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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109 vote 0 2010.10.06 (23:25:54)

 


무심


  흔히 무심을 강조하곤 한다. 마음을 비운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패하고 만다. 그저 비우기만 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또 설사 행복해진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 왜? 알아주는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과의 소통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만 쓸쓸해지고 만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에서 소외되고 마는 것이다. 소외를 극복하고 널리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노스님은 평생 암자를 떠나지 않고 수도에 전념했는데 절에 우편으로 배달되어 오는 신문에 끼어오는 광고지 뒷면이 이면지로 쓸만하다고 해서 수십 년간 종이를 차곡차곡 모았더니 상자에 넘치게 되었다. 그동안 애써 모은 광고지를 젊은 학승에게 내주며 공부하는데 쓰라고 한다. 노스님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히 짓고 있지만 쓸쓸하다. 스님은 절 밖으로 나가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다. 젊은 학승 역시 웃으며 종이를 받아들지만 속 생각은 다르다.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노스님과 무슨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하고 탄식한다. 가방 속의 노트북은 차마 꺼내어 자랑하지 못한다. 실패다.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억지 미소를 띠고 행복한 척 하면 거기에 홀려서 찾아오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그러나 역시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은 수준이 낮아서 도무지 대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창의는 기대할 수 없다. 일은 도모할 수 없다. 계획은 세울 수 없다. 밥이나 축내다 갈 뿐이다. 존재는 나무와 같다. 그 나무 자라야 한다. 해마다 신록이 새로 고개를 내밀어야 한다. 나무는 새로 난 가지가 가장 위로 올라간다. 최근 뉴스가 맨 꼭대기로 올라감으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 지은 시에 운을 맞출 수 있고, 새로 그린 그림에 화제를 달 수 있고, 새로 작곡한 음악에 추임새를 넣을 수 있다. 그래야 찾아오는 친구가 반가울 수 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씨앗이라면 실패다. 떡잎을 내밀지 못하는 씨앗이라면 실패다. 내 안에 잠재한 가능성을 이 세상에 한껏 펼쳐보이지 못한다면 실패다. 무심을 앞세우며 그냥 멍청하게 있다면 곤란하다.


  무심의 심(心)은 심이다. 심은 연필의 심과도 같다. 촛불의 심지와도 같다. 그러므로 심은 포커스다. 심은 타오르는 불꽃이다. 충(忠)은 중심(中心)이다. 그러므로 심은 중심이다. 심은 센터다. 심은 핵이다. 심은 바퀴의 축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쓸모가 있다. 구슬을 꿰는 실이 심이다. 심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 그런데 왜 무심하라고 할까? 다른 뜻이다. 아기는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무심해진다. 엄마가 자기의 심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의 문제는 항상 높은 단계에서 풀린다. 1차원 문제는 2차원에서 풀리고 2차원 문제는 3차원에서 풀린다. 행복의 심은 성취다. 행복 안에서 행복의 심을 찾지 말라는 의미다. 그것이 무심의 진정한 의미다. ‘행복하니까 좋다’가 아니라 ‘성취하니까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성취에 방점을 찍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성취의 심은 사랑이다. 성취 안에서 성취를 찾지 말라는 의미다. 사랑에서 성취의 보람을 찾아야 한다. 성취를 늘려서 행복하다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성취했다고 해야 진정한 기쁨이 있다. 그냥 성취에 집착한다면 돈을 벌거나, 승진을 하거나, 합격을 하는 거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곤란하다. 그 모든 것이 사랑으로 가기 위하여 거쳐가는 정거장이어야 한다. 정거장은 들렀다가 곧 떠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무심이다. 사랑의 심은 자유다. 사랑 역시 자유로 가기 위한 정거장이어야 한다. 사랑에 집착한다면 역시 곤란하다. 자유 역시 존엄으로 올라서기 위한 계단에 불과하다. 자유에 집착한다면 실패다. 자유의 심은 존엄이다. 존엄은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렇게 신과 만나는 코스를 밟아가는 것이다. 항상 한 단계 높은 곳에 해답이 있다.


  개인의 심은 공동체의 발전에 있다. 개인이 성공했다는건 의미가 없다. 개인이 열심히 돈을 벌었더니 공동체가 발전했다고 해야 의미가 있다. 공동체의 심은 역사의 진보에 있다. 그냥 국가가 커지고 힘이 세지는건 의미가 없다. 인류 전체를 이끌어나갈 지도력을 얻어야 의미가 있다. 역사의 심은 문명의 발달에 있고, 문명의 심은 진리의 보편됨에 있고, 진리의 심은 신의 완전성에 있다.


  다들 무심을 말한다. 심을 비우라고 한다. 심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 있다. 개인의 문제는 공동체의 레벨로 올라가야 해결이 된다. 공동체의 문제는 세계와 문명의 진보에서 해결이 된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야만 문제가 풀린다. 그럴 때 무심해진다. 편안해진다.


  무심은 아기가 자기의 소유를 챙기지 않고 엄마를 믿는 것이다. 만약 아기가 ‘엄마가 내 젖병을 훔쳐가면 어쩌지?’하고 염려하여 젖병을 몰래 감춘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아기가 ‘엄마가 나를 키워서 잡아먹을 셈으로 내게 댓가도 받지 않고 젖을 주는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도리질을 하며 젖먹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거 곤란한 거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으며, 돌아가는 팽이는 넘어지지 않는다. 배가 노젖기에 부지런하다면 실패다. 순풍에 돛달고 그 바람결을 타는 것이 무심이다.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겨서 무심해 지듯이, 개인은 역사의 진보하는 흐름에 올라탈 때 무심해 진다. 개인의 성취가 공동체의 진보로 연결되기 때문에 무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악사의 연주가 화음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무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멍청하게 있는 것이 무심은 아니다. 왜? 사회가 진보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가만이 있었을 뿐인데도 사회는 저 만치 달려가 있다. 사회와 개인의 간격은 멀어지고 만다. 떠밀려나가고 만다. 소외되고 만다. 배척되고 만다. 승객은 버스에 올라타야 무심해질 수 있다. 운전기사는 교통질서가 잘 지켜져야 무심해질 수 있다. 기수는 경주마와 호흡을 잘 맞추어야 기수도 경주마도 무심해질 수 있다. 


  연주자는 잘 연주할 때 무심해진다. 신명이 날 때 아기처럼 무심해진다. 관객이 호응할 때 무심해진다. 일이 되어가는 흐름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이 딱딱 맞아떨어질 때 무심해진다. 안절부절 하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면 무심해진다. 인간은 높은 단계에 올라섬으로써 무심해질 수 있다. 눈을 떠야 한다. 더 넓은 세계를 보아야 한다. 전모를 보아야 한다. 돌아가는 판 전체를 장악하고 제어해야 한다. 그럴 때 뱀 다루는 사람이 코브라의 맹독을 무서워 하지 않듯이 무심해질 수 있다. 인간이 가만 있어도 세상이 뱅글뱅글 돌아가기 때문에 멀미가 난다. 그러므로 무심해지지 못한다. 그 진보의 흐름에 몸을 태우고 박자를 맞추어야 한다. 함께 호흡하고 함께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완전성을 알아채면 무심해질 수 있다. 세상의 진보하는 방향성을 알아채면 무심해질 수 있다. 내 안에서 가치를 낳아낼 때 무심해질 수 있다. 남의 집에 들어온 도둑이 안절부절 하는 것은 그것이 제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포지션을 찾아야 한다. 자기 역할과 위상을 확인해야 한다. 세상이 가는 쪽으로 쫓아가야 한다. 세상은 나무와 같아서 날로 성장한다. 그 나무의 성장에 맞추어서 봄에는 봄의 꽃을 입고, 여름에는 여름의 잎을 입고, 가을에는 가을의 단풍을 입어야 무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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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9]로드샤인

2010.10.06 (23:38:33)

카~ 좋구려! 
동렬님 글을 보면서 무심을 느낍니다그려. ㅎㅎ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0.07 (12:04:31)



심은 내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을 내안에서 비우려 하니...될 턱이 있을까...^^
인간의 소외감과 절망감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네요
대체로 자신의 마음이 일어나는 그 시점의 현상에서 그것을 붙잡고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은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기에...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에 머물다 보면 감정을 계속하여 채워줘야 하기에...신씨처럼 계속 도박이란 마약을 줘야 하는 것과 같고...
성취에 머물다 보면 계속하여 성취하여야 갈증이 풀린다고 보기에...돈,권력,출세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삶이 너무 피곤해져 물욕의 노예가 되어가고...
사랑에만 머물러 있으면 이 역시 계속 채워줘야 하기에 기부만 하거나 사랑 자체에 집착하다 보면 그것을 유지해야 하는 마음의 요구를 계속 수행해야 하므로 이 역시 사랑의 노예가 되어 피고해지기만 할 뿐...그것이 기쁨인줄 착각하게 되는 것...
자유에만 머물러 있으면 이 역시 끝없이 자유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기에 역시 방종으로 흐를 뿐...통제가 안된 자유는 허무할 뿐이다.
존엄에만 머물러 있으면 존엄하기만 할 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소통의 길을 열어야 한다.
존엄이 신의 완전성과 통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정거장은 들렀다가 곧 떠나가는 것이다.
한 단계에 집착하지 않고 바로 다음 다음 단계로 나아가 주는 것이 무심이다.
인간은 높은 단계로 올라 갈 때 무심해질 수 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 때 무심해 질 수 있다.

눈을 떠야 한다. 더 높은 세계를 보아야 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2]wisemo

2010.10.07 (16:28:17)

행복의 심이 결국 존엄이듯이,
질의 심이 결국 양이 되나보오?

지금은 겨울인데 봄의 꽃을 입히는 세월이 아닌가 보오. 그 결말이 기대되오. 무심!
아인쉬타인의 문제해결에 관한 차원의 명제와 구조론의 일치를 보며
하나씩 질에서 양까지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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