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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561 vote 0 2017.12.12 (22:42:24)

     

    팟캐스트에서 했던 이야기에 몇 마디 보충하자. 비유로 말하면 창의는 재료에 뭐를 섞는 게 아니고 새로운 요리의 철학을 만드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중국요리의 철학은 몸에 좋다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중국인들은 한국에 와서 몸에 좋은 삼계탕을 먹고 홍삼을 산다. 나라마다 그런 음식철학이 있다.


    일본요리의 철학은 원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일본만화 맛의 달인이고 일본요리는 눈으로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성이 들어간 것처럼 연출하는 것 외에 별것 없더라. 일본은 봉건영주가 많아서 말하자면 허세의 요리철학이 되겠다. 소규모 식당에 몇 안 되는 손님 앉혀놓고 말로 때운다.


    요리사가 손님과 대화한다. 참치 대뱃살이 어떻고 이 부위가 어떻고 저 부위가 어떻고 시시콜콜 설명한다. 솔직히 짜증나는 거다. 뭐 그것도 익숙하면 나름 재미가 있겠지만. 프랑스 요리도 대략 말로 때우려 드는 게 허세요리다. 여기엔 어떤 소스가 어울리고 여기에 뭐가 들어갔고 하며 설명이 복잡하더라.


    한국요리는 특이하다. 일단 반찬이 수십 가지가 나온다. 그 의미는? 고객의 입맛에 맞출 이유가 없다. 그 반찬이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다. 서양요리는 대개 단품이다. 한 가지 요리에 온갖 재료가 들어간다. 안 먹을 수 없다. 그렇다는 의미는? 요리의 주재료와 충돌하면 안 되는 것이다. 앙상블의 문제다.


    재료 간에 궁합이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지고 볶고 삶고 튀겨서 마찰의 소지를 제거해버려야 한다. 중국음식이 그러하다. 야채의 독성을 완전히 제거한다. 마늘이든 파든 맵고 시고 쓴 것은 식물이 포식자인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이다. 채소는 염소와 토끼가 싫어하는 독을 품고 있다.


    중국요리는 채소의 독을 제거하거나 중화시킨다. 한국요리는 그냥 둔다. 독한 것은 독한 맛으로 먹는다. 신 것은 신맛으로 먹는다. 매운 것은 매운맛으로 먹는다. 반찬이 수십 가지나 되므로 그래도 된다. 해물누룽지탕에 수십 가지 재료가 들어가지만, 중국맛 하나로 획일화된다. 새우는 새우맛이 안 난다.


    죽순은 죽순맛이 안 난다. 해삼은 해삼맛이 안 난다. 모든 요리에 중국맛이 난다. 그 맛은 소스맛이다. 무엇이 맛인가? 필자는 미식가가 아니다. 나는 맛있는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맛있다는 것은 혀에 착착 감긴다는 것이다. 감칠맛이다. 아미노산 맛이다. 아니면 설탕맛이거나 부드러운 재료의 식감이다.


    나는 즐거운 분위기를 추구한다. 뭐든 조미료 잔뜩 넣고 설탕 뿌리면 맛있다. 백종원이 뭔가를 아는 거다. 부드럽게 씹히고 목구멍에 술술 잘 넘어가주면 좋다. 그런데 좋은 게 과연 좋은 것일까? 한국인의 요리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은 산채밥이다. 산채는 지리산 산채와 농부가 밭에서 재배한 것이 다르다.


    같은 식물이라도 깊은 산중에서 난 것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 풍미를 살릴 수 있다. 더덕구이는 매워야 한다. 소백산 산더덕은 매워야 한다. 부드럽게 가공하면 안 된다. 무슨 뜻인가? 외국요리는 너무 과도하게 조리한다는 말이다. 열 시간씩 고면 좋은 맛이 난다. 미역국은 두 시간을 끓여야 제맛이 난다.


     많은 경우 과잉조리다. 정성을 들여서 가격을 올려받을 수 있겠지만, 좋지 않다. 왜? 입맛에 맞추려는 그 행동이 간사하기 때문이다. 요리가 사람 입맛에 맞추면 안 되고 사람이 요리의 맛을 찾아가야 한다. 찾아가는 맛이어야 참되다. 사람에 맞추면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므로 점차 평균화되어 버리는 거다.


    평균맛이 되어버린다. 홍어맛이 간재미맛으로 된다. 한국요리는 죄다 독하다. 젓갈이 독하고 나물도 독하고 김치도 독하다. 한국요리는 능동적이다. 손님이 직접 고기를 굽는다. 완성된 요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먹는 게 아니라 직접 요리에 참가한다. 그래서? 풍성해진다. 비빔밥이라도 덜 비벼 먹을 수 있다.


    열 사람이 같은 요리를 먹어도 각자 다른 맛으로 먹는다. 나는 줄 서서 먹는 집에 가지 않는다. 줄 서 있다는 사실 자체로 기분 잡친 것이다. 내가 왜 줄을 서나? 맛집순례는 사절이다. 맛은 주관적이다. 바닷가에서는 해산물을 먹고 산골에서는 산채밥을 먹는 거다. 그 지역과 잘 어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주방장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나 하는 의도에 관심이 있다. MSG가 어떻다니 하며 과잉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좋지 않다. 10시간을 푹 고아서 정성을 들였다는 식의 과잉조리 좋지 않다. 지나치게 장식하고 모양을 낸 것은 좋지 않다. 정갈한 요리를 추구한다며 조금씩 담아내는 것도 좋지 않다.


    과잉조리, 과잉논리, 과잉탐미, 과잉장식, 과잉정성의 다섯가지 과잉을 제거해야 한다. 뭐든 과잉되면 거짓이 진실을 이긴다. 넌 열시간 고았니? 난 스무시간 고았어. 이런 식의 경쟁이 되면 좋지 않다. 심플해야 한다.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라야 한다. 그래야 상황이 통제되는 것이다. 손님이 주도권 쥔다.


    과잉경쟁으로 가면 손님은 바보가 되고 요리사가 고객을 갖고놀며 장난치게 되는 것이다. 주방장이 억지논리를 주장하며 자기 페이스로 끌고가려고 하면 안 된다. 이 요리에는 이 소스가 맞다며 우겨대면 피곤한 거다. 손님이 다양한 실험을 하도록 놔둬야 한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창의하는 맛이다. 


    요리재료 각각이 자기 주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재즈처럼 즉흥연주가 된다. 너무 짜다? 그러면 밥을 한 숟갈 더 먹으면 된다. 너무 싱겁다. 그럼 반찬을 한 젓가락 더 먹으면 된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게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마디 명사로 정의해야 한다. 그것이 창의력의 요체가 된다.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참다운 맛? 찾아가는 맛? 풍성한 맛? 순수한 맛? 진정한 맛? 이기는 맛? 나는 한국 음식의 장점을 내 의도대로 통제하는 데서 오는 맛이라고 본다. 더 맵고 짜고 싱겁고 달고 쓰게 입안에서 조절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조직된다. 그것은 매우 즐거운 게임이 된다.


    한국요리가 세계화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요리의 철학이 워낙 독특해서 잘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맛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요리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의 문제다. 어떤 것을 맛이라고 규정할 것인지다. 철학은 방향성의 문제다. 이겨야 한다는 말이다. 이쪽 페이스로 끌고 와야 하는 거다.


   창의교육의 진짜 의미는 다양한 아이디어로 삶고 볶고 데치고 졸이고 굽고 튀기고 하여 서구인의 입맛에 맞추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러한 철학승부에서 이겨서 상대쪽을 우리쪽 페이스로 끌고 오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켜 가야 한다. 이것이 맛이라고 우기고 승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다음 단계를 제시해야 한다. 그냥 맛있다가 아니라 맛있어서 그래서 어쩌라고? 여기에 할 말이 있어야 한다. 지중해 지역이라면 시에스타 문화가 있어서 점심을 느긋하게 두 시간씩 먹어주는 것이다. 미국은 반대로 패스트푸드다. 길거리에 서서 햄버거나 먹고 바로 일하러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요리는? 반찬을 수십 가지 놓고 제왕처럼 먹으려면 거기에 걸맞는 시간과 공간의 투자가 따라야 한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수십 가지 반찬을 먹을 수는 없잖은가 말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 궁중의 숙수들이 차린 요릿집은 기생 앉혀놓고 어찌 시간을 끌었던가 본다만.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만남이라는 타이틀이라도 걸어야 한다. 창의가 안 되는 것은 굽고 볶고 지지고 삶고 데치고 튀기는 아이디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어떤 만남인지 규정하는 타이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타이틀을 생각해봐야 한다. 조선왕조시대 선비들은 어떤 타이틀이 필요했던가?


   정리하면 창의가 안 되는 것은 주입식 교육 때문이 아니라 첫째, 시장이 작거나 없고, 예컨대 패션을 하려면 파리로 가고 미술을 하려면 뉴욕을 가고 뭐를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하고 이런 게 있어줘야 한는 것이다. 둘째, 개발자에게 이거 내일까지 만들라고 시킬 잡스와 같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없다.


   셋째, 방향을 제시하고 동원력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즉 경제가 발전해서 한국이 분야를 선점해서 표준을 정해야 한다. 프레임 싸움을 이겨야 이기는 거다. 창의력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주입식 교육의 폐해는 우리 어린이들이 불행하다는 점과 자격미달자가 명문대 들어가는 것이다.


   창의력과 상관없다. 창의가 안 되는 게 아니고 서울대가 망한다. 주입식 교육을 하니까 서울대의 질이 떨어져서 이류대학이 되어버린 거다. 천재 놔두고 시험 잘 치는 둔재 뽑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창의가 잘 되는 것은 유태 자본이 창의하라고 시키기 때문이다. 잡스 같은 사람이 시켜야 된다.


    다음은? 좋은 동료가 있어야 한다. 창의력 교육을 한다고 창의가 되는 게 아니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성실한 동료와 좋은 시장이 갖추어져 있을 때 창의한다. 철학있는 지도자+성실한 동료+우수한 시장과 자본이 있으면 창의하지 말라고 해도 창의만 잘한다. 자유방임교육을 한다고 창의가 된다고?


    조선왕조 오백 년간 자유롭게 놀아서 창의가 되었나? 천만에. 시장경쟁에서 이겨서 우리가 표준을 정할 위치에 올라서 선점하고 표준을 깔아야 창의가 되는 것이다. 창의전쟁에서 이겨야 창의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육은 공자의 영향으로 인지의신예가 되니 성실한 동료를 구하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창의에 필요한 세 가지 조건 중의 하나는 갖추어져 있다. 이것만 해도 어디야? 그것도 안 되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잡스와 같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뜨고 경제성장을 더 해서 한국에 창의시장이 들어서면 창의가 된다. 핀란드식 교육 이딴 거 필요없다. 도무지 인간이 말을 잘 들어야 창의가 되는 것이다. 

 

    철학의 힘을 길러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교육+좋은 동료를 갖게 하는 인지의신예 교육+패션을 하려면 파리로 가듯이 창의를 하려면 서울로 가라는 식의 환경개선. 이 세가지로 창의할 수 있다. 비트코인이 뜨니까 폰지사기라고 우기는 창의력 없는 놈들이 문제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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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큰바위

2017.12.13 (08:14:35)

한국의 맛? 

[레벨:11]큰바위

2017.12.13 (08:14:58)

한국맛?

[레벨:9]Quantum

2017.12.13 (09:51:29)

동렬님의 구조론을 관통하고 있는 개념 중 하나가 '권력싸움, 싸워서 이긴다, 게임의 지배' 인 것 같습니다.

요리도 그런 관점에서 파악하고 계시네요.


대개 유명한 요리사는 자신만의 방식과 코스, 먹는 법을 정해놓고, 그 권력으로 손님을 제압하는데

동렬님은 반대가 좋은 요리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저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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