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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092 vote 0 2019.03.09 (18:30:35)

    우주의 처음

    

    우주의 처음을 생각하지 않고 다들 잠이 온다는 말인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인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앉아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숨이 쉬어진다는 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절망적이지 않다는 말인가? 자신이 인형술사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말하는 사람이 없다. 희희낙락하며 잘도 살아대는 인간 군상들을 보면 신기하다.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은 동료의 얼굴을 쳐다본다. 저 녀석보다 빠르면 돼. 이 많은 사슴 중에 나 대신 잡혀먹힐 사슴이 하나만 있으면 돼. 그러다 늙고 병들어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꼼짝없이 사자의 먹이가 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왜 도약하지 않나? 왜 금 밖으로 나가지 않나? 왜 새장을 탈출하지 않나? 왜 힘을 합쳐 사자를 죽이지 않나? 왜 포기하는가? 자기 존재가 날마다 조금씩 지워지는 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강 건너 불구경인가? 마땅히 줄을 끊고 인형술사의 올가미를 탈출하는 괴뢰가 되어야 한다. 비록 나무인형일지라도.


    인도 아저씨들은 편리하다. 지구는 코끼리 등 위에 올려져 있고 코끼리는 거북이 등 위에 올려져 있고 거북이는 코브라 뱀의 등에 올려져 있다. 코브라는요? 하고 묻는 녀석은 없다. 일단 기억력이 그 정도 안 된다. 지구에 코끼리에 거북이에 뱀까지 진도를 뺐다면 나름 성의를 보인 셈이니 더는 선생님을 귀찮게 하지 말자.  


    지구가 꺼져서 밑으로 추락할까 걱정인 판에 코끼리에 거북이에 뱀까지 3중 안전장치를 설치해 놨다고 하니 안심이 된다. 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봤자 지혜로운 코브라 형님을 최종보스로 안배해 놨다고 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편하게 잠을 청하는 거다. 기독교 형님들도 편리하다. 창세기를 주워섬기면 된다. 


    그런데 많은 결함이 보인다. 코끼리에 거북이에 코브라 뱀이라면 어처구니가 없어 너털웃음 짓고 물러나겠지만 숫자를 동원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논리적으로 도전하게도 되는 것이다. 창세기는 우주가 탄생되기 전부터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지구도 없고 태양도 없는데 어떻게 7일이라고 시간표가 있는 거지? 


    이런 믿음 없는 질문을 하면 하느님께 혼난다. 하느님이 이놈! 한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내 존재가 지워진다. 근본의 근본의 근본으로 추궁하여 들어가면 최후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 괴로워진다. 막막하다. 숨이 막힌다. 머리가 아프다. 그만두게 된다. 눈 감고 아무것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똑바로 걸어가 보자.


    열다섯 걸음까지 쉽게 간다. 열여덟 걸음에서 막혀 더 걸을 수 없다. 무언가 앞을 막아서는 듯한 느낌에 발이 내밀어지지 않는다. 물론 장님들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쉽게 가지만 말이다. 태초에 대한 생각도 이와 같다. 무언가 캄캄한 것이 앞을 딱 막아서면 숨이 막힌다. 거대한 검은 힘에 짓눌리게 된다. 팔다리가 아파진다. 


    그래도 조금 버텨보자. 인간이 게임 속의 아바타와 같다면 어떨까? 인간은 대칭의 연쇄고리를 통해 사건을 해석한다. 아바타들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인간들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서로 대칭된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나는 저 녀석만 이기면 돼 하고 안심한다. 논리가 어수선해져 물타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가 있어 무리의 신망을 받게 되면 난처해진다. 지도자는 외부와 대칭을 조직해서 에너지를 끌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쳐다볼 누군가가 없다. 그게 있으면 지도자가 아니다. 대칭에서 비대칭으로의 도약이다. 대표성을 얻어 외부세계에서 대칭을 조달해야 한다. 아바타는 게임을 탈출해야 한다.


    게임 속의 아바타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자신이 게임 속에 갇힌 존재이며 그러므로 게임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내부가 독립하면 외부에 대칭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임 바깥을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있다. 반대로 인간은 시공간과 물질이라는 게임의 알고리듬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물질은 광속에 막혀 새장을 탈출할 수 없지만 양자얽힘은 시공간의 눈금을 무시하므로 바깥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나? 게임의 시작이 있다. 우리가 아는 시공간은 그 게임의 알고리듬 안에서 작동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건의 출발점이다. 특이점이다. 빅뱅을 일으키는 한 점이 있다. 그 이전은?


    시간의 이전은 없어도 논리의 이전은 있다. 시공간의 이전은 사건의 원인과 결과로 있지만 논리의 이전은 사건의 전체와 부분으로 있다. 부분이 있으므로 전체가 있다. 시간의 이전은 게임 스타트가 종점이며 그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북극의 북쪽은 없다. 아니다. 북극의 북쪽은 지구의 중심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시공간의 이전은 물질세계에 해당되는 것이며 물질을 넘어선 영역은 논리와 수학의 세계다. 그 세계는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대칭성의 세계다. 대칭이므로 짝수다. 어떤 둘이 충돌하여 계를 이루고 특이점을 형성하면 태초다. 전체와 부분의 대칭에서 전체는 사건의 계를 형성하고 코어를 도출하는 절차다.


    과거로 무한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현재가 있으면 반드시 대칭되는 과거가 있어야 하지만 과거의 과거로 계속 가는 수는 없다. 부분은 전체를 만나는 지점에서 연결이 종결된다. 스타트가 되는 출발점은 반드시 있다. 우리 우주가 하나의 비눗방울 거품과 같다면 거품이 만들어지고 꺼지는 시작과 종결이 있다. 


    우주는 거품 속에 갇혀 있다. 시간은 거품 안에서 작동한다. 거품 밖으로 나가려면 거품이 꺼져야 한다. 거품이 꺼지면 시계는 원위치 된다. 평행우주를 떠올릴 수 있다. 한 뿌리에 여러 개의 우주가 나무의 가지처럼 돋아 있다. 하나의 우주는 하나의 게임이다. 다른 우주로 간다면 시간이 지워지는 게임의 경계를 넘는다. 


    우리 우주 밖으로 빠져나가 게임을 갈아타는 순간 거품이 꺼지고 시간이 지워져 태초로 돌아가 버린다. 부분이 전체를 만나는 순간 시간이 리셋된다. 두 우주 사이의 경계에 있는 사람은 두 우주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그곳은 우리 우주의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은 거인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20페이지에서 21페이지에 걸쳐 살고 있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항해한다. 거인은 책의 어느 페이지든 단번에 찾을 수 있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버리면 해결된다. 비로소 밤잠을 이룰 수 있다. 시간적 원인과 결과의 대칭이라는 알고리듬에서 벗어나 공간적 전체와 부분의 대칭으로 알고리듬 갈아타기다.


    우리는 종종 딜레마에 빠진다. 강아지나 고양이에 대해서는 불쌍해한다. 파리나 모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시큰둥하다. 파리나 모기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므로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차별이다. 피라미나 개미의 목숨도 소중하다. 정녕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가 다르다. 목숨의 차별이 아니라 이야기의 차별이다.


    개와 고양이가 가진 이야기의 가치가 파리나 모기가 가진 이야기의 가치와 다른 것이다. 바다의 고등어와 명태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어부의 그물에 걸려 죽어도 상관없다. 고래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므로 작살에 찔리면 안 된다. 인간의 친구인 개와 고양이는 각자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각자는 각자의 게임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로 인해 우리는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이 어부가 되었다고 해서 자괴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극해에 100조 마리의 크릴 새우가 탄생하고 죽는다. 시공간의 경계라 해도 이와 같은 것이다. 


    물질로 보면 개나 고양이나 인간이나 개미나 모기나 같지만 이야기로 보면 다르다. 영향력이 다르다. 얽힌 정도가 다르다. 전체와 부분의 입장이 다르다. 긴밀하게 얽혀야 대표성을 얻어 전체로 도약하고 얽힘이 끊어지면 부분으로 이탈한다. 대표성을 얻으면 한 마리의 고양이라 해도 모든 고양이들의 대표자가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겹친다. 엮인다. 얽힌다. 간섭한다. 단 부분에서 풀어지고 전체에서 얽힌다. 개별성에서 끊어지고 대표성에서 연결된다. 전체에 있고 부분에 없는 것은 완전성이다. 개별성에 없고 대표성에 있는 것은 이야기의 완전성이다. 사건의 완성도가 다르다. 완전하면 통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또다른 이야기를 불러낸다. 


    시공간도 이야기로 보면 다르다. 물질로 보면 시간은 과거로도 무한하고 미래로도 무한하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에는 척도가 있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틀렸다. 인간을 척도로 대입한다면 자기소개다. 인간소개 하지 말고 우주소개 하는게 맞다. 이야기의 완성도가 척도가 된다. 연결단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완성도가 사건을 연결하는 단위가 된다. 그것은 시간적 원인이 아니라 공간적 전체에 있다. 전체만 외부와 연결하여 에너지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이야기로 보면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반드시 스타트가 있다. 특이점이 있다. 그 특이점은 항상 짝수로만 존재한다. 우리 우주는 다른 우주와 경쟁관계에 있는 거다. 


    우리가 고민할 일은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다른 우주에 미치는 영향이다. 두 우주는 각자 독립된 단행본으로 존재하지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책의 페이지를 넘나드는 거인의 손이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주최측이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새로운 이야기들이 무수히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우주를 사는 인간들은 다른 우주로 갈 수 없지만 이야기는 새나가고 있다. 소문이 나고 있다. 소식이 전파되고 있다. 그래서 할 일이 있다. 우리가 목도하는 물질은 가짜다. 시공간도 가짜다. 그것은 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알고리듬에 불과하다. 에너지가 진짜다. 에너지는 사건을 일으킨다. 사건은 반드시 주최측이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며 사건의 완성도가 척도다. 완성되어야 복제되고 전파되고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짝이 있다. 궁극의 궁극에 무엇이 있나? 게임이 파탄나고 물질이 지워지면 시공간도 사라지고 에너지가 남는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방향을 만드는 것은 균일성과 불균일성이다. 둘이 마주친다.


    마주침의 순간에 균일과 불균일이 판정되어 척력이 인력으로 틀어지며 사건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에는 위대한 마주침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게임의 논리에 갇혀버리는 것이며 인간은 게임의 논리를 우주의 진리로 착각하지만 그것은 컴퓨터에 구현된 가상에 불과하다. 벽을 깨부수고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빛의 파동은 실제로 있는 것이고 빨주노초파남보는 인간의 뇌가 구현해낸 거짓이다. 빛은 있지만 칼라는 없다. 칼라는 연속성을 가지므로 무한하지만 빛은 불연속성을 가지므로 유한하다. 모든 무한은 게임의 논리에 의해 모니터상에 구현된 것이다. 즉 가짜라는 말이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게임을 탈출하면 무한은 없다.


[레벨:3]바람21

2019.03.09 (23:47:47)

동렬님 무한대의 과거, 무한대의 미래, 무한대의 공간등의 무한은
대칭맺지 못하고 정보를 실을수 없기에
존재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9.03.10 (10:32:33)

본문 내용을 수정해 놨습니다. 

짝이 있는 것은 존재이고 짝이 없는 것은 연출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03.10 (04:56:56)

"우리가 고민할 일은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다른 우주에 미치는 영향이다."

http://gujoron.com/xe/1069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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