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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247 vote 0 2009.11.12 (23:24:03)

 

‘그래서 어쩌라구?’

서구문명의 최종결론은 이상주의다. 가시화된 형태는 마르크스주의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에서 실패다. 미완성의 부실한 이론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한 가치를 전면 부정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 유효하게 인정할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자궁이라 할 그리스 이상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상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이상주의를 재발견하고 보완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운동권에서 한때 원전읽기 붐이 있었다. 마르크스 이후 잘못 왔다는 점을 인정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마르크스부터 다시 시작해보자는 생각이다. 틀렸다.

마르크스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존재는 모태를 가진다. 자궁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것은 없다. 마르크스의 자궁은? 마르크스가 합리적이라면 그 이전 유도단계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이전이 없다. 이론의 유도절차가 생략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변혁의 근거로 삼으려 하지만 허술하다.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가 옳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다른 사람이 못났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잘났다는 증거는 아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마르크스 이전 단계가 없는 이유는 기독교에서 그것을 베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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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커다란 의심에서 시작한다.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전제’를 의심해야 한다. 전제를 의심한다 함은 그 견해의 유도절차를 캐묻는 것이다. 사람을 의심한다면 그 사람의 출생부터 따진다.

‘너 어디서 온 누구냐?’ ‘네 아버지는 누구냐?’ ‘네 소속은 어디냐?.’ 어떤 사람이 나름의 주장을 내놓는다면 그 주장이 자연에서 유도되는 절차를 따져야 한다. 모든 사상은 근본 자연에서 온다.

하나의 견해는 우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동사에 대해 명사≫술어에 대해 주어≫진술에 대해 전제≫주장에 대해 근거≫인식에 대해 존재로 5단계의 단계적인 유도절차를 거친다.

최종적으로는 동사로 결판낸다. 길에서 만나는 ‘도를 아십니까?’라면 이렇게 쏘아붙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라구?’ 장황한 설명을 듣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제사를 지내야 됩니다.’로 끝난다.

결말은 항상 동사다. 교회에서 나왔다면 헌금 ‘해야’ 되고, 다단계에서 나왔다면 강연 ‘들어야’ 되고, 정당에서 나왔다면 투표 ‘해야’ 하고, 장사꾼이라면 물건을 ‘사야’ 한다. 어떤 주장이든 결말은 액션이다.

하나의 견해는 반드시 하나의 동사로 최종 집약되며, 그 동사를 끌어내기 위하여 예의 5단계 논리적 유도절차를 거쳐야 하며, 만약 그것이 없거나 부실하다면 이론적인 미완성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적유물론, 소외론, 노동가치설에 근거를 댄다고 하지만 이들 사이에 논리적 인과의 고리는 없다. 공산주의가 역사발전 최종단계라는 주장은 그냥 주장일 뿐 유도절차가 없다.

소외이론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할 뿐 마르크스의 핵심주장인 공유제와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다. 생산수단의 공유로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국유제다. 한꺼풀 벗기면 관료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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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래 공유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공동 물레방앗간에서 보리를 빻더라도 내 차례면 내작업이 끝날때까지 내소유다. 군부대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하더라도 내 식기의 밥은 내소유다.

보리를 먼저 빻으려면 줄을 서야 하고, 공동식사를 하려면 역시 줄을 서야 한다. 줄을 서면 관료제다. 소유의 ‘유’라는 개념을 잘 살펴야 한다. 공유는 ‘유’가 특정되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다.

‘유’는 기능을 부여하기 위한 짝짓기다. 공유는 짝이 지어지기 전, 기능이 특정되기 전 예비단계다. 공유제는 결국 예비제다. 언제까지나 예비로 두면 의미가 없다. 기능을 부여하면 관료제다.

존재론으로 규명할 때 하나의 존재는 ‘명목+기능’으로 되어 있다. 공유개념은 기능이 특정되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를 의미한다. 이는 하늘의 공기를 모두가 공유한다는 말처럼 의미없다.

공유란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잠정상태다. 이는 미발달, 미분화의 허술한 상태이며 사회의 진보란 그 소유가 판별되는 절차의 발전이다. 물론 소유를 결정하지 않은 예비자원은 많을수록 좋다.

공원은 넓을수록 좋다. 지구는 클수록 좋다. 공해는 넓을수록 좋다. 임자없는 공기는 많을수록 좋다. 문제는 인구증가와 인간의 활동량 증가다. 소유가 판별되는 정도는 인간 활동량에 정비례한다.

결론적으로 공유는 실제로는 없고, 공유라 불리는 것은 소유가 특정되지 않은 잠정상태의 예비자원이며, 이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서 소유로 변경되고, 마르크스는 관료제를 공유라 이름하였다.

● 소유가 특정되지 않은 예비자원이 있다.
● 공해, 공역, 공원과 같은 예비자원은 많을수록 좋다.
● 예비자원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기능이 부여되어 소유로 변환된다.
● 마르크스는 예비자원이 소유로 변환하는 과정에 관료를 개입시킨다.
● 인간활동에 의해 반드시 소유로 변환되므로 엄밀한 의미의 공유는 없다.

공유 개념에 대한 환상은 ‘예비자원이 많을수록 좋다’는 당위에서 온 착각이다. 지구는 넓을수록 좋다. 영토는 넓을수록 좋다. 그것이 줄어든 것은 인구증가와 인간의 활동량 증가 때문이다.

관료제가 예비자원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국립공원이 관료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그 예다. 북극해나 남극, 공해가 공역으로 남아있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인간활동의 증가 문제는 별개다.

생산수단을 관료가 소유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최종결론이다. 관료제는 중국이 앞섰다. 중국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이유는 익숙한 전통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상이 아니고 봉건주의로의 후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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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치설은 자본의 작동원리에 대한 이해부족에 기인한다. 자본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이는 생물의 진화와 같은 자연현상이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자연법칙과 싸워서 안 된다.

자본은 특정 조건에서 가치를 증식한다. 가치를 증식하려면 농부가 소를 키우듯 자본을 키워야 한다. 자본의 근본은 신뢰이며, 신뢰가 신뢰를 낳으며 연쇄적으로 증식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다.

교육이나 의료, 법률, 제도, 정치도 그 신뢰의 증식에 기여한다. 본질은 자본이 아니라 총활동량이다. 인간의 활동증가에 비례하여 신용이 증가되어야 한다. 활동이 늘어나면 부실한 신용이 생산된다.

어떻든 활동 자체는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이 문제가 아니라 활동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자본은 활동의 폐해를 드러내는 지표에 불과하다. 자본에 대한 비난은 결국 활동에 대한 비난이다.

인구가 적고 인간이 활동하지 않으면 쾌적한 환경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실제로는 그 활동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자본이라는 명목적 이름에 비난을 떠넘기고 있다. 이는 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태도이다.

이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놔두고, 그림자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막연하게 자본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인간의 무절제한 활동을 어떻게 조직하고 제어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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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는 그리스의 이상주의+기독교의 해방사상+창세기의 파라다이스 개념+사적유물론 역사학+소외론 심리학+노동가치설 경제학+게르만의 원시사회주의 전통을 이것저것 조합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사이에 논리적 인과의 고리가 없다는 점이다. 하나의 계통을 따라 일관되게 유도되지 않는다. 직접 증거를 들이대지 않고 잡다한 방증을 어수선하게 들이대고 있다.

정황증거 만으로 범인을 지목하는 격이다. 핵심 ‘공유제’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물론 다분히 공유제를 암시한다. 문제는 병풍으로 둘러친 여러가지들이 다분히 고대 혹은 원시시대 배경이라는데 있다.

공자가 요순시절을 이상향으로 표방한 것과 비슷하다. 결국 진보가 아니라 복고다. 석가만 해도 최초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고(苦)를 얻고, 고를 단서로 사성제를 유도한다.

사성제에서 팔정도를, 팔정도에서 다시 12연기법을 유도하는 등 열심히 논리의 인과고리를 만들었다. 석가의 첫번째 질문이 되는 '인생'은 역시 자연의 일부다. 궁극적으로 자연에서 유도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없다. 이것저것 줏어 섬기는 병풍치기 수법은 안 통한다. 핵심은 기독교를 베끼고 있다. 혁명이론은 모세의 해방사상을 표절하고 있다. 일부 먹히는 이유는 기독교와 닮았기 때문이다.

상부구조의 빈곤이다. 동양사상도 요순시대, 왕도정치, 장자의 혼돈개념 등 복고적 이상주의에서 출발하고 있다. 서구의 이상주의는 그리스의 이상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그래서 어쩌라구?’에 대한 답은 ‘공유제’ 하나이며 그는 공유제를 논리적으로 유도하는데 실패했다. 사적 유물론이나 소외이론 노동가치설 등 여러 방증들과는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는다.

공유제는 관료제이며 이는 인간소외를 심화시킬 뿐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은 소유 밖에 없다. 최대다수의 최소한도 이상의 철저한 사적 소유가 소외를 극복하는 바른 방향이다.

‘공유제’는 관료제의 이름바꿔치기 수법에 불과하므로 폐기 혹은 제한되어야 하며 그 이전단계인 이상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상주의 자궁을 추구해야 한다. 이상주의 상부구조는 무엇인가?

보편적 깨달음≫깨달음을 통한 소통≫소통을 통한 의식의 공유≫집단지성의 형성≫인류 지혜의 총화로 전일적 인격의 형성, 신과의 대등한 소통이다. 이것이 이상주의를 유도하는 절차다.

그리스의 이상주의는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창세기의 이상주의는 신의 자손이라는 혈연관계로 유도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인류의 ‘공동선’이 유도되는 것이다.

공동선에 따른 ‘공동목표’가 제시된다. 이상주의는 인류의 공동목표다. 공동목표는 공동선에 기반한다. 공동선은 ‘전일적 인격’에서 얻어진다. 전일전 인격은 집단지성에서 얻어진다.

집단지성은 소통을 통한 ‘의식의 공유’에서 얻어진다. 소통은 깨달음에서 얻어진다. 인간이 깨닫는 수준 만큼 공동선도 높아지며, 인류 공동선의 높이만큼 공동목표는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 깨달음≫소통≫
● 의식의 공유≫집단지성≫전일적 인격
● 인류 공동선의 도출
● 인류 공동목표의 제시
● 이상주의 성립

이상주의라는 결론으로 바로 갈 것이 아니라 그 이전단계를 거슬러 올라가서 출발점이 되는 깨달음에서부터 바른 첫단추 꿰기에 나서야 한다. 상부구조에서 첫 단추를 잘못꿰궤면 계속 어긋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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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미래로 가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상을 논하면 과거로 간다. 미래로 가야 한다. 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결론은 소유다. ‘그래서 어쩌라구?’에 이상주의 대답은 ‘철저한 소유’다.

소유는 자산이 아니라 권이다. 권은 인권, 생존권, 소유권, 저항권, 소유권 등 일체의 권이다. 권 자체를 소유하는 것이다. 소유라는 말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그게 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옷이 내옷이고 이 신발이 내 신발이라는 것은, 이 옷과 신발에 대한 권리가 내게 있다는 뜻이다. 권은 저울의 작동이다. 그것에 대한 일체의 판단과 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소유는 권의 여러 형태중 하나다. 회원권이나 이용권도 있다. 학생이 학교에 출입할 권리, 시민이 공원에 출입할 권리 역시 소유에 해당한다. 소유는 좁은 개념이고 권 개념이 합리적이다.

백명이 있는데 빵이 50덩이 밖에 없으면 나머지 50명은 몫이 돌아가지 않아서 빵을 먹을 수 없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그 50명 역시 돌아갈 최소한의 몫이 있음을 알게 된다.

공기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간다. 식수 역시 충분히 공급될 수 있다. 학습이나 의료, 기회의 보장은 넉넉히 돌아갈 수 있다. 최대 다수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최대한 다양하게 보장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려면? 많은 종류의 다양한 권들을 발견해야만 한다. 주택이라면 소유권만 있는게 아니라 임대권 다양한 형태로 권이 제시될 수 있다. 그것은 인류가 진보하여 새로이 창안해야 한다.

권의 종류가 늘어나고 기능이 세분화되며 발전할수록 사회는 진보한다. 똑같이 나누기 어렵지만 다양한 형태로 나누면 몫이 돌아갈 기회는 증가한다. 우리는 진보하여 그 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깨달음이다. 빵은 부족하여 충분히 나눠줄 수 없지만, 깨달음은 무한하여 충분히 나눠줄 수 있다. 소통은 넉넉히 나눠줄 수 있다. 의식의 공유 역시 얼마든지 보급될 수 있다.

현찰은 못줘도 학교에서 기본적인 공부는 가르쳐 주어야 하듯이 깨달음, 소통, 집단지성, 전일적 인격의 형성, 인류 공동선의 도출, 이상주의까지는 누구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

모두가 월드컵팀의 주전으로 뛸 수는 없지만 승리의 기쁨은 나눠가질 수 있다. 축제의 자리에는 누구라도 초청될 수 있다. 몸은 하나라 나눌 수 없지만 마음은 복제가 되니 넉넉히 나눌 수 있다.

누구든 진리의 친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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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1) 마르크스주의 자궁은 이상주의다.
2) 마르크스가 방증으로 들이대는 여러가지들은 하부구조에 불과하다.
3) 하부구조는 한의학의 경험방처럼 수집된 것으로 논리의 인과의 고리가 없다.
4) 부실한 상부구조는 일부 기독교에서 표절하고 있으며 논리적 증명이 없이 막연히 암시할 뿐이다.
5) 이상주의 이전의 상부구조로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의 공동선과 공동목표를 유도하는 바른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의학은 부분적인 효과가 있지만, 하부구조에서 경험적으로 수집된 것이지, 상부구조로부터 논리적으로 유도된 것이 아니다. 한의학의 치료법과 논리라 할 사상의설, 오행사상, 음양사상은 관련이 없다.

한의사들은 음양사상, 오행사상, 사상의설을 논리로 들이대어 설명하여 환자를 안심시켜놓고는 실제로는 그 논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험적 치료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비과학적인 태도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여러 기독교적 암시들과 현실의 경험들을 조합하고 있으며 이는 비과학적 태도이다. 하나의 논리틀에 꿰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한 줄에 꿰어서 일관되게 설명해야 한다.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6]하루

2009.11.13 (02:35:43)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공유화는 생산수단이고,   생산물의  사적소유는 인정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음.. 생산수단의 공유화, 국유화는  관료화되어 억압하고 착취하는게 필연적인 걸까요.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내가 알고있는 한

그가 이상주의로 상상했던 세상,  생산력이 발전하여 하루 중 오전에는 4시간정도 공익을 위해 노동하고 ,
오후에는 자아실현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세계는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덕분인지  생산력은 충분히 발전했다고 보여지고요.

돈으로 사랑을 구하고, 돈에 의해 인간이 평가되는  자본에 의한 소외가 아니라
사랑이  사랑으로 exchange되고,  인간이 인간적으로 대해지는 세상을 그렸고요.

자본주의에서 동기가 자본의  사적소유에 의해 창출된 욕망이라면
공산주의에서의 동기는 공익에 대한 욕망, 자아실현의 욕망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봅니다.
원시사회주의에서의 동기가 개인의 사적소유보다는 공동체에서 명예, 존경이었으니깐요,

.. 글이 논리적이지 못하고,  생각하고 글이 따로 노네요 ㅎ~

[레벨:15]LPET

2009.11.13 (10:50:38)

내부 관료화를 막으려면 외부 경쟁을 도입해야 하는데, 그러면 공기업과 사기업의 차이가 없어집니다.
생산수단의 경쟁을 통하지 않으면 충분한 잉여가 창출되지 않을 것이고, 사유재산의 축적도 불가능할겁니다.
경쟁하지 않는 기업이나 개인이 독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독점기업은 외부시장에서 수익을 끌어올릴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내부에서 이윤을 착취하는거죠.
따라서 생산수단의 공유화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생산수단은 시장에서 경쟁시키고,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는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11.13 (13:26:13)






본문을 추가하겠습니다.
역사이래 엄밀한 의미에서의 완전한 공유제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의 존재는 '명목+기능'으로 성립하며 공유제는 명목적 존재이고 사유제는 기능의 부여입니다.
그러므로 공유제는 기능이 부여되기 전의 상태인 예비자원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예비자원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기능을 부여하지 않으면 결국 의미가 없습니다.
이는 겨울을 대비하여 식량을 많이 비축할수록 좋지만,
먹지 않고 막연히 쌓아두기만 하면 결국 봄이 되어 유통기한이 지나서
버려지게 되고 재고부담만 는 것과 같습니다.
공유상태에서 기능을 부여하여 그것이 사유화될 때 하나의 존재가 올바로 성립하는 것이며
공유상태에서 곧바로 기능을 부여하려 하면 관료제가 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09.11.15 (17:54:36)

그래서 어쩌는가.
한 줄에 꿸 수 있어야 논리, 한 점에 밀 수 있어야 일.
알싸한 바람이 마음을 휘감아 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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