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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706 vote 0 2019.08.01 (16:56:47)


    연역하는 방법


    나는 원래부터 연역했다. 사람들과 뭔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여긴 것은 일곱 살쯤이다.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아홉 살 때 국어사전찾기를 하다가 중요한 단서를 포착했다. 그때부터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모아온 것이 구조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만 다를 리가 없다.


    사실은 다들 연역한다. 인간의 뇌구조가 연역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그대로 연역이기 때문이다. 수학적 귀납법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것도 사실은 연역논증이다. 나무위키에 나온다. 귀납은 가설을 세우고 학습을 하는데 필요한 수단이지 근본 지식의 생산방법이 아니다.


    귀납은 연역에 쓰이는 도구인 것이다. 연역과 귀납 그리고 연역적, 귀납적은 다르다. 용어의 혼선에 따라 귀납적 접근법을 그냥 귀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연역이다. 확률을 쓰는 방식을 귀납이라 하지만 그 확률을 만든 수학이 연역이므로 연역이다. 


    귀납은 확산이고 연역은 수렴이다. 이건 감각적인 것이다. 위하여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거부감이 든다. 확산방향이다. 짜증나잖아. 의하여는 필연이다. 반드시 그렇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 수렴방향이다. 명쾌하잖아. 의하여를 따라가면 연역이다.


    그림으로 치면 소실점이다. 한 점에 모아져야 한다. 딱 봐도 아니잖아. 소실점이 안 맞는 그림을 보면 속이 거북하지 않은가? 인간의 눈이 하나이므로 피사체도 하나여야 한다. 사람의 눈은 동시에 여러 가지를 본다. 개도 보이고 고양이도 보인다. 아니다. 한 컷의 이미지다.


    개나 고양이는 2차적으로 해석된 것이다. 사람의 눈동자가 하나이므로 이에 대칭된 시야도 하나여야 한다. 소실점이 안 맞는 그림을 보면 뇌가 무의식적으로 소실점을 찾으려고 한다. 원근을 맞추려고 한다. 멀미가 날 것 같지 않은가? 과거 싸이월드 초기화면이 그랬다.


    이모티콘을 팔아먹으려고 실내공간처럼 만들었는데 속이 거북해서 싸이월드를 이용할 수 없었다. 원근이 있으면 이모티콘을 붙이는 위치에 따라 커지거나 작아져야 한다. 그게 복잡하니까 원근을 없앤다. 게임화면도 원근이 없는 경우가 많다. 원근을 없애니 작아진다.


    맵이라고 하는 게 작아져서 지도가 되어버렸다. 웅장한 느낌을 구현할 수 없다. 인간은 시야가 워낙 넓기 때문에 모니터 세 개를 붙여도 당해낼 수 없다. 박진감을 느끼려면 그림이 커야 하는데 말이다. 슈팅게임에 원근을 부여하니 멀리 있는 표적이 작아져서 잘 안 보인다. 


    여러 가지로 딜레마가 있다. 영화라면 스크린의 상을 모아주는 것은 필름이다. 정확히 말하면 필름 뒤의 광원이다. 광원을 움직이면 영상은 덩달아 이동한다. 이건 강력하다. 필름의 위치를 움직여도 변화가 있지만 작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나오는 3일치의 법칙이다. 


    3일치는 사실 필요없고 하나의 사건이라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옴니버스가 되면 긴장감이 떨어진다. 천일야화나 데카메론이나 손오공이나 서유기나 이런 것은 옴니버스다. 조선시대 군담소설도 하나의 강력한 중심주제가 없이 자잘한 에피소드를 나열시켜 놓고 있다. 


    세익스피어 문학에 있는 것이 거기에 없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결정적인 의사결정 장면에 모아져야 한다. 옆으로 가지를 치지 말고 원점으로 끊임없이 돌아와야 한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뻗어 나가 산만해질 때 화가 나잖아. 재미가 없잖아. 짜증이 나잖아. 


    연역한다는 것은 계에 잡아 가둔다는 것이다. 그럴 때 집중된다. 긴장한다. 쾌감이 느껴진다. 좋잖아. 일대일로 맞대응하기 때문이다. 내가 틀면 상대도 튼다. 내가 움직이면 상대도 반응한다. 그럴 때 인간은 긴장한다. 접점이 있기 때문이다. 확산방향이면 그 접점이 없다.


    허전하다. 나는 느낌으로 판단했고 언제나 맞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틀렸다. 깨달음이 좋고 명상이 좋은 것은 쾌감 때문이다. 쾌감을 따라가면 그곳이 정답이다. 허공에 뜬 것처럼 발밑이 허전하면 틀린 거다. 상대와 맞대응이 안 되고 라인이 끊어지면 허전하다.


    톱니가 맞물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발밑에서부터 머리꼭지까지 차오르는 충일감이 느껴져야 한다. 수렴방향이라서 한 점에 모아져야 나와 일대일이 되고 그럴 때 뇌가 긴장하고 에너지가 솟아나고 의욕이 샘솟고 원기가 왕성해진다. 기분이 좋아지는 거다. 


    그래서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이다. 그런 수렴구조가 없으면 졸려서 잠이 들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고 생각하면 이미 틀렸다. 필연의 구조 안에는 선택지가 없다. 방향이 맞으면 모두 맞고 방향이 틀리면 모두 틀어진다.


   인간의 뇌는 원래 연역하게 되어 있다. 단지 자신이 모를 뿐이다. 뭔가 산만하게 흩어지면 나와 일대일로 붙는 라인이 끊어져 불쾌감과 어색함을 느끼고 반대로 하나의 중심주제로 모이면 나와 일대일로 붙는 라인이 예민해져서 쾌감을 느끼고 편안한 느낌이 들면 연역이다. 


    언어는 이다/아니다, 있다/없다, 같다/다르다,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를 순서대로 판단한다. 연역한다는 것은 반드시 이 순서로 가는 것이다. 그 반대로 가면 귀납이다. 이다가 먼저라야 한다. 맞다가 앞에 나오면 일단 틀렸다. 맞다는 직접 맞춰본 건데 누가 맞춰봤지?


    사과가 하나 있다. 이것은 사과이다 하고 말할 수 있다. 이다 나왔다. 근거는? 전에 사과를 본 적이 있다. 믿을만한 사람이 사과라고 알려주었다. 즉 이미 사과라고 판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이다는 확정해 놓고 들어간다. 문제는 다음 상황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사과를 먹을 것인가? 팔아치울 것인가? 훔칠 것인가? 수확할 것인가? 던질 것인가? 던지려면 질량을 판단하고 수확하려면 소유권을 확인하고 훔치려면 망을 보고 팔아먹으려면 고객을 확보하고 먹으려면 과도로 깎는다. 다음 단계의 대응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있다/없다 판단이 요구된다. 그 사과는 사실 트럭에 실린 채 지나가는 사과였다. 그 사과는 지금 없는 것이다. 그 사과는 사실 그림 속의 사과였다. 역시 눈앞에 없는 것이다. 사실은 이야기 속의 사과인데? 없다. 과연 사과가 확실히 눈앞에 있다면? 손으로 만진다.


    여기서 같다/다르다가 판정된다. 과연 만져보니 썩은 사과였다. 분명히 사과이다. 그리고 확실히 여기에 사과가 있다. 정말 있구나. 그런데 썩었다. 그래도 먹을까? 여기서 옳다/그르다가 판명된다. 그리고 직접 먹어봤더니 과연 맛있는 사과가 맞다/틀리다로 판명이 된다.


    맞다는 맞췄다는 건데 접촉했다는 말이다. 접촉했다면 굉장히 진도를 나간 것이다. 여친과 데이트를 하는데 처음부터 접촉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맞다/틀리다를 판정할 수 없다. 여장남자일지도 모르잖아. 레즈비언인데도? 비구니 스님인데도? 맞추려다가 싸대기 맞는다.


    맞추는 행동은 쌍방의 동작이 들어간 것이다. 혼자 못 맞춘다. 이다, 있다, 같다, 옳다, 맞다는 내가 사과 속으로 침투해 가는 정도를 반영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순서대로 행동한다는 거다. 사과의 사정이 아니고 내 사정이다. 사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것이다. 


    사과가 있다는 건 나의 있음에 사과가 일대일로 대칭된다는 거다. 즉 나의 이다/있다/같다/옳다/맞다에 사과가 대응하는지 확인해서 맞네!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맞다로 갈 수 없다. 맞춰보지 않았으니까. 영화 속의 사과처럼 사과가 있는데 손으로 만지려 하면 사라진다. 


    그림자였다. 어쩔 거냐고? 거기에 실물이 있는지 확인이 먼저다. 내가 내다. 내가 있다. 내가 같다. 내가 옳다. 내가 맞다를 전제로 제출하고 거기에 사과가 대칭되어 따라가는 것이다. 사과의 이고, 있고, 같고, 옳고, 맞고는 나의 이고, 있고, 같고, 옳고, 맞고를 복제한 거다. 


    내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해놓고 들어간다. 전제가 되는 지식을 확보해놓고 들어간다. 수학이라면 1을 먼저 정해놓고 들어간다. 다음 이미 확정된 1에 대칭시켜 2를 도출한다. 그러므로 1을 결정할 때 나머지 모든 숫자의 위치가 동시에 정해진다. 그러므로 오류가 없다. 


    마찬가지로 사과를 알 때는 먼저 나를 알고 들어간다. 내가 없다면 사과도 믿을 수 없다. 내가 꿈을 꾼다면? 꿈속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내가 내가 아니므로 사과도 사과가 아니다. 내가 여기에 없다면? 사과를 먹을 수 없다. 내가 사과 속으로 침투하기는 불가능이다. 


    연역은 나의 존재를 사전에 확보하고 사과를 나에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색맹이라면? 곤란해진다. 이 경우는 에러다. 연역은 프로토콜을 사전에 공유하는데 그게 안 되면 틀어진다. 내게 혀가 없다면 사과가 맛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사과의 맛이 시고 달다면? 


    인간의 혀에 단맛을 느끼는 미뢰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사과가 달기 전에 인간의 뇌에 단맛이 있다. 근래에 밝혀졌지만 팬더곰은 사실 곰의 무리인데 어쩌다 고기맛을 느끼는 유전자를 잃어 먹었다고 한다. 상대가 한국말을 못 알아들으면? 이때 연역은 망한다.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자와 대화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강퇴 될 수 있다. 일단 한국말을 배우고 와야 한다. 내가 내라야 사과가 사과다. 어쩌면 우리는 색맹인 사람과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색맹이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환장한다. 


    소통은 실패다. 연역이 틀릴 경우는 상대방이 인간이 아닌 경우다. 외계인과 대화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나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데 상대방은 초음파로 사물을 본다면? 에러가 난다. 이런 연역구조는 자연법칙이며 인간의 뇌에 복제되고 사물에 복제해서 지식을 얻는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08.02 (04:58:21)

"내가 내다. 내가 있다. 내가 같다. 내가 옳다. 내가 맞다를 전제로 제출하고 거기에 사과가 대칭되어 따라가는 것이다. "

http://gujoron.com/xe/1110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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