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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012 vote 0 2019.12.20 (19:00:57)


    진정한 세계로 초대하다


    당신이 무슨 말을 했다면 잘못 말한 것이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다면 그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당신이 무엇을 봤다면 잘못 본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안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틀렸다. 그러므로 검증하여 바로잡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곡식을 먹으려면 먼저 방아를 찧어야 한다.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자동차를 타려면 운전부터 배워야 한다. 지식을 응용하려면 체계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가 자연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말로 전달하여 얻은 지식은 날것이다. 가공되지 않았다.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날것의 지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공을 벽에 던지면 되돌아오거나 혹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반은 공의 성질이고 반은 벽의 성질이다.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눈이라는 벽에 공을 던진 것이다. 반은 공의 사정이고 반은 눈의 사정에 달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날것의 지식은 반쯤 맞는다. 반쪽짜리 지식으로도 인류는 5천 년간 별 탈 없이 지내왔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날고 스마트가 기는 시대에 맞지 않다. 이제는 온전한 지식이 필요하다. 반쪽짜리 지식이 때로 기능하는 것은 두 지식이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지식이 연결되어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걸러진다. 그러나 운이 좋은 경우다. 틀린 반쪽과 틀린 반쪽이 만나면 온전히 틀린 지식이 된다. 세상의 바른 지식은 운 좋게 맞는 반쪽끼리 만난 경우이고 세상의 온갖 허튼소리들은 틀린 반쪽끼리 마주친 경우다.


    문제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할 때다. 이때 인간은 거의 백퍼센트 오류에 빠진다. 왜냐하면 지식은 연결되는 것이며 연결고리들 중에 하나가 고장나도 전부 틀려버리기 때문이다. 아폴로 우주선을 달에 보낸다면 백퍼센트 시행착오는 일어난다고 봐야 한다. 여럿 죽어나간다.


    운 좋게 열 개의 링크가 다 맞을 리 없잖아. 하나만 틀려도 우주선은 아폴로 13호의 위기에 처한다. 정치의 세계가 특히 그러하다. 새로 실험하는 정책은 거의 실패한다. 노무현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과한 정치인은 열에 하나도 안 된다. 거의 90퍼센트는 오판하고 삽질을 했다.


    안철수가 특이한 경우가 아니다. 손학규가 특별히 멍청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그렇게 된다.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잘못한 것이다. 무엇을 알든 그것은 잘못 안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무엇을 봤든지 일단 잘못 본 것이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하려면 특별한 도구를 써야 한다. 왜 당신은 항상 잘못되는가?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눈은 이쪽에 있고 대상은 저쪽에 있다. 이미 쪼개졌다. 눈이 관측대상을 바라보므로 애초에 잘못되고 마는 거다.


    광원과 빛과 피사체와 스크린과 영상이 일직선상에 있다. 우리는 이 다섯 중에 하나를 보고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진실의 1/5을 알았을 뿐이다. 주체의 관점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되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로 눈금을 대어보는 것이 주체의 관점이다.


    바라보는 자신을 동시에 봐야 한다. 사수는 가늠자와 가늠쇠와 표적과 연결선을 동시에 봐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눈동자를 정확히 맞추어야 한다. 다섯 개가 일직선으로 정렬할 때 명중한다. 이렇듯 우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도구도 없이 막 보고 있다.


    잘못된 언어로 말하고 잘못된 방법론으로 사유한다. 모두 갈아엎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정이 이런데도 세상이 그럭저럭 굴러온 것은 틀린 견해들이 중간에 도태되기 때문이다. 두 사건을 연결하면 둘 다 맞거나 둘 중 하나가 맞거나 아니면 둘 다 틀리거나다. 1/4 확률로 맞는 거다.


    대충 찍으면 넷 중 하나가 요행수로 맞는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백퍼센트 틀린다. 바둑 고수는 한 수, 두 수, 세 수, 네 수, 다섯 수 앞을 내다봐야 한다. 아폴로 우주선을 달에 보내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아야 한다. 제트기 조종사라면 수십 가지 판단을 동시에 해낸다.


    언제나 요행수를 바라며 살 수는 없다. 특히 지구온난화와 같은 미래의 문제는 미리 실험해볼 수도 없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시대에 대충 겐또(어림)나 짚으면서 살 수는 없다. 정치를 어림짐작으로 할 수는 없다. 전쟁을 대충 연필이나 굴려 할 수는 없다.


    대상의 세계에서 주체의 세계로 갈아타야 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도구가 필요하다. 원론이 필요하다. 원자론이 필요하다. 원자론과 원론은 같은 아이디어다. 시작점을 찍는 문제다. 내 눈을 어느 위치에 둘 것인가를 정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종교의 신도 마찬가지다.


    신을 쪼갤 수 없다. 이데아를 쪼갤 수 없다. 원론의 공리를 쪼갤 수 없다. 원자를 쪼갤 수 없다. 주체를 쪼갤 수 없다. 그것은 사건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한다면 대상과 주체를 연결하는 하나의 라인이다. 그 연결의 라인은 하나이므로 쪼갤 수가 없는 것이다.


    쪼갤 수 없는 원자 개념은 고대인이 대충 느낌으로 하는 말이고 정확히는 주체와 대상의 연결이다. 공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명분과 의리다. 그것은 게임에 앞서 룰을 정하는 문제다. 그것은 쪼갤 수 없다. 축구의 주심은 한 명이어야 하며 두 명이면 안 된다. 쪼개지면 안 된다.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 그러하다. 의사결정은 도마 위의 생선을 칼로 내려치는 것이다. 생선은 두 토막이 나지만 칼은 한 개여야 한다. 생선이 둘이라고 칼도 둘이면 안 된다. 두 개의 칼로 내리쳤는데 생선이 한 토막이면 안 된다. 원고와 피고는 둘이라도 법은 하나라야 한다.


    지식은 주체와 대상의 연결이다. 두 사건을 연결하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사수와 표적을 연결하는 하나의 선이 있다. 그것이 공자에게는 명분과 의리가 되고, 데모크리토스에게는 원자가 되고,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되고, 종교인에게는 신이고, 유클리드에게는 원론이다. 


    그것은 모든 사건의 출발점을 정하는 문제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주체다. 나와 대상을 연결하는 것이 제 1원인이다. 추론의 시작점이다. 유클리드는 열 개의 공리로 시작해서 465개의 정리를 연역해냈다. 생산성이 높다. 눈이 휘둥그레질 법한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유클리드 원론의 막강한 생산력을 접하고 전율하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동양의 손자병법은 원론에 반대되는 꼼수다. 원론은 정석이다. 정석과 꼼수 중에 어느 쪽이 생산력이 높을까? 정석이 빛을 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꼼수는 즉시전력이다. 


    프로야구팀이 FA에 거액을 투자해서 즉시전력감을 구하고 루키를 내주다가 망하는 이치다. 동양은 꼼수의 즉답성에 매료되어 대사를 그르쳤다. 꼼수는 당장 효과가 있지만 거짓이고 지속가능하지 않다. 정석은 나중에 천천히 돌려받지만 10개를 투자해서 465개를 얻는다. 


    동양은 실용주의로 망하고 서양은 원리원론으로 흥했다. 원리원칙과 대의명분이라야 한다. 게임의 룰을 바르게 정해야 한다. 노자와 장자는 즉시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다. 공자는 원리원론이다. 우리는 원론과 원자론과 대의명분에 의지하여 의연하게 장기전을 해내야 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로 마주보고 대칭되면 일단 틀린 것이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은 ->->로 연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방향성이다. 방향성을 얻었을 때 지식은 하나의 연결고리로 기능하여 새로운 지식을 낚아올린다. 비로소 연역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지식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12.21 (03:57:26)

"우리는 원론과 원자론과 대의명분에 의지하여 의연하게 장기전을 해내야 한다."

http://gujoron.com/xe/115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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