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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104 vote 1 2021.08.22 (18:34:28)

    안다는 것은 변화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여전히 변화를 꿰뚫어보는 눈을 얻지 못하고 있다. 뉴턴의 미적분학이 처음으로 변화를 추적했다지만 겉보기 변화를 살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표면의 변화를 추적할 뿐 여전히 인간은 '사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추적하는 논리'를 갖고 있지 않다.


    변화를 설명하는 말로는 원인과 결과가 있지만 그사이의 의사결정에 대해서는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다. 자동차로 말하면 출발과 도착만 알고 그 중간의 운전에 대해서는 모르는 셈이다. 출발과 도착은 자동차 밖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운전은 자동차 내부로 들어가서 실제로 차를 몰아본 사람만 아는 것이다.


    변화는 사건이라는 자동차 안에서 일어나는데 인류는 여전히 사건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으므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변화를 외부에서 피상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외부에서의 물리적 작용에 의한 변화는 눈으로 보고 추적할 수 있다. 격물치지라 했다. 망치로 때린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면 된다.


    외부에서 관측되는 변화는 일회적인 것이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반복적인 것이다. 깡통은 외부에서의 타격에 따라 소리가 다르고 피아노는 내부의 조율에 따라 소리가 일정하다. 깡통은 외부에서 몽둥이로 때리는지 돌멩이로 때리는지에 따라 소리가 다르지만, 피아노는 내부에서 조율되므로 소리가 항상 일정하다.


    핵물질의 반감기처럼 내부에서 자체 모순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를 추적하는 논리가 가져야 한다. 그런데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라도 더 큰 단위로 보면 내부다. 손을 물에 담그면 차갑고 손이 불에 닿으면 뜨겁다. 변화는 신체의 외부에서 일어난다. 아니다. 차갑고 뜨거운 감각은 뇌가 판단한다. 뇌는 내부에 있다.


    문제는 내부원인에 대한 변화를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점이다. 피아노는 있는데 건반이 없다. 건반이 있는데 알아채지를 못한다. 집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규칙적인 변화를 개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무질서한 변화와 혼동하고 있다. 변화의 원인을 표현할 언어가 없으므로 피상적인 관념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자유, 평등, 사랑, 정의, 선악, 윤리, 도덕, 이념, 영혼, 이성, 이데아, 내세, 천국, 정언명령, 해탈, 신토불이, 생태주의 하며 마구잡이로 투척되는 혼란스러운 관념들은 모두 개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한 것이다. 실제로는 집단의 내부에서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애초에 접근방향이 틀려먹었다.


    집단에는 원인이 성립하고 개인에는 결과가 나타난다. 집단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원인은 권력이고 개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결과는 자유다. 혹은 사랑이다. 또는 평등이다. 정의다. 선악이다. 윤리다. 도덕이다. 무수하다.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주워섬기는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본질은 언제나 하나인데 말이다.


    하나의 원인이 어떤 대상에 작용하는가에 따라 무수히 많은 결과를 연출하는 것이다. 하나의 원인을 짚어야 하는데 백 가지 증상을 떠들어대고 있다. 질병은 하나라도 아픈 데는 이곳저곳이다. 원인은 하나라도 결과는 여러 가지다. 인간의 사유가 관념으로 흐르는 것은 원인이 되는 내부질서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관념어는 미래의 사정을 가정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그러하다. 이데아가 그러하다. 예수의 사랑이든, 석가의 해탈이든, 유교의 중용이든 마찬가지다. 유토피아의 변형이고 이데아의 변형이다. 자사의 성, 동중서의 천인합일, 주자의 이기이원론, 왕양명의 양지, 칸트의 정언명령이 모두 유토피아와 이데아의 변형이다.


    그것을 마음속으로 가져가면 이성이 되고, 사후세계로 가져가면 천국이 되고, 정치이념으로 가져가면 사회주의가 된다. 그것은 원인이 아닌 결과를 지시하는 것이며 그 결과도 실은 미래를 가불하여 미리 당겨쓴 거짓이다. 자유든 정의든 평등이든 정치적 올바름이든 페미니즘이든 유토피아론, 이데아론의 곁가지다.


    유토피아의 일부를 떼어내면 자유가 되고, 평등이 되고, 정의가 되고, 윤리가 되고, 도덕이 된다. 미래를 가불하여 현재로 끌어오니 공허하다. 그게 견강부회다. 견강부회는 송나라의 역사학자 정초가 한 말인데 동중서가 음양학을 꾸며내어 억지로 공자의 춘추에 갖다붙였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개소리 하지 말라는 거다.


    인정해야 한다.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변화를 기술하는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 뉴턴의 미적분이 변화의 외부를 추적했지만 사건 내부에 대해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당구공이 쓰리쿠션을 맞고 나오는 것은 보인다. 중국의 북대하회의나 러시아의 크렘린 궁에서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열역학은 감춰진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추적한다. 방향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이다. 구조론은 대칭을 이용하여 감추어진 내부에서의 변화를 낱낱이 추적한다. 인류는 변화를 설명하는 언어로 인과율을 쓰고 있지만, 원인은 변하기 전이고 결과는 변한 이후다. 구조론은 변화의 현재를 추적하는 언어를 공급한다.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변하는 것보다 크다. 계 안에서 에너지의 모순이 일어나면 큰 것과 작은 것이 싸워서 큰 것이 내부에서 버티고 작은 것이 밖으로 튕겨나가는 형태로 변화는 일어난다. 큰 것이 버티고 작은 것이 변하므로 변화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그것이 엔트로피다.


    어떤 것이 변했다면 보다 큰 것이 배후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이 날아왔다면 그 공을 움켜쥔 손은 공보다 크다. 그 손을 움직인 팔은 손보다 크다. 그 팔을 움직인 어깨는 팔보다 크다. 그 어깨를 움직인 몸통은 더 크다. 변화와 불변은 대칭을 이루며 변화는 배후의 변하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작아야 한다.


    닫힌계 내부에서 게임이 벌어지며 이기는 쪽이 지는 쪽을 결정한다. 변화는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방향을 정하기 전에 먼저 방향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대칭이다. 대칭은 둘이고 의사결정은 그중에서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며 대칭은 방향보다 크므로 변화를 결정하는 의사결정에는 일정한 비용이 든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밀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것은 게임에 지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큰 것을 대비하는 비용은 감추어져 있다. 그 비용을 통해서 변화를 통제할 수 있다. 우리가 변화를 추적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태 원자론적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불변은 변화보다 크다. 고대인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변화를 연출하는 근원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변하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변화가 일어나므로 궁극의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원자라는 가정이다. 그 가정이 틀렸다. 원자론은 편의적인 눈속임이다. 변화가 일어나면 무언가 점점 늘어난다.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청소부의 일거리가 늘어난다. 변하기 전에 먼저 와서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가장 작은 숫자라야 한다. 가장 작은 숫자는 1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1의 집합이다. 틀렸다. 변화는 존재의 본래 모습이며 변하는 것은 1이고 변하게 하는 것은 2다. 2는 나란함이다. 무질서 중에서 우연히 나란함이 성립하면서 사건이 일어난다.


    모든 것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가? 변화가 있다. 그리고 나란함이 있다. 모든 변화는 어떤 둘 사이의 간격이 변화하는 것이며 이때 그 간격을 결정하는 둘을 동시에 보는 눈을 얻어야 변화를 기술할 수 있다. 변화보다 크고 배후에서 변화를 끌어내며 스스로는 불변하는 궁극의 그것은 어떤 둘의 나란함이다. 그것이 구조다.


[레벨:4]고향은

2021.08.23 (13:49:31)

통찰하고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림의 배경[원인]과 전경[결과]을 함께 본다
소의 표정을 관찰할 때,
소가 비빌 언덕의 유무有無도 함께 인식을 하며 본다
어떤 것을 볼 때,
현재에는 보이지 않는 밑천의 희생[원인]과
지금 보임[결과]은 한 세트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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