시간의 호응에 따른 효율성이다. 짧은 파장이 긴 파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므로 원상복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엔트로피다. 다시 두 개의 정부로 쪼개지려면 상호작용이 증가하는 만큼 비용이 청구되며 닫힌계 안에서는 비용조달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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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6:50)
*.92.147.219

  토대의 공유가 효율성을 만든다


  대칭은 둘이 하나를 공유하는 만큼 상호작용이 감소한다. 구조가 촘촘해진 만큼 파장이 짧아졌다. 이때 에너지의 자투리가 발생하여 이탈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5회에 걸쳐 촘촘해져서 더 많은 내부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자동차가 엔진에서 바퀴 사이에 뭔가 촘촘하게 들어서는 만큼 에너지가 손실된다. 손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엔트로피다. 이때 공유되는 토대를 움직여 계를 통제할 수 있다. 에너지가 전체를 관통하지 않고 토대가 되는 코어를 타고 빠르게 이동한다. 코어를 조작하여 사건을 통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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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7:02)
*.92.147.219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량은 침투한다.


  두 팀이 하나의 협회를 공유하면 질의 결합이다. 협회를 조작하면 두 팀에 동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 팀이 하나의 그라운드를 공유하면 입자다. 그라운드를 조작하여 시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 선수가 하나의 공을 두고 경합하면 힘의 교섭이다. 역시 공을 조작하여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질에서 입자를 거쳐 힘으로 운등으로 량으로 갈수록 통제범위가 좁아진다. 대신 세밀해진다. 이때 조작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로 진행해야 한다. 엔트로피에 따라 파장이 짧아지는 방향으로만 통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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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7:36)
*.92.147.219

귀납이 아니라 연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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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16:35:10)
*.29.28.42

공간이 시간이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는 완전히 같다. 에너지는 포지션이 꼬여 있는 것이고 물질, 공간, 시간은 꼬인 것이 풀리는 절차이며 정보는 풀린 것을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알겠는데 시간은 모르겠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시간을 모른다면 공간도 모르는 것이며 물질도 모르고 에너지도 모르는 것이다.


    앞은 알겠는데 뒤는 모르겠다거나, 오른발은 알겠는데 왼발을 모르겠다거나, 밤은 알겠는데 낮은 모르겠다거나, 북쪽은 알겠는데 남쪽은 모르겠다거나, 손은 알겠는데 손가락은 모르겠다거나, 버스는 알겠는데 자동차는 모르겠다거나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언어도를 단절하니 언어를 공격하는 행위다.


    다섯은 세트로 가므로 알면 다 아는 것이고 모르면 다 모르는 것이다. 존재는 대체로 꼬여있다. 만약 꼬이지 않으면 외력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언가를 봤다면 그것은 일단 꼬인 것이다. 꼬인다는 것은 둘인데 하나로 행세한다는 거다. 부부는 둘인데 호텔 객실을 하나만 잡으니 보나마나 팔자가 꼬인 거다.


    둘이 꼬이지 하나가 꼬이지는 않는다. 꼬인 것을 풀려면 둘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중심에 아기가 있다. 아기가 없다면 그 부부는 이혼할 확률이 높다. 꼬인 것이 풀린다. 그 중심이 꼬인 둘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물질이다. 날아가는 총알이 허공에서 방향을 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가능하다. 아니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총알을 둘로 쪼갠 다음 둘이 자리를 바꾸면 된다. 총알의 탄두 속에 화약을 넣어서 터뜨리면 된다. 화약을 기술적으로 배치하면 원하는 각도로 틀 수 있다. 이때 둘이어야 한다. 혼자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이 공간이다. 시간은 그 바꿈의 계속된 진행이다. 문제는 그 상태를 멈추지 못한다는 점이다.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에너지 보존에 의해 관성력이 지속되므로 한번 운동하면 계속 운동한다. 공간은 방향을 틀고 그걸로 끝난다. 시간은 그 상태를 지속한다. 보통은 입자 상태에서 밸런스가 어긋나고 그 밸런스를 보정하는 과정에서 둘이 자리를 바꾸고 그 바꾸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빛이 튀어나오는 것이 그렇다. 강한 에너지로 철판을 때린다.


    철판 안에 에너지가 높아져서 밸런스가 붕괴되면 보정하느라 축이 이동하여 자리를 바꾸게 되고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다. 광전효과다. 처음에는 철판 내부에서의 밸런스가 붕괴되었으나 다음에는 튀어나온 전자로 인해 공간의 밸런스가 무너졌고 그 밸런스를 바로잡다보면 빛은 광속으로 계속 이동하게 되니 그것이 곧 시간이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는 계 내부에서의 에너지 밸런스가 붕괴되어 그것을 보정하는 과정에서 계가 깨지는 절차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마치 문재인과 대통령과 김정숙 남편이 별도로 있다는 생각과 같다. 셋은 한 사람이다. 같은 것의 덩어리를 볼 것인가 아니면 해체해서 볼 것인가다.


    공간은 진행하는 것이 방향을 틀 수 있다는 것이며 시간은 돌아가는 팽이는 계속 돌게 되고 제 발로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 물질의 성질을 설명하고 있다. 물질은 공간과 시간의 방법으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며 에너지는 그 통제가능성이다. 에너지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통제가 된다는 특징이 있다.


    에너지 - 계를 지정하면 통제할 수 있다.

    물질 - 내부질서에 의해 자체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공간 -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시간 - 운동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정보 - 인식할 수 있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운동하는 것은 그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곧 깨져버린다. 시계태엽이 너무 빨리 풀려버린다. 인간은 조로해 버린다. 물질 중에는 0.1초만에 붕괴해 버리므로 과학자의 실험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 실제로는 많은 물질들이 곧바로 붕괴한다. 드물게 일부가 살아남아 우리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광속이 무한대라면 우주는 바로 붕괴한다. 우주의 먼 곳에 있는 빛과 가까운 곳에 있는 빛이 동시에 도착하면 지구는 바로 터져버린다. 빛이 허공을 이동하는 것은 자리를 바꾸는 것이므로 공간의 고유한 진동속도가 광속을 결정하기에 우주가 폭발하지 않고 보기 좋게 유지되는 것이다. 자리를 바꾸려면 일정한 속도로 가게 된다.


    시계 속에는 앵커라는 것이 있어서 톱니가 둘 있는데 앞으로 두 칸 갈때마다 뒤로 한 칸을 간다. 즉 2보전진 1보후퇴를 반복하므로 내부에서 부단히 자리를 바꾸며 그 방향전환 순간 속도가 0이 되기 때문에 즉 순간적으로 운동을 멈추기 때문에 시계태엽이 단번에 풀리지 않고 천천히 풀려서 우리가 시계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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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2 (08:55:10)
*.36.40.206

구조론은 특별히 설명할게 없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똑같은 이야기를 5회 반복한 것이다. 질이 입자고, 입자고 힘이고, 힘이 운동이고, 운동이 량인데 힘과 운동의 차이를 설명해달라고 하면 난감하다. 힘은 힘이고 운동은 운동이지 달리 설명할게 뭐 있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이게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설명을 요구한다면 이게 에너지에 대한 논의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에너지를 논하는데 그게 에너지라는 사실을 모르면 수학시간에 국어교과서 펴놓고 있는 격이라서 애초에 말이 안 통하는 장면이 된다. 그렇다면 설명할 것이 아니라 500방을 앵겨야 할 일이 아닌가? 정신 못 차리고 한 눈 팔고 그러기냐?


    숭산처럼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머리통을 때려줘야 할 장면이다. 에너지는 사건 안에서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사건은 1회의 에너지 입출입에 따른 변화다. 인간은 먼저 변화를 포착한다. 즉 모두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변화는 복잡하므로 마디를 끊어주되 그 마디가 사건이며 사건의 원인은 에너지이며 1회의 에너지 출입에 따른 변화를 논한다.


   질은 그 에너지가 모여서 사건을 일으키려는 상태이며 입자는 축과 대칭으로 교착되어 안정된 상태이며 힘은 외력의 작용으로 그 안정이 깨져서 축이 움직이는 상태이며 운동은 축이 움직여서 변화가 바깥으로 드러난 상태이며 량은 그 사건의 종결이다. 이걸로 설명은 끝났으며 구체적인 적용은 내게 묻지 말고 본인이 직접 관찰하면 된다. 


    모를만한 구석이 없다. 어디를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 중요한건 의사결정 중심으로 보는가이다. 필자가 컵이나 저울이나 공으로 설명해도 실제로는 그 안의 에너지 방향을 설명하는 거지 컵을 설명하는게 아니다. 전봇대로 이를 쑤시면 이쑤시개다. 그건 이를 쑤시는 사람이 결정하지 전봇대가 결정하는게 아니다. 전봇대는 에너지가 없다.


    이를 쑤시는 사람에게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봇대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찾지 말고 그 전봇대로 이를 쑤시는 사람이 전봇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봐야 한다. 어차피 그 관측대상과 상관없는 거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사용목적이 있기 때문에 용도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정해져 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거다.


   예컨대 컵에 손잡이가 있지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손잡이를 질로 놓는 것은 사람이 손잡이를 쥐니까 그런 거다. 즉 질은 에너지의 입구이며 사람이 손잡이를 입구로 쓰니까 입구인데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 손잡이 놔두고 다른 곳을 잡으면 그곳이 질이 된다. 그냥 에너지의 입구가 질이지 꼭 컵의 그 부분으로 에너지가 들어가란 법은 없다.


   에너지가 들어가면 그 에너지가 작동하며 그 작동의 시작점인 코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코어가 없어도 코어 역할을 하는 무언가는 있다. 우리가 만든 도구들은 대개 코어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편의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자연에서 그것은 순간적으로 결정된다. 수학적으로 대칭에 의해 에너지 균형점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움직이려면 움직임의 시작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건 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접근하기다. 필자가 컵의 코어는 여기다 하고 가르쳐주면 아 거기구나 하고 외어서 추상적 논리를 구체적 사물로 바꿔치기 할 것 같아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할수록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느낌이 든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꼭 토를 달아야 하나?


    힘은 용수철이 눌려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놔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냥 안정되게 눌려있는 상태는 입자다. 놓으면? 스프링이 튀면서 펼쳐진다. 어디로? 여러분은 스프링이 어디로 튀는지 안다. 왜? 만져봤거든. 눈으로 봤거든. 그러나 자연의 에너지가 튀는 방향은 모른다. 스프링이 어디로 튈지 안다면 정부규제로 집값이 어디로 튈지 알어?


    국민 여론이 어디로 튈지도 알겠네? 진짜 알어? 알긴 개뿔을 알어. 스프링이 어디로 펼치는지는 스프링 내부의 밸런스가 순간적으도 도출하는 것이다. 김연아가 연기하며 움츠린 몸을 펼칠때 어디로 튀지? 투수가 와인드업 했다가 어디로 튀지? 스프링은 알면서 김연아는 모르고 오승환도 모르고 강남 집값도 모르고 국민 여론도 모른다면? 

    

    즉 스프링이 어디로 튈지는 여러분은 그냥 봐서 알지만 스프링 안에서는 결정해야 한다. 자기들끼리 가위바위보 해서 정하는 거다. 이 말 듣고 스프링이 어떻게 가위바위보를 하지? 이러는 사람은 오백 방을 맞아야 한다. 어휴. 밸런스를 말하는 거다. 중요한 건 그 방향이 결정된다는 거다. 운동은 그 진행을 멈추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보자.


    우주 공간에서 총을 쏘면 총알은 영원히 날아간다. 날아가는 상태로 정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추가설명이 필요한데 운동하는 물체는 두 개의 축이 내부에 있으면서 교대한다. 부메랑을 떠올리면 된다. 그 둘의 상대적인 관계는 안정적으로 균형을 이루므로 정지해 있는 것이다. 물론 외부 관측자에 대해서는 움직인다. 내부에 축이 두개이다.


    축은 원래 한개인데 계속 바뀌는 거다. 아령을 회전시키며 던져보자. 명왕성과 카론처럼 서로를 공전한다. 모든 운동은 명왕성과 카론 상태로 서로를 공전하는 것이다. 그냥 허공을 진행하는 공도 내부적으로 에너지는 그런 상태에 있다. 하여간 이런 것은 몰라도 된다. 힘은 그냥 축이 위치를 바꾸는 것이고 운동은 둘이 교대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은 인간의 눈에 보인다. 둘이 자리를 바꾸기 때문이다. 사람이 걷는 것도 두 다리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허공을 날아가는 총알도 에너지적으로는 내부에서 자리를 바꾼다. 광자의 경우 그것을 파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운동은 보통은 마찰력이나 중력에 의해 정지되지만 이는 외부의 개입이고 자체로는 영원히 진행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힘은 각도가 정해져야 하고 운동은 시간 곧 속도가 정해져야 한다. 눈에 보이는 물체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찾으려 말고 에너지의 의사결정을 봐야 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말귀를 못 알아 잡수는 것 같이 느껴져서 언어를 보태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에너지는 다섯차례 결정한다. 


    물체를 외부에서 타격하면 즉 계에 에너지를 투입하면 밸런스 붕괴로 그 물체는 깨지거나 반작용하거나 정해야 한다. 그걸 정하는 것이 질이다. 깨질지 반작용할지는 밀가루반죽이냐 유리냐 돌이냐 나무냐로 정하며 그것이 질이다. 깨지면 사건은 사망이고 반작용하면 반작용의 시작점을 정해야 한다. 내부적인 에너지의 밸런스가 결정한다. 


    보통은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에서 코어를 정한다. 인간이 미리 정해놓은 것도 있다. 일부러 심을 삽입해 둔 것이다. 야구공 골프공에도 코어가 있다. 축구공은 비어 있지만 그 비어진 것이 코어가 된다. 딱딱한 코어든 빈 코어든 반드시 반작용의 시작점이 있다. 밸런스의 균형점은 수학적으로 있다. 인간의 근육이라면 뼈가 코어가 되는 것이다.


    문어는 뼈가 없어도 코어가 있다. 대신 문어는 코어를 정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동작이 사람처럼 재빠르지 않다. 뱀은 코어를 잘 못 정해서 몸을 S자로 꼬아서 그 S의 중간점을 코어로 삼는데 이게 꽈배기 하는 시간이 걸려 뱀은 동작이 느리다. 문어나 낙지도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탄력 받으면 잘 간다. 지렁이도 코어를 만드는데 느리다.


    뼈가 있으면 확실히 코어를 정하는 속도가 빨라 대응이 빠른 것이다. 갑각류는 속이 비어있지만 대신 껍데기가 대칭을 이루므로 코어를 의외로 빨리 정한다. 그래도 척추동물보다 느리다. 껍데기의 대칭에 의지하므로 복잡한 동작을 하지 못한다. 갑각류는 대칭적인 동작에만 능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코어는 있다. 없어도 즉각 도출한다. 


    축구공 속은 비어서 코어가 없는데요?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은 500방을 맞아야 한다. 대나무라도 코어는 에너지적으로 반드시 있다. 균형점이 코어다. 힘을 가하면 균형이 생기므로 코어는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없어도 있고 있어도 있는 것이다. 단 코어가 있어야 그 코어의 이동이 빠르게 되어 동작이 빠르다. 게는 동작이 빠를 수가 없다.


    코어가 있으므로 반작용이 진행되는 방향 곧 코어의 이동이 있는 것이며 힘은 그 이동방향을 정하는 절차고 운동은 코어를 이동하면 멈출 수 없으므로 운동거리가 벌어지는 것이다. 량은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이걸 추상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추상을 추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무한복제 되어 어디든 적용할 수 있다.


  볼펜이 하나라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볼펜을 갖고 와서 어디가 하나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하나라는 것은 볼펜과 상관없다. 숫자 1과 대응시킨 것이다. 마찬가지로 질 입자 힘 운동 량도 볼펜과 상관없이 에너지의 매개변수에 따라 대응시킨 것이다. 볼펜을 쓰려면 일단 잡아야 한다. 볼펜을 잡으려면 다섯개 루트로 에너지가 들어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볼펜은 다섯개 루트로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볼펜에는 다섯개의 발이 있어야 하며 다섯개의 발은 볼펜을 구성하는 인자들이 서로를 붙잡고 있는 결합력 그 자체다.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 등이 결합력을 결정한다. 발이 네개면 로봇은 볼펜을 잡을 수 없다. 포크로 음식을 집을 때는 콱 찌르면 되니 발이 한개면 된다?


   아니다. 우주공간의 허공에 떠 있는 음식을 포크로 찍을 수 있나? 접시를 이용하여 뒤를 받치고 중력으로 붙잡아놓고 있으미 이미 두 개의 발을 써먹었다. 로봇의 발이 둘이면 옆으로 삐져나온다. 음식의 무게가 지탱하는 역할. 접시의 받침역할. 이미 두 개의 발을 제공받고 있다. 우주공간에서 다섯 발이 아니면 움직이는 물체를 집을 수가 없다.

    

    이미 잡았으면 발가락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통제한다. 다섯발을 사용한 상태에서 물체를 원하는대로 조작할 수 없다. 다섯손가락 중에 하나를 빼야 한다. 손가락을 하나씩 빼서 0에 도달하면 물체는 원하는 위치에 가 있다. 그럼 손가락을 다쳐 네 손가락인 사람은 어쩌지? 그 경우 한 손가락을 교묘히 움직여 두 손가락의 역할을 겸해야만 한다. 


    이건 단순히 수학이다. 아직 이런 분야를 연구하는 수학이 없지만 조만간 나와야 한다. 이 수학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로봇이 걷지를 못하는 것이다. 로봇이 걷는 것도 다섯 손가락을 쓰는 것이며 로봇의 무게와 지표면의 단단함이 둘을 해주므로 발이 두 개이면 되는데 이는 발바닥의 길이가 하나의 역할을 대행하기 때문이다. 다섯발로 걷는다.


    젓가락으로 물체를 집어도 일단 그릇이 받치고 음식의 무게와 질감이 받치니 두 개를 날로 먹는다. 젓가락 두개+젓가락 길이+음식의 질감+접시로 5개의 발을 사용한다. 우리가 노상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으면서도 이런 것을 세어보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그냥 세어보면 된다. 음식을 먹는 건 거기서 하나씩 뺀다.


   집으면 접시가 떨어져 나간다. 입속에서 혀와 목구멍이 젓가락을 대체하므로 0까지 가는 절차가 복잡하다. 최종적으로 음식의 중력을 버리면 위장에 투하된다. 투수가 공을 던져도 먼저 5를 완성한 다음 하나씩 빼는 것이다. 투수의 와인드업은 지구 중력까지 끌어와서 5를 만든다. 5, 4, 3, 2, 1을 거쳐 0에 이르면 공읕 투수의 손을 떠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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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6 (16: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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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론과 인식론


    구조론 안에 존재론과 인식론이 별도로 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원래 수학 안에 대수학과 기하학이 있듯이 같은 표현이 중복되는 경우는 흔하다. 구조론은 간단히 세상을 알갱이 입자가 아니라 구조 곧 관계로 보는 관점이다. 주파수가 대표적이다. 파동의 간격이 색깔을 결정한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관측대상 속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알갱이나 혹은고유한 무엇이 아니라 대칭된 둘 사이의 간격이다. 두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지에 따라 부부가 되기도 하고 형제가 되기도 한다. 침실에서 만나면 부부요 거실에서 만나면 형제다. 그 간격은 상대적이며 고유하지 않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움직여도 결과는 같다. 부부 중에 어느 쪽이 외도를 하든 결과는 이혼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있다. 구조론은 모든 것을 구조 하나로 설명하는 일원론이지만 오히려 그 안에 다양함을 감추고 있다. 둘이 만나는 간격을 조정하여 얼마든지 다양한 칼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구조론 안에 존재론과 인식론이 있다. 인식론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관측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측되는 세계가 알갱이 입자로 되어 있으며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인간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사과, 배, 감, 복숭아, 포도, 잣, 대추들이라면 각각 고유한 형태와 속성을 갖추었다.


    금, 은, 구리, 납, 철, 주석, 아연이라도 마찬가지다. 굳기의 차이로 판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판별할 수 있는 입자는 많지 않다. 몇 종의 과일과 몇 가지 물질 뿐이다. 소립자 단위 미시세계로 가면 이런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컴퓨터로 봐도 0과 1 밖에 없어서 얻어낼만한 알맹이가 없다.


    인간사회의 다양한 부분은 고유한 입자가 아니라 상대적 간격으로 존재한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예술이든 간격이 칼라를 결정한다. 고유함도 없고 입자도 없다. 인식론적 접근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다. 남녀구분이라도 입자와 고유성으로 보면 고작 성기형태 차이 뿐이다.


    인위적으로 표지를 달아 고유성을 강조하지만 가짜다.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차이가 없다. 고유성을 발견할 수 없다. 태극기니 일장기니 하며 깃발을 내걸어 차이를 말하지만 가짜다. 해부학적인 증거가 없다. 오장육부 외에 뭐가 없다. 그러나 상대적인 관계 곧 간격으로 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신분, 지위, 계급 등은 모두 상대적인 관계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엘리트와 비엘리트, 서울대와 지방대, 승자와 패자는 관계다. 그것은 사건 안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대한 갈림길이다. 원래 고유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우연히 만나 상대적인 관계로 파악되는 사건을 일으켰는가?


    아니면 원래 커다란 하나의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이 특정한 조건에서 교착되어 우리가 아는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가다. 구조론의 답은 원래부터 사건이 있었다는 거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돌아다니다가 여러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원래 사건이 있고 사건이 진행되며 존재로도 된다.


    너와 내가 만나 국가를 결성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인류가 있고 그 인류가 번성하여 너와 내가 된 것이다. 가지와 가지가 붙어 나무가 된 것이 아니고 나무가 자라서 가지가 나누어진 것이다. 여기서 딜레마다. 인간은 나누어진 가지다. 나누어지기 전의 본체를 볼 수 없다. 진면목을 볼 수 없다.


    너와 내가 만나 국가를 결성한게 아니라 원래부터 집단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무의식의 형태로 집단의 조종받지만 자신이 집단의 일원이며 조종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신이 가족과 부족과 국가의 일원임을 모른다. 국명을 내걸지 않아도 국가단위 의사결정은 존재한다. 타자성이 있는 거다.


    국가는 없어도 단위는 있다. 집단이 있다.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세상은 고유성을 가진 입자 알갱이의 집합이 아니라 대칭구조 안에서 상대적인 관계와 간격으로 존재하지만 인간은 대칭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인식에 제한이 걸린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밖을 모른다.


    사건의 전모를 볼 수 없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소속한 집단을 모른다. 누가 자기를 조종하는지 모른다. 그것을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인식의 메커니즘과 존재의 메커니즘이 별도로 있는 거다.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에 인식은 인식대로 가고 존재는 존재대로 가야 한다. 인식은 나와 타자의 경계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존재로 보면 그 경계는 희미하다. 산모에게서 엄마와 아기의 정확한 경계를 정할 수 없다. 이익이 일치하면 가족은 내 일부이고 이익이 불일치하면 남이다.


    나와 타자의 경계는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다. 인식에서 단서를 얻은 다음 존재로 재구성해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자동차를 분해해서 부품을 익힌 다음 재조립해봐야 한다. 세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하지만 우리는 부분에서 전체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머리 속에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부분에서 전체로 간 다음 다시 전체에서 부분으로 놓아봐야 한다. 바둑을 두어도 그렇다. 흑백의 대결은 부분에서 일어난다. 전체를 봐야 하지만 전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전체는 아직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석대로 두면 전체가 연출된다. 머리 속에서 전체로 갔다가 다시 부분으로 와야 한다.


    나무는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는데 바둑은 가지에서 줄기가 나온다. 줄기는 없지만 있다치고 머리 속에 그려야 한다. 세상은 언제라도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더라도 투자가는 전체를 보고 투자하지 부분을 보고 투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체를 보여줄 수 없다. 전체는 계획이다.


    전체는 CEO의 서랍 속에 있는 것이다. 인식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 손정의가 내 마음 속에 이런 대담한 계획이 있노라 해봤자 믿어줄 사람 없다. 그러므로 인식론으로 가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존재론으로 틀어야 한다. 처음에는 이상한 아이디어로 유인하여 투자를 유치한다.


    일단 투자를 받은 다음에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이상한 아이디어는 보여줄 수 있지만 진짜배기는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세돌 9단의 머리속에 있는 것이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구조론은 철저히 존재론이다.


    존재 그 자체가 스스로 대칭하고 관계하고 간격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인간과 관계없다. 인간을 떠나 독립적으로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보여줄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다. 보여주려면 왜곡시켜야 한다. 인류는 원래 한 가족이다. 무의식이므로 보여줄 수 없다. 적이다 하고 외쳐야 알아듣는 것이다.


    적을 때려죽여라고 선언하면 개라도 알아듣는다. 적을 제압하려면 우리편이 필요하고 우리편을 만들려면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는 한가족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오지 않고 그냥 원래 한 가족이라고 하면 먹히지 않는다. 찢어죽일 놈의 사탄이 없으면 하느님도 없다.


    나쁜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 없다. 악이 없으면 선을 납득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업은 처음부터 좋은 것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항상 나쁜 것을 거쳐 간다. 선을 가르치려면 악을 경험시켜야 하고 하느님을 가르치려면 사탄을 만들어와야 한다. 차별하고 배제하고 미워해야 통합되고 사랑한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면 악은 원래 없다. 선의 지체가 있을 뿐이다. 적은 원래 없다. 문제해결이 있을 뿐이다. 사탄은 원래 없다. 리더가 있다. 모든 차별되고 미워하는 것은 통합하고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인간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누구도 진리로 바로가지는 못한다.
   

    존재론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인식론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존재는 양자적이다. 둘이 교착되어 하나가 된다. 처음부터 둘로 시작된다. 세상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원래 고유한 활동성은 가지고 있다. 인식은 원자적이다. 그냥 하나가 있는데 누가 외부에서 건드리면 사건이 일어난다. 틀렸다.


    원래 사건은 일어나 있다. 137억년 전 빅뱅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사건은 일어나 있었다. 사건이 교착되어 에너지의 고유한 활동성을 감추면 존재가 포착된다. 그러나 속임수다. 드라마의 빌런은 원래 동적 존재다. 원래부터 돌아다니며 일을 벌인다. 주인공은 정적인 존재다. 주인공은 가만 있다.


    주인공이 가만 있는데 빌런이 찾아와 일을 벌인게 아니라 반대로 주인공이 일을 벌이는 것이 구조론이다. 우주는 처음부터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이브가 아담을 꼬셔서 사건이 일어난게 아니다. 원래부터 사건으로 시작했다. 사건 자체의 논리를 따라가는게 존재론이다. 그러나 사건을 볼 수 없다.


    인간은 정지한 것만 볼 수 있다. 정지한 것은 애초에 잘못 본 것이니 눈을 다시 뜨고 에너지의 활동성을 봐야 하지만 인간은 그게 원래 안 되기 때문에 일단 정지한 것을 봤다가 다음 그 모순에서 사건을 유추하고 다시 정지한 것을 뇌에서 지우는 번거러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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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6 (19: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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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역과 귀납 그리고 이중의 역설


    인식론은 귀납이고 존재론은 연역이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귀납은 진술로부터 전제를 추측하는 것이며 연역은 정당하게 전제로부터 진술을 끌어내는 것이다. 연역은 언어구조와 맞고 귀납은 어긋난다. 그러므로 귀납은 추측과 사유에 쓰이되 추론에 쓰이지 못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추론은 연역이며 귀납은 없다. 단 적的을 붙여서 귀납적 접근이라는 표현은 쓸 수 있다. 이 경우는 추론이 아니라 추측이며 사유다. 새로운 가설을 세우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수학은 통째로 연역이다. 먼저 룰을 정하고 룰 안에서 세부를 채워가는 거다.


    엄밀하게 논하자면 모든 논리적 추론은 연역이며 귀납은 있을 수 없다. 단 연역추론을 하기 전에 자료수집 단계에서 귀납적 접근이 가능하며 이는 접근일 뿐 추론이 아니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방향이고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방향이다. 여기에서 딜레마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야 연역인데 추론단계에서 전체를 알 수 없으므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귀납하여 부분에서 전체로 가다가 오류를 발견하고 전체를 찾은 다음 다시 방향을 틀어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야 한다. 반드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거쳐야 한다.


    어떤 사유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방향전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무조건 틀렸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역설이다. 사건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가 있다. 결과측의 단서를 포착하는 사실단계와 배후에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원인측의 사건단계가 있다. 이중의 역설이 성립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두 번 방향을 바꾸어야 바르다. 예컨대 진보를 주장한다면 그냥 진보가 옳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역설을 적용하여 사실은 보수가 옳다를 찍고 와서 다시 에너지는 진보가 옳구나 하고 틀어야 한다. 이러한 이중의 역설을 거치지 않으면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사건은 문제의 해결이며 문제의 해결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부구조 단계와 방해자를 제거하는 하부구조단계로 조직된다. 에너지 공급은 주로 진보의 관심사가 되고 방해자 제거는 주로 보수의 관심사가 된다. 에너지 공급이 전제이면 그 범위 안에서 방해자의 제거가 진술된다.


    진술은 전제의 제한을 받는다. 그러므로 추론은 연역 밖에 없다. 진술에서 전제를 추측할 수도 있지만 이는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연역추론을 하기 위한 자료수집이다. 인간은 사건의 전모를 모르므로 전체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입수한 단서를 통해 가설을 세울 수 밖에 없다.


    전제를 알 수 없으므로 가설은 틀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거짓을 뒤집으면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바른 길을 가려면 어긋난 길을 한 번 가보고 와야 한다. 선은 악을 거쳐야 한다.


    대포 사격을 한다고 치자. 처음 아무 데나 한 방을 쏘고 낙하지점을 지도에 표시한다. 다음 각도를 1도 틀어서 다시 한 방을 쏘고 낙하지점을 지도에 표시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세번째 사격에 필요한 정확한 각도를 알 수 있다. 준비사격은 반드시 2회라야 한다. 삼각측정과 같다.


    정설에서 역설로 다시 이중의 역설로 세 개의 설을 조직해야 진실이 찾아지는 것이며 처음부터 정답으로 바로 갈 수는 절대 없다. 먼저 어떤 것을 찾고 다음 그 어떤 것의 움직임을 찾고 다시 그 어떤 것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에너지원을 찾는다. 이 과정이 없으면 보나마나 가짜다.


    존재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쳐 대칭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범위를 압축하여 사건의 원인에서 결과까지 접근한다. 질 입자 힘의 상부구조에서 에너지를 조달하고 힘 운동 량의 하부구조에서 대상을 통제한다. 보통은 대상을 통제하려다가 대상이 움직이므로 실패한다.


    미꾸라지를 잡으려다가 미꾸라지가 도망가버려서 실패하는 식이다.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하므로 미꾸라지를 잡을 수 없다는게 역설이다. 그러나 통발을 설치해두면 미꾸라지는 제 힘으로 통발 속에 들어와 있다. 미꾸라지의 자체 에너지를 통제하여 잡는 것이 이중의 역설이 된다.


    대상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의도적인 실패를 저지르는 방법으로 대상을 움직이게 해서 잡는 것이 이중의 역설이다. 그물을 쳐놓고 물을 들쑤셔서 물고기가 그물 속으로 숨게 한다. 두 번의 방향전환이다. 그물을 친다. 방향을 바꿔 물을 흔든다. 다시 방향을 바꿔 그물을 당긴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만 성공하는 존재다. 물론 이 과정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고 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라면 이 과정이 실패로 보여야 작전이 성공한다. 정치는 항상 새롭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실패해서 탄핵당한 것으로 보여야 한다. 일부러 탄핵을 당했다고 하면 안 된다.


    새로운 발명이나 창의라도 외부의 관측자에게는 실패로 보여진다. 이 패턴이 반복되어야 의도적인 투자로 이해한다. 미끼를 던져야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물고기가 미끼를 가져가니 실패로 보여진다. 정치와 예술과 발명과 도전은 새로우므로 언제나 오해되는 과정을 거친다.


    귀납추론은 무조건 틀린 것이며 응수타진으로 써먹을 수 있다. 바둑이라면 사석작전이다. 귀납은 반드시 죽지만 그것으로 적을 함정에 끌어들일 수 있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져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실을 파악하려면 의도적으로 오류를 저질러야 한다.


    진리는 오직 존재론과 연역 뿐이며 인식론과 귀납은 존재론과 연역을 쓰기 위해 필요한 장치다. 우리는 틀린 인식론을 구사하여 적을 게임에 끌어들여서 적이 틀리게 하는 방법으로 바른 길을 찾는다. 오조준을 거쳐 정조준이 가능하다. 가늠자와 가늠쇠를 거쳐 타겟을 겨냥한다.


    첫 번째 발사가 가늠자 역할을 하고 두 번째 발사가 가늠쇠 역할을 해서 세번째 발사로 타겟을 때린다. 이에 예외는 없다. 만약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이 과정을 거쳐서 내부에 감춰놓은 것이다. 오조준으로 실패를 경험하고 가늠자와 가늠쇠를 장치 내부에 갖춰놓은 것이다.


    정치나 예술이나 발명이나 도전에는 가늠자와 가늠쇠가 없기 때문에 만들어야 한다.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창당이 가늠자가 되고 적들이 탄핵소동이 가늠쇠가 되어주어야 국민이 정조준을 할 수 있다. 최저임금을 올려도 약간 무리하다 싶게 올려야 가늠쇠 기능을 충실히 해준다.


    적당한게 좋다 싶지만 적당하면 판단이 불가다. 국민이 납득하지를 못한다. 요리를 해도 약간 싱겁게 했다가 다시 소금을 쳐야 한다. 이러한 흔들기 조절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인가? 존재는 에너지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너지에 도달할 수 없고 장악할 수도 없다. 


    에너지는 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장은 둘 이상의 상호작용 형태로만 존재하므로 우리는 절대 에너지에 도달할 수 없다. 에너지를 장악하는 절차로 귀납적 접근이 필요한 거다. 오른주먹을 앞으로 내밀기 위해서는 왼주먹을 뒤로 당겨야 한다. 반드시 대칭구조를 조직해야 한다.


    신체의 코어를 중심으로 왼팔과 오른팔이 저울을 이룬다. 반드시 저울을 만들어야 한다. 두 번의 오조준을 거쳐 세번째 정조준으로 저울이 만들어진다. 가늠자와 가늠쇠와 타겟이 저울의 수평으로 정렬한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기 전에 오른발을 뒤로 힘주어 밀어 저울을 만든다. 


    가려는 방향의 반대로 갔다와야 한다. 당신이 진보주의자라면 보수주의를 거쳐와야 한다. 그렇게 저울을 만들고 가늠자와 가늠쇠를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선을 지향한다면 악을 한 번 거쳐와야 한다. 사건의 장을 조직하고 대칭을 조직하고 저울을 조직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젊었을 때는 진보였다가 세상 물정을 알고나서 보수로 생각을 바꾸었다가 에너지에 대한 통제권을 얻어 다시 진보로 와야 하는데 이 과정을 거쳐온 제대로 된 진보는 없더라. 에너지에 대한 통제권은 창의하는 자에게만 있다. 에너지는 반드시 닫힌계의 외부에서 오기 때문이다.


    닫힌계 안에서는 대칭구조가 작동하므로 에너지가 성립하지 않는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없다. 반드시 밖으 나갔다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안에서만 껍죽대는 자는 물정을 모르는 무뇌진보다. 밖으로 나가면 보수의 일탈이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제대로 된 진보다. 


    노무현처럼 바깥의 밑바닥 세계로 한 번 갔다와야 한다. 진짜에게는 에너지에 대한 통제권이 있다. 노무현은 밑바닥 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이 있다. 밖은 닫힌계의 밖이다. 닫힌계가 반드시 국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라면 공방이 벌어지는 판도 바깥이다. 그라운드 밖이다.


    한 번은 야인이 되어봐야 한다. 밖에서 신무기를 얻어오거나 외교하여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오거나 창의하여 새로운 방법을 얻어오거나 공방이 벌어지는 기존의 판도 안에 없는 것을 끌어들여야만 진보는 가능해진다. 닫힌계 안은 대칭적으로 조직되므로 절대로 에너지가 없다. 


    반드시 밖에서 힘을 가져와야 내부를 조정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가면 보수다. 노무현이 찾아간 밑바닥 세계는 보수가 먹는 세계다. 그 보수에 대한 통제권을 얻어와야 진짜 진보가 가능해진다.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는게 딜레마다. 누가 밖에서 끌어내줘야 한다.


    노무현은 정치권 바깥의 문재인이 당겨줘서 가능했다. 문재인도 정치권 바깥의 김어준이 당겨줘서 가능했다. 바깥과 연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대개 진보는 안에서 힘이 없어 움쭉달싹 못하고 보수는 밖에서 힘을 찾아 겉돈다. 진정한 자는 밖에서 힘을 이루고 안으로 쳐들어온다. 


    변방에서 중앙을 침범한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와 보수는 상대의 실패에 힘입어 기생할 뿐이다. 스스로의 역량으로 길을 열어젖히는 진짜는 없다. 보수는 호남과 노무현의 연결부위에서 약한 고리를 끊는 방법을 쓰고 있고 진보는 이명박근혜의 실정을 심판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할 뿐 스스로의 힘으로 전진하지 못한다. 자체 역량이 없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도덕과 명분으로 말하면 가짜다. 그것은 상대방의 실패를 이용하려는 것이며 상대방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자체 역량을 가져야 한다. 천하와의 큰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에너지는 언제라도 천하에서 온다. 우리가 세계와의 대담한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 희망은 없는 것이다. 천하인이 아니면 안 된다. 조중동과 박근혜의 허약한 연결고리를 끊기만 하면 집권은 가능하지만 상대방의 실패에 따른 반사이익에 안주하면 안 된다. 큰 그림을 그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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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9 (13: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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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와 언어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것은 언어다. 그 언어는 훌륭한가? 그러지 못하다. 인간과 자연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한 명석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과 자연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원리를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언어가 그다지 훌륭하지 않으므로 자연의 언어를 모방해야 한다. 자연이 스스로 연결하는 방법은 구조다. 자연은 구조로 소통한다. 자연의 근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고유한 활동성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의 활동성에 계를 지정하면 방향성이 보인다.


    자연의 에너지 활동에 계를 지정하고 대칭성을 조직하여 방향성을 유도하면 구조가 작동하여 사건이 일어난다. 인간은 그 사건을 목격하고 존재로 인식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다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서 에너지의 활동성이 계에 가두어져 통제된다는 의미다.


    인간은 사건을 조작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 자연의 구조는 효율성을 따른다. 만약 효율의 달성에 실패하면 에너지 부족으로 사건은 작동을 멈춘다. 계가 깨지고 사건이 중단된다. 그 경우 인간은 그 사건을 목격할 수 없다. 이야기는 중단된다.


    태풍이 육지에 상륙하여 사라지듯 존재가 흩어진다. 생물은 죽는다. 별은 수명을 다하고 초신성 폭발을 일으킨다. 우리는 사건을 장악하고 효율성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 자연과 자연이 구조로 대화하듯 인간과 자연의 대화는 가능하다.


    효율적인 구조는 대칭적인 구조다. 대칭적이면서도 그 대칭성이 깨져야 구조가 작동한다. 지속적으로 대칭을 이루면서도 대칭성을 깨려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정렬하여 엔트로피를 이루어야 한다. 자연은 기본적으로 대칭적이다. 그러면서 엔트로피적이다.


    머리와 꼬리가 50 대 50의 대칭을 이루면서도 51 대 49로 머리가 약간 커야 한다. 이 구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며 엔트로피를 달성한다. 이러한 자연의 구조를 모방하여 효율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인간은 자연을 복제해낸다.


    인간사회도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선과 악 중에서, 진보와 보수 중에서, 정의와 불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지만 틀렸다. 그러한 자세는 엄마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태도다. 선생님의 격려를 바라는 초딩들의 자세다.


    주최측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최측은 게임을 벌이고 판돈을 올리며 꽁지돈을 빌려줄 뿐 승부에 관여하지 않는다. 승부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한쪽이 판돈을 쓸어가면 도박장 하우스는 망하는 거다. 아니다. 승부는 아슬아슬하게 진보의 우위여야 한다.


    가만 놔두면 보수가 이기도록 세상은 만들어져 있다. 세상은 당연히 비겁한 넘이 이기고 반칙하는 넘이 이긴다. 세상은 나쁜 넘이 이기고 의리없는 넘이 이기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하우스는 망하도록 되어 있다. 2천년 전에 중국에는 4천여개 국가가 있었다.


    모두 망했다. 놔두면 경쟁하고 경쟁하면 승자독식에 의해 하나만 살아남는다. 하우스는 문을 닫는다. 하우스는 은밀히 사건에 개입해야 한다. 주최측은 카지노를 관리할 뿐 승부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지만 실제로는 개입하여 젊은이가 돈을 따게 한다.


   그래야 고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최측은 엔트로피가 작동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대칭을 유지하되 교착되지 않도록 속도조절을 하는 것이다. 진보가 승리하도록 하는게 역사의 목적이다. 그러나 너무 빠른 승리는 되레 수명을 단축시킨다.


    조로하지 않으려면 천천히 이겨야 한다. 진시황은 너무 빨리 이겨서 너무 빨리 망했다. 계를 통제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대칭을 끼고 가되 대칭이 교착되지 않도록 부단히 대칭성을 깨뜨리는 것이 주최측의 역할이다. 그러려면 언제나 약자를 편들어야 한다.


    강자가 이기면 사건은 종결되고 존재는 죽기 때문이다. 약자가 연대해 강자와 맞서 50 대 50의 균형을 이루되 약자가 살짝 이겨야 한다. 대승은 부메랑을 이루므로 좋지 않다. 자연은 이 방법으로 존재를 여기까지 달성해 왔다. 인간도 이 방법을 써야 한다.


    자연의 소통법을 복제해서 사회발전에 써먹어야 한다. 자연은 연역이므로 인간도 연역을 익혀야 한다. 자연은 에너지와 엔트로피를 위주로 하는 존재론을 사용하므로 인간도 존재론을 익혀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 인간은 귀납과 인식론으로 세팅돼 있다.


    인간의 언어가 귀납과 인식론에 맞추어져 있다. 인간의 언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전달에 맞추어져 있다. 인간에게는 호랑이를 때려잡기보다 호랑이의 존재를 알리는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본래를 익혀 한 단계 더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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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19:4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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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동일성


    어떤 연산구조에 대하여 두 집합이 완전히 동일하게 작용하는 경우 이 두 집합을 그 연산구조 하에서 이소모픽isomorphic하다고 부른다. 증명은 간단히 이소모피즘을 찾는 것이다. 

    수학에서 동형사상同型寫像, isomorphism은 서로 구조가 같은 두 대상 사이에 모든 구조를 보존하는 사상이다. 두 대상 사이에 동형 사상이 존재하는 경우 서로 동형同型, isomorphic이라고 하며, 서로 동형인 두 대상은 구조가 같아 구조로서 구별할 수 없다.[웹에서 발췌]


    구조는 같고 소재만 다른 것이 구조동일성이다. 서로 다른 두 그룹이 원소들은 다른데 그 그룹의 핵심 정의에 해당하는 부분이 동일한 경우다. 동일한 것을 좌표로 나타낼 수도 있고 수식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여기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 구조동일성을 읽는 방법을 터득하면 우리가 판단해야 할 문제의 숫자가 크게 줄어든다.


    드러난 팩트들에서 숨은 패턴과, 로직과, 매커니즘과, 패러다임을 찾는 것이다. 패턴이 같은 것들은 모집단에 가두어져 있다. 로직이 같은 것들은 서로 엮여서 대칭되어 있다. 메커니즘이 같은 것들은 의사결정의 축이 움직인다. 패러다임이 같은 것들은 에너지 입출력이 같다. 에너지 입출력이 같으면 사건이 같은 것이다.


    팩트에서 패턴을 찾고 패턴에서 로직을 찾고 로직에서 메커니즘을 찾고 메커니즘에서 패러다임을 찾는다. 인간은 만 가지 고민을 하지만 문제는 하나다. 여러가지 고민은 그 하나로부터 가지쳐 나왔다. 이소모피즘을 적용한다면 문제의 수를 줄여서 근원의 하나를 바라보게 된다. 인생의 문제는 결국 완전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완전성의 문제는 무의식의 형태로 개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집단과의 관계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다양하게 말해봤자 근본은 하나다. 에너지다. 어떻게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는가? 삶을 이어가게 하는 에너지의 출처와 끌어오는 방식을 묻고 있다.


    에너지는 집단에서 나온다. 집단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이 하나의 문제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부족과 국가와 인류에 충성해야 하는가? 아니다. 진보해야 한다. 개인이 어떻게 해도 의미는 없다. 잘 살든 못 살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완전성이 문제다. 


    완전성은 개체에 있지 않다. 방송국 없이 라디오가 완전하거나 불완전할 수 없다. 인간은 완전한가? 완전성은 집단과의 연결에서 찾아진다. 개인은 에너지를 얻을 때 완전하다. 언제라도 집단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의 출처는? 집단의 진보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 뿐이다. 그것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불완전한 것이다.


    에너지가 없어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므로 문제가 있다. 에너지를 충전하면 완전하다. 집단과의 관계를 바로 설정할 때 에너지를 얻어 인간은 완전해진다. 집단의 진보하는 방향을 읽고 그 에너지 흐름에 올라탈 때 인간은 완전하다. 방송국의 전파를 수신하여 방송을 토해낼 때 라디오는 완전해진다. 인간이나 라디오나 같다.


    구조로 보면 같다. 사건이 같다. 패러다임이 같다. 인간은 인생길을 달리고 자동차는 도로길을 달린다. 메커니즘이 같다. 인간은 심장이 뛰고 자동차는 엔진이 뛴다. 로직이 같다. 인간은 여당과 야당으로 나누어 있고 배는 이물과 고물로 나누어 있다. 패턴이 같다. 인간은 집단에 의지하고 글자는 활자에 의지하여 존재한다.


    생태계의 수렴진화도 이소모피즘isomorphism으로 해명할 수 있다. 생태적 지위가 구조동일성을 가진다. 호주와 아메리카의 대륙이 달라도 환경이 같으면 상호작용이 같고 상호작용이 같으면 서로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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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14: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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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론은 새로운 언어다.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게 하는 것은 문명이다. 문명은 여러 사람의 뇌가 컴퓨터처럼 네트워크를 이루어 더 높은 단위의 뇌를 조직한 것이다. 병렬형 슈퍼 컴퓨터와 같다. 그것이 사회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안에서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사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체다. 문명의 수준에 따라 사회의 격이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언어다. 언어에 의지하여 인간은 서로 소통하여 병렬형 슈퍼 컴퓨터를 이루게 된다. 만약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숫자가 없다면 인간은 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에게 충분한 언어가 있을까? 사물을 가리키는 언어는 있는데 사건을 진술하는 언어는 없다.


    원인과 결과 정도가 사건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단어다. 사건의 세계가 방대한데 겨우 두 단어로 감당할 수는 없다. 부족민은 숫자가 없어 셈하지 못한다. 하나 둘은 있는데 셋이 없다. 만약 셋이 있다면 셋셋셋으로 9까지 곧장 진도를 나간다. 셋하나 셋둘 셋셋으로 4, 5, 6을 나타낼 수 있다. 손가락이 열개라 열까지 간다. 


    열을 반복하면 스물이다. 백, 천, 만으로 계속 간다. 무한대로 간다. 멈추지 못한다. 그런데 부족민은 2에서 멈춘다. 2는 대칭되니 자체적으로 완성된다. 3은 필요없다. 피곤하다. 셈이라는 말이 3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3은 혁명이며 인류는 3 앞에서 꽤나 망설였던 것이다. 지혜가 축적되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있을까?


    문명사회와 부족민 세계의 차이는 2와 3의 차이에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와 둘, 곧 홀과 짝만 알았는데 어떤 계기로 3을 깨닫자 창졸간에 문명을 이루었다. 각국의 수사를 어원학적으로 규명해보면 대개 3진법이나 4진법이 곱해져서 12까지 나아갔다가 손가락 숫자에 맞추어 다시 10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건을 설명하는 언어가 원인과 결과 둘 뿐이라 문명이 더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 부족민이 2에서 짝지어져 그걸로 완성되어 안정감을 얻고 거기서 막혀버렸듯이 현대사회도 원인과 결과의 대칭으로 짝지어져 막혀버렸다. 여전히 3의 돌파구를 찾지 몫하고 있다. 2는 대칭이고 3은 비대칭이다. 구조는 3이다.

    

    대칭에 축이 있으면 3이다. 토대의 공유다. 두 사람이 한 배를 탄다. 배는 A에 속하면서 동시에 B에 속한다. 이런 것을 알게되면 인류는 무섭게 전진한다.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버리는 것이다. 보통은 선 아니면 악, 진보 아니면 보수, 정의 아니면 불의로 대칭된 둘 중에서 선택하려 하지만 3이 되면 사건의 주최측이 된다.


    보통은 1+2는 얼마지? 하고 물으면 3이라고 대답한다. 토대의 공유를 아는 사람은 얼마로 맞춰드리면 될까요? 하고 반문한다. 더 높은 층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얻는다. 2가 짝지어져 닫혀 있는 세계라면 3은 열려 있는 세계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여 다른 곳에 새로운 전단을 연다. 인류는 2에 갇혔다.


    대칭에 갇혀 축을 장악하지 못했다. 에너지를 이용하지 못한다. 시소의 양 끝자리에 갇혀 있다. 가운데 축을 차지한 사람이 게임의 룰을 바꾸어 농간을 부리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다. 3을 차지한 자는 언제든 축을 이동시켜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 거다. 그 세계로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사건은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기승전결로 전개한다. 그 과정에 의사결정을 한다. 하나의 사건에 다섯 번의 세부적인 의사결정이 숨어 있다. 먼저 계를 이루고 다음 축과 대칭의 구조를 만들고 다음 공간에서 축을 움직이고 다음 관성력으로 시간적인 진행을 한다. 그 과정에 에너지가 소모되면 사건은 종결된다. 


    다섯 매개변수가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그리고 원인에서 결과까지 진행하며 일 단위의 사건을 이룬다. 사건은 닫힌계 중심으로 시작과 종결이 있고, 머리와 꼬리가 있고, 전체와 부분이 있고, 그 사이에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시스템 안에 바둑의 수순처럼 순서와 방향의 형태로 질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한국인이 영어를 쉽게 익히지 못하는 이유는 영어에 방향과 순서가 숨어 있는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뇌가 직관적으로 반응하지 않아서이다. 단어가 아닌 어순에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동서남북을 모르면 길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동서남북은 그냥 감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머리 속에 지도가 한 장 그려진다.


    머리 속에 지도를 띄우지 않고 그냥 시각적으로 두드러진 표지를 기억해서 길을 찾는 사람도 있다. 보통은 동서남북 방향을 머리 속에 그려놓고 몇 번 오른쪽으로 꺾고 다음 왼쪽으로 꺾는다는 방향감각으로 길을 찾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큰 건물이나 인상적인 표지들을 카메라로 찰칵 찍듯이 뇌에 입력해 놓는다.


    밤길을 가거나 혹은 잠시 한 눈을 팔아 표지를 놓치면 길을 못 찾는 사람이 있다. 영어에 방향성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더 쉽게 영어를 배운다. 개별적으로 암기하지 않아도 뇌가 반응해서 감각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패턴을 유추하여 아는 것이다. 아기들이 언어를 학습하는 방법도 상황에 맞게 패턴을 유추하는 것이다.


    길에는 동서남북이 있어서 표지를 보지 않고 길을 찾아간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핸들을 꺾는 순서만 기억한다.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표지판을 보지 않고 감각적으로 서울방향과 시골방향을 안다. 자연스럽게 몸이 방향을 지시해준다. 방향감각을 과신한 나머지 톨게이트를 뱅뱅 돌다가 헷갈려서 반대쪽으로 가는 수도 있다. 


    사건의 방향을 아는 사람은 쉽게 사건의 다음 전개를 예측할 수 있다. 지금 사건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알면 앞으로 진행이 어떻게 될지 통박을 때릴 수 있다. 초반 포석과 중반 전투와 막판 끝내기에 따라 전술이 변한다. 먼저 닫힌계를 지정하고 축과 대칭과 호응의 엮임을 간파한다. 작동순서를 바로 알고 길을 찾는다.


    에너지와 물질과 공간과 시간과 정보가 순서대로 전개하는 흐름을 바둑의 수순을 읽듯이 훤하게 읽어낸다.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가 어떻게 맞대응 한다는 대칭의 엮임이 알아야 할 구조다. 좌표의 X축과 Y축을 이룬다. 수학을 배운 사람은 좌표만 보면 감각적으로 안다. 물론 보통사람은 좌표를 보고도 어리둥절해 한다.


    세상은 언제라도 대칭으로 이루어졌다. 대칭이 사건의 얽히고 풀리는 고리다. 우리가 아는 선악과 진보보수, 정의불의, 옳고그름, 높고낮음, 길고짧음, 밝고어두움이 모두 대칭이다. 상대적인 대칭은 알지만 이 대칭구조에서 축을 찾지 못하고 수순을 알지 못한다. 문명은 2에 막혔다. 언제나 탄생이 먼저고 죽음은 나중이다.


    죽고 난 다음에 또 환생하고 또 죽고 또 환생하면서 밑도 끝도 없으면 곤란하다. 사건은 분명히 시작과 끝이 있다.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이 있다. 선으로 시작하고 악으로 끝난다. 탄생은 선하고 죽음은 악하다. 진보로 시작하고 보수로 끝난다. 밝음으로 시작하고 어둠으로 끝난다. 하루는 분명히 아침이 저녁에 앞서 있다.

 

    봄으로 시작하고 겨울로 끝난다. 얽히는 방향을 알면 풀어내는 방향도 알게 된다. 좁은 구속으로 몰아가야 할지 아니면 반대로 폭넓게 간격을 벌려야 할지 알게 된다. 나침반 보는 법을 익혀 지도를 찾는 것과 같다. 사건을 읽는 법을 익혀 삶이라는 사건을 설계대로 조직하기다. 사건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진행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면 망하고 방해자를 제거하면 확률적으로 얻게 된다. 재수가 없으면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방향이 맞으면 좋은 패가 들어올때까지 계속 가야 한다. 확률에 지배되는 사건을 다루는 방법이 그러하다. 구조론이 새로운 언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어 배우면서 한국어 문법 적용하면 안 된다.


    구조론의 언어를 익히려면 귀납적 사유로 세팅된 기존의 문법을 버리고 연역적 사유로 사유의 문법을 바꾸어야 한다. 연역은 방향 보고 간다. 방향을 찾으려면 뇌에 동서남북을 그려야 한다. 닫힌계를 펼치고 축과 대칭의 구조를 벌려야 한다. 그런 사전 세팅절차가 없이 그냥 표지만 보고 가겠다는 얌체생각을 버려야 한다. 


    운이 좋으면 표지만 보고 가도 길을 찾을 수 있지만 복제가 안 된다. 자기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머리 속에 지도를 그릴 수 있어야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갈 수 있다. 익숙한 한국어 문법은 그만 잊어버려라. 2로 짝지어 사건을 완결시키는 습관을 잊어버려라. 선과 악이면 결론이 난게 아니고 시작이다.


    이쪽은 선하고 저쪽은 악하다 하는 판단이 서면 결론 나왔네 하고 이야기를 끝내면 안 되고 토대의 공유를 찾고 다음 그 토대를 이동시켜야 한다. 진보가 옳고 보수가 그르네 하고 결론을 내리고 끝내기 때문에 문재인 정권이 활로를 열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통일의 길로 내닫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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