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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다원이
read 6471 vote 0 2009.04.14 (13:56:26)

여기 말고는 다른 데 글을 올릴 권한이 없어서리... 여기다 올려봅니다...

남극빙어는 남극에 가까운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인데진화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이 어류는 혈액에 헤모글로빈(Hb)이 없다. 물론 진화 초기에는 있었다. 그 증거는, 이 물고기의 조상뻘 되는 물고기에는 Hb 단백질을 암호화 하고 있는 유전자 서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Hb는 알파-글로빈과 베타-글로빈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데, 현생 남극빙어에는 베타-글로빈 유전자가 아예 사라져버렸고, 알파-글로빈 유전자는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 심각하게 고장이 나서 아무런 기능도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기능을 하는 헤모글로빈을 생산하지 못하고, 이놈의 피에는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이 없다. 따라서 피의 색깔이 묽은 황색이다.

그런데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남극 가까이에는 바닷물의 온도가 극히 낮아서 녹아있는 산소 농도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Hb이 없는 허여멀건 혈액이라도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산소를 운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놈의 피는 그저 액체에 산소가 녹아 들어가는 평범한 물리법칙에 따라 산소를 체내에 공급한다.

이런 연유 때문에 이놈은 심장이 매우 크고 튼튼하여 혈액을 효과적으로 순환시키고, 커다란 아가미로 산소 흡수 효율을 높였다. 또한 혈액의 점성도 매우 낮아서, 보통의 피보다 마찰저항을 덜 받으므로 더 빨리 혈관을 흐를 수 있고, 빈약한 산소농도이긴 해도 대량의 혈액이 순환하므로 필요한 양의 산소를 운반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박리다매 형식이다. 또한 비늘이 없어서 피부로도 산소를 어느 정도 흡수한다.

육지 동물이나 따뜻한 물에 사는 물고기들은 산소의 대량 운반을 위해 Hb의 농도가 매우 높고, Hb을 만드는 유전자가 정상적인 형태로 유지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Hb 유전자가 고장 나서 비정상적인 (즉 효율이 떨어지거나 산소운반 능력을 잃어버린) Hb을 만들다가는, 멀리 뛰지도 못하고 뒤처져서 곧바로 포식자에게 먹히고 만다.

남극빙어의 조상들은 Hb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이 차가운 물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Hb 유전자의 중요성이 다른 유전자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게 되었다. 오히려, 저온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유전자의 창출 혹은 기존 유전자의 변화가 더 중요해졌다. 그러다 보니, Hb 유전자에 자연발생적인 확률로 돌연변이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애써 고쳐 쓸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쓰지 않는 공구가 창고에서 녹슬듯이, 이 유전자에 더 심각한 돌연변이가 일어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리거나, 심지어 유전자 자체가 사라지더라도 신경 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남극빙어에 Hb가 없는 이유이다. 이들은 근육에 산소공급 기능도 하는 미오글로빈(Mb) 유전자 역시 고장이 나서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Hb 유전자처럼 Mb 유전자도 같은 원리에 의해 별로 쓸모가 없다(Mb 뿐만 아니라, 쓸모 없기는 MB 역시 마찬가지).

이 물고기는 진화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생물은 필요에 의해 또는 환경의 압력에 대응하여 새로운 형질을 창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으며, 그 형질이 생존에 소용이 있는 한은 자연환경이 그 유전형질을(즉 유전자를) 계속 기능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각 생물 개체는 필요한 유전자에 일어나는 돌연변이를 끊임없이 원상복구하며, 그 결과 살아남게 되고, 살아남았으므로 그 유전자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 돌연변이의 원상복구에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는 그 개체의 죽음과 함께 끝날 뿐, 그 생물종의 집단 전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환경의 변화에 의해 집단적으로 어떤 유전자가 불필요하게 되면, 그 유전자에 일어나는 돌연변이(돌연변이는 무차별적이며, 어떤 조건 하에서도 자연적으로 어떤 확률을 가지고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가 원상복구 되어도 그만이고, 복구가 불완전하더라도 그만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회복은 확률적으로 도태의 길을 걷게 만든다(여기서는 그 개체가 아니라 특정 유전자의 도태를 말한다). 그 특정 유전자가 기능을 잃어버린다 해도 그 개체 및 그 집단은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 유전자가 불필요한 방향으로 환경이 바뀌었으므로.

그러나, 이 종집단의 서식지에 다시금 어떤 환경적인 변화가 왔을 때, 그리고 그 변화가 이미 기능을 잃은 유전자를 요구하는 변화일 때, 이 집단은 (멸종이 아닌) 멸족을 면치 못한다. 우호적인 환경에서 사는 동일한 개체들은 생존할 수 있다.

진화를, “열등한 것에서 월등한 쪽으로 변해간다는 도식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빙어의 사례에서도 설명된다. 이들이 Hb 유전자를 잃어버린 것을 두고 더 나은 방향이라 한다면 그는 아마 또라이로 봐야 한다. 진화란, 변화하는 환경에 생물이 능동적으로 적응해 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카메라나 컴퓨터의 성능이 향상되는 것을 일러 진화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진화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례인 것이다.

[레벨:15]르페

2009.04.14 (14:06:18)

구조론 게시판에도 글 올릴 권한 있으십니다. ^^
[레벨:17]눈내리는 마을

2009.04.15 (00:09:41)

이러한 인식의 깨짐을 경험하는데...서 쾌감을 느끼게 되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3]꼬치가리

2009.04.15 (10:02:58)

다원이님의 깨달음이 다윈보다 훨 앞섰구료. 좋은 글이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4.15 (11:06:31)


참고로 덧붙이면.. 공룡이 멸종한 이유는 '밀레니엄 버그'와 비슷하다고 보오.
생존경쟁에 졌기 때문이 아니라(결과적으로 졌지만 그건 결과론이고) 원래
더 이상 변이가 일어나지 않도록 유전체계가 세팅되어 있었기 때문.

그 점은 현생인류나 포유류도 마찬가지. 위험할 때 펼쳐보라며 제갈량이 주머니 세개를 챙겨주
었는데 하등동물들은 그 주머니를 너무 빨리 펼쳐봤기 때문에 환경변화가 초래하는 다음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 없는 거지요.

인간은 어쩌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주머니를 펼쳐본 결과가 되었지만 그 주머니가 더 남아있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많은 변이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팅해놓은 이유는 호환성이 좋은 MS가 그
호환성 때문에 더 진보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지요.

맥이 호환성은 안좋지만 성능은 뛰어난 것처럼. 인간 역시 원숭이들이 다양하게 진화할 때 맥처럼
아프리카 남부 좁은 지역에 잔뜩 웅크리고 있었던 것. 진화의 두 가지 전략. 다양성을 추구할 것이냐,
독립성을 추구할 것이냐.

다양성을 선택하면 일제히 전개하여 생태계를 점령하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거미나 게 수준
에 머물러 있게 되며, 독립성을 추구하면 그 자리에서 서서히 말라죽게 되지만 혹 운 좋은 놈은 살아
남아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곤 하오.

유럽이나 미국은 다양성 전략을 선택하여 지금 활짝 꽃을 피운 상태이고 한국은 독립성 전략을 선택
하여 제 자리에서 말라죽어가고 있지만 혹 살아남는다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도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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