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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099 vote 0 2009.11.18 (00:01:10)

인생에서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근원의 질문 두 가지 있다. 두 질문은 전제와 진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짝을 짓고 팀을 이루어 서로 호응하니, 다시 하나가 된다.

하나는 노가리 까는 사람을 당황케 하는 ‘누가 물어봤냐고?’ 응수다. 이 말대꾸는 모든 예술가, 문학가, 철학가, 정치가들에게 해당된다. 소설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누가 그거 하래?’ 시비를 피해갈 수 없다.

예술가든 정치가든 목에 힘주려다 실패한다. 길거리에서 말 붙이는 ‘도를 아십니까?’처럼 뻘쭘하게 된다. 누가 네게 마이크 줬지? 누가 네게 발언권 줬지? 니가 뭔데 세상 앞에서 감히 나서려 하지?

둘은 ‘그래서 어쩌라구?’다. 정치가 청중 앞에서 열심히 떠들었는데, 문학가 독자 앞에서 열심히 썼는데, 예술가 관객 앞에서 열심히 작품했는데 감동해주기는 커녕 ‘그래서 결론이 뭐야?’ 되치기 당하면 난감하다.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산다는 그 자체가 뻘쭘한 거다. 인생이라는 연극무대 위에 오르려고 하는데 누가 시비하며 자격을 묻는다. ‘누가 너더러 그 무대에 오르라던?’ ‘니가 뭔데 나서냐 나서길?’

쪽팔림을 무릅쓰고 어찌어찌 무대에 올라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청중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그래서 어쩌라구? 그래서 결론이 뭐야?’ 살아가려면 이 두 가지 시비에 대책이 서 있어야 한다.

첫번째 질문.. 인생이라는 무대에 오르기 앞서 당신의 자격은?

두번째 질문..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라선 당신 작품의 결론은?

###

세상의 물음 - 구조의 열쇠를 쥐고, 깨달음 창을 열고, 소통의 길을 가다가, 의식의 공유로 만나, 이상주의라는 꿈을 찾겠는가?

구조 - 구조는 세상을 여는 열쇠다.

깨달음 - 깨달음은 세상을 향해 난 각자의 창(窓)이다.

소통 - 창을 열고 큰 길로 나와서 함께 먼 길을 간다.

의식의 공유 - 정상에서는 모두 만난다. 그리고 다시 하나가 된다.

이상주의 - 그렇게 내 안의 것을 세상이라는 이름의 화폭에 펼쳐낸다.

이 다섯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다섯을 한 줄에 꿰어낼 수 있는 사람, 하나의 논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은 첫번째 질문을 통과한 것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 오를 자격을 얻은 것이다. 구조의 열쇠를 쥐었다면, 깨달음 창을 열었다면, 소통의 길에 올랐다면, 의식의 공유 정상에서 만났다면, 그대 안의 이상주의를 마음껏 펼쳐도 좋다.

당신은 자격이 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물어봤다. 당신은 마이크를 쥐었다. 당신은 그 무대에서 한 곡을 뽑아도 좋다. 청중의 박수갈채 쏟아진다. 당신 안의 모든 것을 토해내어야 하리.

인생의 응답 - 미학의 밭에, 완전성 씨앗을 뿌려, 통짜덩어리 인식의 싹이 자라 입체적 관점의 꽃 피고, 미학적 스타일의 열매를 이룬다.

미학 - 미학은 모든 창의성의 자궁이다.

완전성 - 미학의 밭에 뿌려진 근원의 씨앗은 자연의 완전성이다.

통짜덩어리 인식 - 완전성을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으로 가져온다.

입체적 관점 - 통짜 덩어리 인식을 펼쳐내는 비선형적 사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흑백논리,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를 극복하는 진정한 창의성은 얻어진다.

미학적 스타일 - 거기에 나다움이라는 옷을 입혀 일관성을 부여하면 비로소 작가 자신의 독창적인 조형적 질서, 곧 자기만의 미학적 스타일이 얻어진다.

이 다섯은 그 무대에 오른 당신이 청중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음악가는 곡으로 이 다섯을 말해야 한다. 소설가는 글로 이 다섯을 한 줄로 꿰어보여야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

정치가는 선동으로, 종교가는 설교로, 철학가는 사상으로 이 다섯을 표현해야 한다. 다만 남의 아이디어를 앵무새처럼 표절하지 말고 내 안에서 나의 미학적 스타일로 완성시켜 보여야 한다.

그래서 낳아야 한다. 내 안에서 낳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전파해야 한다. 세상끝까지 가 닿도록, 울림과 떨림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삶이다. 도달해야 할 삶 안에서 나다움의 일관성이다.

세상의 물음과 인생의 응답이 있다. 먼저 세상의 물음을 얻고 다음 인생의 응답을 얻어야 한다. 세상의 물음은 최종적으로 이상주의다. 인생의 응답은 최종적으로 나만의 창의성 자궁이 되는 미학적 스타일이다.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09.11.18 (08:58:24)



요근래들어....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사람들은 말을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고...
나는 말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 라는 느낌...

결국 서로가 하는 생각들이나, 내뱉는 말들을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고 말할 준비가 안되어 부딪치는 느낌이라고 할까...
막힘,단절,소통의 부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상주의와 미학적 스타일이 부딪히는 것은 어떤 이유이며...
실제로 이상주의와 미학적 스타일은 부딪힘이 일어나는지 궁금합니다.
이 두가지가 부딪히고 삐걱대고 스스로 화합되지 못함은 세상탓인지,개인 각자의 탓인지도 궁금합니다.

이상주의와 미학적 스타일..이 두가지의 물음과 응답에서 '세상의 물음'을 먼저 얻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상주의만 얻고 미학적 스타일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결과는 어찌될까요...?
또는 이상주의를 얻지 못하고 미학적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요..?
질문하다 보니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굉장히 불균형이 일어날것 같은데...
그래서 요즘의 세상과 혹은 사람들이 뭔가가 모순된 사고를 갖게되는 것일까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11.18 (10:23:47)






이상주의와 미학적 스타일이 부딪힐 수는 없지요.

노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자유로운 사회에서 그의 자유로운 삶과
그 여유있는 삶을 뒷받침할 충만한 에너지가 샘솟아 나오는 것이고

공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엄격한 사회에서 그의 엄격한 학문의 자세와
그 일관된 자세를 뒷받침할 효율적인 에너지 소모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상주의는 결국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고 미학적 스타일은 '어떻게 살것인가?'의 질문입니다.
왜 사는가는 존재에 대한 물음, 실존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삶의 일관성에 대한 물음, 자기다움에 대한 물음입니다.
왜 사는가는 존재론적인 사명,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할 일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나다움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문제는 실존적 고민 없이 남에게 배워서 어디서 줏어들은 지식으로 대충 아는 척 하는 거지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의 이상주의는 어디서 들은 거지 자신이 몸으로 부딪혀가며 고민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이라도 마찬가지에요.

종교마다 각자의 종교적 이상이 있을 텐데 그건 스님이나 목사에게 줏어들은 거지 자신이 고민한 진짜가 아닙니다.
가짜이므로 이상과 실천이 어긋나는 것입니다.

가짜 이상주의를 가지면 그에 걸맞는 미학적 스타일이 있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가짜들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상황논리로 응수하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닥치는 상황마다 임기응변이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이상주의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난 이렇게 살다 죽을래' 하고 대충 사는 사람은 대충주의라는 부실한 이상주의가 있는 거지요.
갈팡질팡 사는 사람들은 갈팡질팡 부실한 이상주의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즉흥적인 것이고
따라서 일관된 삶의 태도가 없이 뒤죽박죽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죽끓듯 하겠지요.

결국 일관된 사람과 변덕스런 사람이 있는 것이며
일관된 사람은 완전한 이상주의가 있고 변덕스런 사람은 이상주의가 불완전한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불완전한 이상주의의 변덕이냐 완전한 이상주의의 일관성이냐지요.
명박처럼 하루만에 말을 뒤집는 자는 변덕이며 불완전한 이상주의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09.11.18 (18:44:52)



결론적으로...불완전함이 문제이군요.

"그것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즉흥적인 것이고
따라서 일관된 삶의 태도가 없이 뒤죽박죽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죽끓듯 하겠지요."

불완전한 이상주의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인군요.

좋은말씀 감사드립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11.18 (20:19:03)






이상주의는 내 안의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가능성을 끌어낼 무대가 있어야 하며 그 무대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주의는 여러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 것이며
어떻게 여러 사람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공자-효도하면 된다.
예수-사랑하면 된다.
석가-자비하면 된다.
맑스-조직하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것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입니다.

그 방법을 쓰면 한 사람이 그룹 안으로 들어오겠지만 동시에 한 사람이 떨어져 나갑니다.
발가벗고 모여살면 된다는 이상주의 그룹도 있고
미국 오지에 숨어 16세기 전통방식으로 사는 그룹도 있고
육체노동을 강조하는 그룹도 있고
웃고 울부짖거나 포옹하고 노래하며 춤 추는 그룹하며
육식을 금한다든가 따위 괴이한 교리를 만드는 그룹도 있지만
대부분 극단적인 성향의 소수 괴짜들을 모을 뿐입니다.

변산공동체 윤구병선생이라면 그의 노동하는 삶이 그의 이상주의겠고
그의 옷차림과 삶의 자세가 그의 미학적 스타일이겠지요.

jiwon7938200510311735470.jpg

[윤구병의 미학]

그러나 이 포즈에는 이미 그의 고착된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포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성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노동하고 있지만 실로 세력을 모으고 있는 것이며
그 세력화 역시 남성에게 익숙한 것입니다.

여성이라면 조금 더 근사한 포즈를 연출할 것이고 조금 더 독립적으로 살아가려 할 것입니다.
물론 여성도 여성 나름이겠지만.

그러므로 완전한 이상주의는 깨달음과, 소통, 의식의 공유에 따른 공동선에 의해 가능하며
그것은 끝없이 우일신 해 나가는 형태가 될 것입니다.

인간 내부에서 끝없는 창의를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가치입니다.
어떤 고착된 형태를 만들고(주로 농촌사회, 부족사회, 16세기 사회) 그것을 내세운다면 가짜가 됩니다.

참된 이상주의는 물처럼 흐르는 것이며
각자의 내면에서 끝없는 창의를 끌어내어 부단히 옷을 갈아입는 것이어야 합니다.
첨부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09.11.19 (09:52:34)


 '세상의 물음'을 먼저 얻어야 한다고 하셨는데'..라고 질문을 드렸어야 하는데 '인생의 응답을 먼저 얻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로 되어 있어서
 '세상의 물음'을 먼저 얻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로 수정하여 놓았습니다.
^^;...그래도 답변은 제대로 하여주시니 우문현답인가 합니다.^^


세상에는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기스타일을 완성하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다고 봅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각자의 삶의 스타일이 분명히 있기는 있지요.
그러나 그 스타일을 미학적 스타일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합니다.

그동안 살면서 이상주의를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그곳에 발을 담구고 함께하지 않는한 그들과 섞여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늘 그곳과 함께하지 않는한 어느 선을 넘어가기 힘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한데 어우러지기 어려운..?)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스타일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주의가 어느정도 교육을 담담해주는 것 같습니다.일종의 철학을 부여해주는 것이겠지요.
평범한 사람들도 한달만,혹은 일년만...어떠한 것에 관심을 갖고 몰입하고 투쟁하고... 하다보면 어떠한 의식이 싹트게 됩니다.
일종의 개념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대체로 그러한 과정을 보면...거기서 자기만의 이상주의와 자기만의 스타일을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만들어 내는것 같습니다.
아마도 개인이 사회와 대립각을 세우므로 인해서 사회가 주는 시선의 의해 그리되는 것 같기도 하고,거기에서 어떠한 의식이 싹트므로 인해서 자기 스타일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러한 이상주의와 스타일은 개인의 혹은 소수의 이상주의,스타일로 머무르는 경우들이 많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호응을 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그것과 닮아져 가기는 원하지 않는것이겠지요.
사람들은 대체로 검증되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방향을 따라가려는 안전지향적 경향들이 있어서 일까요...?
그리고 어느정도는 미지를 개척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세상의 어떤 보이지 않는 비밀(?)을 아는 것에 있어서 별로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단,가쉽이나 어떠한 이슈에는 관심이 있어도 ...그러니까..작은 비밀이 드러나는 것은 즐기면서도 큰것 집단적인것, 집단이 가야할 방향,혹은 집단의 큰 길의(개인에게 보아서는 손해일 수도 있지만, 집단의 큰 테두리안에서는 이로운 것들..) 방향과 그 집단이 추구하는 이상주의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또한,사람들은 아직은 이상주의가 뭔가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는듯 하고 각자의 집단이나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가 궁극적으로 이상주의라는 것을 인식하기가 애매한 상황인듯하기도 합니다.

같은 이상주의를 지향한다해도 스타일은 개인들마다 차이가 생기므로...
한집단에 머무른다하여도 같은  이상주의를 품을 수는 있겠지만 각자의 미학적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다르므로
한나무에서 줄기는 제각각 뻗어가는 것과 같겠지요.
한 집단에서 혹은 사회에서 이상주의는 성격상 절대성을 띄지만 미학적 스타일은 상대성을 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진리를 해석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방법상으로는 많은 방식들이 있으므로 이상주의는 이상주의들과의 사이에서는 서로 상대적이 되겠고, 미학적 스타일은 상호간에 상대적이지만 그 개인의 스타일로 보았을 때는 절대적(고유성) 미학적 스타일이 되겠지요.

이러한 것을 보았을 때... 한 집단이나 사회에 이상주의가 제대로 발현이 된다면 그 구성원들에게도 고유의 미학적 스타일이 제대로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세상의 물음이 먼저이기에 그 사회에 알맞은 철학이 형성되어야 거기에 걸맞는 이상주의가 나타날 것이며,
인생의 응답은 세상의 물음을 얻은 후에 나타나기에 미학적 스타일의 발생은 이상주의에 종속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있으로
개인들이 미학적 스타일을 얻는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 만큼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러므로 완전한 이상주의는 깨달음과, 소통, 의식의 공유에 따른 공동선에 의해 가능하며
그것은 끝없이 우일신 해 나가는 형태가 될 것입니다.

인간 내부에서 끝없는 창의를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가치입니다.
어떤 고착된 형태를 만들고(주로 농촌사회, 부족사회, 16세기 사회) 그것을 내세운다면 가짜가 됩니다.

참된 이상주의는 물처럼 흐르는 것이며
각자의 내면에서 끝없는 창의를 끌어내어 부단히 옷을 갈아입는 것이어야 합니다." -


대체로 사람은 자기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서 절취고심합니다.자기다워지고 싶어서이겠지요.
그런데 순서가 뒤집혀 있어서 어려운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의 물음을 얻고 인생의 응답을 얻어야 하는데...대부분 인생의 응답을 먼저 얻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욕심이 되는 것이겠지요.아무것도 없는데 가지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삶이 참되게 흘러가게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깨우치는 것...!







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09.11.18 (23:22:59)

글을 읽고 나서 문득, 복습 차원의 질문입니다.

질문이 먼저인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11.18 (23:57:46)






옛 사람은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영혼은 본래 성령(Holy Spirit)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는데
어원을 추구해 보면 성령은 '바람'이라는 뜻이 있고, 
그 바람은 본래 브라흐마 신의 콧김이며, 하느님이 진흙으로 빚은 아담에 불어넣은 그 숨결이며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가 그것이며, 그 신비 물질, 미지의 에테르 그 원소 X를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신비의 원소에서 인간의 윤리적 본성이 나오고, 칸트가 주장하는 이성이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사회 도덕의 근본원리라고 믿었더랬지요.

근데 과학자들이 수헬리베붕탄질산플네 하며 106가지 원소를 다 찾았는데 그 신비물질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 서슬에 유전인자라는 것이 밝혀졌고, 다윈의 진화론에다가 한술 더 떠서 프로이드이래 집단무의식 따위가 나와서
무지 황당해졌고 급기야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게 되었고
샤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전부 한줄에 꿰어내게 하는 맥락을 추적해야 한다는 거지요.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며 다른 동물에 없는 특수원소가 있어서 그것이 인간 영혼이 된다는 믿음이 깨진 거지요.
특수원소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없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본질 곧 영혼을 만드는 특수원소에 따라서 2차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특수원소를 A급으로 지급받은 바라문 계급이 가는 길과
특수원소를 B급으로 지급받은 크샤트리아 계급이 가는 길이 다르고
브라흐마신이 작업중에 뭔가 잘못되어서 하필 신의 똥방귀가 잿더미에 여불때기로 묻어들어가서
엉뚱하게 탄생된 신의 실수 불가촉천민은 원초적으로 다른 길로 가야 하는 것이지요.

즉 인간이 무슨 원소로 만들어졌느냐?
거기에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질문과 답에서
그 질문은 그 특수원소니 브라흐마의 콧김이니 성령이니
영혼의 원소니 기(氣)니 하는 따위가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지금에 와서
인간이 그 특수원소를 간절히 필요로 하였던 그 무언가를 유도하는 절차입니다.

답은 그 특수원소를 대체할 무언가가 어떻게 유도되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2차적으로 얻어지는,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국어를 잘하면 나중에 시인이 되고
노래를 잘하면 나중에 가수가 되는데

잘하는게 질문이고 그래서 나중에 되는게 답이지요.

존재론의 존과 재,
곧 명목과 기능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명목은 나를 나이게 하는 에너지의 유도절차이며
기능은 그 에너지의 사용입니다.
질문은 명목 답은 기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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