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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824 vote 0 2011.02.23 (01:19:45)

 

 

깨달음

마음의 문제는 결국 깨달음과 깨달음의 문화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은 성취에, 성취는 사랑에, 사랑은 자유에, 자유는 존엄에 그 답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복잡해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작은 행복이냐 큰 행복이냐다. 양적으로 많은 행복이냐 질적으로 높은 행복이냐다.


행복, 성취, 사랑, 자유, 존엄은 행복의 급수를 나눠놓은 것에 불과하고 결론은 진정한 행복을 찾으라는 거다. 최고 레벨의 행복을 찾으라는 거다. 그래야 노가다를 덜 한다. 행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존엄은 근원의 행복이다. 그것은 그냥 막연히 존중받고 존중하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거다. 반응하려면 관계를 긴밀하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밀접하게 소통해야 하고, 소통하려면 역시 문화가 필요한 거다.


그러므로 막연히 사람을 존중하자고 외칠 것이 아니라 화가에게는 붓을 주고, 가수에게는 마이크를 주고, 연주자에게는 악기를 주고, 또 그 연주를 들어주어야 하고, 그 그림을 감상해주어야 한다. 여자친구가 새 옷을 입었으면 ‘그 옷 잘 어울리네’ 하고 평을 해주어야 한다.


현실 사회에서 누가 연주자에게 악기를 주고, 화가에게 붓을 주고, 가수에게 마이크를 주고, 그들의 청중이 되어주고 또 관객이 되어주며 그것을 현장에서 실천하느냐다. 심리학계나 진보쪽 사람들은 말만 많지 전혀 실천을 안 한다. 특히 심리학자라는 사람들은 화가에게 붓을 주기는 커녕, 그들의 관객이 되어주기는 커녕, ‘당신은 어릴 때 상처받아 트라우마가 있어. 그래서 마구 그리려는 거야.’ 하고 염장을 지른다. 이게 될 말인가?


구조론으로 말하면 에너지의 입력측과 출력측, 곧 원인측과 결과측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동기를 부여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삶이라는 형태로 실천하게 하는, 즉 인생이라는 사건의 원인측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에너지를 입력하는 것이다. 삶의 원인제공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상대가 반응하기 때문에 인간은 행동하는 것이며 그 행동이 모여 삶을 이룬다. 우리 낮은 곳의 작은 목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 -> 당신이 악기로 연주하려는건 잠재의식, 트라우마 때문이야.
불교스님 -> 그만 악기를 내려놓거라.


스님이 막연히 ‘내려놓아라’고 하는 것도 염장질이기는 마찬가지다. 둘 다 상대방에게 원인을 돌리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연주할 사람은 연주하게 해야한다. 그걸 내려놓아라고 하면 안 된다. 마음은 악기와 같다. 누구나 마음의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 자유도 내려놓고, 사랑도 내려놓고, 행복도 내려놓고? 이건 아니다. 자유도 연주하고, 사랑도 연주하고, 행복도 연주해야 한다.


화가가 붓을 내려놓고, 운전기사가 핸들을 내려놓고, 교사가 백묵을 내려놓고, 야구선수가 방망이를 내려놓고? 이건 아닌 거다. 그릴사람 그냥 그리게 하고, 노래할 사람 그냥 노래하게 하고, 연습할 사람 그냥 연습하게 하는게 맞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장이 벌렁벌렁하게 반응하는게 중요하다.


막연히 내려놓거라 한다면 책임회피다. 오히려 ‘삽이라도 들라’고 말하는게 낫다. 인간이 나쁜 길로 가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계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당이 악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 악으로 나타나는 거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을, 좋은 기회를, 좋은 시대를, 좋은 해결책을, 좋은 무대를,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에러는 그 좋은 것들을 이어주는 하이퍼 링크가 깨졌기 때문이다.


그 좋은 사람과, 기회와, 해결책과, 무대와, 환경을 제공하면, 끊어진 하이퍼 링크를 복구해 주면 누구라도 좋은 일을 한다. 그리고 그 기회와 무대와 환경을 제공하는 일을 공동체가 해야 한다. 공동체의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면 곤란하다. 공동체가 복지를 외면하고 개인의 게으름을 탓하면 곤란하다.


의사가 환자에게 ‘병에 걸린 것은 순전히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은 당신 때문이야’하고 약올리면 안 된다. 의사는 환자를 나무라고 꾸짖을 것이 아니라 치료를 해야 한다. ‘손을 씻어라’고 지시할 것이 아니라 약을 처방하든가 아니면 수술을 해줘야 한다.


80년대 라즈니쉬 이후 깨달음 바람이 살짝 불었으나 곧 소멸되었다. 라즈니쉬는 사실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없다. 그냥 석가만 깨달은게 아니라 달마도, 혜능도, 노자도, 예수도 다 깨달았다고 주장해서 깨달음의 문턱을 좀 낮추어놓기는 했지만 대개 자기 이야기는 안 하고, 다른 사람 이야기만 줄줄이 줏어섬겨서 쓸데없이 책만 많이 팔아서, 그 덕에 출판사만 돈을 벌었다. 하긴 출판시장을 키워놓은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내 배 아파서 내 안에서 낳아낸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진짜배기 이야기 말이다.


불교의 약점은 신(神)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닫는다는 것도 강렬한 유혹이기는 하지만 약하다. 깨닫고 나서 무엇을 해야할지 분명하지 않으니까. 그냥 ‘나 깨달았다.’ 그러면 ‘됐네 이양반아!’ 그럴거 아닌가 말이다. 사람들이 비웃는다. 절대적으로 다음 단계가 있어야 한다. 이건 구조론의 원리이기도 하다. 뭐든 다음 단계가 없으면 일단 가짜로 볼 수 있다.


신(神)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공(空) 개념이 있지만 역시 공허하다. 어떤 사람은 공(空) 개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던데, 왜 공에다가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까? 아마도 그래야만 말이 앞뒤가 맞고, 아귀가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그럴 것이다. 기승전결의 자기완결형 동그라미 말이다. 그 안에 에너지의 순환이 있는 거다. 곧 완전성이다. 구조론은 포지션으로 말한다. 포지션이 있으면 일단 있는 거다. 그것을 신이라고 하든, 공이라고 하든, 각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이고. 그것이 존재하여 있다는건 분명하다.


나는 불교가 석가를 넘어서야 한다고 보며, 석가를 넘어서는 것은 불교의 무신론적 입장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불교가 무신론의 종교라고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신을 들이댈 필요도 없다. 도깨비나 귀신같은 것도 불필요하다. 공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구조론의 대칭원리에 따라 색이 있으면 공도 있고, 그 사이에 법이 있다. 공의 의미는 색의 의미만큼 확장되어야 한다. 공은 제로가 아니라 0부터 무한대까지 전부 담아내는 자루다. 그것은 자(尺)와 같다. 그저 자가 있는 거다. 자에 눈금은 무한대로 새길 수 있다. 현미경을 동원해서 칸을 자꾸만 나누면 된다. 자는 무한히 작아질 수도 있다. 자는 그저 마음에 있어도 충분하니까. 자가 구체적으로 대나무나 플라스틱으로 구현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미터자든 피트자든 상관없다. 당척이든 고려척이든 상관없다. 30센티 자든 1미터 자든 상관없다. 자를 성립시키는 비례원리 자체가 자(尺)니까.


자연수, 정수, 분수, 소수, 유리수, 무리수, 실수, 허수, 복소수 따위는 자에다가 눈금을 새길 요량으로 인간들이 임의로 지어낸 거고. 실제로 있는 것은 자다. 그리고 원래 자에는 원래 눈금이 없다. 공(空)은 자와 같아서 아무 것도 없는게 아니고 번듯하게 있는 거다. 단지 수(數)의 세계에 없을 뿐이다. 자가 공이라면 수는 색이다. 둘은 이어져 있지만 서로 만나지 못한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은 무한순환이 아니고 절대로 자가 형님이다. 자는 수를 낳지만 수는 자를 낳지 않는다. 자가 상부구조, 수는 하부구조다. 수는 결코 자를 볼 수 없다. 수의 세계에서 자는 보이지 않는 손이지만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정한다. 반면 자는 수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위에서 다 내려다보고 있다.


그림자는 빛을 볼 수 없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 물체가 있고 물체가 치워지면 그림자는 사라지므로 절대적으로 그림자는 숨어있어야 한다. 환한 세계로 나오면 그림자는 즉시 죽는다. 그러나 볼 수 없지만 추론하여 알 수 있다. 물체 너머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신을 볼 수 없지만 알 수 있다.


살불살조라는 말은 있지만 아직 살불살조 하는 양반을 보지 못했다. 석가를 뛰어넘으려면 깨달음이 최종목적이 아니어야 한다. 그 다음 단계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깨달았다’고 선언해봤자 ‘누가 물어봤냐고?’하는 힐난이 돌아올 뿐이다. 깨달음은 사람을 행복으로 인도하지만 행복의 양을 늘리는게 아니라 질을 높이는 것이다. 행복의 양을 늘리려면 술과, 담배와, 마약과, 섹스와, 드라마와, 오락과, 놀이와 돈에서 구하면 된다. 술과 담배가 해롭다지만 적당히 하고 의사에게 치료받으면 된다. 문제없다.


행복의 질을 올리는 것이 성취고, 사랑이고, 자유고, 존엄이다. 존엄은 사람과 사람을 공동체 안에서 만나게 하고, 사람과 자연을 더 밀접하게 하고, 인간이 모든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한다. 그러한 반응들은 서로간에 더 많은 하이퍼링크를 만든다. 더 많은 뉴런들을 만드는 거다. 인간의 뇌는 태초에 원생동물의 자극반응들이 집적되어 건설된 것이다. 작용반작용 법칙에 의해 자극이 반응으로 복제된 거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거대한 생명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진행해온 인류의 집단작업에 의식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가 실로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요한건 깨달음의 경쟁력이다. 깨달음은 모형으로 사고한다. 모형은 복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대량생산이라는 현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모형은 직관으로 소통하게 한다. 수백년간 수학자들로 하여금 밤잠을 설치게 만든 푸앙카레의 수백가지의 난제들은 모두 직관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푸앙카레의 머리 속에 모형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무질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푸앙카레는 난삽하게 상상한 사람도 아니고, 부지런히 계산한 사람도 아니다. 직관하고 통찰한 사람이다. 리만기하학도 마찬가지로 직관력의 산물이다. 그것은 빠른 두뇌회전에 의한 계산력의 산물도 아니고, 몽상가의 상상도 아니고 일정한 이론의 모형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대칭성의 연쇄고리에 의한 당위성의 집적이다. 모형에는 오류가 없다. 오류가 있는 모형은 작동하지 않고, 따라서 복제되지 않고, 그러므로 생산성이 없기 때문이다. 낳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구조론의 모형은 열심히 계산하여 문제를 푸는 노가다 작업도 아니고, 공허한 상상도 아니다. 푸앙카레의 뇌속으로 들어가서 그 직관의 모형을 슬그머니 가져오는 것이다.


 
1.jpg


자를 두개 합치면 콤파스가 되고, 콤파스 둘을 합치면 대저울의 추를 거는 고리가 되므로, 천칭저울의 됫박이 되고, 됫박 둘을 합치면 천칭저울이 된다. 저울은 대칭을 이루고 있다. 구조론의 모형은 대칭구조의 저울을 해체해서 저울접시에서 됫박을 얻고, 됫박을 해체하여 콤파스를 얻고, 콤파스를 해체해서 자를 얻고 자를 해체해서 눈금을 얻는 것이다. 집적된 대칭성의 연쇄고리다. 이 연쇄고리는 한 방향으로만 풀리게 되어 있다.

 

  2.jpg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의 대칭성이 한 방향으로만 전개하여 기승전결의 자기완결성을 구성한다. 사건의 기승전결을 이루는 동그라미의 완전성 원리에 의해 우리는 온 길을 알 수 있고, 갈 길을 알 수 있다. 풀리는 방향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얽힌 실은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풀리고 반대방향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다른거 없고 우리는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왜냐하면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기 때문이다. 쏜 화살은 에너지가 남아있기 때문에 계속 날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기승전결의 동그라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방향으로만 풀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부구조에 의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종이 소리를 낼때까지, 메아리가 들릴때까지, 신에게 닿아 위대한 소통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공동체에 하이퍼링크를 연결하고 집단인격에 뉴런들을 연결해야 한다.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11.02.23 (02:07:43)

인간의 육체의 성장은 양적크기의 성장만이 아니라 뇌와 신경들의 감각통합이 제대로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공동체의 뉴런을 연결하는 일은

집단지능, 집단인격의 성장을 가져오는 일.

마침내 완정성의 성장이 이루어질 때까지.

 

 

[레벨:15]오세

2011.02.23 (16:41:46)

부처를 딛고, 예수를 딛고,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11.02.23 (18:11:48)

부처님 제일 반기시지 싶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1.02.23 (19:32:35)

 

조금 답답했던 부분은 뭔가 일이 발생하면..그 다음의 해결책은..?

그 다음에서 늘 막히는 말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마음이 다 풀어져서 나타난 현상으로 결론만을 가져다 주기에...

그 과정을 거쳐가는 인간으로서는 그 중간을 어떻게 해결하고 대처하고 마무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미숙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실컷 화풀이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지쳐서 그 마음을 놓아 버리게 되다보면...그것은 치유가 된 것이 아니고보면...

 

하지만 원인과 결과에서 원인을 보면 그 과정의 문제는 저절로 풀어지게 됩니다.

알면 바로 이해되는 것을....그것에 대해 설명이 안되니 답답한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든 풀어야 사는데 풀지 못하니 답답해서 죽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구요.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왜 그러한지 제대로 된 말을 들을 수는 없고, 아니면 그냥 속을 감추고 있어야 하거나...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러한 것들이 자꾸 끌어 올려지면...마음은 갇혀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되므로...잘 풀려지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불교를 알면 알수록 불교는 무신론인데..

(하지만, 부처 당시의 상황을 불경에서 보자면 부처가 신이나 혹은 다른 어떤 존재들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타 종교나 관념에 대해서 외도라 지칭하는 것은 불교의 바깥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라고 생각되기도 하구요. 이 외도들은 고행이나 신을 섬기는 것이 주가 되기 때문에 인간이 주체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인간이 주체적이어야 뭔가를 해결할 수 있는데..의탁하고, 의지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자신이 주체적이지 않은 상황인데, 신에게만 의탁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더구나 인간이 온전히 신에게만 의탁한 상태에서 구원해줄 신은 없다라는 의미라고 생각되기도 하고...^^;....어찌보면 부처는 스스로 온전하게 신을 받아 들이고 하나가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존재는 오온의 집합이다. 색수상행식으로 풀어서 존재의 실체를 보고, 마음의 작동을 보고, 연기법으로 존재가 어떻게 색이 되었다 공이 되었다 하는지를 밝힌 것이고, 거기에 부처가 본 세상의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사성제를 설한 것이지 않을까...? 해탈은 대체로 이해도로 접근하고 있지만, 열반에 대한 의미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므로... 열반에 대한 것에서 부처는 이것은 시설할 수 없다라고 하셨는데... 일반인들은 열반하면 없어지는 것인가? 그래도 뭔가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혹은 여전히 품게 되는 것이구요.^^ )

 

 

불교는 대를 거치면 거칠수록 종교화되어 신들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신의 숫자는 인간이 필요한 만큼이고, 그러다보면 힌두교와 겹치게 되고, 그래서 그 신들을 무한정 늘릴 수 없으니 신들의 소임이 자꾸 늘어나게 됩니다. 신의 일이 많아진 것인데... 결국 이것을 하나로 돌릴 수 있어야 하는데..그러다보면 기독교의 유일신과 겹치게되고, 그러다보면 거봐라 우리 종교가 최고지 하는 소리들과 직면해야 되고....

그래서 신의 개념을 사람들 스스로 명확하게 이제는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6]블루

2011.04.11 (09:37:59)

다시봐도,,,,글 참 좋소.뭐라 표현은 못해도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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