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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698 vote 0 2016.04.01 (11:48:41)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A%B7%B8%EB%93%9C%EC%9D%B8


소그드인은 본래 "스키타이"라고 불렸다. 스키타이 (Scythian), 사쿠라 (Skudra), 소그디아 (Sogdian), 사카 (Saka) 라고도 한다. 사카족은 부처 고타마 싯타르타를 배출해낸 부족이다. 소그드(Sogd)인은 이란계의 민족이었으며, 5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중국과 인도동로마 제국에 걸쳐 통상을 하였다. 마니교,조로아스터교소그드 문자를 여러 지역에 전파하였다. 중국에서는 속특(粟特)이라고 불렀다. 유럽에서는 특별한 명칭은 없으나 스코트족의 일부 구성 민족이 스키타이, 소그드인과 같은 민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소그드인 성씨로는 강(康), 사(史), 안(安), 조(曹), 석(石), 미(米), 하(何), 화심(火寻), 무지(戊地)라는 성씨가 있어 중국에서는 소무구성(昭武九姓)이라고 하였다. 안녹산 역시 아버지가 소그드인으로 소그드인에게 흔한 안씨 성을 지닌다.(녹산은 '빛'을 뜻하는 소그드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 측의 기록 중 소그디아 왕족의 성씨는 온(溫)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평강 공주와 결혼한 온달,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호위 무사였던 온군해도 소그디아 왕족 출신일 수도 있다. 또 다른 근거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틀어서 온씨 성을 가진 사람은 온달과 온군해 두 사람 뿐이기 때문이다.

소그드인들은 8세기 신라와도 교역을 하였다. 최치원의 속독(束毒)은 소그드인 탈춤을 묘사한 것이다. 처용가의 처용이 서역인, 즉 소그드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8세기 신라 음악이 서역인(소그드인)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는 고유 음악을 향악(鄕樂), 서역에서 유래한 음악은 속악(俗樂), 중국 당나라의 음악은 당악(唐樂)이라고 불렀다. 통일신라 때에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鄕樂雜詠)에 "수만리를 걸어오느라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구나"라는 구절이 있는데, 북청사자놀이와 같은 서역에서 들어온 연희를 보고 지은 시구라고 한다. 본래 소그드인은 스키타이로 불렸는데, 그들도 신라처럼 금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악은 그 본질적 요소는 속악에서 유래하였다.

그 활동 범위는 동로마 제국에서 당나라의 장안에까지 이르렀지만, 이슬람 세력의 대두에 의해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12 세기에는 그 민족적 특색이 없어졌다. 소그디아나 지방은 나중에, 우즈베크인의 남하에 따라 투르크화가 진행되어갔다.


###


제가 오랫동안 이곳저곳에서 주워 모은 지식으로 

썰을 풀어보려고 했더니 여기에 다 정리해 놨네요. 


석가도 소그드인, 석탈해도 소그드인, 조조도 소그드인?


유태인과 집시, 객가족처럼 잘 돌아다니는 민족이 있는데 

이들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소그드인은 상업에 종사해서 상호商胡라고도 하는데


유태인이 세계 곳곳에 없는 곳이 없듯이 소그드인도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소그드인이 한반도에 안왔다는게 더 이상하죠.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zuna

2016.04.01 (12:25:13)

http://www.junim.pe.kr/koica/prepare/eurasialesson.htm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분량이 상당합니다.

소그드인의 성(姓)은 출신도시에서 따왔다네요.

아래는 일부만 발췌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8)]


실크로드 상권 장악한 소그드인 중국정치·문화까지 주물러

오아시스 정착민 출신으로
동서 오가며 비단으로 막대한 부

역사적 사실로 ‘상호’ 혹은 ‘호상(胡商)’이라고 불리는 상인이 갖고 있던 엄청난 재력인데,
‘보골’ 한 조각에 상상을 초월하는 현금을 쾌척할 정도의 재력을 갖고 서시를 좌지우지했던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물론 한나라 때와 같은 시대에는 ‘호’라고 하면 흉노인과 같은 북방의 유목민을 지칭했지만, 수·당대에 오게 되면 이 말은 거의 전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hd)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따라서 ‘호상’은 곧 소그드인으로서 중국에 와서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소그드’란 명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켰다. 이미 다리우스 대제 때에 새겨진 비스툰 비문(기원전 519년)에도 언급되었다. 이들은 파미르 산맥 서쪽의 건조지대, 즉 북쪽의 시르다리아 강과 남쪽의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점재하는 오아시스 도시들에 살던 정착민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수공업과 상업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멀리 중국이나 인도 혹은 서아시아 각지로 나가서 국제무역에도 종사하였다.


‘호상’이라 불리며 중국서 맹활약
장안에만 4000여명 거주

‘호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중국 측 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후한대 즉 1세기 이후의 일이었고, 중국 측 문헌에는 “장사하러 오는 호상들이 매일 변경에 온다”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소그드인은 쿠샨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중앙아시아~인도~중국을 연결하는 교역로를 장악했던 인도나 박트리아 출신 상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활동의 정도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4세기에 들어오면서 북방에서 히온(Chion)이라든가 헤프탈(Hephtal)과 같은 유목민이 대거 남하하고 약탈하면서 오늘날 아프간과 인도 서북부 지방이 황폐해졌고 종래 인도와 연결되는 교역망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 혼란으로 초래된 공백을 메우고 국제무역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소그드 상인이었다.
 
장사라고 하면 다른 민족에게 뒤지지 않는 중국인의 눈에도 이 소그드인의 상재(商才)는 거의 천부적일 정도로 비쳤던 모양이다. ‘신당서(新唐書)’라는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탕을 물리고 손에는 아교를 잡게 하는데,
이유인즉 그가 커서 달콤한 말을 하고 돈을 손에 쥐면 딱 달라붙게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법을 익히고 장사에 능하며 이익을 탐한다. 남자 나이 스물이 되면 이웃나라로 가는데,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아니 가는 곳이 없다.”


 ▲ 소그드인의 교역 네트워크와 거류지 분포
당시 중국에는 많은 수의 소그드 상인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 수를 정확히 말해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장안에 40년 이상 거주하며 처자식을 두고 전택과 가옥을 소유한 ‘호객(胡客)’의 수가 4000명 정도였다는 한 기록만을 보아도 대충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국제교역에 종사하는 이들은 중국의 비단을 대대적으로 구입하여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방면에서 고가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교역망을 유지·운영하기 위해서 이들은 고향이 있는 실크로드 교역로 중간 곳곳에, 그리고 중국 내 여러 도시들에 집단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중국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중국식 성(姓)을 채택하였는데, 그때 출신도시의 이름을 따서 성을 지었다. 예를 들어 사마르칸드 출신은 ‘칸’이라는 발음을 반영한 ‘강(康)’씨를, 타슈켄트 출신은 ‘타슈’가 현지어로 ‘돌’을 뜻하기 때문에 ‘석(石)’씨를 택했다. 이렇게 해서 각각 다른 성을 갖고 교역에 종사하던 소그드인을 ‘아홉 가지 성을 가진 소그드인’이라는 뜻으로 ‘구성호(九姓胡)’ 혹은 ‘소무구성(昭武九姓)’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중앙유라시아 거의 전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 자세한 실태를 알기는 쉽지 않으나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7년 스타인(A. Stein)이라는 학자가 돈황 부근의 봉수대 유적지에서 발견한 고대의 편지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그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들은 중국 영내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이 고향인 사마르칸드로 보낸 것인데, 변경의 관문인 돈황에서 압수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학계에 ‘고대의 소그드 서한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것은 모두 8통인데 어떤 것은 훼손이 심한 단편이지만 일부는 아주 잘 보존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제2서한이 그러한데, 중국 무역의 현지 총책인 나나이 반닥(Nanai
Vandak)이라는 사람이 사마르칸드 본국에 있는 고용주에게 중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브리핑하고 각 도시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주재원의 활동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에는 낙양에 커다란 기근과 화재가 발생하여 황제가 도주했고 ‘훈족’의 공격을 받은 소식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4세기 초두 서진(西晋)왕조가 흉노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된 사건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편지가 씌어진 시기도 저절로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나나이 반닥은 이 편지에는 자기가 중국산 순품 사향(麝香) 800g을 사서 보내니까, 이것을 팔아서 생겨나는 이윤의 일부는 자신이 사마르칸드에 남겨두고 온 아들의 교육비로 써달라는 당부를 적고 있다. 그런데 이 사향을 그 당시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은 27㎏과 같으니, 그때 금과 은의 비가(比價)를 1 대 20으로 계산하면 금 1.35㎏에 해당하고 오늘날 우리 돈으로 하면 약 2600만원이 되는 셈이다. 당시 이들의 교역규모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의 대부분은 상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서 말한 서한 가운데에는 돈황에 살던 한 여인이 고향 사마르칸드에 사는 어머니와 남편에게 자신의 힘든 처지를 호소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역시 캐러밴 무역과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이 다수를 점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이미 남북조 시대 말기인 북제(北齊) 때부터 이들 중국 체류 소그드인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한 ‘살보(薩寶)’라는 관직의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중국의 서안에서는 소그드인이 바로 이 살보에 임명되었으며 그러한 상층인사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나왔다. 아파트 건설붐의 영향으로 도시 여러 곳이 파헤쳐지고 개발되는 와중에 소그드인의 묘지가 발견되었는데, 학계에는 묘주의 이름을 따서 안가묘(安伽墓), 사군묘(史君墓) 등으로 알려졌다. 물론 ‘안’과 ‘사’라는 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와 키쉬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돌궐·위구르와 연합,
‘안록산의 난’등 정치·군사 개입


더 흥미로운 것은 거기서 출토된 석곽(石槨)과 석상(石床)에 새겨진 조각이다. 거기에는 그들의 일상생활은 물론 연회를 벌이고 수렵을 하는 장면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들 소그드인과 북방 돌궐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강조되고 있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관계는 당나라 현종 때인 755년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이 가서한(哥舒翰)이라는 장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회유한 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나의 부친은 소그드인이고 모친은 돌궐인이다. 그대의 부친은 돌궐인이고 모친은 소그드인이다. 그대와 나는 같은 종족이니 어찌 서로 친해지지 않겠는가?” 서안의 소그드인 묘지 출토자료는 이처럼 두 종족의 통혼이 두 사람에게만 국한된 특수한 경우는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돌궐이 몽골리아 초원에서 힘을 잃자 소그드인은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위구르인과 연합하였다.


그렇다면 소그드인과 돌궐·위구르의 연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곧 소그드의 경제력과 유목민 군사력의 결합,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막강한 영향력이었다. 예를 들어 안록산은 3개의 절도사직을 겸임하여 북방 변경의 군권을 장악했고 이를 기초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으로 당제국은 몰락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소그드인의 영향력이 정치·군사 방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교역활동으로 인한 경제력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지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중국 측 문헌에 기록되어 있듯이 “시장의 큰 이익이 모두 그들에게 돌아갔다”라든가 “소그드인과 위구르인은 모두 공사(公私)의 큰 우환이 되고 있다”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소그드 문화까지 상품화
중국 상류층에 ‘호풍’ 유행시켜

이처럼 소그드인이 중국을 정치·경제적으로 잠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급 소비자층은 소그드인이 수입해 들어온 이국적인 물품과 문화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고, 그런 것을 즐기고 모방하는 ‘호풍(胡風)’이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골동품 애호가에게 잘 알려진 당삼채(唐三彩) 가운데에는 소그드 상인이 낙타에 비단을 싣고 장사하러 떠나는 모습, 소그드 출신 주악대가 낙타 위에 앉아서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 등도 있지만, 중국인이 ‘호복(胡服)’과 ‘호모(胡帽)’를 착용한 모습도 있다.

또한 중앙아시아 출신의 무희들이 추던 ‘호선무(胡旋舞)’는 백거이(白居易)와 같은 시인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포도주 역시 당시 최고의 인기상품 중 하나였다. 시인 이백(李白)은 자신이 중앙아시아에서 출생하여 그 쪽 문화에 관심도 있었겠지만, 워낙 포도주를 좋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봄바람에 꽃잎이 떨어질 때면, 말채찍을 휘두르며
곧장 호희(胡姬·소그드 여인)에게로 가서 술 한 잔을 마시노라! 장안의
청기문에 가면 호희가 흰 손을 내밀어 부르면서, 손님을 청하여 금술잔에
취하게 하는구나!”

이처럼 소그드인은 여러 지역의 특산품을 중개하고 판매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지만,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자신의 문화까지도 상품화하여 중국을
 매료시켰던 천재적인 장사꾼이었던 것이다.
백거이의 시 ‘호선녀’

호선녀야, 호선녀야.
마음은 비파에 맞추고, 손은 장구에 맞추니,
비파소리 북소리 하나에 두 손이 올라가고,
마치 빙빙 돌며 날리는 눈발처럼 빙글거리며 돌아가는 춤이여!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아도 지칠 줄을 모르니,
천 번 만 번 돌아도 그칠 때가 없도다.

[레벨:2]가몹

2016.04.03 (14:06:20)

선생님!
이걸 그냥 믿기에는 우리가 너무 똥송합니다.
이란계는 아주 잘생겼어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6.04.04 (13:09:34)

유전자가 아니라 유목민의 문화로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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