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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038 vote 2 2017.07.10 (22:07:36)

     

    불이 타는가 나무가 타는가?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인간에게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타인과 생각을 공유한다는 데 언어의 의미가 있다. 내가 본 것을 너도 보았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네가 알 것이니 언어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는 통한다.


    다만, 고양이가 야옹 울고 개가 멍멍 짖는 것은 언어가 아니다. 거기에 생각이 자라는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에게 제대로 된 언어가 있는가? 과연 생각들은 하고 사는 건가? 생각이 자라고 있는가? 


    언어는 관측으로부터 촉발된다. 자연은 에너지로부터 촉발된다. 자연은 복제되고 언어는 공유된다. 언어의 공유는 수평의 전달이고 에너지의 전달은 수직의 복제다. 인간의 관측과 자연의 에너지는 결 맞지 않다. 


    아는 언어와 전하는 언어의 차이다. 관측은 전하는 언어다. 복제는 아는 언어다. 전하는 언어는 서로의 약속이다. 사슴을 몰이하는 늑대라도 대장의 신호에 맞추어 한꺼번에 공격해야 한다. 약속신호를 정해야 한다. 


    그것은 전하는 언어다. 인간의 언어는 사냥꾼 무리의 약속신호 전달하기에 맞추어져 있다. 수학은 자연에 맞춘다. 1은 합의되고 2는 복제된다. 2는 따로 검증할 필요가 없으니 1을 합의했을 때 2도 합의되어 있다. 


    1의 합의는 약속의 전달이고 2는 복제다. 복제하는 것이 자라는 것이다. 생각이 자라야 한다. 대장 늑대의 신호에 늑대무리가 흩어져 포위하는 것은 합의다. 한 마리가 슬그머니 뒤로 돌아가 길목을 지키는 건 복제다.


    그것은 생각이 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귀납원리와 자연의 연역원리는 충돌한다. 인간의 사유도 실제로는 연역과 복제이지만, 타인과 대화할 때는 약속을 정하기에 주력하므로 관측의 귀납을 쓴다. 코드맞추기다.


    언어의 프로토콜 문제 때문이다. 내가 본 것을 너도 보았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네가 안다는 점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발전시키면 그 약속이 깨진다. 생각이 자라지 말아야 한다.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 


    물 자체에 내재하는 원리를 기준으로 말하지 않고 관측의 기준으로 말한다. 관측이라는 울타리에 생각을 가둔다. 생각이 자라지 못하니 언어의 한계다. 약속의 전달이 진보를 막는다. 뇌의 사유를 언어가 제한한다.


    인간의 직관적인 생각을 언어의 표현이 가로막는다. 구조론을 배운 사람은 '맞어 맞어!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하고 말하지만 그런 직관을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언어로 나타내지는 못한다. 나타내면 망한다.


    불이 타는지 나무가 타는지 헷갈린다. 불을 끄는 데는 첫째, 냉각소화, 둘째, 연료제거, 셋째, 산소차단의 방법이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가? 타는 불을 끌 것인가? 연료인 나무를 뺄 것인가? 아니면 산소를 막을 건가?


    우리는 이 중의 한 가지를 알면 곧 알았다고 여긴다. 위태롭다. 열을 식히는 것이 불을 끄는 것이다. 불은 열이다.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타오르는 불꽃이니 사실은 불이 아니라 산소의 공급이니 불의 전파이다.


    열을 꺼야 불이 꺼지는 것이며 물을 끼얹는 방법으로 식혀서 열을 끌 수 있다. 다음은 연료제거이고 산소차단이 마지막이다. 거기에 넷째와 다섯째를 추가할 수 있다. 불이 번지지 않게 방화선을 치는 것이 넷째다.


    잔불정리로 끝내는 것이 다섯째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보면 열을 끄는 게 질이고, 연료목의 제거가 입자이고, 모래를 끼얹는 방법의 산소차단으로 불의 전파를 막는 게 힘이고, 옮겨붙지 못하게 하면 운동이다.


    마지막 잔불을 정리하는 게 량이다. 여기서 일의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열과 연료와 산소의 세 가지 중의 하나를 알아놓고 끝내려 드는 게 귀납의 함정이다. 조금 알기는 아는데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불이 타는지 나무가 타는지 헷갈린다. 세상은 상대적이다. 첫째는 불이요, 둘째는 나무다. 불을 꺼도 꺼지고 나무를 꺼도 꺼진다. 불씨는 또 살아난다. 국민의당 삽질이 그렇다. 그들은 노상 불을 끄지만, 불꽃만 끈다.


    국민의 마음속에 분노의 불씨가 여전히 살아있다. 열기가 살아 있다. 상대적으로 끄는 건 임시봉합이고 절대적으로 꺼야 한다. 그것이 노무현의 진정성이다. 유시민이 결코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다. 


    그는 나무를 꺼놓고 불을 껐다고 믿는다. 불이 타는 게 아니라 나무가 탄다는 어긋난 믿음 때문이다. 열을 끄지 않고 불꽃만 끄려 든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나무를 꺼도 불은 꺼지고 산소를 막아도 불은 꺼진다. 


    겉으로 드러난 불꽃만 꺼도 불은 꺼진다. 성냥불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내부에 잠복한 열이 있다면 불은 다시 붙는다. 진보의 방향성을 알기 전에는 알아도 안 게 아니다. 약속 정하기의 귀납적 지식은 불완전하다. 


    유시민의 엘리트 지식에 노무현의 인간적인 매력을 더하면 금상첨화라고 유시민은 믿는다. 얼치기다. 그건 안 게 아니다. 사람이 말하는가 아니면 말이 사람하는가? 인간의 말이 그러하다면 말 자체의 말은 어떠한가? 


    인간의 말은 말이 아니며 말의 말이 말이다. 인간의 말은 어떤 말에 불과하니 그것은 언어에 사건을 태운 것이라 약속정하기 언어다. 그것은 불이 타는 게 아니라 나무가 타는 것이니 불을 끈 게 아니라 나무를 껐다. 


    언어 자체의 성장하는 진보의 방향을 알아야 진짜다. 그것을 알기 전에 당신은 말을 배운 것이 아니며 당신은 여전히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정 알아야 할 것은 에너지 복제를 따라가는 사건의 결맞음이다. 


    인간은 의사소통의 코드만 일치하면 알았다고 친다. 알긴 뭘 알어. 알긴 개뿔, 그것은 하나도 모르는 것이다. 사건은 어떤 둘의 일치에서 일어난다. 둘 중에 하나만 장악해도 우리는 사건을 상당히 통제할 수 있다. 


    한 명만 생각을 바꿔도 두 사람의 결혼은 무효가 된다. 한 사람에게만 기술이 먹혀도 둘 다에게 효과가 있다. 그것이 진정성 없는 안철수들의 상대주의 방법이다. 사건을 일으키는 둘에서 하나를 알고 아는 척한다. 


    불이 타는지 나무가 타는지 모르면서 말이다. 불이 타는 것도 아니요, 나무가 타는 것도 아니요, 열이 타는 것이다. 불이나 나무 중에서 하나를 꺼도 불은 꺼지는 법이니 이는 상대성이다. 이걸로 아는 척하면 안 된다. 


    상대적 지식은 불완전한 절반의 지식이다. 약속 정하기 목적의 지식은 진짜 지식이 아니다. 생각을 공유할 뿐 자라지 않는다. 대화와 설득에나 능할 뿐 참된 문제해결에 능하지 않다. 당신은 진보나 보수를 아는가? 


    아는 척하기는 쉽다. 진짜 아는 것은 다르다. 노무현이 유시민의 말을 잘 들었다면 정치가 매끄럽게 잘 되어 노무현이 성공했을 거라는 유시민 생각은 초딩이다. 진정성이 없다. 노무현이 잘하면 잘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잘해야 잘한 거다. 오바마가 잘했다. 단지 오바마가 잘했을 뿐이다. 오바마가 잘했기 때문에 미국 유권자는 더 화가 난다. 유권자가 잘해야 성공이다. 흑인도 잘할 수 있는 쉬운 것을 백인이 잘하지 못했다. 


    오바마가 잘하니까 백인들이 화가 난 것이다. 자기가 잘하는 건 잘하는 게 아니다. 국민이 다 함께 잘해야 문재인이 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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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을 아는 것은 아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동차와 비행기를 구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아직 자동차도 모르고 비행기도 모르지만, 자동차와 비행기에 대해서 공부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며 자동차와 비행기를 구분할 줄 알아야 약속을 정할 수 있습니다. 안철수와 문재인의 사진을 보여주면 당신은 누가 안철수이고 문재인인지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 문재인과 안철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수원나그네

2017.07.11 (05:32:18)

탁월한 비유입니다~

[레벨:30]이산

2017.07.11 (14:32:30)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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