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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503 vote 0 2019.11.26 (15:53:46)


    생각은 도구를 쓴다.


    인간은 언어를 도구로 삼아 사유한다. 그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점이 문제다. 일상어로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단순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하려면 고급 언어가 필요하다. 이에 수학이 소용된다. 수학에서 물리학이 나오고, 물리학에 기대어 화학의 성과를 얻고, 화학의 성과로 생물학을 발전시키고, 화석으로 퇴적된 생물의 자취가 지구과학에 사용된다.


    학문의 족보가 있는 것이다. 물론 물리학 없이도 화학을 할 수는 있지만 한계가 있다. 보통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통해 인간은 생각한다. 생각할 수는 있지만 한계가 있다. 대화는 열린 공간에서 일어나므로 아날로그의 상대성이 성립한다. 닫힌계에 가두어 디지털의 절대성으로 바꿔야 한다. 일본 만담의 보케와 츳코미처럼 대화는 말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 


    상대가 대꾸를 잘해야 한다. 모든 학문이 물리학을 거쳐 수학으로 수렴되듯이 생각은 계통을 만들어 족보를 찾아가는 것이며 이때 두서없이 산만해지지 않고 한 방향으로 수렴되게 하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칼과 도마와 생선이 필요하다. 생각은 칼로 도마 위의 생선을 내려치는 것이다. 반드시 도구가 있다. 칼이 없고 도마가 없고 생선이 없으므로 생각은 실패하게 된다. 


    선승들이 화두를 참구한다고 하지만 대개 생선만 붙들고 앉아있다. 칼이 없고 도마가 없다. 세트가 갖추어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방정식이다. 에너지가 작동하면 원인과 결과의 연결이 있고 그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그리고 일이 따른다. 칼이 원인측이면 생선은 결과측이다. 의사결정은 도마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바닥에서 이 모두를 통일하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장의 형태로 존재한다. 보통은 바닥이라는 표현을 쓴다. 정치바닥이 있고 시장바닥이 있다. 양아치들이 노는 뒷골목 바닥도 있다. 인간은 바닥에 소속된다. 가정이 바닥이 되고, 가문이 바닥이 되고, 학벌이 바닥이 되기도 한다. 계급이 바닥이 되기도 하고 패거리가 바닥이 되기도 한다. 보통은 그 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 바닥이 에너지 공급원이기 때문이다. 


    바닥에 가해진 밀도가 심리적 긴장도를 만든다. 바닥에서 가해지는 무형의 압박이 없으면 긴장이 풀려서 생각을 밀어붙이지 못한다. 호르몬이 나오지 않아 집중을 못한다.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 집단이 바닥이다. 바닥이 좁으면 겨우 자신과 가족을 보살피고 바닥이 넓으면 이웃과 국가를 거쳐 신의 완전성과 인류의 문명을 헤아리게도 된다. 


    자기규정이 중요하다. 정의, 평등, 평화, 안보, 애국, 안전, 건강, 행복 따위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전에 당신이 노예냐 자유인이냐가 중요하다. 출신성분이 중요하다. 엘리트인지 대중인지가 중요하다. 귀족인지 평민인지가 중요하다. 인간들이 노상 정의를 찾고, 평등을 찾고, 평화를 추구하며 떠드는 것은 이웃의 평판을 얻어 집단의 높은 의사결정그룹에 들려는 거다. 


    다들 행복이다 사랑이다 성공이다 말들 한다. 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고 본질은 그 사람의 출신이다. 태어나기를 잘해야 한다. 뭔가 잘못되어 당신이 바퀴벌레로 태어났다면 자유든 평등이든 평화든 애국이든 의미없다. 당신은 바퀴벌레가 아닌가? 확실히 나는 바퀴벌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일단 종교의 신도들은 바퀴벌레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신의 노예다. 의사결정권이 없으니 인간의 그룹에 끼지 못한다. 중국인들도 다르지 않다. 종교인이 신과 사제에게 위임하듯이 그들은 의사결정권을 공산당에게 위임해 버렸다. 노숙자들도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있다. 범죄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투표권이 없다. 따져보면 바퀴벌레가 아닌 사람은 극소수다. 대개 의사결정을 타인에게 위임하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이웃의 감시를 받고 주변의 눈치보는 일본인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관측자가 되어 관측대상을 주목하지만 이는 인간의 눈이 외부를 바라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고 반대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벌레가 한 마리 숨어 있다. 급식충부터 틀딱충까지 한국인들은 충으로 있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보는 위치를 높여야 한다.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이 가장 멀리 본다. 눈높이가 높기 때문이다. 관점을 얻어야 한다. 도구를 장악해야 한다. 주체를 세워야 한다. 에너지원을 확보해야 한다. 집단과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거기서 왕자가 될지 거지가 될지 결정된다. 왕자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왕자이고 거지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거지다. 


    왕자는 자기 계획이 있고 거지는 상대의 계획에 운명이 달렸다. 인간은 도구로 생각하는 존재다. 관점이 도구다. 칼로 재료를 썰어야 한다. 작가는 펜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무사는 칼을 다룰수 있어야 한다. 칼과 도마와 생선이 하나의 라인에 직결될 때 통제된다. 어쩌다가 칼을 잃어버리고 미처 도마가 준비되지 않았고 생선이 살아나서 도망친다면 생각이란 실패다.


    에너지 = 바닥 = 닫힌계 = 장 = 바운더리 = 토대 = 소속집단 = 심리적 압박과 긴장
    원인 = 도구 = 칼 = 메커니즘= 방정식 =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의사결정 = 도마 = 대칭 =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결과 = 생선 = 대상

    일 = 생각


    압도적인 에너지에 의해 대상은 통제된다. 요행으로 자기보다 약한 만만한 존재를 만나면 통제할 수 있지만 상대적이다. 언제라도 어떤 상대라도 통제할 수 있어야 프로다. 보는 자가 누구인지를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짖으면 개가 되고, 지저귀면 새가 된다. 노예의 언어를 쓰면 노예가 되고 깨달음의 언어를 써야 깨닫는다. 에너지를 조달받을 수 있는 언어라야 한다. 


    보통은 ‘네가 먼저 이래서 내가 이렇게 받다친다네’ 하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상대방으로부터 에너지를 조달한다. 자기 에너지가 없다. 소속이 잘못되어 에너지원이 없다. 나와 대상을 연결하는 라인이 없다. 공중에 붕 떠 있다. 긴밀하지 않다. 겉돌고 있다. 발언권이 없다. 주도권도 없고 소유권도 없으니 팔 걷어부치고 세상 일에 참견하고 끼어들 근거 하나 없다. 


    내가 있고 신이 있다면 신은 타자다. 남이다. 남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신이 남이면 이미 신이 아니다. 바퀴벌레다. 신이 타자화 되고 대상화 되면 그것은 곧 바퀴벌레다. 니가 뭔데? 보통은 아버지라고 부른다. 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남이 아니란 말이다. 신을 타인으로 대하면 타인이다. 심판하고 천국가고 지옥가면 타인이다. 


    그것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상과 자신의 긴밀한 라인을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연결의 중심에서 의사결정한다. 일상어는 상대방의 말을 받아치는 것이다. 말대꾸하는 것이다.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대상화 하고, 타자화 하고, 객체화 하여 소외시키고 자신의 소속을 부정당한다. 세상과 내가 대칭관계로 맞선다. 


    서로 밀어낸다. 세상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튕겨져 나가기를 반복한다. 실패다. 한 방향으로 일관되고 긴밀하게 연결시켜 소외를 극복하는 소속을 이루는 방법으로 에너지는 조달된다. 언어는 관점을 반영한다. 몇 마디만 나누어 보면 어떤 관점으로 어떤 눈높이에서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관측자의 시점이 확산방향인지 수렴방향인지를 알 수 있다. 


    깨달음의 언어라야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고 집단의 중심과 분리되지 않고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 족보를 찾을 수 있다. 역할을 획득할 수 있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눈높이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무엇을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보는지가 중요하다. 당신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봉건시대라면 사회가 당신을 규정한다. 지금은 스스로 정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9]systema

2019.11.26 (18:00:59)

바닥의 법칙 > 절절한 진실입니다. 결국 윤석열 검총이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도 검찰패거리에서 에너지를 의존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 인간의 이성이나 교양이 아니라 에너지를 공급하는 집단에서 이미 결정되는것. 그렇기 때문에 먼저 대승으로 진보로 천하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집단을 바꾸고 개인을 수양하는 것이 방향성. 먼저 천하를 만나고 후 수양. 가족에게 에너지를 의존하면 안철수되고, 중간집단에게 에너지를 의존하면 향원이 되고. 그래서 료마는 탈번을 했고, 손정의는 미국으로 갔고, 부족을 떠나면 천하가 있고 천하의 공동작업으로써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의 발전에 소집단의 이해관계를 떠나 기여하는 자가 근대인의 칭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류가 공유하는 것은 시스템, 시스템의 관점으로 보면 계급도 없고 인종도 없고 다만 포지션이 있을 뿐. 그 포지션이 밀접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할 뿐. 

 근대인은 결국 의사결정의 기준점으로써의 대칭을 어디에 세우느냐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있는듯 합니다. 시스템 전체와 각을 세울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기집단 기준으로 세울때 문제행동을 하게 되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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