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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419 vote 0 2020.05.13 (21:25:54)

      
    철학의 탄생


    인간이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추론이다. 추론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연결하는 것이다.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듯이 무지에서 지가 발생할 수 없다. 인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복제하여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신체감관을 통하여 단서를 수집한다. 그 감각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호흡할 줄 알고, 목청 높여 울 줄도 알고, 젖을 먹을 줄도 안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태어난다. 컴퓨터를 사더라도 OS는 기본으로 깔아준다. 많은 프로그램을 공짜로 제공한다. 그 안에 게임도 들어 있다. 추론은 한마디로 추리는 것이다. 추리면 단순해진다. 단순해지면 같아진다. 같아질 때까지 추려내야 한다.


    같으면 연결되고 연결되면 그것이 지식이다. 귀납추론과 연역추론이 알려져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연역추론이 있을 뿐이다. 연역은 빈칸에 채워 넣는 것이다. 1+X=3이라고 하면 우리는 1과 3을 알고 있다. 그사이의 2가 숫자라는 사실도 안다. 1을 알고 3도 아는데 2는 모르겠다는 말은 불성립이다. 2를 알아야 3을 알게 되어 있다.


    2를 모르면서 3을 안다면 사실은 3을 아는 게 아니다. 1도 알고, 2도 알고, 3도 알고, +도 알고, =도 알고, 계산법도 아는데 X를 모른다. 그런데 이미 2를 알고 있으므로 X가 2라는 사실도 저절로 알게 된다. 순서만 틀어놨다.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헷갈려서 그런 거다. 문제를 복잡하게 꼬아놔서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은 포기하게 된다.


    집중할 수 있다면 누구든 이 문제의 답을 알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은 뇌의 어느 부분이 고장 나서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 귀납추론은 2를 아는 상태에서 나머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실패다. 뇌구조로 보면 연역만 가능하고 귀납은 원리적으로 없다. 우리가 보통 귀납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납추론이 아니라 귀납적 접근태도인 것이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그런데 그 전체가 되는 플랫폼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자신이 연역한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보통 말하는 귀납은 논리회로의 귀납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의 귀납이다. 귀납추론이 아니고 귀납처럼 사건의 한 부분을 먼저 알게 되는 것이다.


    경찰이 범인을 잡는다면 범인의 담배꽁초부터 확보한다. 부분을 먼저 알고 사건의 전모는 나중에 알게 된다. 당연하다. 인간이 사건을 인지했을 때는 대개 사건이 종결된 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이미 뇌 안에 1+X=3이라는 회로를 깔아놓고 있다. 거기에 X라는 담배꽁초를 집어넣은 것이다. 실제로 추론의 내용은 연역이다.


    단, 그 사건에 대해서 귀납적 접근이다. 뇌 안에서 지식이 만들어지는 절차는 플랫폼을 깔아놓고 빈칸을 채우는 연역구조로 되어 있다. 사건에 대해서는 귀납이지만 담배꽁초를 단서로 추리해야 한다는 수사기법은 이미 아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수사기법의 빈칸에 담배꽁초라는 단서를 채워 넣은 연역추론을 실행한 것이다.


    연역추론 - 플랫폼을 깔아놓고 단서를 하나씩 채워가는 수사기법을 안다.
    귀납적 접근 - 사건의 일부를 먼저 알고 전체를 나중 아는게 귀납처럼 보인다.


    뇌 안에서의 추론은 연역이지만 사건에 대해서는 귀납적이다. 귀납 뒤에 적이 붙었다. 귀납추론은 없고 귀납적 접근이 있다. 여기서 딜레마는 모든 지식은 결국 연역뿐이며 연역하려면 답을 알고 있어야 하며 연역의 플랫폼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면 그 플랫폼이 없거나 부실하면 어떻게 하지? 그 경우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지렁이나 거미나 바퀴벌레가 지금부터 맹렬히 학습한다고 해도 인간만큼 될 수 없다. 뇌의 근본적 한계다. 연역추론은 처음부터 플랫폼을 가지고 시작하므로 플랫폼이 없거나 부실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공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안 되는 사람은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당신은 절대로 메시처럼 될 수 없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다. 음치라면 어쩔 수 없다. 필자가 음악을 논하지 않는 이유다. 길치라면 노력하지 말고 내비게이션을 써야 한다. 구조치는 구조론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플랫폼이 분명히 있는데도 사용에 능숙하지 못하다면 깨달아야 한다. 두 번째 선택은 깨닫는 것이다. 플랫폼이 있는데도 사용법이 미숙한 경우다.


    여기서 연역의 딜레마다. 인간은 원래 되는 것만 된다는 점이다. 지식은 한계가 있다. 누구는 어렵게 되고 이정후는 그냥 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한국이 된다고 해서 아프리카 국가들도 한국처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 되는 나라는 민주주의를 해도 안 되고 자본주의를 해도 안 된다. 인정할건 인정하자.


    그렇다면 인간사회 역시 그러한 한계가 있지 않을까? 되는 것만 되게 되어 있다. 자연 역시 그러한 원리로 되어 있지 않을까? 어떤 근본적인 벽이 있지 않을까? 여기가 철학의 출발점이다. 철학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형이상학을 말한다. 인간은 귀납적 지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다. 부족민은 하나, 둘밖에 세지 못한다. 셋부터는 많다이다. 셋은 많고, 넷은 많고많고, 다섯은 많많많다. 부족민에게 진리는 없고, 있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 숫자가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 첫머리의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은 이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안되니까 포기하자는 거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있으므로 언어를 건설해야 한다. 숫자가 없으면 숫자를 만들면 된다.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구조어를 익혀야 한다. 축과 대칭의 방향과 순서를 익혀야 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2500년간 좌절해 왔다. 솔직히 그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노자는 어차피 안 되는 철학이란 것은 포기하자고 떠들었다. 그 말을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고 표현한다. 유명론이니 실재론이니, 유물론이니 유심론이니, 합리론이니 경험론이니 하는 것은 '혹시 모르잖아. 도전해보자.' '아냐. 그래봤자 별수 없어. 성공한 사람이 없잖아. '이러한 좌절과 자조와 탄식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철학은 2500년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넷도 2500년간 없던 것이다. 2500년간 실패했으니 이제는 성공할 때도 되지 않았나? 원래 되는 사람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구조론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지구에 최소 한 명 이상 있다면 인류는 첫 발걸음을 뗀 셈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이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연역할 수 있지만 동시에 연역의 한계가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언어능력이 있지만 동시에 언어의 한계가 있다. 인간의 언어가 미완성인 점이 인류의 근본적인 장벽이다. 자연은 처음부터 플랫폼을 가지고 시작하니 플랫폼을 새로 만들 줄 모른다. 우주도 플랫폼의 원리를 적용된다면 가늠할 수 있다.


    신이니, 유심론이니, 실재론이니 하는 것은 그 처음부터 주어진 완전성을 모색하자는 것이며 유물론이니, 명목론이니, 경험론이니 하는 것은 그래봤자 2500년 동안 그 처음부터 완전한 무언가를 알아낸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하는 좌절감의 표현이다. 둘 다 맞는 말이면서 틀린 접근이다. 정답은 확실히 있다. 아는 사람도 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20.05.14 (03:35:14)

"인간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있으므로 언어를 건설해야 한다. 숫자가 없으면 숫자를 만들면 된다."

http://gujoron.com/xe/120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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