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실

근접도-완성도-균형도-활성도-정확도 (미학)

http://gujoron.com/xe/8127   가치의 밀도 라는 글에서

"● 초등생의 진(眞) - 무엇을 그렸나?

● 중학생의 선(善) - 모델과 닮았나?

● 고교생의 미(美) - 보기에 좋은가?

● 작가주의 주(主) - 한줄에 꿰었나?

● 스타일의 성(聖) - 어디에 놓을까?

가치판단의 5 단계가 있다. 표면의 가치와 이면의 가치가 있다. 진, 선, 미, 주, 성으로 갈수록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 존재의 본질과 맞물리게 된다. 현대성에 대한 수준높은 이해가 된다. 그것이 더 가치가 높다. "


위와 같은  내용에서...


근접도-완성도-균형도-활성도-정확도
진 -선 - 미 - 주 - 성에서


진선미주성의 단계가 '진.선 '은 표면의 가치이고 ' 미' 는 표면의 가치와  이면의 가치의 중간단계로서 표면과 이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이고. '주.성'은 이면의 가치라는 말씀이신지요?

물론 가치의 밀도라는 글에 하단에 다 설명되어 있지만, 그 부분의 설명은  이해가 가는데...
오히려 글의 처음 부분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다시한번 설명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궁금한 점은 우리는 보통  ^;^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더라도 '진'이 가장 좋다고 알고 있는데...
초등생의 그림을 ' 진' 이라 함은  '진' 이 무한한 가능성은 있지만, 존재의 본질과 맞물리는 부분은 '성' 에서 라는 것인데...
'성'은 외부와의 소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진'에서 바깥세계와 소통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성'에서 일어난다고 하시니...
진이 좋다 성이 좋다의  혹은 진이 나쁘고 성이 좋다의 관점이 아니라...
질 -입자-힘-운동-양과 비교해보아도 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양의 개입이 더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진과 성도 그런 의미인가 해서입니다.
양은 계속 투입하는 것이고,성은 바깥세계와 소통하는 것인데... 물론 대입해야 하는 지점들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관점이 조금 이해가 갈듯말듯합니다.

 ' 진.선.미.주.성' 을 '근접도-완성도-균형도-활성도-정확도' 같이 연계하여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하여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8.03 (21:57:29)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근접도, 활성도 이런건 예전에 쓰던 임시적인 명칭인데

용어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지금은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일이 괄호달아서 맥락을 설명하기도 귀찮고 또 내가 지어낸 단어가 넘 많아서 내가 먼저 헛갈릴 지경이고.)


  성속(聖俗 - 낳아내기) - 창조인가 모방인가?

  주종(主從 - 하나되기) - 주도하는가 종속되는가?

  미추(美醜 - 짝짓기)   - 서로 보완하는가 충돌하는가?

  선악(善惡 - 맞물리기) -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진위(眞僞 - 만나기)   - 보이는가 감춰지는가?


그리고 가장 좋은게 무어냐는 것은

사람들이 존재론적 관점과 인식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가

수시로 기준을 바꾸기 때문에 믿을만한게 못됩니다.


시합을 하기 전에는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다."

시합 중에는

"페어플레이가 중요하다."

시합 끝나면

"금메달을 따와야지."


어떤 사건의 초기 단계와 중간단계, 종결단계에 중요한 것이 다릅니다.

출전할 때는 16강이 목표라고 하다가

막상 16강 가니까 다들 허정무 욕하데요.

인간이 원래 그렇죠.


그리고 좀 아는 사람들은 모든 사건을

인류문명 단위에서 공존의 룰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초기단계를 중요시하고

좀 모르는 사람들은

입증가능한 당장의 눈앞의 결과만 따집니다.

왜냐하면 인류문명단위의 룰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판단하지 않는 거지요.


그리고 흔히 말하는 진선미는

고지식한 칸트 아저씨가 주장한 거라고 하는데(검색해봤음.. 질문하는 사람은 그냥 물으면 되고 답하는 사람은 일일이 검색해야 하고, 실수라도 있으면 안 되고.. 이건 불공평함.)


그건 칸트 아저씨가

이성(진) 다음에 의지(선) 다음에 감성(미)를 놓았기 때문에

그런거고 그걸 truth, good, beauty라고 옮겨쓰는건 어떤 영국넘 마음일테고

칸트가 독일어로 어떤 단어를 썼는지는 나도 모르겠고

칸트 이전에도 비슷한 게 있었다고 하고

하여간 이걸 한국에서 진선미라고 쓰게 된건 아마

이걸 번역한 어떤 왜넘 마음일테고

어떤 왜넘을 잡아와서

'니가 뭔데 그걸 진선미라고 니맘대로 번역했느냐? 이실직고 하렸다. 저 괘씸한 놈을 매우 쳐라!'

한대서 순순히 불 일은 없을 테고

중요한건 고대나 중세에 이런 말을 지어낸 철학자 아저씨가 썼던 맥락과

제가 쓰는 맥락이 다르다는 거지요.


어쨌든 저는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여간 맥락이 다릅니다.


그리고 칸트 아저씨가

이성을 truth, 의지를 good, 감성을 beauty로 표현했다면

뭐 그것도 그럴듯 한 바가 있지만 중요한건 단어가 아니라 맥락입니다.

단어는 그냥 가져다 붙이면 되재요.

포지션이 중요한 거에요.


보통 감성(beauty)을 얕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아마 서양 마초아저씨들이 여성들이 더 좋아하는 beauty를 경멸하여

일단 여자는 서열이 뒤쪽이야 하고 뒤로 돌렸을 혐의가 상당합니다.

남자는 부하들을 끌어모으고 대장을 옹립하여 세력을 이루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고대 남자들 직업이 전사였기 때문에

전쟁할 작정으로 생각해낸 것이고

전쟁하기 위하여 세력을 이루려면 일단 truth가 필요하기 때문에

전쟁판에 거짓말쟁이 전과 14범을 대장 뽑을 수는 없으니까

남자의 전쟁 목적으로 truth를 앞세운 거겠지요.

아마도.


하여간 칸트류 게르만전사의 후예인

독일 마초 아저씨들의 무개념으로 보면

남자는 truth 여자는 beauty

고로 truth를 앞세우는게 당연한 공식이겠지요.

(독일넘이 생각도 할줄 알고 뭔가를 안다는 건 뭐 상상하기 힘들지만, 또 진득하게 들어보면 그 무개념 안에도 나름대로 기특한 발상도 간간이 있어주면서.)


어쨌든 그건 칸트생각이고

구조론으로 보면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입니다.

이건 뇌가 작동하는 공식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깨달음이나 직관력, 통찰력은

대부분 미에 대한 판단으로 작동합니다.

미학이야말로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문제는 미라는 개념이 광범위하다는 거지요.

어떤 수학자는 수(數)가 가장 아름답다고 우기고.

그럴 때는 맥락이 다르지요.


하여간 구조론에서는 beauty가 제일 앞서고

beauty 안에 다시 성>주>미>선>진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주>미>선>진의 세번째 미(美)와 

이 전체를 의미하는 beauty는 또다른 겁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가느냐 하면

인간들이 단어를 충분하게 만들어놓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전에 적당한 단어가 없으니 있는걸 형편대로 끌어다쓰고 그래서 헛갈립니다.


하여간 맥락을 보고 포지션 안에서 판단해야지 단어 글자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단어가 맘에 안 들면 그냥 질, 입자, 힘, 운동, 량입니다.

하여간 인간은 beauty를 기준으로 판단하여 상황을 장악해 갑니다.

다른 말로는 질서겠지요.


질서 - beauty 상태

무질서 - beauty가 아닌 상태


그러니 어떤 수학자가 수를 아름답다고 말한 거겠지요.


하여간 여자들이 beauty를 좋아하는 것은 질서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남자들이 beauty를 truth 뒤로 돌려놓는 것은

자기들이 당장 전쟁해서 무질서를 만들 작정이기 때문이고

하여간 남자들의 전쟁욕심이 판단을 흐려놓은 거고

뭐든 얄궂은건 마초 탓하면 되고.


어쨌든 제 말이 맞습니다.

왜냐면 저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하나의 사건 안에서는

성>주>미>선>진으로 진행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순서는 진>선>미>주>성입니다.

그러니 성이 앞에 설 때도 있고 진이 앞에 설 때도 있는 것이며

구조론은 입체적인 사고를 요하므로

통합적으로 보면 성이 앞섭니다.


근접도라는 표현은 지금은 안 쓰는데

왜냐하면 성(聖)은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의미하는데

소통도 하면 이상하니까 근접도 한건데

이질적인 것이 어떻게 하나의 바운더리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느냐입니다.

공존할 수 있는 정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이 높은 예수님은 창녀와도 공존할 수 있으니까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성이 낮은 사람은 창녀와 공존할 수 없으니 돌로 치려 하는 거고

백인이 나는 흑인과 공존못해 하거나

수구꼴통이 나는 좌파와 공존못해 하거나

자기와 다른 존재와 공존할 수 있는 정도를 근접도라고 한 것입니다.

근접도는 자기 존재의 아우라가 미치는 공간의 바운더리 범위라고 할 수 있겠죠.

바운더리가 좁은 인간은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그런 인간은 성이 낮은 것이니 성인이 못됩니다.

성인이 못되니 지성인도 못됩니다.


하여간 성은 자기와 다른 것과의 공존이며

남녀가 결합하는 것은 자기와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이며

남녀가 결합하여 아기를 맹그는 거 뿐 아니라

모든 창조는 자기와 다른 것과 공존할 때 일어납니다.

음악가는 어떤 음과 다른 음을 공존시켜 화음을 끌어내고

화가는 어떤 색과 다른 색을 공존시켜 작품을 창조하고

소설가는 자기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조직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며

이문열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견디지 못하고 쌍욕을 해대므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작가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에 오는 주(主)는

자기 안에서 내부를 통제할 수 있느냐입니다.

자기와 다른것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 안에서

자기식구들을 잘 데불고 있느냐입니다.

소설이라면 에피소드가 자기가 정한 주제를 벗어나 삼천포로 유람가지 않았느냐

음악이라면 엉뚱한 음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깨지 않았느냐지요.

이발소 그림을 낮게 치는 이유는

그림 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공존하고

아침과 대낮과 저녁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한 편의 그림이 아니라 여러 편의 모듬그림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생선회도 모듬회를 안 먹습니다.

자기 주장을 앞세워서 심플하게 가지 않고

남의 것을 이것저것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추해지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에 오는 미(美)는

사실은 성>주>미>선>진이 다 미(美)에 속하지만

보통 인간들이 미를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 보통 말하는 미는

성이 외부와의 소통인데 비해 미는 내부에서 어울리느냐 즉 내부소통입니다.

자기식구들 간에 대화가 되느냐입니다.

(성-외부소통, 주-내부통합, 미-내부대화)

음악이면 음과 음의 호흡이 맞느냐

소설이라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호흡이 맞느냐

뭐 이런 거지요.

성은 반장이 외부로 가서 담임을 만나고 전달사항을 알아오는 거고

주는 총무가 그 담임의 지시사항을 반원들에게 통보하는 거고

미는 반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 대 일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밸런스를 말합니다.


그 다음에 오는 선(善)은 good이라고 하는데

영어 good와 한국인들의 선(善)은 다른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선은 사회의 윤리, 도덕을 말하는 겁니다.

good의 어원은 ‘가득’인데 충만한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충성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뜨거운 사랑이라든가

뭔가 펄펄 끓어넘치는, 목숨걸겠다는, 하여간 대단한 것을 good이라고 하지요.

근데 한국인의 선(善)은 뭔가 신중하고 겸허하며 조용하고 참하고 진중하고

하여간 서양의 선은 펄펄 끓어넘치고 한국의 선은 은인자중하니 다릅니다.

그런데 중국인이 쓰는 한자어 선(善)이나

옛날 우리 조상이 쓰던 선(善)은 good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좋다가 아니라 가득입니다.

 

결론적으로 서양의 진선미 개념과

한국인의 진선미 개념은 번역이 잘못된건지 모르지만

상당히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이런 독일어 번역은 왜넘이 왜정때 했으므로 그저

이게 다 왜넘 때문이야 하면 얼추 맞습니다.


제가 말하는 선은 영어의 good과 비슷한 건데

상대적인 비교가 가능한 것 중에서 상대적인 비교우위를 말합니다.

진위판단이나 미추판단은 비교가능한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비교가능하다는 말은 OX 판단이 아니고

yes냐 no냐 판단이 아니고

점수로 90점이나 80점 하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진위판단은 비교가 아니라 배제입니다.


예컨대 충성이면 더 뜨거운 충성이 있고

열정이면 더 지독한 열정이 있고

사랑이면 더 맹렬한 사랑이 있듯이 항상 더한 것이 있는게 good입니다.

근데 진위판단은 비교를 안하지요.

예컨대 여자축구 월드컵을 하는데 남자선수가 그라운드에 뛰고 있으면

비교하는게 아니고 쫒아내는 겁니다.

자동차 경주를 하는데 자전거를 타고 출전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비교해서 3등이나 4등을 주는게 아니라 쫓아냅니다.


마지막 진이 그거지요.

하여간 진선미 하면서 진을 앞세우는 것은

특히 미인대회에서 미를 꼴등으로 돌리는 것은

미 하면 여자고 여자는 나대면 안 된다는 마초주의 때문이지

다른거 없습니다.


지금도 여성단체들이 미인대회를 비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주의 잔재로 미의 추구를 죄악시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점잖지 못하다는 거지요.


근데 그건 좁은 의미의 미가 되고

넓은 의미의 미로 보면 원래 철학의 출발이 미학입니다.

그리고 성>주>미>선>진가 다 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왜 미를 꼴찌로 치는가 하면

미는 어떤 결과를 나타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사건이 일어나는데 사건의 결과로 미가 얻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꽃품평회를 하는데

활짝핀 아름다운 꽃을 출품하면 그동안에 시들어서 볼품이 없습니다.

완전히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가져가면

그 기간 동안 피어서 채점관이 왔을 때 활짝 피는 거지요.

그러므로 아직 아름답지 않은걸 가져와야 하기 땜시롱

미를 뒤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근데 아직 아름다워지지 않은 것을 가져오면

잘못 가져올 수가 있으므로

그거 진짜냐 해서 진이 앞에 가는 거지요.

이건 소박한 인간의 경험칙이고

아무 논리의 근거가 없는 것이며

구조론적으로 성>주>미>선>진이 맞는 것이며

칸트가 진을 앞세운 것은 진위판단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며 그건 구분이 다른 거지요.

어쨌든 인식론으로 보면 진이 앞서는게 맞습니다.

그리고 어떤 세력을 이루어 갈 때는 인식론으로 하는게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건 혼란스러운 거고

구조론은 명확한 판단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준대로 하면 진이 판단하는 fact는 가장 꼴찌입니다.


어쨌든 신라시대에 화랑은 다 미인이었고

그 당시엔 미인+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성인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늘에 어떤 성스러움이 있고 그 성스러움을 받은 사람이 성인이지요.

비너스의 어원은 받는다는 뜻이 있는데

받는 것은 복이므로 비너스 신에게 빌면 복이 온다고 믿었는데

비너스가 아름다운 이유는 복을 받아서 그렇다고 했지요.

하여간 그리스인이나 신라인은 미인을 성인으로 쳤고

역으로 미를 판단할 때 성스러움을 기준으로 쳤으며
(그때는 예쁜 사람이 아니라 성스러운 사람을 미인이라고 했음)

이후 유교나 칸트 류의 전쟁논리가 끼어들어

아주 버려놓은 것이며

미는 미 중에서 가장 말단의 미인 예쁘다를 뜻하도록

의미가 축소된 것이며

예쁜게 미가 아니고 사람의 영혼을 긴장시키는게 미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08.04 (16:56:05)


근접도-완성도-균형도-활성도-정확도 는 현재 구조론에서는 쓰지 않는 개념이라는 말씀이시고,
구조론의 언어는 현재의 언어들중 가장 합당하고 알맞은 것을 차용하여 사용하신다는 의미이시고, 그러나 일반적인 쓰임새와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기에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언어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구조론의 미학에 관한 계통은 성>주>미>선>진으로 설명하시는 다는 말씀이시고,
미학의 '미' 를 풀어보면 그 안에 성>주>미>선>진이 다 들어있고, 그것을 보는 관점인 존재론적 관점과 인식론적 관점이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바뀌게 되므로 기본적인 기준은 존재론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신것 같습니다.

'문제는 미라는 개념이 광범위하다는 거지요.'
그래서 모든 만유에는 '미'가 깃들어 있어야 울림이 전달되나 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는 미학적인 가치가 숨겨져 있고, 또한 그것을 보아야만 가치가 상승하는 것인가 봅니다.
미학적인 가치(질서)가 없으면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것이 되므로,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미학적 가치를 성>주>미>선>진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 같구요.
혹은 그런 계통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미학)'의 가치가 축소된 협소한 의미의 '미'만을 얘기하게 될 우려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하여, '미(미학)'는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진'이 가장 앞서는 것이고 세력을 이루어 가는 것은 인식론적 방향이므로 '진'이 앞선다고 하는 것이 맞기도 하지만, 구조론적인 측면에서 명확한 판단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맞추어 보면 '성'이 가장 앞선다라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학적 가치는 '성'에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라는 의미이신 것 같고, 성에서는 외부와의 소통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이며, 일어나는 것이며, 그래서 관계맺기를 하는 것이며 그 감흥과 교감으로 인하여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하여 긴장하게 한다는 의미이시고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한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시대마다 미의 기준은 달라지지만, 절대적인 미의 기준도 있는 것이어서 미학에도 절대적 기준과 상대적 기준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하나의 사건 안에서는 성>주>미>선>진으로 진행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순서는 진>선>미>주>성입니다.
그러니 성이 앞에 설 때도 있고 진이 앞에 설 때도 있는 것이며 구조론은 입체적인 사고를 요하므로 통합적으로 보면 성이 앞섭니다.'

구조론의 미학에서는 성>주>미>선>진이 절대적 기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상대적 기준은 진>선>미>주>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절대적 기준과 상대적 기준도 서로 앞설 때도 있고 뒤설 때도 있으므로 구조론의 입체적인 통합적인 사고로 보아야 하며 그렇게 보면 '성'이 앞선다.라는 말씀이시라고 이해해 봅니다.

큰 뜻의 '미(미학)'를 다시 성>주>미>선>진으로 풀어 놓으신 것을 정리해보면...

'성은 외부와의 소통, 바깥과의 관계,교감,감흥,울림... 자세히 보면 연대개념과도 비슷하게 여겨집니다. 나 아닌 다른 것들과 같이 잘 지내는것. 비록 괴롭더라도 껴안아 버려야 하는 것.공존 공생 결합...이로서 창조가 일어나는 것.
'자기 존재의 아우라가 미치는 공간의 바운더리 범위라고 할 수 있겠죠.'
바운더리 범위를 넓히며 살고 싶은데.. 잘 안되는데..^^; 성인과 지성인 되기는 틀렸나 봅니다.ㅋㅋ

'주'는 내부통합...곧 자기안에서 자기 질서화가 되어 있느냐라는 의미이신것 같습니다.
내부에서 자기 질서화가 안되면 산만하고 어수선하고 뭔가 불일치가 일어나기에 아름답지 못하지요.

'미' 는 내부소통...내부에서의 대화, 각각의 호흡이 맞는가,일대일의 관계= 밸런스를 이루었는가, 조화롭게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가, 이루었는가...

선과 진 부분의 설명은 명확하게 단락이 지어져 있지 않으신 것 같아서(?) 제 생각대로 정리합니다.

'선' 은 영어의 good 개념과 비슷한것, 좋다가 아니고 '가득'의 의미, 상대적인 비교에서 상대적 비교우위를 갖는 것,
~보다 더 ~하다. 비교가 아닌 배제의 개념, 비슷한 것에서 좀 더 나은 것을 찾아내는 것,

'진'은 이질적인 것을 완전히 제외 시키는 것,같은 것에서 다른 것은 완전히 분리해냄,


'넓은 의미의 미로 보면 원래 철학의 출발이 미학입니다. 그리고 성>주>미>선>진가 다 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왜 미를 꼴찌로 치는가 하면 미는 어떤 결과를 나타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사건이 일어나는데 사건의 결과로 미가 얻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는 사건의 결과로 얻어지는 경향이 있다라는 것은 우리의 눈으로 바로 확인 가능하다라는 말씀이신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는 협소한 의미의 미다. 전체적인 넓은 의미의 미는 모든 만유에 감추어져 있는 질서있는 아름다움이다.
이것을 보아야 한다.라는 말씀이시라고 생각해봅니다.

긴 글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ㅎ~ 저도 예전에 누군가들에게 댓글 달아주느라 밤새 검색하여 자료 찾은 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수고로움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동렬님께 수고로움 끼쳐 이리 장문의 글을 받았습니다.
언젠가 저도 누군가들을 위해 밤새 검색하며 자료 찾으며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댓글 달아주게 될 때도 있겠지요. 그렇게 갚겠습니다.
구조론에서 구조론 언어 창조는 동렬님 몫이고, 활용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구조론 언어,혹은 구조론 사전 확립에 밝은 진전이 있으시기를 기대해봅니다.
각각 학문을 (미학,철학,사회과학 등등) 설명하고 논증할 합당한 계통적 용어들이 있다면 훨씬 사용하기 편리하고 이해하기도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드립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8.04 (17:42:36)


진보는 망가지는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것을 논쟁하고 경쟁하면 점점 좁아지고 비루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실에서 벗어나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지요.

원래의 미는 건강한 미였는데 그것은 순수하게 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쟁이 들어가면서 점점 왜곡되어서

허리는 버들가지처럼 가늘어야 하고

엉덩이는 어째야 하고 등등

점차 왜곡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미를 주체적인 시각이 아니라

어떤 수단, 용도, 기능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경쟁하면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을 내세우는 쪽이 이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것은 대부분 입증할 수 없으므로

즉 평가할 수 있는 부분만 가지고 평가한다는 거지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빼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1초만에 증명이 되는 표피만 가지고 따지게 되며

그것은 하잘것 없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점점 허리를 졸라매거나 발을 묶거나 목을 늘이게 되었지요.

진정한 미란 인간의 통찰력을 키워주는데 의미가 있지만

통찰력은 입증되지 않으니까 입증되는 부분만 논하자 이렇게 되어

그냥 발 길이를 재보자 허리둘레를 재보자 목 길이를 재보자

자꾸만 왜곡이 되어가는 거지요.

진이 뒤로 가는 이유는

진위판단이 입증가능한 부분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며

옛날에 진선미 할때 진을 앞세운 이유는

진리 즉 입증되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말할 때도 두가지 태도가 있어요.

진(眞)이라는 말이 입증가능한 부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참되다거나 참사람이 되어라거나

참정치 하겠다 할 때의 참은

나중이라도 입증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참된 것은 당장 입증되는 측면도 있고

오랜 세월이 흘러야 입증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마다 미의 기준이 달라진다 해도

미 자체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미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미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미를 주체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이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http://media.daum.net/economic/estate/view.html?cateid=100019&newsid=20100803085116931&p=akn


이 기사에 달린 리플을 보면 아실텐데

추천수 1위로 92추천을 받은 글은


완전 쇼를 하는 구먼.. [23] 트라이스타님 |10.08.03 |

우리나라는 차가 우측통행을 하기 때문에 차를 마주볼수 있게끔 좌측통행을 해야 오히려 사고를 줄일수 있다.

어떤 미친놈이 우측통행안을 내놨는지. 그놈 뇌구조를 한번 분석해 보고 싶다.

그리고, 이걸 기사라고 써댄 아시아경제 황준호기자 이놈도 참 개념 없다.. 

추천 92


에서 보듯이 모두 도로 기준으로 좌측이냐 우측이냐 판단하고 있습니다.

좌우란 것은 사람 몸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인데

모두들 당연하다는듯이 도로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즉 대부분 오판한다는 거죠.

왜?

노예근성이죠.

자기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도로가 주인이고 자신은 종놈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리플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민주시민교육이 안 되어 있어요.

국민 대다수가 노예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렇듯이

미를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타자를 위한 봉사, 차원의 기능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미가 변한게 아니고

미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변한 것입니다.

미 자체는 변하지 않고 의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며

그 미를 대접하는 인간의 태도가 변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순수하게 미를 그대로 받아들였죠.

세월이 갈수록 실용주의자 똥쓰레기들이 나타나서 

미를 써먹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내한테 어떤 이득이 되느냐는 식이지요.

즉 옛날에는 미인을 주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미를 판단하되 대화할만 하냐 소통할만 하냐 격이 맞느냐 관점에서 본 것이며

세월이 흐를수록 쥐새끼들이 물을 흐려서

미를 종놈으로 보고

저 종놈이 내게 어떤 시중을 들어주느냐는 관점으로 보게 되어

판단이 흐려진 것입니다.

예컨대 작품을 보되

저 작품을 사놓으면 가격이 오르느냐는 식이지요.

가격 올리는 방법은 간단해요.

그 작가를 죽이면 되지요.

죽이면 작품이 희소해지고 신문에 보도가 나가면서 가격이 배로 뜁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 작품이 좋다는 말이

저 작품을 그린 작가는 곧 죽을 것이라는 뜻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런 식이지요.

주체적으로 보느냐 대상으로 보느냐입니다.

미를 주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획득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식으로 보면

영원히 노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여간 미는 변한 적이 없고
상대적인 미란 없으며
인간의 언어가 변한 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08.04 (19:03:46)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미를 왜곡,폄하,평가절하 하는 현상이 심해진 것 같습니다.

내가 끌리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미학이라는 것을 알고 한동안 너무나 매료되었던 적이 있었지만...
정작 미학은 장치 투성이었고, 미 자체를 제대로 설명하는 글은 보기 힘들었고,
시대적으로 미를 해석한 것. 또는 누군가들이 주장하는 미에 대해 주석이나 설명을 달아놓은 정도, 철학과의 애매한 경계를 넘다든다는 것 뿐이었는데...
그래서 모든 미학의 관련된 책들은 이진경의 서양 철학 해석적 바운더리를 많이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갈등되어.. 진정한 미의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했는데...
고민이 많이 해소됨을 느낍니다.


진(眞)이라는 말이 입증가능한 부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참되다거나 참사람이 되어라거나

참정치 하겠다 할 때의 참은

나중이라도 입증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참된 것은 당장 입증되는 측면도 있고

오랜 세월이 흘러야 입증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마다 미의 기준이 달라진다 해도

미 자체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미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미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미를 주체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이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미를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타자를 위한 봉사, 차원의 기능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미가 변한게 아니고

미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변한 것입니다.

미 자체는 변하지 않고 의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며

그 미를 대접하는 인간의 태도가 변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순수하게 미를 그대로 받아들였죠.


'하여간 미는 변한 적이 없고
상대적인 미란 없으며
인간의 언어가 변한 것입니다.'

미 자체가 변한 적이 없다는 것 .
단지 인간의 태도가 변한 것. 인간의 언어의 쓰임새가 변한 것, 인간의 필요에 의해 그 시대 가치관에 따라 변한 것.
미를 제대로 통찰하기 위해서는 주체적으로 미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사람마다 미를 달리 여기고 받아 들이는 이유는 미의 진정한 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성>주>미>선>진 에서 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서 미를 격하 시켜버리는 왜곡이 일어난다면,
입체적으로 보아야 하고 전모를 보아야 하는데...부분만 보게 되므로 그런  경우들은 '미'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개인마다 미를 보고 느끼는 범주도 그 왜곡에 갇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미'의 기준은 저급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생각되는데, 미의 기준을 한정지어버리게 되어 그 시대 사람들의 미적가치는 하락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미'에 대한 기준은 주체적이어야 한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미를 보고 느끼며 판단하는 것도 진에서 멈추어 버리거나,선에서 멈추거나,미에서 멈추거나, 주에서 멈추거나  하는 단계적인 것인지요?  진만보고 성은 보지 못한더거나...혹은 주 까지는 보는데 성을 대체로 보지 못하는 것인지요...?
'미'에 대한 생각도 단계적으로 상승하는 것인지, 아니면 통짜로 인식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물론 어떤 것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교감하는 것은 표현은 되지 않을지라도 모두 느낀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미에 대한 것을 느끼면 사람은 행복감이나 어떤 정화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대가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이렇게 느끼는 미의 대한 것도 그 시대에서 왜곡이 일어난다면 느끼는 것도 달라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물론 느끼는 감정 그 자체는 변한 것이 아니지만, 무엇을 보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가?에 대해서 대상이 달라지는가 입니다. 그 시대가 지정하고 공모한 미의 기준에 모두 매혹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미는 절대적인 미의 기준과 상대적 미의 기준이라고 표현했던 것이지만, 미 자체의 기준에 상대적인 미란 없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신지 감은 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8.04 (22:07:49)

 



  이런 문제들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자신이 인식한 것을 순수하게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언어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문명화 되어 언어의존이 심해질수록 그 경향도 심해집니다.


  아프리카 부족민들이 셈을 안 하는 이유는 숫자가 없기 때문이듯이, 배우지 못하면 아는 것도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상황을 통째로 인식하지만 그것을 남에게 언어로 설명할 때는,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포기하지요. 그러므로 그것이 미다 하고 깨우쳐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성(聖)이라고 써놨지만 적당한 단어는 없습니다. 성(聖)의 개념을 옳게 아는 사람이 지구 상에 몇이나 될까요. 대부분 직관으로 느낄 뿐, 확실히 아는게 아니지요. 예컨대 장발장 소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지만, 자신이 그 신부님의 상황이 되어 장발장을 만나면 절대 신부님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직관적으로는 진선미주성을 다 알지만, 실제 그 상황에서는 연습된, 익숙한, 해본 짓만 합니다. 즉 인간은 성(聖)의 상황을 경험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상황을 당해도 연습한 사람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서 부추기면 합니다. 이명박도 한때는 운동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영웅들은 떼로 출현합니다. 무리들 중 한 명의 선지자가 시범을 보이면 다들 따라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술에도 붐이 있습니다. 르네상스도 붐이고 그 핵심인물은 미켈란젤로지요. 다빈치는 좀 아닙니다. 물론 아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현대인들도 90프로는 미(美)를 어떤 기술이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안 그려 봤으니까. art의 어원도 ‘잇다’인데 실로 구슬을 꿰는 따위의 기술을 뜻합니다. 매너리즘이라는 말도 손기술이라는 뜻이고, 재래의 아카데미파들이 인상주의를 반대한 것도 거기에 신통한 기술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들 완고하게 예술=기술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동양이 오히려 앞서 있었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도 예술이 기술이 아니라고 들어서 아는데, 실제로 미술관에 데려가서 작품을 보여주면 다들 기술을 살피고 있습니다. 심지어 평론가들도 그림을 보여주면 본질을 떠나서 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론에도 평론의 기술이 있기 때문에, 익숙한 평론기술을 구사하여 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평론가들 대부분은 그럴습니다. 심지어는 칼럼도 기술로 찍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모두에 신문기사를 인용하고, 다음 자기집단의 강령을 제시하고 호통을 치는 식의 판에 박힌 칼럼을 복제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도를 아는 것은 노자가 도를 말했기 때문이고, 덕을 아는 것은 또한 노자가 덕을 말했기 때문이고, 인을 아는 것은 공자가 인을 말했기 때문이며, 철학을 아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개념화 시켜 주지 않으면 아는 것도 써먹지 못합니다. 


  이제 내가 성(聖)을 말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성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지금까지는 성(聖)을 말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미에 있어서 성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에 대한 느낌 자체는 달라지지 않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옛날 시골농부들도 저녁에 멋진 저녁놀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지만 그걸 절대 입밖에 내지 않습니다. 도시의 시인이 찾아와서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하고 감격해 하면 ‘미쳤군’하고 흉봅니다. 농부가 느끼지 못하는게 아니라 느껴도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써먹지 못하니까. 물론 시인은 시에 써먹죠. 시집이 대박나서 부자되지요. 그리고 농부를 흉보죠. 느끼지도 못하는 농부의 삭막한 가슴이라니 하면서.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지만 그 느낌을 표현하고 그 느낌으로 소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연한 사람도 꽃을 보면 예쁘게 느끼지만 고개를 돌립니다. 연애하는 사람도 꽃을 보면 예쁘게 느끼지만 연애하고 있기 때문에 그 꽃에 다가가 향기를 맡습니다. 느끼는건 같지만 연애하는 사람과 실연한 사람의 행동은 다릅니다. 즉 미의 기준은 시대를 떠나 절대적이지만 그 미에 다한 사람의 태도와 행동은 다른 거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진선미주성을 다 느끼지만 초등학생을 만나면 진에 대하여 대화하고, 중학생을 만나면 선에 대해서 대화하며, 고등학생은 미, 대학생은 주, 좀 아는 사람을 만나고서야 성에 대해서 대화를 합니다. 이문열류를 만나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피합니다. 백안시입니다.


  즉 인간이 성(聖)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첫째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 스스로 명확하게 개념화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셋째 그것을 함께 나눌만큼 수준이 맞는 대화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언어를 만들어줘야 하고 개념화시켜 줘야 하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철학자입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노자와 공자가 그 일을 했습니다. 죽림칠현이 했고, 소동파가 했고, 율곡이 했고, 화담이 했고, 추사가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옥도 모양이 원래 그랬던게 아니고, 고려때만 해도 직선을 많이 써서 장중하게 지었는데, 조선시대 유림들이 유교미학을 퍼뜨려서 집은 똑 이렇게 지어라고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집에 색칠을 하지 않고 흰색 회만 쓰는게 유림들이 심플한 것을 강조해서 그렇게 된 거고, 한국인이 백의민족이 된 것도 고려때는 원래 흑의민족이었는데(신라때는 백성들이 개가죽옷을 즐겨 입었음) 조선후기에 유림들이 유행시켜서 백의로 변한 것입니다.


  미라는 것은 양식이 있어서 절대적으로 누군가가 시범을 보여주고 세팅을 시켜주지 않으면 지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느끼는데 어렷품히 느낄 뿐 언어로 표현하고 행동하지 못합니다. 서태지의 난 알아요가 처음 나왔을 때 보통 아무 생각없는 꼬맹이들은 다 알았지만 TV프로에 나온 유명 음악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혹평을 했는데 임백천이 홀로 알아주었습니다. 즉 임백천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문가들은 초등학생보다 안목이 낮았던 것입니다. 전문가일수록 더합니다.


  역시 평가할 수 있는 것을 평가한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평가하기 곤란한게 나오면 배제하는 거지요. 그런데 재미있는건 그런 것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보는 초등학생도 심판석에 앉혀서 완장 채워놓고 니가 함 평가해봐라 하면 다시 평가능력이 퇴행해서 제대로된 평가를 못합니다. 본능은 평가하는데 이성은 못합니다. 왜? 언어가 없기 때문이지요. 자기가 뭘 보고 평가했는지 자신이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진선미주성을 통짜덩어리로 느끼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사용함에 있어서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사용하며, 초등학생은 진에 집착하고, 중학생은 선에, 고등학생은 미에, 대학생은 주에 집착하며 성은 아는 사람이나 아는 것입니다.


 미에 대한 기준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하지만 사회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변합니다. 이때 유통과 소비가 변하는 거지 본질이 변하는건 아닙니다. 상대적인 미가 있는게 아니라 소비시장의 트렌드가 있고, 유행이 있고, 패션이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독일에 가면 집을 지어도 다들 다르게 짓습니다. 근데 한국인들은 아파트처럼 획일화된 집을 짓습니다. 한국인이라고 독일처럼 짓고 싶지 않아서 그런게 아니고, 첫째 돈이 없어서, 둘째 디자이너가 없어서, 셋째 평론가들이 그 점을 떠들어주지 않아서, 넷째 남들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런 것이며, 한국인들도 독일식으로 다양하게 지으면 좋다는거 머리로는 다 알고 있어요. 어쨌든 독일인이 한국에 와보고 성냥갑 아파트 보면 한국인들은 파시스트에 전체주의라서, 미에 대한 감각이라곤 없어서, 독재자에 세뇌되어서 바보같이 획일화된 집을 좋아하는군 하고 착각하겠지요. 어쨌든 일본인들은 경차를 소비하는데 작은차를 좋아해서 그런게 아니고 도로와 주차장이 비좁아서 그렇답니다. 일본인은 원래 작은차를 좋아해 왜냐하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니까 하고 이어령이 떠들면 그게 다 맞는 말은 아닌거죠.


  미는 양식이며 양식은 어느 기준에 맞추는 건데 주변에 띨빵한 양반이 있어서 맞춰주다 보면 전체적으로 띨빵해집니다. 만약 그 나라에 띨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 기준에 맞추다가 국민 전체가 띨빵해집니다. 기준을 잘못 맞춰서 그렇지 미의식 자체가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느끼는건 같지만 그것을 표현하는건 다르지요.


  아프리카 어떤 일자무식 소년이 있었는데, 주인 나리를 찾아와서 베토벤 몇악장 무슨 음악을 축음기로 틀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소년은 진정한 무식인이었지만 베토벤 음악이 자기 귀에 맞았던 겁니다. 문제는 베토벤을 알 리가 없는 그 소년이 주인 나리에게 자신이 한번 우연히 들었던 그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서 손짓발짓 30분간 애를 먹었다는 거지요. 만약 한국이라면 어떨까요? 어떤 부자가 축음기를 사서 이런 저런 음악을 틀어놓으면 한국소년이 우연히 듣고 와서 베토벤을 틀어달라고 할까요? 죽어도 그 말 안 합니다. 왜? 그 아프리카 소년은 순수하기 때문에 베토벤을 원하는 것이고, 한국소년은 좀 아니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원하며, 친구들 앞에서 써먹을건 유행가니까 무조건 최신유행가를 틀어달라고 합니다. 이건 한국인 수준이 낮아서 그런게 아니고, 느끼는게 없어서가 아니고, 명백히 의도와 목적이 개입한 불순한 것입니다. 소비시장의 법칙이 작용한 겁니다. 다 그렇지요. 그래서 망가지는 거고.

  하여간 좋은 것일수록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써먹을 데가 없어요. 허접한 것은 써먹을 데는 많은데 도움이 안 되죠. 알아주는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봄에 나는 향긋한 죽순의 향을 음미하기 위해여 담양까지 운전해서 갈 용의가 있지만 그런 친구가 없다면 그냥 짜장면 시켜먹는게 맞습니다. 제가 그냥 짜장면의 푸짐함에 만족하고 있지만 그 죽순의 진정한 맛을 몰라서 그런게 아니고, 같이 먹을 제대로 된 친구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08.05 (16:38:08)


미를 예술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 쉽지만 '미'란 자연을 구성하는 질서화와 같은 것이어서 미는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됩니다.
단지 볼 수 있는가? 없는가? 느끼는가,느끼지 않는가? 표현하는가? 표현하지 않는가? 표현되는가? 표현되지 못하는가?
사용할 언어가 있는가? 없는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가? 모르는가? 에 따라서 '미'의 양상은 다르게 전달되거나 다르게 나타난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동렬님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이유에서 입니다. 그래야 무엇이 더 의문점이 나는지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는 미가 순수했기에 인간과의 교감이 쉬웠는데 점차로 인간이 자연과 멀어짐으로 인해서 자연과 교감하는 것이 어려워 졌다.
그 이유는 점점 문명화 되어 언어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의도와 목적이 개입되어 불순해진 것이다. 소비시장의 법칙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의 대한 인식은 점점 망가지는 것이다.

미에대한 기준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하지만 사회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변한다.이때 유통과 소비가 변하는 것이지 '미'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시장의 트랜드가 있기 때문이다.

미는 양식이며 양식은 어는 기준에 맞추는데 기준이 잘못되면 전체적으로 미의 기준이 낮아진다. 그러나 기준을 잘못 맞춰서 그런 것이지 미의식 자체가 소멸항 것은 아니다.

느끼는 것은 같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결국 느끼는 것이 제대로 표현되고 미적 가치가 높아지려면 그 제시되는 기준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을 아는 것은 누군가 개념화 시켜주는 것이다. 개념화가 안되면 자신이 느끼는 그것도 표현되지 않으므로 써먹지 못한다.
느끼기는 하지만 표현이 안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지만, 그 느낌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즉 미의 기준은 절대적이지만 그 미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행동은 다르다.

미라는 것은 양식이 있어서 절대적으로 누군가가 시범을 보여주고 세팅을 시켜주지 않으면 자각되지 못하는 것이다.
본능은 알고 평가도 하는데 이성은 알지를 못한다. 언어가 없으므로 자신이 뭘 보고 평가했는지 모른다.
이 말은 이성은 언어로서 아는 것이고 개념으로 아는 것이어서 양식화 되지 않으면 표현을 못하는 것과 같다. 즉 '미'는 본능으로 아는 것을 이성화 해야 알게 되는 것이다.자각이다. 각성이다. 자연상태의 '미'를 양식화 하지 않으면 이성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표현이 안되는 것이다. 이성은 언어를 필요로 하고 개념을 필요로 한다. 즉 표현할 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언어로 표현된 것은 개념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선미주성은 통짜덩어리로 느끼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사용한다.
진<선<미<주 는 초등수준,중등수준,고등수준,대등수준 의 단계에서 집착하여 이해하지만 '성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만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 '성'에 무관심한 이유는 (1)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 (2)스스로 명확하게 개념화하지 못했기 때문, (3)그것을 함께 나눌 수준이 맞는 대화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언어를 만들어줘야 하고 개념화 시켜줘야 하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철학자이다.



미 자체는 절대적이지만, 미도 진보의 방식을 따르고 망가지지만 ,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인식하는 방식이나 혹은 필요에 의해 그것을 왜곡하기 때문이고, 문명으로 인하여 언어에 의존하는 것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미를 느끼는 것은 다 같지만, 그것의 표현에 있어서는 아는만큼, 상황에 따라서이나, 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개념화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표현할 방법을 마련해야 하고, 그것이 언어창조이고, 창조된 언어는 개념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 미의 최종적인 것은'성인데 성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성이라는 개념화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면 그것을 표현할 것을 만들어 낸다. 언어를 만들고 개념화 시키는 것이 철학자의 역할이다. 그러한 작용으로 인하여 점점 인간은 표현을 확대하고 소통을 하며 관계를 확장하게 된다.점점 맣은 언어들이 생겨나게 된다. 현재의 IT산업처럼 새로운 말들이 생겨난 것과 같다.  이름 붙여주어 생명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철학자는 개념을 정립하여 '미'에 대한 표현을 사고에 대한 표현에 생명성을 불어넣어 준다.

동렬님 글을 읽으면서 존재론적 관점과 인식론점 관점이 자유롭게 왔다갔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을 입체적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왜 존재론을 애기했다가 인식론으로 가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일까...? ^^;에 대한 의문이 있었거든요. 이제는 그 의문도 풀렸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일종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글의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리...)그러나 이제는 그런 스트레스 안 받아도 되니 좋습니다.ㅋㅋ


인간이 양식화 해야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미'도 인간의 구조를 따라서 인식되고 느끼는 것이기에 '미'를 표현하려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을 양식화 하여 이성화 해야 한다.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 관점에서 느끼는 '미' 를  인식론적 관점으로 전환되어야 '미'는 양식화 되는 것이고, 개념화 되는 것이고, 언어는 인식을 통하여 이성에서 개념화 되는 것이므로 '미'는 그런 단계를 거쳐서 표현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제말이 맞는 말인지 검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종교적 체험에서 불교- 선불교의 선도 일종의 "성'에 대한 체험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더운데 질문만 드려서 죄송합니다.ㅎ~ ^^:()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8.07 (17:22:22)

인간이 양식화 해야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미'도 인간의 구조를 따라서 인식되고 느끼는 것이기에 '미'를 표현하려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을 양식화 하여 이성화 해야 한다.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 관점에서 느끼는 '미' 를  인식론적 관점으로 전환되어야 '미'는 양식화 되는 것이고, 개념화 되는 것이고, 언어는 인식을 통하여 이성에서 개념화 되는 것이므로 '미'는 그런 단계를 거쳐서 표현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제말이 맞는 말인지 검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미를 양식화 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학생의 지능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감각이 없다는 거죠. 즉 다 그런게 아니고 그런 애들만 그렇습니다. 어떤 애들은 요령을 가르쳐 주면 잘 알고, 요령만 잘 알고, 요령에서 더 진도를 나가지 못합니다. 그게 일종의 양식이지요. 다 그런게 아니고 조금 지능이 낮은 애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려면 양식화 해야 하지요. 한가지 중요한 것은 구조론을 안다고 해서 둔재가 천재되는 것은 아닙니다. 둔재는 그냥 기교만 배우는게 낫습니다,. 어차피 둔재는 안 되니까.

기교를 넘어서고 양식을 넘어서는 천재는 소수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다수의 둔재들을 위해서 소수의 천재를 죽이지요. 왜냐하면 둔재들의 기준에 맞추는게 반평균을 올리니까, 그리고 천재를 가르칠 천재 선생이 없으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선이 성과 통하지만 단지 통할 뿐 곧 일치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불교는 종교니까. 단서만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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