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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460 vote 0 2011.06.16 (22:16:14)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글입니다.


‘개도 불성이 있느냐?’ ‘없다.’ 조주스님의 유명한 무(無)자 화두 이야기다. 그런데 말이다. 불성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다는 말인가? 아무 차이가 없다. 애초에 의미가 없는 거다.


‘동물도 깨달을 수 있느냐?’ 이런 질문에 답변하는 것은 사실이지 의미가 없다. 짐승도 깨달을 수는 있지만 깨닫지는 못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도 깨달을 수는 있지만 깨닫지는 못한다.


인간은 별을 딸 수 있지만 별을 따지는 못한다. 어떤 특수한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현장에서 그렇게 한다는건 다르다.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는 매우 큰 간격이 있다.


중요한건 깨달음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 태양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동굴 속에 숨은 이가 태양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태양은 오래전부터 그를 먹여살리고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 해도 부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무엇이 다른가? 신분이 다르다. 무슨 신분인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접하는가의 차이에 따른 신분이다.


중요한 것은 ‘있다’는 거다. 물론 그 이전에 ‘이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구조로 보면 ‘이다≫있다≫같다≫옳다≫맞다’의 순서다. 인간이 깨닫고자 하는 것은 하부구조에 속하는 같다, 옳다, 맞다의 수준이다. 의미없다.


그대가 깨달았건 혹은 깨닫지 못했건 간에 우주는 눈꼽만치의 충격도 받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세상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구? 누가 물어봤냐구? 흥! 별꼴이야.'


왜 깨달으려고 하지? 멍청한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연 깨달음인가, 그리고 깨달음이 실제로 과연 존재하여 있는가다. 진짜냐 가짜냐가 중요할 뿐 그 깨달음의 소속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깨달았다는 것과 혹은 내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의 차이는 없다. 깨달음을 통해서 번뇌를 극복하는 것이나, 혹은 교회를 다니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나, 혹은 돈을 벌어서 잘먹고 잘 사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배 고프면 밥 먹으면 되고, 몸 아프면 병원가면 되고, 돈이 없으면 일을 하면 되고, 골치가 아프면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휴식을 취하면 된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 깨달으려고 하는가? 그것이 그다지 효율적인 방법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 그것이 빛나는 다이아몬드냐 아니면 그냥 기왓장이냐가 중요하다. 그 물건이 누구 손에 속하여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이아몬드가 존재하여 있으면 결국 모두가 이득을 본다. 땅 속에 석유가 모두가 이득을 본다.


중요한건 우주의 존재 그 자체가 깨달음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지 인간이 그 깨달음에 도달해서 ‘나 깨달았네’ 어쩌구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깨달아서 그것으로 아무 쓸모가 없지만, 우주와 자연과 진리의 존재 그 자체가 깨달음의 구조로 되어 있다면 인간은 서로간에 소통할 수 있다.


무엇인가? 석가가 깨달음을 설파했을 때는 생노병사의 고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옛날 이야기다. 생노병사의 고는 병원가면 해결된다. 돈 벌면 해결 된다. 현대사회에서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중요한건 진리다. 진리가 깨달음의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상승할 수 있다. 집단지능을 형성할 수 있다. 더 높은 레벨에서의 소통을 할 수가 있다. 지구촌 인류호의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석가는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무(無)’라고 대답했다. 왜? 불성은 개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 그 자체의 본 모습으로 있다.


불성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는다. 우주는, 자연은, 세계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것을, 진리를 꺼내 쓸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자는 드물다.


깨달음은 인간에게 상승의 가능성을 던져준다. 이전에 인간의 삶의 목표는 행복이나 쾌락이었다. 요즘은 돈이거나 출세나 성공이 삶의 목표다.서구라면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천국행이 삶의 목표다.


그것이 우습게 된다. 더 멋진 것이 있는데, 더 나은 세계가 있는데 행복이나 쾌락 따위에 매달린다는 말인가? 돈이나 출세에 미련을 가진다는 말인가? 깨달음은 인간의 삶의 목표를 바꾼다.


노예는 어릴 때 부모로부터 격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부모없는 자식으로 만들어 놓아야 노예주가 길들이기 편하기 때문이다. 집시들이 나라없는 백성으로 떠도는 것과 같다. 나라는 없어도 역사가 있었던 유태인과 달랐다.


깨달음이 존재하여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쾌락이 아니라, 돈이 아니라, 존엄이고 자유이고 사랑인 것이다. 독립적인 존재로 고유한 자기 포지션을 가지고 우주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한다.


큰 배가 있었다. 그 배의 항해는 매우 오래되었다. 그 배 안에서 처음 태어난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 배가 그들의 세상이고 우주였다. 그들은 그 배가 행해중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배가 항구를 떠나 출항하는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배가 그냥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네는 어디서 오지도 않았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느 항구에서 출항했으며 그 배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후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들은 행복이나, 쾌락이나, 출세 따위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 배의 항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보람이나 기쁨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깨달음은 그런 것이다. 어떤 젊은이가 10만원을 가지고 있는데 데이트를 하는데 5만원이 든다. 5만원이 드는 데이트를 2회 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근사한 곳에 가서 10만원이 드는 데이트를 한번 할 것인가?


그게 달라진다. 깨달음은 나쁜 포지션에서 2를 얻는 것보다 좋은 포지션에서 1을 얻는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가치없는 것을 많이 가지기보다 가치있는 것을 적게 가지는 길을 선택하게 한다.


실력있는 피아니스트와 전혀 피아노를 못 치는 사람이 연주회에 초대받았다면 어떨까? 두 사람이 연주를 듣는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피아노를 못 치는 사람은 자신이 지불한 티켓값과 연주자의 실력 사이에서 균형을 생각한다.


과연 내가 들은 연주가 5만원짜리 연주인가다. 그러나 실력있는 피아니스트는 다르다. 연주자가 잘 치면 ‘저 연주자와 친해야겠군’ 하고 생각할 것이고, 못 치면 ‘저 연주자에게 신경쓸 필요는 없겠군’ 하고 생각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손해보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쪽 세계의 흐름을 알아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깨달음이 있다면, 그런데 우주가 통째로 깨달음으로 되어 있다면 우주 앞에서 나는 지불한 비용을 아까워하는 소비자가 아니고, 투덜거리는 피고용인도 아니고 주주의 입장이다. 내가 이 우주에 지분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사람의 신분을 상승시킨다. 이것이 본질이다. 돈 내고 가져가는 그 상품의 소비자 포지션에서 그 상품을 제조한 회사의 주주 포지션으로 승격시킨다. 돈 내고 가져가는 소비자는 그 지불한 댓가가 적당한지 신경을 쓴다. 그 회사의 주주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차피 자기 호주머니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세상 앞에서 댓가를 지불하고 반대급부를 챙기는 소비자의 관점으로 볼 것인가 어니면 자기 지분을 가진 투자자의 관점으로 볼 것인가이다. 신분이 다르다. 서 있는 지점이 다르다. 포지션이 다르다. 입장이 다르다. 관점이 다르다. 눈높이가 다르다. 역할이 다르다. 경우가 다르다.


그대는 이 세상에 왜 왔는가? 세상이 그대를 불렀는가? 그냥 지나가다가 공연히 이 세상을 기웃거리는가? 세상이 그대의 집인가? 그대가 세상의 주인인가? 세상 앞에서 당당한가? 자연스러운가?


불성은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불성은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이다. 깨달음은 인간에게 어떤 이득도 주지 않는다. 단지 신분을 상승시킬 뿐이다. 포지션을 바꿀 뿐이다. 입장을 바꾸고, 역할을 바꾸고, 처지를 바뀌고, 갑과 을의 위상을 바꾼다.


내가 깨달았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주가, 진리가, 존재가, 세상이, 진보가, 역사가 깨달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것인가가 중요하다. 받아들이면 눈빛이 바뀌고, 삶의 지향이 바뀐다.


http://gujoron.com




[레벨:12]김대성

2011.06.18 (05:12:49)

전송됨 : 페이스북

  옥주현에게 희망은 없는가?에 대한 답이고,

  딱히 탓할 사람도 없는데 비참한 상황에 대한 답일수도. 날개 잃은 새는 초극이 필요하다니.

프로필 이미지 [레벨:7]id: LifenicheLifeniche

2011.06.26 (17:09:31)

글을 읽고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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