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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983 vote 0 2010.09.10 (11:40:21)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이어지는 글입니다.

 

 “블랑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뉴올리언즈에 도착한다. 사교계를 드나들던 명문가 출신으로, 이 퇴락한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귀부인 차림새를 하고 동생 스텔라의 허름한 아파트를 찾아간다. 동생의 남편 스탠리는 바웬사처럼 무뚝뚝하게 생긴 폴렉 노동자로 맥주와 카드놀이에 빠져있는 난폭한 사내다. 그는 처음부터 상류층 흉내를 내는 블랑쉬에게 적개심을 갖는다. 노동자 계급의 고단한 삶에 적응할 수 없던 블랑쉬는 곧 멋진 귀족 남자를 만나 상류사회로 옮겨갈 것처럼 떠벌이면서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하려 하고, 스탠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스탠리의 친구 미치는 블랑쉬에게 관심을 가지는데..”(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최근에 잦아진 연예인들의 저급한 공방을 지켜보면서 겉으로 전시되는 언어 이면에 또다른 언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사교계의 허영에 들뜬 블랑쉬는 동생의 남편 스탠리 앞에서 온갖 화려한 거짓말을 늘어놓지만 그것은 팩트로 본 세계이고, 테마로 보면 스탠리의 친구 미치 앞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 안에 절절한 진정성이 있다. 단지 그 테마가 아둔한 스탠리의 관심 밖에 있었을 뿐이다. 서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소통되지 않는다. 작가는 소통의 실패, 소통의 단절을 드러내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 안에서 희미한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팩트로 논쟁하여 상대의 오류를 입증하고 단칼에 베어넘기려 하지만, 한 방에 보낸다면서 끝내 보내지 못한다.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그리고 연예인과 안티세력 사이에, 또 개혁세력과 수구꼴통 사이에.. 도처에 교착되어 있다. 서로 냉소하고 비아냥할 뿐 정작 상대방을 설득하지는 못한다. 자기만의 성에 갇혀서 소리만 지르고 있다. 감정만 쌓여간다. 테마로 보아야 한다. 상대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보지 말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점성술에 빗대어 화성남자와 금성여자라는 말도 있었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에 확실히 언어의 차이가 있다. 스탠리는 팩트를 위주로 하는 화성어를 쓰고 블랑쉬는 테마를 위주로 하는 금성어를 쓴다. 애초에 소통은 불발하고 만다. 이를 남성의 ‘합리적 가치’와 여성의 ‘미학적 가치’로 대비시켜 풀어낼 수 있다.

 

  합리적 태도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합리적 가치만 고집한다면 그것이 남성 위주 마초적 발상일 수 있다. - 물론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맥락에서 그러할 뿐 - 합리적 태도란 원인과 결과, 동기와 목적을 일치시키려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건 목적지향적인 남성 위주의 사고일 수 있다. 무뚝뚝한 폴렉 노동자 스탠리의 관점이다. 데이트를 한다고 치자. 여자가 질문을 던진다면 실은 거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함이 아닌 경우가 많다. 여자가 거미에 대해 묻는다. 유식한 남자가 거미의 학명부터 시작해서 독이 있는 거미와 없는 거미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알고있는 지식을 다 동원하여 장관설을 푼다면 어떨까? 이거 영화에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목석같이 고지식한 남자 차승원이 적역이 되겠다. 여자 마음을 읽지 못해 데이트에 실패하고 마는 흔한 장면 말이다.

 

  여자가 ‘나 예뻐?’ 라고 질문했다면, 예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가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겠는가? ‘저번에 내가 예쁘다고 정답을 알려줬는데 왜 또 묻지? 그새 까먹었나?’ 이건 아닌 거다. 실은 질문이 아니다. 답변은 필요하지 않다. 백화점에서 ‘이 옷 나하고 어울려?’하고 질문했다면 어울리는지 혹은 어울리지 않는지가 궁금해서 물어보고자 한 질문이겠는가?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멋진 옷을 입어보는 그 자체이다. 남자의 감탄어린 시선 안에서 주인공으로 서 있고 싶은 것이다. 주인공에게 포커스가 맞춰지고 객석에서 갈채가 쏟다진다면 더욱 좋다. 그러한 멋진 장면을 그림으로 연출하고 싶은 것이다.

 

  시골사람이 ‘밥 먹었는가?’ 하고 인사하는데 고지식한 젊은이가 ‘안 먹었습니다’ 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가 혼쭐이 났다는 한소공의 소설 마교사전 한 꼭지가 기억난다. 시골에서 ‘밥을 안먹었다’는 말은 ‘밥을 달라’는 요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경을 치는 수가 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은 명석한 답변이 아니라 공감과 호응이다. 대화 자체를 즐기는 것이며, 단지 남자의 밝고 유쾌한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며, 호응하는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으로 머무르고 싶은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분석도 여자가 싫어하는 것이다.

 

  합리적 태도가 미학적 태도와 대비될 때 때로 그것은 지식인의 안전한 동굴일 수 있다. 도피로일 수 있다. 안다는 사람도 실은 세상의 한쪽 절반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모든 일에 분명한 원인과 그에 따른 명확한 결과 그리고 분명한 동기와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의 대화는 질문과 답변이 단선적인 대칭구조를 가지지만 여자의 대화는 동심원 구조 혹은 입체적 구조다. 더 복잡하고 더 높은 경지다.

 

  러셀의 기독교 비판이 대표적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치지 못하고 신앙인들의 관심사가 아닌 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러셀의 모든 주장이 사리에 맞고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해도 여성들이 요구하는 미학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허무할 뿐이다. 합리주의는 칼이라면 미학주의는 그릇이다. 러셀은 칼로 잘라서 진짜가 아닌 것을 제거할 수 있을 뿐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을 담을 그릇은 제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반쪽짜리 지식에 불과하다. 완제품이 아니라 반제품이다.

 

  여자의 질문은 때로 답변이 아닌 호응을 필요로 하며, 사실의 규명과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분위기의 명랑함과 공감하는 즐거움을 꾀한다. 여자의 동기는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쪽을 바라보고 저쪽을 이야기 한다. 여러 번 데이트에 실패하고 난 다음에 겨우 깨닫게 된다. 그것도 머리로만 알 뿐 정작 현장에서는 여자의 무드에 호응하지 못하고 다시 무뚝뚝한 남자로 되돌아가고 만다.

 

  여자는 남자의 답변이 맞는 소리인지 허튼 소리인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 목소리가 어떤 톤의 굵기이며, 그 얼굴빛이 얼만큼 상기되어 있는지를 살필 뿐이다. 여자는 오히려 어긋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가 호응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비틀어서 남자가 따라오는지를 본다. 그런거 모르고 탄식하며 다음 아고라 사이트에 ‘도대체 여자는.. ’ 하는 제목으로 글 올리는 남자 많다. 여자의 변덕에 얼마나 열받았는지 다음날 그것을 만화로 그려 올린 사람도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맞어맞어’ 하고 박수를 쳤지만 참으로 아둔한 거다. 이는 소통이 막힌 것이다. 정 모르겠다면 케이블TV에서 하는 ‘남녀탐구생활’이라도 보시라. 결론적으로 여자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컨셉이자 화두이다. 그걸 포착하는 것이 개념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대개 개념이 없다. 단지 문제의 해결이 있을 뿐.

 

  여자의 언어가 남자의 언어보다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다. 그 점에서 여자의 판단이 뛰어나고 남자의 판단이 우둔한 경우가 많다. 남자는 소통의 센스가 떨어지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 대신 남자는 집단적인 목표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아는 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지만, 문제의 해결에 집중한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정치, 스포츠, 주식, 자동차, 골프, 그리고 여자이야기를 주로 한다지만 대개 어떤 문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형태로 대화는 진행된다. 여자는 다르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런데’ 하며 공감하는 형태가 많다.  

 

  우리는 언어가 팩트위주로 진술되며 객관적 사실을 전달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백인 탐험가가 도끼 사용법을 알려줘도 마법의 원리를 믿는 부족민을 계몽하지 못하듯이, 언어의 구조 곧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에 따라 가치체계 전반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의사소통은 실패다. 사실의 전달에서 지식을 구하기보다, 의미와 가치의 전달에서 지혜를 구하고, 개념과 원리의 전달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빠르다.  

 

  ◎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

 

  돌도끼를 쓰는 부족민은 모든 질병은 악령에 의해 오는 것이며, 주술사의 마법에 의해서만 질병이 퇴치되는 것으로 믿는다. 쇠도끼를 쓰다가 손가락을 다쳤다면 이 또한 악령의 해꼬지 때문이다. 그것은 부족민 의료세계의 작동원리다. 그것이 사방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원리’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백인의 말대로 쇠도끼에 손가락을 다친 것이 악령 때문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질병들도 악령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마을의 주술사는 필요없는 존재이며, 이는 부족의 권력서열을 바꾸는 엄청난 문제로 된다. 쇠도끼 하나 때문에 자칫 부족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쇠도끼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주술사를 추방할 것인가? 양자택일의 문제로 된다. 이것이 원리의 세계다. 원리는 전체가 한 덩어리로 이어져 있어서 하나를 바꾸면 모두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쇠도끼를 버려 재난을 막아야 한다. 부족민은 나름대로 현명하게 판단했다. 그걸 이해 못한 백인이 개념이 없는 것이다. 데이트 현장에서 분위기를 맞춰주지 못하고 ‘내가 뭘 잘못했나? 도대체 문제가 뭐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남자처럼.

 

  피자집이라도 가면 어떨까? 남자들은 ‘문제의 해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오늘의 문제는 피자주문이다. 남자들은 이 골치아픈 문제를 어떻게든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무거나 시키는 것이다. 여자는 다르다. 남자와 마주보고 있는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다. 허둥지둥 주문을 재촉하는 남자야말로 분위기를 깨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아직도 많은 남자들이 복수하듯 이를 갈며 게시판에 ‘나의 피자주문은 왜 실패했는가?’ 체험담을 써 올리고 있다.  

 

  화물교를 믿는 비누아투의 부족민도 마찬가지다. 백인에게 있는 화물이 부족민에게 없다. 하느님이 보내오는 화물을 백인이 중간에서 가로채기 때문이다. 화물의 존재에는 크나큰 비밀이 숨어 있으며, 여기에 온 우주가 작동하는 이치가 맞물려 있다. 백인의 말대로 화물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면, 부족민의 삶은 참으로 허무한 것이 된다. 인생 전체를 뜯어고쳐야 하는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개념이다. 백인은 개념이 없기 때문에 원주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동자 스탠리가 사교계 출신의 블랑쉬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남자의 화성어와 여자의 금성어가 충돌하듯이 언어 사용법이 다르다. 무엇인가? 백인은 화물이 공장에서 나온다고 말하지만 그 공장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공장은 과학에서 나온다면 과학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과학은 진리에서 나온다면 진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렇게 계속 추구해 가다보면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백인이 공장 운운하는 것은 부족민을 부려먹기 위해 얕은 수를 쓰는 것이며, 결국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하느님과 빅딜을 하는 수 밖에 없다.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더 열심히 화물교를 숭상해야 한다. 이렇게 전부 엮어서 일괄타결로 가려는 것이 원리다. 그러므로 부족민은 결코 설득되지 않는다.

 

  인간은 어리석다. 그러나 정녕 무엇이 어리석다는 말인가? 거짓말을 일삼다가 폭행을 당하고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마는 블랑쉬?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화성남자와 금성여자? 쇠도끼를 버리고 돌도끼를 고수하는 부족민? 화물교를 숭상하는 비누아투 사람? 러셀의 과학을 믿지 못하고 종교를 믿는 신앙인? 아니다. 잘못 알고 있다. 단지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돌도끼를 고수한다고 믿는 백인의 무개념이 더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쇠도끼를 주기 전에 주술사부터 계몽시켜야 했다. 바꾸려면 전부 바꾸어야 한다. 전부 바꿔주지 못하면서 바꾸려고 시도하면 위태롭다. 비누아투의 화물신앙을 비웃을 자격이 없다. 그렇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원리를 보지 못하고, 개념을 보지 못하고, 가치와 의미를 보지 못하고 말단의 팩트에 집착하는 문명인의 어리석음이다. 그들은 지능이 낮다. 백인 탐험가의 판단력은 불을 까이고 마는 돼지와 비슷한 수준이다. 자기네의 몽매함을 알지 못하고 부족민을 비웃는다.

 

  알아야 한다. 동화정책을 펴서 애보리진 어린이를 납치한 호주인의 악행을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했을 정도로 인간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히틀러의 악행을 비난하기 전에 독일인의 다른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정도로 그들이 매우 어리석다는 사실을. 그렇다. 인간은 원래 어리석다. 그렇다면 이 발달한 문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판단력이 아니라 바깥뇌의 작동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깥뇌의 작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족민이 쇠도끼와 돌도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이것이 마법의 문제이고, 그러므로 주술사를 마을에서 추방해야 하는 문제와 연결되며, 자칫 부족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며 즉 여러 문제들을 연동시켜 큰 하나의 문제로 만들어 일괄타결을 하는 그 자체다. 다시 말해서 부족민이 쇠도끼와 주술사를 연계시켜 판단한 것은 영리한 판단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부족들이 함부로 백인의 쇠도끼를 받아들였다가 전통가치를 잃고 문명세계와 부족민 세계 양쪽에 다 적응하지 못한 채 부족이 파멸되는 재앙을 겪어야 했다.

 

  호지 여사가 라다크에서 지키려고 했던 것도 그러하다. 백인의 쇠도끼를 받아들인 라다크의 젊은이들은 청바지를 입고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오토바이를 몰아 라다크에 하나 밖에 없는 도로를 질주한다. 그들은 거리의 삐끼가 되어 남을 속이고 있다. 도무지 속임수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순수한 젊은이들이 말이다. 그들은 자부심을 잃었고 그들의 정신은 황폐해졌으며 그는 시골의 여자친구와는 헤어졌고 그의 미래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팩트로 보면 돌도끼 고집은 어리석은 결정이지만 원리로 보면 지혜로운 결정이며 바깥뇌의 작용에 의해 합리적인 판단이다. 인도와 필리핀은 우리보다 300년 더 일찍 백인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쇠도끼를 의심하지 않고 덥썩 받아들인 것이다. 그 결과 자주성을 잃었다. 그들은 아직도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본은 200년간 쇄국정책을 펴서 백인을 막았다. 그러나 동경만에 흑선이 출현하자 방침을 바꾸어 전부 바꾸었다. 그들은 쇠도끼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주술사까지 제거해 버린 것이다. 부족 내부의 전쟁을 각오한 결정이었으며 실제로 일본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도 쇄국을 했지만 한번 바꾸기로 결정했을 때는 완전히 바꾸었다. 이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아랍은 제대로 쇄국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인에 의해 나라가 갈갈이 찢어져서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부족의 전통과 현대의 산업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중국 역시 전부 바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홍콩을 통해 교역하는 등 쇠도끼만 받아들이고 주술사인 청조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결국 내전이 일어났다. 팩트가 아니라 원리가 중요하다. 쇠도끼만 받아들였다가는 점점 일이 커져서 곤경에 빠지고 만다. 이쯤은 부족민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원리는 바깥뇌의 조직에 의한 집단지능 시스템의 건설로 얻어진다. 그것은 부분을 엮어서 전체를 이루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을 반응하게 하는 것이며 종교의 기능도 거기에 있고, 학계나, 재계나, 언론계나, 정계나, 인터넷이나 다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반응하는가이다. 바깥환경과의 밸런스와 포지션 구조 안에서 반응할 때 인간의 지능은 향상된다. 주도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쇠도끼는 도무지 반응하지 않으므로 그 안에 악령을 불어넣고 마법으로 봉인하여 반응하게 한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의 반복되는 일상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지식은 인간에게 선행을 가르치지만 어제도 선행을 했고 무려 오늘도 선행을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건 당황스런 일이다. 그러므로 쇠도끼에 악령을 불어넣듯 신을 개입시켜 하루하루의 삶이 반응하게 하는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학적 판단이다. 무료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신앙이란 하루하루가 반응하고, 매 순간이 반응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판단력이 상승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당장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알아채야 한다. 물론 종교의 판단은 옳은 판단이 아니다. 그러나 어떻든 판단하고 있다. 부분을 보면 비합리적이지만 전체로 보면 미학적이다. 반면 과학의 세계는 반응하지 않는 세계, 죽은 세계, 허무의 세계, 순간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물론 지식인들은 높은 지위에 있어서 매우 바쁘기 때문에 매 순간 삶의 보람을 느끼며 알콩달콩 잘 살아가지만 대중들은 그렇지 않다. 대중들은 높은 지위에 있지 않고 바쁘지도 않고 삶의 보람도 없기 때문에, 매 순간 반응하지 않으면 허무의 바다에 빠져 질식하고 만다.

 

  종교는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공동체에 위임하는 것이다. 대신 얻는 것은 부분을 연결하에 전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판단을 위임하는 대신 신과 만나고, 우주와 만나고, 진리와 만나고, 역사와 만나는 것이다. 개인의 수준에서 만날 수 없는 것을 만나기 위하여, 권한을 위임하는 방법으로 공동체를 결성하여, 대표자를 내세워서 신과 접촉하고, 그 방법으로 일상의 매 순간이 생명력있게 반응하게 함으로써 더 영리하게 본질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지식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진리와 만나고 우주와 만날 수 있다.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대중은 소액주주가 위임장을 써서 대표하게 함으로써 주식회사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듯이, 권한을 위임하는 방법으로 본재의 본질이 반응하게 하는 것이다. 매 순간의 일상을 정당화 할 수 있다. 납득시킬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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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희정

2010.09.12 (12:38:36)

한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여성이 더 뛰어나고 고수고 우월하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잘 않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여성이 더 뛰어난것 같습니다.
남성보다 지구력이나 환경에 대한 적응력등등... 그래서 수명도 더 길고요.
하지만 대화는 아닌것 같아요.
여성들과 무슨 말을 하면 참으로 모호하게 하죠.
부부지간에도 속내는 다른뜻을 담고 있지만 겉으로 내뱉는 말은 이상하게 하거든요.
왜 말을 저렇게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고 말시름 이르킬까 불만 많습니다.
남자가 아둔해서 못따라가면 잘아는 여자들이 좀 알아서 잘 유도를 해야 더
뛰어나다고 할수있는데 오히려 번번히 말다툼만 일어나는데도 계속 그러거든요.
그것이 입체적으로 하는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여성들이 뛰어나면 화해나 설득도
여성들이 먼저 해야 할텐데 그런경우는 좀 드문것 같습니다.
이나이에(현재50대) 동갑나기 여자친구들이 있는데 어릴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게 없더군요.
내숭떠는게 어쩌면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지...
여자들은 왜 그러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는데 다음편에 그런 이야기좀 부탁드립니다.
너무 번거롭게 해드린것같아 죄송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9.12 (17:33:22)


여성이 더 뛰어나고 고수고 우월하다는 판단은 누가 했나요?
전 그런 적이 없는데.

여성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제 글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납득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 모두를 이해하는 입장과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이 있을 뿐입니다.

부분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오해를 심화시킨다는 뜻이될 수 있지요.
이건 이해나 오해의 문제가 아니라 입장과 태도와 포지션의 문제입니다.

보통은 피아구분을 하지요.
이해한다는 말은 우리편이라는 뜻이 되고 이해하지못한다는 말은 한 편이 아니라는 뜻이 되지요.

[레벨:5]희정

2010.09.12 (18:24:44)

아~ 제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사실은 그런 말도 없었는데 제 느낌으로
지어낸 말이고요.
다시 읽어보니 그런 의미가 아닌것 같군요.
죽~ 읽다가 어느부분이 딱 걸렸는데
아마도 아래부분을 보고 그런거 아닌가 싶네요.
동렬선생 글은 읽다보면 좍~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거기에 동화되다보면
머리속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지더군요.
에구~ 정신차려야지..

 

  여자의 언어가 남자의 언어보다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다. 그 점에서 여자의 판단이 뛰어나고 남자의 판단이 우둔한 경우가 많다. 남자는 소통의 센스가 떨어지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 대신 남자는 집단적인 목표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아는 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지만, 문제의 해결에 집중한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정치, 스포츠, 주식, 자동차, 골프, 그리고 여자이야기를 주로 한다지만 대개 어떤 문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형태로 대화는 진행된다. 여자는 다르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런데’ 하며 공감하는 형태가 많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9.12 (18:52:33)


메타언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어에 대한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지록위마의 고사를 아실 겁니다.
'사슴은 말이다'.. 조고의 명제.. 이를 메타언어로 풀면

'3세황제 자영은 가케무샤고 사실은 내가 황제다'
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신하는 전부 죽었습니다.

이런 구조가 여자어에 더 발달되어 있습니다.
남자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한 절대 메타언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레벨:15]오세

2010.09.12 (18:57:25)

"결론적으로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한 절대 메타언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메타언어는 곧 관계언어고, 구조론이 바로 관계언어죠.
구조론을 익힌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9.12 (19:03:10)


아기가 칭얼대면 엄마는 곧 그 원인을 압니다.
아빠는 모릅니다. 아기의 두서없는말 내용에서 답을 찾아

논리적으로 격파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 이건 대화가 안 되는 경우지요.
그런데 때로는 아빠가 애들을 더 잘 다룹니다.

왜냐? 자기의 목적과 일치하기 때문이지요.
즉 자신이 야외에 놀러갈 목적인데 꼬맹이를 데리고 갈 때는

신통하게 아이의 마음을 잘 읽습니다. 기가 막히게 다루지요.
반대로 엄마는 애들과 씨름하며 끙끙 앓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읽느냐 못읽느냐는 오로지 마음에 달린 겁니다.

[레벨:15]오세

2010.09.12 (19:07:23)

전율이 이는구려.
마음을 읽느냐 못읽느냐는 오로지 마음에 달린 것이라.
내 필생의 화두로 삼겠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9.12 (19:49:10)


여선생님이가르치면 여학생이 더 집중하여 공부를 잘하고
남선생님이 가르치면 남학생이 더 집중하여 공부를 잘 한다고 합니다.
이건 과학자들이 보고한 거니까 아마 맞겠지요.
초등학교에 여선생님 비율이 증가해서 남학생 성적이 떨어졌다는 말도 있는데
남녀간에 언어의 차이가 있으며 그것이 우월하고 열등하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특정상황에서 남자가 우둔하게 또 반대상황에서 여자가 우둔하게 행동하는 일은 분명히 있습니다.
노소간에도 문화권 간에도 그런 차이가 있을 수있습니다.
이는 다양성관점에서 접근해야지 차별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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