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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787 vote 0 2017.10.23 (21:16:08)

     

    인간을 다시 보자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성에 지배되는 탁월한 존재가 아니라 본능에 지배되는 단순한 존재다. 이성에 지배된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낱낱이 규명해보면 그냥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복제한 것이다. 역사의 경험치가 누적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은 집단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의 행동을 복제한 셈으로 되었다.


    좋은 복제대상을 가지고 좋은 복제시스템을 꾸린 집단이 성공한다. 특히 유교주의는 탁월한 복제시스템이라 하겠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는 본받을만한 복제대상이 된다. 유럽이 지고 한중일이 뜨는 이유는 유교 전통의 한중일이 기독교 전통의 서구보다 더 복제를 잘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장점이다.


    일본은 봉건영주제 전통에 기반을 둔 복제구조가 있고 중국은 꽌시 시스템이 있지만 약하다. 일본은 불교에 빠져있고 중국은 도교와 공산주의에 빠져 있다. 한국이 촛불 민주주의로 진도를 빼는 것은 이런 점에서 더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의 약점은 본받을만한 좋은 복제대상이 없는 점이다. 영웅이 없다.


    그래서 노무현이다. 관우가 조조의 극진한 제안을 마다하고 유비를 따라 풍찬노숙에 나선 것이나 노무현이 확실한 종로 지역구 놔두고 부산의 사지로 내려간 것이나 같다. 우리는 복제할만한 좋은 모델을 얻었다. 이것이 인간의 백퍼센트다. 그동안 유럽이 앞선 것은 본받을만한 영웅이 유럽에 더 많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본받지 말아야 할 배신자가 많다. 중국은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우면 죽는 게 보통이다. 아니면 찬탈하여 본인이 왕이 되거나. 송나라의 명장 악비도 배신당했고, 몽골에 맞서 양양성을 6년간 사수한 여문환도 배신당했고, 누르하치를 죽인 원숭환도 배신당했다. 오죽하면 배신의 중국사라는 책이 있겠는가?


    인간과 동물이 구분되는 점은 각별한 복제능력에 있다. 동물과의 비교실험으로 밝혀졌다. 침팬지는 실험자가 먹이를 어디에 감추는지 유심히 살피지만 인간 아기는 아무 생각이 없다. 먹이를 획득하겠다는 이성적 목적은 없고 그저 모방의 즐거움에 취해 실험자의 무의미한 동작까지 그대로 흉내 내며 즐거워한다.


    인간 특유의 춤과 노래와 웃음과 눈물과 표정은 발달한 모방본능의 부산물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남을 따라 하다 보니 남에게 따라 하도록 요구한다. 표정을 지으며 그 표정을 따라 하게 한다. 그것이 점차 언어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행동복제는 표정에서 보디랭귀지로, 언어로, 도덕으로 발달하였다.


    인간은 선악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선은 집단의 양식을 복제하는 것이고 악은 집단의 양식과 충돌하는 행동이다. 선악개념은 결국 고도로 양식화된 행동복제다. 이성적인 근거는 없다. 많은 경우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선이 아니라 집단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선으로 치부된다.


    집단에 복종하면 선이고 집단을 거역하면 악이다. 그렇다면 그 집단은 옳은가? 옳은 집단에 복종해야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옳지 않은 집단에 복종하면 이지메나 왕따가 된다. 소집단에 복종하는 행동이 대집단의 방향과 어긋나게 된다. 작은 패거리 의리를 지키는 행동이 큰 인류 진보와 충돌하게 된다.


    인간의 비참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다. 맹목적으로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존재다. 한두 명이 바람을 잡으면 쉽게 넘어간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집단에 봉사한다. 남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우쭐대고 과시하다 보면 이미 자신은 몸과 정신은 망가져 있고 집단은 그 이득을 빼먹는다.


    그 집단은 가족이기도 하고 회사이기도 하고 국가이기도 하고 인류이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몸을 희생하고, 회사를 위해 몸을 다치고, 국가를 위해 몸을 죽이고, 인류를 위해 몸을 버린다. 그게 인간이다. 몇 마디 칭찬과 평판이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에 치여서 말이다. 혹은 신분이기도 하고 혹은 명성이기도 하다.


    궁극적인 단계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에너지 효율이다. 다만 그 에너지가 자연의 물리적 에너지가 아니라 의사결정 에너지라는 점이 각별하다. 인간은 그저 의사결정하기 쉬운 쪽으로 의사결정한다는 말이다. 남을 따라 하는 게 가장 쉬운 의사결정이다. 대부분 생각 없이 주변의 가까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게 지역주의, 인종주의, 차별주의다. 차별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의사결정하기가 쉽다. 포용은 어렵고 배제는 쉽다. 포용하려면 규칙을 새로 업그레이드해야 하지만 차별은 그런 학습과정이 불필요하다. 집단에 이질적인 존재가 들어오면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그 사람에 대해서 학습해야 한다. 흑인이 들어왔다.


    흑인의 눈빛을 읽고 흑인의 감정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흑인과 함께 생활해야 이게 된다. 이미 성인이 되었다면 죽을 때까지 안 된다. 사투리를 못 고치듯이 안 되는 거다. 포용은 어렵고 차별은 쉬우므로 인간은 차별을 선택한다. 그냥 흑인을 배제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정치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지지를 결정하기 쉬운 정당을 지지한다. 가르치는 것도 많고 배워야 하는 것도 많은 정당은 지지하지 않는다. 지지자노릇 하기 쉽지 않다. 의사결정스트레스 회피다. 의사결정은 서로 연동되어 있다. 이것을 이렇게 하면 저것을 저렇게 해야 한다. 벌써 골치가 아프다.


    연동되는 사항이 많으면 지지하지 않는다. 왜? 피곤하니까. 그렇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욕망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더 큰 심리적 억압을 회피하는 행동이다. 의사결정의 방해자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다. 돈으로 도망치고, 섹스로 도망치고, 쾌락으로 도망치고, 권력으로 도망친다.


    사실은 더 큰 억압과 트라우마로부터 비롯한 스트레스 회피행동이다. 인간은 결코 욕망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며 욕망은 본능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도덕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도덕은 선악구분이며 선악은 집단적 행동양식이며 집단에 인정받으려고 하는 게 선이다. 인간은 동시에 집단에 대항하여 독립한다.


    인간은 집단의 행동양식을 복제하는 한편으로 집단에 대항하여 독립함으로써 자기네 패거리의 긴밀한 집단을 조직하려고 한다. 대집단은 느슨하고 소집단은 긴밀하며 선은 느슨한 대집단의 행동양식이고 악은 긴밀한 소집단의 행동양식인 경우가 많다. 작은 패거리에 들려면 이지메와 왕따와 차별에 참가해야 한다.


    선악의 도덕적 구호는 허무하다. 집단에 드는 선과 독립하는 악은 인간의 두 가지 근본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합리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전략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합리적인 것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합리성은 목적을 따르며 인간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목적은 플러스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기피한다. 편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불편을 기피한다. 부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가난을 기피한다. 성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소외를 기피한다. 플러스는 후천적으로 학습된 양식이고 마이너스는 타고난 본능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강력하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플러스하면 환경과의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 새집을 사려면 헌 집을 버려야 한다. 적응의 문제가 생긴다. 인간은 환경과 긴밀하게 엮여 있으며 그러므로 마이너스로 통제된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대단한 야망보다는 허리를 꼬집는 부인이 더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성공한 사람은 트라우마가 있거나 콤플렉스가 있거나 동기를 부여하는 무언가 있는 법이다.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결혼하는 사람보다 불편한 집에 얹혀있기 싫어서 결혼하는 사람이 많다. 환경에 지배되는 측면이 의외로 크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야망이니 탐욕이니 희망이니 하지만 말만 그럴듯한 헛구호다.


    김근태의 희망은 유권자에게 먹히지 않았다.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도 먹히지 않았다. 반면 트럼프의 인종차별은 먹혔다. 마이너스 전략이 먹힌다. 왜? 인간은 환경과 엮여 있으며 그 환경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붕 떠 있는 것이며 긴밀하지 않으며 엮여있지 않다. 환경을 건드리는 전략은 성공한다.


    어떻게 환경을 극복할 것인가? 환경에 의존하기로 하면 차별이 먹히고, 보수가 먹히고, 텃세가 먹히고, 기득권이 먹히고, 진보가 진다. 진보는 미래를 말하고 보수는 현재를 말한다. 현재가 더 긴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멀리 있는 금보다 가까이 있는 은을 취하는 어리석은 존재다. 장기전을 못하는 단세포 동물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는 다르다. 첫째, 복제대상이 있고, 둘째, 복제구조가 있을 때다. 노무현은 복제대상이고 노빠세력은 복제구조다. 시스템에 올려 태우기다. 복제대상을 선발하기 어렵고 복제구조를 설치하기 어려울 뿐 시스템이 돌아가면 무섭게 진보한다. 왜? 인간은 타인을 복제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실패는 환경의 얽힘 때문이다. 똑똑한 재원이라도 불량한 환경 속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 환경을 끊어내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강한 에너지를 줘야 한다. 에너지는 통제가능성이다. 통제가능성은 방향성에서 비롯된다. 방향성은 양자화로 이루어진다. 계가 설정되고 내부가 균일해야 하며 축이 설정되어야 한다.


    구조적 불안정성이 갖추어져야 하고 안정을 지향해야 한다. 이런 많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특별한 구조가 에너지를 태운다. 에너지를 태우면 환경에 휘둘리는 보수본능을 극복한다. 죽음조차 극복한다. 이성적으로 변한다. 하던 대로 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탑포지션을 잡았을 때 에너지는 충만한다.


    초인이냐 촌놈이냐다. 니체의 초인은 권력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야심을 품은 사람이다. 그 야심은 플러스다. 아뿔싸! 인간은 탐욕에 지배되는 동물이 아니다. 탐욕타령은 무뇌진보가 상투적으로 쓰는 언어에 불과하다. 촌놈이 초인을 이긴다. 촌놈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이다. 시스템에 들지 않고 기웃거린다.


    촌놈이 에너지가 강하다. 촌놈은 고향을 잃은 마이너스에 지배된다는 점이 다르다. 총독부 시절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 붙여 놨다는 얼간이가 권력의지의 초인 안철수라면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큰형을 교통사고로 잃고 고향을 떠나와 두리번거리는 촌놈 노무현이다. 이는 다른 거다. 진짜는 에너지 낙차다.


    자신의 포지션을 전략예비로 돌려야 강한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는 기운, 주체, 존엄, 열정, 패기, 호연지기, 군자, 초인, 근원의 생명력, 집단에서의 포지션, 역할과 신분이다. 이런 것이 사람을 강하게 한다. 무언가 되겠다는 식은 다른 사람이 물어보니까 둘러대는 말에 불과하다. 안철수는 그냥 즐기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안철수의 야망은 그런 말 하면 다른 사람이 주목하더라는 경험에서 얻은 꼼수다. 야망은 인간을 움직이지 못한다. 신념도 인간을 움직이지 못한다. 식욕과 성욕도 인간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것은 핑계다. 사실은 식욕으로 도피하고 성욕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집단과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타자성을 깨닫고 대표성을 획득하여 주체성으로 나아갈 때 인간은 에너지를 얻는다. 그것은 집단과의 관계재설정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다. 어느 시점에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기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강력해진다. 사랑도 출세도 지위도 독립에 필요한 수단에 불과한 거다.


    가족의 구성원이던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족을 조직하는 거다. 이왕이면 더 크고 탄탄한 가를 조직해 보겠다는 거다. 그러므로 필연 인간은 가와 틀어진다. 본가와 틀어져 출가한다. 그것이 타자성의 깨달음이다. 무엇으로부터 가를 조달할 것인가? 대표성이다. 가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주체성이다.


    삶은 타자성에서 대표성으로 그리고 주체성으로 나아가는 여행이다. 타자성을 깨달았지만 아직 대표성을 얻지 못하고 애매한 상태에 있을 때 에너지는 극대화된다. 집을 나왔지만 아직 자립을 못 했을 때 인간은 도원결의하여 내 한 몸을 내던진다. 그것이 촌놈정신이다. 양자화된 상태다. 입자화되지는 않았다.


    입자화되면 이미 자리를 잡고 텃세를 부리고 에헴 하고 헛기침하며 뒷짐 지고 팔자걸음 걸으며 빌어먹을 향원노릇을 하고 있다. 가부장으로 만족하고 승진에 만족하고 기득권에 만족하고 자녀의 성적에 집착하며 뽐내는 보수꼴통이 되어 있다. 패기도 잃고 기운도 잃고 생명력도 잃고 사랑도 잃고 진부해져 있다.


    방법은 게임체인지다. 작은 게임 버리고 큰 게임 얻어야 한다. 가족게임 버리고 인류게임 얻어야 한다. 고향친구들 앞에서 우쭐대려는 생각 버리고 인류 앞에서의 부끄러움 깨달아야 한다. 마침내 신과의 일대일까지 나아가기다. 인간은 별수 없이 환경에 지배되는 나약한 존재다. 자유의지는 게임의 선택뿐이다.


    인간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지만, 게임을 선택할 수 있다. 운명을 뛰어넘어 자신의 소속을 정할 수 있다. 가족인간이 되든지, 회사인간이 되든지, 국가인간이 되든지, 인류대표가 되든지 자신이 결정하기 나름이다. 작은 패거리에 만족하고 추태 부리며 낄낄대든지 아니면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는 큰일에 나서든 지다.


    답은 깔때기다. 자신을 깔때기 안으로 몰아넣고 조이면 강력해진다. 그러려면 먼저 풀어놓아야 한다. 자유를 줘야 한다. 그 전에 존엄해야 한다. 만날 사람을 만나야 한다. 만날 시점을 만나야 한다. 만날 환경을 만나야 한다. 하필이면 그 공간에서, 하필 그 타이밍에 하필 그 사람을 만났다면 당신은 매우 강력해진다.


    구조 안에서 축과 대칭이 작동하면 부르는 소리 있으니 응답하면 비로소 그대가 된다. 그대는 온전히 그대 자신이 된다. 의사결정할 수 있다. 인류의 편, 진리의 편, 역사의 편. 진보의 편에 들어야 한다. 거센 물결 흐름 속에 그대의 몸을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 그리고 장기전을 꾀하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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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김미욱

2017.10.23 (22:49:44)

따가웠을지도 모를 만인의 시선에도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대표자로서의 완전성을 향한 복제를 거듭한, 죽음으로써 이 나라의 정치적 방향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성숙한 미래도 앞당긴... , 우리에겐 노무현이란 아름다운 정치적 자산이 있습니다. 투박한 얼굴 속에 깃든 순수한 표정이 정말 그립습니다.
[레벨:30]솔숲길

2017.10.24 (07:00:05)

김대중은 존경하고 

문재인은 좋아하지만 

노무현은 사랑하지요. 

[레벨:5]희정

2017.10.30 (12:16:55)

이 글 하나로 철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모두 한방에 해결이오.

우주진리 찾기 전에 우리자신 인간부터 알면 안 밖으로 다 알게 되는 것.

우리정치와 정치인 몇 분에 국한시켜 볼게 아닌것 같소.

여기에 자주 들어오긴 하지만 글은 한꺼번에 보는지라 뒷북이 되어 유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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