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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060 vote 0 2010.01.22 (12:52:32)

지성과 깨달음

‘지성’과 ‘깨달음’은 본질에서 같은 개념이다. 깨달음을 부정하면서 지성을 긍정하거나, 지성을 부정하면서 깨달음을 긍정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하나를 부정하면 둘 다 부정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추상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먼저 국어를 옳게 배워야 한다. 깨달음 혹은 지성에 대하여 많이 잘못 알려진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상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이다.

한의사들이 쓰는 몸이 ‘덥다, 차다’는 표현이나 민간의약에서 쓰는 ‘몸에 좋다’는 표현, 종교인들이 쓰는 ‘은혜받는다’거나 ‘복받는다’거나 하는 따위는 엄밀한 의미로 볼 때 비문이다. 언어가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정확하게 같다. UFO, 외계인, 초능력, 기(氣) 따위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핵심이 빠져있다. 주어나 목적어가 빠져 있거나 동사에 함부로 의미가 부여된다. 무리가 있다.

불성실한 언어사용이다. 언어는 원래 불완전하므로 상대가 말귀를 알아듣는다면 대충 쓸 수도 있다. 깨달음이 있으면 언어가 부실해도 통한다. 아기와 대화한다면 말이 틀려도 엄마는 바로 알아듣는다.

그러나 언어 자체가 기능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언어는 보조할 뿐 소통의 본질은 깨달음이다. 언어의 많은 부분이 실은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방해할 목적으로 고안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쓰는 수법이 있다. 온갖 차별과 편견의 딱지들. 수구들이 쓰는 ‘좌빨’ 이런 표현은 애초에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과 판단을 차단할 목적으로 고안된 난폭한 언어들이다. 언어에 함정이 있다.

‘깨달았다’는 식의 동사라면 곤란하다. 주어가 있어야 한다. 지성과 깨달음은 같다. ‘지성했다’고 말하지 않으니 ‘깨달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물론 개별사실에 대해서는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경우도 주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은 개별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보편원리로서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저울과 같다. 요는 그 저울이 실제로 있느냐다. 저울은 명사다.

동사로 말하면 곤란하다. 주어인 ‘저울’을 생략하고 ‘저울에 달았다’는 의미에서 ‘달았느냐’고 표현하면 곤란하다. 한국어 문법 특유의 주어생략에 따른 오류다. 옳은 저울이 있는냐가 중요하다.

‘나는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달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저울은 어디갔지? 그 저울에 무엇을 달았지? 문장 자체가 틀려먹은 것이다. 많은 사람이 주어를 생략한 채 말한다. 우스꽝스럽다.

‘깨달은 사람’ 혹은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인간이 지성인과 비지성인으로 나눠지지 않음과 같다. 지성 자체가 존재할 뿐 사람이 지성인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 나왔다고 지성인 되는 것은 아니다. 전혀 상관이 없다. 깨달음은 저울이다. 저울은 판단과 결정에 사용된다. 운전사에게는 핸들이고, 목수에게는 톱과 망치고, 무사에게는 칼이고, 포수에게는 총이다.

본질은 과연 그것이 진짜배기 칼이고 총이냐다. 무사라든가 포수라든가 하는 신분은 사회가 편의적으로 부여한 이름일 뿐 어린이라도 칼을 들면 자를 수 있고, 명박이라도 방아쇠 당기면 총알은 날아간다.

그러므로 무사는 없고 포수도 없다. 같은 맥락에서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은 사람은 없다. 지성은 있어도 지성인은 없다. 저울은 있어도 저울사람은 없다. 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저울이기 때문이다.

저울이 있으면 계량할 수 있다. 그러나 저울이 사람 봐가면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운전수가 아니라도 시동을 걸면 차는 간다. 직업 운전기사만 핸들 잡으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에게만 깨달음이 뇌 속에 숨어있는 것은 아니다. 지성인에게만 지성이 존재하여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지성과 깨달음은 실로 사람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여 있다.

운전수나 포수나 무사가 없어도 인간의 형편과 상관없이 차는 있고 총은 있고 칼은 있다. ‘나는 지성인’이라거나 ‘나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하는건 ‘나는 운전수’ 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사회적 의미는 있어도 본질적 의미는 없다. 차가 없는데 직업이 운전수면 뭐하냐고? 차가 있다면 직업이 운전수 아니라도 시동을 걸 수 있다. 저울이 있다면 누구라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다. 중요한건 제대로 된 저울이 있느냐지 그 저울이 누구 손에 들려 있느냐가 아니다. 지성이 존재할 뿐 지성인은 없다. 깨달음이 존재할 뿐 깨달은 사람은 없다.

물론 듣기 좋게 말해줄 수도 있다. 지성인이라고 말해줄 수 있다. 그건 호칭일 뿐이다. 임금을 황제라고 불러주면 입이 헤벌어져서 좋아한다. 그래봤자 진왕 정이나 나나 똑같은 벌거숭이 인간일 뿐이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듣기 좋게 말해줄 수도 있다. 사회적 기능은 있다. 그러나 동아리 안에서나 통하는 말일 뿐이다. 네 명의 동승자가 승용차를 타고 간다면 그 중에 운전수는 언제라도 한명이다.

그 한명의 직업이 운전수는 아니다. 그 차 안에 운전수는 있어도 운전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깨달은 사람은 있어도 깨달은 사람은 없다. 지성인은 있어도 지성인은 없다. 본질을 두고 말해야 한다.

본질은 지성 그 자체이며, 깨달음 그 자체이고, 저울 그 자체, 자동차 그 자체다. 지성이라는 저울이, 깨달음이라는 저울이 실제로 존재하여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옳게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가, 저울사라는 직업을 숭상한다. 저울을 모르니까 저울은 보지 않고 저울을 계량하는 사람 얼굴만 쳐다본다.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보는 격이다.

지성의 의미는 ‘독립적 인격’에 있다. 한 개인이 신(神)과 맞먹을 정도의 눈높이에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다른가? 지성은 학습되고 깨달음은 통한다.

인디언 추장에게도 지성은 있다. 전설적인 추장 시팅불의 인격자다운 태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인디언 추장은 학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지성은 다르다. 그러나 본질에서 동일하다.

정확히 같다. 무엇이 같은가? 포지션이 같다. 다만 그 포지션에 어떻게 도달하는가이다. 깨달음은 연역적 접근이고 지성은 귀납적 접근이다. 최고 포지션을 차지하고 그 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야를 얻는 것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에 꿰어내는 통짜덩어리 인식을 얻는 것이다. 아기는 아가라는 포지션에 익숙해 있다. 응석을 부린다. 문제가 발생하면 엄마를 찾는다.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깨달음이 요청된다. 그러나 어른이라도 종교에 의존하고 학계에 의존하고 국가나 제도, 시스템에 의존한다.

이성은 깨달음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자연의 법칙인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성이다. 그 합리성의 끝단에 자연의 완전성이 있고 그것이 인간 안에 반영되어 있다. 그것이 이성이다.

이성을 발동하여 자연의 합리성을 끝까지 추적하여 완전성에 도달하면 근원의 질서가 포착된다. 최고의 포지션에 도달한다. 깨달음에 도달한다. 선험적 사유를 통한 연역적 전개를 할 수 있다.

지성은 네트워크 개념이다. 한 개인의 지식은 의미가 없다. 지성인의 전 지구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지성이 의미를 획득한다. 골방에 들어앉은 샌님이 혼자서 지성인이라고 선언해봤자 의미없다.

어떻게 세계의 지성인이 연대할 것인가? 통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 깨달음이 있다. 보편성을 얻어 널리 통하지 않으면 단지 자기 전문분야의 극소수 전문가들만 폐쇄적으로 집합될 뿐이다.

진리의 보편성에 기반한 참된 지성인의 연대를 통한 세력화 그리고 문화의 주도, 문명의 방향성 제시가 아니면 안 된다. 폭넓은 소통이 따라야 하며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인간의 감추어진 저울이다.

오늘날 지성이 왜소해진 이유는 자기분야의 지식인끼리 모여서 동아리 안에서만 폐쇄적으로 대화한 결과다. 교수들은 교수들끼리 모여서 대화한다. 그런 식이라면 참된 지성의 성립은 불능이다.

교수들이 아는게 있나? 그들의 지식은 과거의 데이터를 축적한 것이다. 경제학 교수는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경영학 교수는 기업경영에 실패하고, 정치학 교수해서 대통령 된 사람 아직 없다.

야노마미 인디언에게도, 티위 오리진에게도 이뉴이트들에게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열린 지성이다. 분야가 다르고 환경이 달라도 어떤 일의 전체과정을 경험한 베테랑이라면, 달인이라면 바로 통한다.

눈빛만 봐도 통한다. 신과도 통한다. 자연과도 통한다. 깨달음으로 가능하다. 통할 때 지성인의 연대와 세력화, 방향제시가 가능해진다. 60억 인류를 태우고 가는 대승이라는 큰 배의 브리지가 탄생한다.

깨달음은 서구의 닫힌 지성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열린 지성으로 이끌어 가는 기관차다. 지성과 깨달음은 동일한 산의 정상을 다른 방식으로 오르는 것이다. 깨달음은 위에서 헬기타고 내려온다.

지성은 배낭매고 아래로부터 등반한다. 깨달음은 쉽게 오르지만 그 산이 소승의 작은 산일 확률이 높다. 지구촌 문제를 걱정하는 대승의 큰 배가 아니라 자기 개인 신상문제에 집착하는 소승의 배가 되기 쉽다.

지성은 어렵게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오르기는 하지만, 자기가 올라온 등반코스만 아는 좁은 지성, 닫힌 지성일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지성은 널리 연대하여 열린 지성으로 비약해야 의미를 획득한다.

지성이 널리 연대하려면 대중과 소통해야 하고 소통하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 깨달음이 소승적 태도를 극복하고 대승의 브리지를 차지하려면 지성적 태도가 요구된다. 세계를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음 : 닫힌 지성≫열린 지성
지성 : 소승적 깨달음≫대승적 깨달음


http://gujoron.com


[레벨:7]꼬레아

2010.01.25 (16:02:18)



지성도 있어야 하고
깨달음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세계를 통찰해야 하고
휴~

갈 길은 멀지만 가는 거지 뭐 !
인생 뭐 있어 ?
걍 가는 거지
.
호시우행 !
.

.
.

동렬거사 어록


" 지성이 널리 연대하려면 대중과 소통해야 하고 소통하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 !  "
" 깨달음이 소승적 태도를 극복하고 대승의 브리지를 차지하려면 지성적 태도가 요구된다 !  "
" 세계를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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