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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484 vote 0 2009.11.20 (15:28:59)


[알파와 오메가]

한강은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서해바다로 흘러가고, 낙동강은 황지에서 발원하여 남해로 흘러든다. 우리네 인생길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여기서 살펴야 할 점은 ‘온 곳’이 ‘가는 데’를 결정한다는 점.

연동되어 있다. ‘이것이 이렇게’ 되면 ‘저것은 저렇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고 저것을 안다. 윗물을 보고 아랫물을 안다. 이를 ‘A면 B다’의 논리칙으로 나타낼 수 있다. 만유를 풀어내는 근원의 열쇠다.

인생에서 풀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 둘이 있다.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 둘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두 질문은 연동되어 있다. ‘내가 누구냐’에 따라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가 결정된다.

‘내가 누구냐?’가 검룡소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서해바다이다. 이 원리 사회로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따라 ‘이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진보해야 하는가?’가 결정된다.  

논리 - ‘A면 B다.’ -> ‘상부구조 A’에 ‘하부구조 B’가 연동된다.

인생 - ‘내가 누구냐’에 따라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결정된다.

사회 - ‘인간은 무엇인가’에 따라서 ‘인류문명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옛사람의 답은 뻔했다. 신분에 따라 결정된다. ‘양반이냐 상놈이냐’에 따라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할지가 정해진다. 태어날 때 부터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는 바른 태도가 아니다.

철학자들이 그 물음에 답해야 했다. ‘양반, 상놈’으로 계급을 가르는건 무성의한 답변이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즉 보편적 상식에 맞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칸트는 이성을, 샤르트르는 실존을 제시했다.

철학이란 본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된 것이다. 그것은 ‘선’과 ‘악’의 문제다. 옛 사람들은 선과 악의 원소가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선한 이의 몸을 해부해 보면, 몸 속에 녹아있는 많은 선의 원소를 발견할 수 있고, 악한 자는 어디서 악한 기운을 들이마셔서 악의 원소가 몸에 배었다고 믿었다. 그게 뭔가? 그것은 아마 영혼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생명의 원소’일 터이다. 태초에 브라흐마 신이 진흙에 콧김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할 때 불어넣은 신의 숨결일 것이다.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신비물질이 아마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콧김으로 이루어진 성령(Holy Spirit)이 그것이리라. 그러나 신비물질은 과학자들이 밝혀낸 106가지 원소 중에 없었다. 계급과 신분의 차별을 정당화 하는 어떤 논리도 과학에 의해 부정되었다.

만약 브라흐마 혹은 하느님이 진흙에 성스러운 콧김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 들어간 콧김이 많고 적음에 따라 영혼이 맑거나 탁할 것이다. 영혼이 맑으면 선하고 탁하면 악할 것이다.

신의 콧김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고, 따라서 계급에 따라, 신분에 따라 선과 악을 갖다대는 논리는 부정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회에 선을 권장하고 악을 배척하는 논리를 유도할 것인가?

선을 권장하고 악을 배척함은 사회의 윤리, 도덕, 인권 등의 고결한 가치를 담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논리장치다. 그런데 신비한 연금술로 알아내야 할 영혼의 원소, 생명물질 따위는 없다고 한다.

영혼이 맑다거나 영혼이 탁하다거나 하는 따위는 없다고 한다. 칸트의 이성은 그러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샤르트르의 실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 패러다임의 문제가 얽혀있다.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잠재의식 개념과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 그리고 유전학의 성과가 나오면서 철학자들은 절망에 빠졌다. 칸트의 이성을 정당화할 패러다임은 무너졌다.

영혼의 존재와 영혼의 원소, 생명물질, 신의 콧김, 동양의 기(氣), 성령의 존재를 긍정해야 이에 연동시켜 사회의 윤리, 도덕, 선(善), 성(聖), 인권, 이성이 긍정될텐데 하나가 부정되니 패러다임이 통째로 무너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철학자는 도무지 무슨 논리로 사회에서 악을 배척하고 선을 권장할까? 철학은 막다른 길에 몰렸다. 이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고, 샤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다.

니체의 언명은 ‘구패러다임’에 대한 사망선고다.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배척하는 논리로 기능하는 영혼, 성령, 천사 개념이 죽은 것이다. 이에 칸트의 이성도 같이 죽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었다. 구 패러다임은 인간 밖에서 찾는다. 신, 천사, 영혼, 내세, 천국은 모두 인간의 삶 바깥에 있다. 밖에서 답을 찾지 못했으니 삶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생의 철학 나왔다.

니체는 욕망을 긍정했다. ‘권력의지’ 개념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는 ‘악을 배척하고 선을 권한다’는 구철학의 기본 패러다임을 깨뜨린 것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려는 욕망이 있다. 권력의지다.

이것이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나는 누구인가?’의 답이다. 삶을 긍정하고 권력의지를 실천하는 것이 ‘어떻게 살것인가?’의 답이다. 그러나 불완전하다. 이 논리는 엉뚱하게 히틀러가 전쟁논리로 써먹었다.

히틀러는 이 논리로 독일인들에게 ‘권력의지’가 아닌 ‘노예의지’를 끌어냈다. 그들은 자청하여 히틀러의 노예가 되었다. 니체의 생각과는 반대로 된 것이다. 이는 니체의 답이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권력자에게만 권력의지가 되고 대중에게는 노예의지로 된다면 보편적이지 못한 것이다. 샤르트르의 ‘실존’ 개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근본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다.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밥으로 살고 사회는 선(善)으로 산다. 그 선을 어디서 끌어낼 것인가? 신의 콧김, 성령, 생명의 원소, 영혼을 만드는 신비의 물질,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 따위는 모두 부정되었다.

대신 DNA, 집단 무의식, 생존경쟁, 잠재의식, 욕망 따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 도덕, 인권, 진보, 합리성의 개념들은 어디에 놓을 것인가? 포지션이 없다.

다 필요없는가? 이 사회는 그냥 막연한 생존경쟁의 장이고, 정글의 법칙에 지배되고, 윤리나 도덕 따위는 약자의 변명에 불과한 것인가? 너죽고 나죽고 막장경쟁 해볼까? 그러다 핵전쟁으로 다 죽고 말지.

그러한 혼란과 좌절을 정리해 보려는 고민에서 칸트의 이성이 나온 것이다. 니체와 샤르트르의 전면부정과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이 모색된 것이다. 결론은 죽음에서 삶으로의 방향전환이다.

서구인들이 숭상한 천국, 내세, 영혼의 개념은 모두 죽음과 가깝다. 삶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생의 철학이고 그래서 실존이다. 그러나 본능, 욕망, 잠재의식, 무의식, 부조리가 충분한 답이 될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본능이 이성에 앞서고, 욕망이 도덕에 앞서고, 잠재의식이 합리성에 앞서고 무의식이 공동선에 앞선다. 그래서? 철학자는 강의실에 폭탄을 던지고, 폭포에서 몸을 던져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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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存在)는 존(存)과 재(在)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존재의 원초적인 불완전성이 자리하고 있다. 존재가 믿을만한, 마음 든든한, 굳건한 것이라 여긴다면 착각이다. 존재는 이슬같고 그림자같다.

존(存)은 명목이요 재(在)는 기능이다. 하나의 존재는 반드시 명목과 기능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존재가 무너진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많은 불완전한 존재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목만 있고 기능이 없는 존재가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이름만 존재하고 실체는 사라졌다. 기능이 있는데 명목이 없는 존재도 있다. ‘하룻밤 커플’처럼 불완전한 사랑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다. 그림자는 빛에 딸려있어서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진다. 명목과 기능이 호응할 때 하나의 완전한 존재자가 된다.

명목은 상부구조 A, 기능은 하부구조 B가 된다. 명목이 원인 기능이 결과다. 명목을 묻는 것이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이다. 기능을 묻는 것이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

전자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이며 후자는 그렇게 찾아낸 나를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실현하는 길이다. 나를 찾지 못한 채로 무작정 실현하려 하면 욕망채우기에 급급하다 파멸당하고 만다.

무턱대고 ‘권력의지’를 실현하려다가 타인의 ‘권력의지’와 충돌하여 결국 파멸하게 된다. 운좋게 승리한다 해도 요행수에 불과하다. 승리의 영광은 짧고 결국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사회적 실현을 포기한 채 ‘나를 찾기만’ 한다면 산 중의 도인처럼 공허해진다. 둘은 호응되어야 한다. 먼저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 다음 세상에 나아가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 나다움을 창조해야 한다.

전자는 자동차의 제작이요 후자는 자동차의 운행이다. 명목을 생략하면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가 된다. 니체의 권력의지를 따르면 자동차를 꿈꾸다가 결국 자전거로 추락하여 실패하고 만다.

후자를 생략하면 전시용 자동차가 된다. 굴러간다고 다 차가 아니요, 엔진을 달았다고 다 차가 아니다. 진정한 자동차는 엔진을 달아야 할 뿐 아니라 도로 위에서 실제로 굴러가야 한다. 사용되어야 한다.

[원인-상부구조-왜 사는가?]

● 구조
● 깨달음
● 소통
● 의식의 공유
● 이상주의

[결과-하부구조-어떻게 살것인가?]

● 미학
● 완전성
● 통짜덩어리 인식
● 입체적 관점
● 미학적 스타일

전자는 세상이라는 무대에 올라서는 과정이며 후자는 그 무대에서 내 안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먼저 이상주의를 얻어야 하고 다음 창의적인 미학적 스타일로 펼쳐내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 구조어 사전 ***

‘A면 B다의 논리칙’

근원의 논리는 인과율이다.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가 'A면 B다‘의 논리칙을 이룬다. 원인(A)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B)가 있다. 둘은 마주보고 대칭되어 하나의 세트로 붙어있다. 뗄레야 뗄 수 없다.

여기서 3단논법이 유도된다. 3단논법은 A와 B 사이에 ’=‘를 둔다. 그러나 자연에 과연 ’=‘ 뿐일까? ‘⊃’도 있다. 구조론으로 보면 A와 B 사이에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따라 다섯 판단이 있다.

이다/아니다, 있다/없다, 같다/다르다, 옳다/그르다(하다/못하다), 맞다/틀리다의 5항을 결정한다. 각각 정의, 분류, 비교, 연산, 측정이다. 여기서 ‘정의’쪽이 상부구조 곧 원인이고 ‘측정’쪽이 하부구조 곧 결과가 된다.

인과율에 따라 결과는 원인에,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에 연동되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항상 원인이 먼저고 결과가 나중이다. 자연수라면 이다/아니다 판단으로 자연수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다음 있다/없다 판단으로 분류할 수 있고, 같다/다르다 판단으로 비교할 수 있고, 옳다/그르다 판단으로 연산할 수 있고, 맞다/틀리다 판단으로 측정할 수 있다. 측정에 성공하면 하나의 공식이 완성된 것이다.

여기서 옳다/그르다는 표현은 의미가 모호하므로 (하다/못하다)로 대체될 수 있다. 맞다/틀리다가 고착된 절대값의 옳고 그름을 의미한다면 옳다/그르다는 진행상태에서의 유동적인 옳고 그름을 의미한다.

어원으로 보면 ‘옳다’는 ‘올+하다’로 ‘올’은 승리를 의미하고 ‘외’는 패배를 의미한다. 오른손은 이기는 손, 왼손은 지는 손이다. 곧 옳은 것은 이기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인 액션(하다, 운동하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옳다’를 ‘바르게 하다’로 풀수 있다. 동적인 현재진행의 의미가 있다. 맞다/틀리다가 융통성 없는 절대값, 객관식 답안을 나타내는데 비해 옳다/그르다는 융통성이 있는 주관식 답안이다.

[상부구조(원인)]

● 질   - 정의(이다/아니다)
● 입자 - 분류(있다/없다)
● 힘   - 비교(같다/다르다)
● 운동 - 연산(옳다/그르다)
● 량  -  측정(맞다/틀리다)

[하부구조(결과)]

http://gujoron.com


[레벨:17]눈내리는 마을

2009.11.21 (01:56:55)

누군가는 죽기 살기로 뛰지 않으면 뒤쳐진다고 외칩니다.
어느 누군가는 즐겁게 해야 정상에 설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군에서는, 아무리 약물이나 팔던 흑인 이등병이 들어와도,
엄혹한 시스템의 규율에 몸서리를 칩니다.

한국군에서는 어느정도 교육받은 대학재학생이 이등병이 되어도,
화장실청소하면서 눈물젖은 빵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시한명이 난리를 쳐도, 워싱턴 정가의 싱크탱크들이
법률과 논리로, 그를 가라앉힙니다.
물론 그들의 세력확장논리에 의해 차갑게 움직이지만요.

작은 나라 한국은 한명의 잘못된 사람이 들어오면,
삽시간에 난리가 납니다.
이동반경 (아시아 유일의 민주국가)이 큰대신,
보수반동도 만만치 않습니다.

미국식의 법률운영으로는 우리는 삽시간에 나라가 절단날수도 있습니다.
실은, 미국은 그렇게 절단내도, 넘쳐나는 세력들이 있기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인재들을 아껴야하는데,
그 인재들이, 어리광쟁이로 돌변한다는 (김동렬님 왈) 약점이 있습니다.

되도록, 그 인재들이 세계사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도록하면서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서 안전망을 구축 (조세개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 모델을 전세계에 내보낼수 있느냐가 핵심이죠.
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09.11.25 (16:38:44)

예?) 발견하면 발명한다.
자동구조 발견하면, 자동기관 발명한다.
지성구조 발견하면, 지성기관 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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