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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5206 vote 0 2002.10.23 (17:29:19)

1. 지난 봄,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이인제가 주장하기를, "97년 대선에서 이인제가 출마했기 때문에 DJ가 대통령 된 것이다. 다시말해 결과적으로 이인제는 DJ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웠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인제의 그런 개소리에 동조를 하는 부류였지요. 그 부류들 중 일부가 지금 민주당 내에서 후단협을 추진하다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결과론적'이지만, 김민석이가 민주당을 탈당해 몽준 캠프로 간 이후에 노무현 후보에 대한 국민반응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후원금도 급격하게 늘고, 더불어 지지율도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의 상황이 김민석의 원인제공에 의해 이뤄졌다고만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점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김민석이 더러 '민주당의 심청이'라는 비아냥까지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문득 김민석과 이인제가 오버랩되고 있습니다. 만약 노무현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당선이 된다면, 김민석은 이인제와 비슷한 논리로 자신의 '비정한 선택'을 옹호할 수 있을까. 머 이런 생각 말입니다. 물론 김민석이 이인제만큼 뻔뻔한 정치인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김민석이 정치를 계속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뻔뻔해야야 할 것이고, '비겁한 선택'이었다는 비판의 포화를 빠져나올 수 있는 적절한 명분과 논리를 만들어야 할 것인데, 그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 하는 데 있겠지요.


2. 지난 토요일 이회창 후보 편을 보다가 그가 좀 안스러웠습니다. 정치에 입문한 지 6년 만에 능구렁이같은 노정객으로 변해 있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고나 할까요. 적어도 6년 전, 그는 '대쪽판사'라는 거대한 산과 같은 이미지의 신인 정치인이었습니다. '대쪽'이라는 이미지는 그가 가진 다른 결점 모두를 한꺼번에 다 아우러서 가려버릴 정도로 큰 역할을 했었지요.

지난 대선에 패배한 후, 절치부심 끝에 그는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의 총재로, 그리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다시 우리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 나라를 5년 동안 안심하고 맡겨도 좋을만큼 국가경영 철학이나 소신, 그리고 비전을 품은 '대쪽 정치인'이 아니라 외부적 효과와 유착된 유력 언론의 온실 속에서 한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소심한 정치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집중력과 논리력, 그리고 내재된 학습력을 요구하는 패널들의 질문에 당황하면서 얼버무리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을 뿐만 아니라 민심 현장에서 뱉어냈던 '공약'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공약을 말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패널들의 질문을 아예 원천봉쇄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게 지난 5년을 절치부심하다가 원내 과반수를 점유한 제 1 야당 총재의 자격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선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TV토론을 기피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군복무과 관련한 어떤 질문에도 자유롭지 못하고 식은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내건 공약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까지 노출시켜버렸습니다.

이런 상태로라면, 현행 선거법 상에 규정된 2~3회의 TV토론 만으로도 그의 '진가'는 국민앞에 충분히 공개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계에 이른 그의 지지율도 그 때쯤 부터는 내려가는 길로 방향을 잡지 않을까 싶습니다.


3. 김영삼, 김대중 이 두 사람의 전직 대통령은 그들의 실패와 별개로 국민들의 뇌리와 역사에 깊게 남겨질 것입니다. 역사에 남겨질 몫은 사학자들의 몫이 클 것이기에 별도로 접어두기로 하고, 국민들의 뇌리에 남겨질 부분에 대해서만 간단히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맹렬히 항거해 온 대중정치인들이었습니다. 수십만 명에서 백만명에 이르는 군중들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할 줄도 알았으며, 위기 상황에 몰릴 때에는 20여 일이 넘는 기간 동안의 단식 투쟁을 통해, 그리고 망명 활동을 통해, 그리고 투옥을 마다하지 않고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를 대변해서 독재정부와 싸워왔습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들의 기개와 투쟁에 많은 국민들은 감동을 하고, 그들을 우상으로까지 여기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정치인! 바로 이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지요. 이 두 사람 이후로 우리는 감동과 기쁨을 선사하는 그 어떤 정치인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지 못했습니다.

노무현의 등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가 지난 2000년 총선에서 보궐선거로 당선된 안정된 정치기반인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 대부부의 사람들은 그를 만류했습니다. 뻔히 보이는 '사지'로 들어가는 그의 등을 대체 누가 떠밀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묵묵하게 그 길을 가고, 또 다시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그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지요. " 부산을 원망하지 않습니까? "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이런 대답은 감동적이었지요. 그의 이런 대답에 그에게 투신한 젊은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감동'이란 이렇게 사람을 소리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작은 힘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작은 힘이 뭉쳐서, 지금 그를 대통령을 만들려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정치인 노무현... 김영삼과 김대중 이후의 정치 지형에 그는 매우 의미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번 겨울에 승리를 한다면, 이 나라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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