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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407 vote 0 2021.03.19 (08:59:33)

    자연의 전략


    근원의 지식은 하나다. 그것은 방향의 판단이다. 만약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안다고 말해도 된다. 대충 남들 뒤에 묻어가도 낙오되지는 않는다. 최소한 본전치기 장사는 할 수 있다. 체면치레가 된다. 방향을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통제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당장 내가 단독으로 그것을 장악하고 통제하지는 못해도 그것이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 파악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에 묻어가면서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군대에서는 중간에 서 있는게 낫다지만 사회에서는 머리에 설 때가 있고 꼬리를 잡을 때가 있다. 


    방향은 하나다. 그것은 결 따라가는 것이다. 기세를 타고 가는 것이다. 자연이면 효율이요, 자본이면 이윤이요, 사회면 권력이다. 그것은 원래 없던 것이다. 원래 없었는데 변화에 의해 만들어진 플러스알파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개체에 없고 그룹에만 있다. 혼자는 방향이 없다.


    구슬은 방향이 없다. 화살은 방향이 있다. 머리와 꼬리가 있다. 둘이 엮이면 방향이 생긴다. 방향은 갑자기 나타난다. 처음은 군중이 무질서하게 모여 있다. 어느 순간 방향이 생긴다. 무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것이다. 순방향과 역방향이 있다. 역주행 하다가 깔려 죽는다.


    메뚜기가 평방미터당 30마리가 넘어가면 서로 충돌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호르몬이 바뀌고 몸이 날씬해지며 날개가 자란다.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날아간다. 거대한 메뚜기떼를 이룬다. 제비들도 일정한 숫자가 전봇줄에 모여야 강남으로 날아간다. 그것은 수학적으로 도출된다. 


    우연 속에서 필연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홀수다. 짝수는 방향이 없다. 짝수인 대칭이 홀수인 비대칭으로 도약할 때 머리와 꼬리가 나눠지며 방향이 성립한다. 둘이 외력의 작용에 대해 하나로 행세하는데 효율이 있기 때문이다. 짝수를 홀수로 바꾸는 데서 무질서도가 증가한다. 


    그것이 기세다. 기세는 자연의 조절장치다. 과학자들은 걸핏하면 뭐를 위하여 어쩌구 하지만 위하여는 거짓이다. 자연에 작위적인 의도나 목적은 없다. 자연은 백퍼센트 우연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 우연이면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데 왜 자연은 당당하게 제자리에 버티고 있을까? 


    우연 속의 필연 때문이다. 확률적 우연 속의 수학적 필연이다. 위하여로 설명되는 것은 모두 기세라는 조절장치에 의하여로 바꾸어 설명해야 한다. 성선택에 대표적인 오류다. 건강한 유전자를 획득하려고 혹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어쩌구 하는건 비과학적인 언술이다.  


    바보다. 우연에 지배되는 자연에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자연선택이라는 말도 무책임한 언술이다. 뭘 선택해? 자연에 인격이 있냐? 확률과 우연과 수학이 있을 뿐이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조절장치를 가진다. 조절장치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조절하는 장치가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보통 그것은 전자기력으로 존재한다. 물질에 크기를 부여하는 것이 전자기력이다. 자연발효된 술은 알코올 도수가 16도를 넘을 수 없다. 알콜을 만드는 효모가 자기가 만든 알코올의 독성에 죽기 때문이다. 


    자연의 조절장치다. 돌은 어느 정도의 굳기를 가지고 흙은 어느 정도의 점성을 가진다. 스스로를 조절하므로 존재를 달성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환경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조절된 존재이므로 조절장치가 없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조절장치의 부재를 상상할 수는 있다.


    무한동력이 있다고 치자. 자연에서 저절로 작동하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면? 핵분열이 거듭되어 폭발해 버린다. 무한동력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우연히 에너지가 무한히 생성되어 우주는 폭파된다. 우주가 멀쩡하게 존재하여 있다는 것은 무한동력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생태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많은 대멸종이 있었다. 대멸종은 생물이 무한번식하여 너무 많은 산소를 생산하거나 혹은 너무 많은 이산화탄소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조절이 안 된다. 효모가 알콜에 죽듯이 자신이 생산한 부산물에 죽는다. 그게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곰팡이와 같은 분해자가 없어서 죽은 나무가 썩지도 않았다. 갈수록 태산이 된다. 땅속에서 많은 석탄, 많은 석유, 많은 석회암, 많은 철이 채굴되는 이유는 고대의 생명체가 조절장치 없이 무한폭주하여 많은 석탄과 석유와 석회암과 철을 생산하다 깔려 죽은 흔적이다. 


    그런데 결국은 조절된다. 아니면 망한다. 우주에 별들이 띄엄띄엄 있는 이유는 조절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에 많은 별이 있는 이유는 조절을 위하여 충분한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는 증거다. 신도 나름대로 애를 먹었다. 뭐 하나 만만치 않다. 수학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절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가능하다. 양방향이면 조절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절은 움직이고,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기껏 만들어놓은게 깨진다. 조절장치는 기세와 관성과 가속도와 효율과 이윤과 권력으로 나타나며 우리는 그 기세에 빨대를 꽂아서 산다.


    그 효율과 그 이윤과 그 권력을 빼먹는 방법으로 잠시 자기 존재를 유지하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태롭다. 조절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 그래서 결국 죽는다. 모든 조절은 궁극적으로 실패한다. 조절이 안 되면 더 상위의 조절장치를 호출하게 된다. 임시변통 수법이다.


    개인이 조절실패로 망하면 가족으로 조절하고, 가족이 망하면 부족으로 조절하고, 다 망하면 인류로 조절한다. 그래도 안 되면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떠나야 한다. 인류도 그렇게 어디서 떠나온 존재일지 모른다. 어떤 그것을 그것이게 고유함을 부여하는 것이 조절장치다. 


    어떤 것의 고유한 성질은 고유한 조절장치다. 쟤는 원래 그렇다면 그 원래가 그 사람의 조절장치가 된다. 성격이 다르다면 조절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조절장치는 시스템 형태로 존재한다. 시스템은 표면에 입력부와 출력부가 있어서 외부 에너지를 내부로 들여와서 순환시킨다. 


    시스템은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다. 메커니즘은 어떤 움직이는 둘이 대칭된 채 하나의 축에 꿰어 연동된다. 메커니즘은 내부에 좌우대칭과 축의 의사결정구조를 갖추고 조절한다. 그 조절부가 구조다. 구조는 둘을 연결하거나 끊는 방법으로 조절한다. 자연 스위치가 되는 것이다. 


    메커니즘이 방향을 잡으면 이후로는 저절로 굴러가게 된다. 우리는 그 에너지 흐름에 편승하면 된다. 우리는 두 개의 방향을 알고 있다. 그것은 좌우다. 실제로는 하나다. 그것은 앞뒤다. 머리로만 가고 꼬리로는 안 간다. 실제로는 꼬리로 가고 머리는 명령만 한다. 그래서 헷갈린다. 


    우리는 좌파와 우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앞으로 간다.  진보는 자력으로 가고 보수는 타력으로 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 결국 같다. 이끌고 갈 것이냐 묻어갈 것이냐의 차이다. 내부에 자체동력이 있으면 이끌어 가고 동력이 없으면 남의 뒤에서 묻어간다. 


    진보는 네티즌의 집단지성이라는 자체의 엔진으로 이끌어 가고자 한다. 보수는 미국과 일본 뒤에 줄 서서 몰래 묻어가는 얌체 짓을 하다가 트럼프에게 들킨다. 재벌과 기득권 뒤에 묻어간다. 자체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방향의 방은 모다. 모는 뾰족하게 모가 났다. 모는 한 방향이다. 


    어떤 A의 변화에 B의 변화가 연동되어 나란히 갈 때 A와 B의 상호작용에 의해 점점 커지는 C가 있다. A의 변화가 B의 변화를 끌어낼 때 둘을 통일하는 C는 일방향성을 가진다. 짝수를 홀수로 바꾸므로 일방향성을 가진다. 홀수를 짝수로 바꾸어 양방향이면 비용이 두 배 청구된다. 


    방향을 홀수로 줄여서 이득을 얻는 그것이 기세요, 효율이요, 권력이다. C의 증가를 파악하는게 방향판단이다. A와 B의 상호작용이 커질수록 C의 일방향성은 명백해진다. 에너지는 수렴되기 때문이다. C는 게임의 주최측이다. A와 B는 이기거나 지지만 C는 언제나 이겨야만 한다. 


    카지노는 언제나 이긴다. 그래야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카지노가 지면 카지노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은행이 파산하면 금융제도가 부정된다. 조절장치는 절대 질 수 없다. 조절을 못하면 존재가 부정되니까. 도박꾼이 지면 어디서 돈을 만들어오지만 카지노는 파멸이다. 


    대칭 가운데 비대칭이 조절한다. 바퀴는 돌지만 축은 돌지 않는다. 돌지 않는 축이 돌 때 일방향성을 가진다. 진보와 보수는 대립하지만 국민은 언제나 승리한다. 그 국민이 변하는게 기세다. 우주 안에 방향은 둘뿐이다. 확산과 수렴이다. 실제로는 수렴뿐이다. 확산은 원래 상태다. 


    에너지의 고유한 모습이 확산이다. 에너지가 수렴하면 우주는 수축되어 한 점 속으로 말려들어 간다. 블랙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본래 모습은 확산이며 확산방향은 무방향이다. 방향정립의 실패다. 방향이 만들어지면서 곧 수렴되면서 게임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엔트로피는 결국 확산된다는 말이다. 모순이다. 확산에서 수렴되는데 결국 확산된다. 그러므로 메커니즘은 한시적이다. 전체로는 확산만 존재하며 수렴은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다. 우주가 팽창하는 이치다. 확산하며 그 확산속도를 늦추는 조절방법이 있을 뿐 그 반대는 없다.


    우주는 언젠가 망하게 되어 있고 전체의 확산에 따른 반작용의 힘으로 국소적인 수렴을 만들며 잠시 시간을 벌어서 유지하는 것이다. 확산하는 힘이 충돌하여 수렴을 일으키지만 결국 확산되고 만다. 그 방향전환의 틈새에 재빨리 우리는 문명의 진보를 성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방향은 타자성과 주체성이다. 타자성은 확산이고 주체성은 수렴이다. 민주주의는 타자성을 전제조건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우주의 원래 모습이 확산이므로 타자성이 원래 상태다. 성악설이 원래 상태고 성선설은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며 문명사회의 이념인 것이다. 


    그런데 주체성이 이기도록 되어 있다. 에너지는 수렴할 때만 효율이 생긴다. 성선설에만 이익이 발생한다. 무조건 선이 이긴다. 이는 수학이다. 타자성은 방어한다. 타자성은 성악설과 같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한다. 주체성은 신뢰를 전제로 한다. 


    가족은 신뢰한다. 동료는 신뢰한다. 신뢰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배타적이 된다. 작아진다. 못 믿는 사람과도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못 믿는 사람과 상호작용하면서 조금씩 믿음을 만들어가는게 민주주의다. 중국은 꽌시만 믿고 일본은 같은 동네 사람들만 믿는다. 


    같이 마쓰리를 뛰어야 끼워준다. 그래서 망한다. 수렴은 궁지로 몰리기 때문이다. 문명의 본질이 수렴인데 수렴하면 궁지로 몰리므로 애초에 크게 시작해야 한다. 무지막지하게 큰판을 벌이면 수렴해도 더 수렴할 수 있으므로 이득이 그 가운데 있다. 민주주의는 인류와 함깨 간다.


    좁은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하면 망한다. 텍사스 시골에서 민주주의 안 된다. 미얀마 시골에서 총성이 울린다. 민주주의는 넓게 터를 잡고 애초에 서로 못 믿는다는 타자성의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러나 믿는 만큼 이긴다. 타자성 속에서 주체성을 쌓아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다. 


    못 믿을 세상으로 나아가서 믿음을 건설하는게 인간에게 주어진 게임의 타이틀이다. 못 믿는 타인과 믿을 만한 가족이 되기다. 보수는 계속 불신을 강조하다가 망하고 진보는 아무나 믿었다가 망한다. 불신 속에서 신뢰를 쌓는게 정답이다. 노무현은 믿다가 죽었다. 주체성은 죽는다. 


    박원순은 죽었다. 안철수는 피둥피둥 살아있다. 진보는 순진하게도 아무나 막 믿다가 죽고 보수는 불신하므로 펜스룰로 방어하면 잘 산다. 진보 진영에 성추문이 일어나는 이유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 다들 자기 도덕을 우러러보고 사랑한다는 자아도취에 빠져버리는 역설이다. 


    남의 엔진에 빨대 꽂고 에너지를 착취하는 자는 죽지 않는다. 자체엔진을 가진 자는 그 엔진이 고장나면 죽는다. 타자성은 불신으로 살고 주체성은 믿음으로 죽는다. 인간은 창피해서 죽는게 아니다. 주체성을 가진 자만 죽는다. 타자성은 타인을 관찰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남을 괴롭힌다. 관종짓을 하며 반응을 본다. 남이 반응하면 맞받아친다. 주체성은 스스로 발광한다. 남을 괴롭혀서 자기 행동의 근거를 만들어내는 조중동들과 진중권들은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남을 괴롭히면 되니까. 자신을 쥐어짜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자는 위태롭다.


    인간은 다음 행동이 보이지 않을 때 죽는다. 타자성은 타인에게 행동의 원인을 조달하므로 타인을 집적거리며 기다리면 된다. 진보는 타인에 관심이 없으므로 자기 안에서 에너지가 고갈될 때 죽는다. 인간이 죽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연스러운 행동의 흐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의 근거가 되는 자는 내부의 흐름이 끊길 때 죽고 남과 상호작용 하는 자는 남 탓하며 산다. 많은 노빠들이 암 걸려 죽은 이유다. 인간은 기생충처럼 외부 에너지원에 의존하는 존재다. 거기에는 흐름과 기세와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에너지의 고갈로 죽는다. 


    언제까지 엄마의 찌찌에 의지할 수 없다. 독립해서 자체 엔진을 만들어야 한다. 에너지의 확산을 수렴으로, 타자성을 주체성으로 바꿔야 지속가능하다. 모순이다. 그래서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순전히 자기 내부에서만 에너지를 조달하면서도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보통은 도덕성을 강조한다. 위태롭다. 자기 안에서 도덕 에너지를 생산하다가 박원순 꼴 나고 안희정 꼴 나는 것이다. 오거돈은 원래 진보가 아니다. 내가 남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다가 사고 치는게 목사들이다. 기도를 남보다 많이 한다. 삽질을 해도 정명석은 열심히 한다.


    압도적인 도덕성을 보여주면 남들이 우러러본다. 그때 위태로운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 나르시시즘이다. 남들이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모든 타인은 적이다 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때로는 도덕이 깡패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호작용만이 진실하다. 


    정리하자. 우주는 원래 확산이다. 방향은 언제나 수렴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타자성이다. 진보는 언제나 주체성이다. 이는 모순된다. 이 말은 모든 존재는 언젠가 엔트로피의 한계에 직면하며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은하도 언젠가는 멸망한다. 태양은 50억 년이 남았다.


    그렇다면 살길은? 우주는 원래 타자성이고 민주주의는 원래 확산인데 정답은 언제나 수렴이고 정답은 언제나 주체성인 이유는? 그래서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은 크게 판을 벌여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개인 위에 가족, 가족 위에 부족, 부족 위에 국가, 국가 위에 인류로 판을 키워야 한다.


    큰 전쟁, 큰 대결, 큰 판이 아니면 주체성이 지고 수렴이 진다. 큰판을 벌인 다음 에너지가 고갈되기 전에 다른 게임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한번 공장 지어놓고 꿀 빠는 기업은 한전과 포철밖에 없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지속적으로 메뉴를 갈아줘야 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하다. 


    자신이 외부가 되고 자기 안에 내부를 가져야 한다. 환경의 내부에 내가 있다. 내 안에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진보 안에 자체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내 밖에도 환경이 있고 내 안에도 환경이 있어야 한다. 일본은 국가 안에 작은 국가가 있었다. 그게 일본이 발전했던 비결이다. 


    민주주의는 국가 안에 국가, 국가 밖에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층위를 만들고 간격을 벌이되 큰판에서 작은 판으로 수렴하면서 게임을 이겨간다. 그리고 또 메뉴를 바꾸고, 업종을 변경하고, 게임 종목을 바꾼다. 이러한 순환이 지속될 때 문명은 수렴하면서도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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